|
준호는 발에 유리잔이 걸려 잠에서 깼다. 일어나보니 유리잔 하나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고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빈 소주병과 맥주병이 세워져 있었다. 그 때 뒤늦게 아침을 알리는 시계 알람
소리가 울렸다. 준호는 알람 소리가 나는 시계의 버튼을 눌렀지만 고장이 났는지 여전히 소리가
시끄럽게 나고 있었다. 그는 시계의 건전지를 손으로 빼서 던진다. 건전지는 바닥을 데구르르 굴
러서 소파 밑으로 들어간다. 방 안에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둡다. 창 밖으로 비가 내려 부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는 거실에서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는 것을 추리
해낸다. 시계를 집어드니 오전 7시에 시간이 멈춰있다. 아내와 두 아이들은 아직 잠자고 있을 시
간이다. 아내는 아침을 차려주지 않는다. 두달째 준호는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
인 준호와 이혼하기를 바랬고 12살난 아들과 8살난 딸 아이를 자신이 양육 하기를 원했다. 준호
는 이혼에 관한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아내는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3개월 간의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준호가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와 옷을 갈아 입
었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플라스틱 생수병을 들고 컵에 따라서 벌컥 벌컥 마셨다. 출근을
하기 전에 그는 아이들 방문을 열고 식구들을 확인한다. 아내는 아이들 방의 2층 침대의 1층에
서 딸아이와 함께 자고 있다.
"잘 다녀올께 여보. 방학이라고 너무 늦게 까지 잠자지는 마라 얘들아."
준호가 힘없이 속삭이듯 말하자 딸아이가 엄마의 품으로 더욱 파고든다. 준호는 우산을 집어들
고 집 밖을 나섰다. 구름이 잔뜩 낀 회색 빛 하늘은 소나기를 연신 뿌려댔다. 그는 갈색 가죽점
퍼 안에 긴 소매의 흰 와이셔츠를 입고 검은 정장바지를 입었다. 2층 계단을 내려와서 3층 빌라
의 입구에서 우산을 펴쓰고 차가 주차되어 있는 건물 뒷 편으로 향했다. 5년째 타고 있는 은색
중고 소나타의 문을 열고 운전대를 잡는다. 시동을 걸고 차 앞 유리창에 와이퍼를 키자 좌우로
움직였다. 빗방울이 굵었다. 준호는 소방서로 차를 몰았다. 그는 12년째 지역 소방서에서 일하는
베테랑이었다. 멋모르던 신참내기에서부터 현재까지 사고 한 번 일으킨 적 없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와는 대학시절에 만나 2년간 연애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 소방서에 입사
했고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 해가 가기 전에 첫 아이를 낳았다. 당시에 아내는 심리
학을 배우고 있었다. 강의 시간을 종종 빼먹으면서까지 아내와 준호는 열렬히 사랑했고 수 없이
만났다. 물과 설탕처럼 하얀 마음에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도 목소리만 들어도 사랑이 피어나는
시절이 준호에겐 아직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내가 준호에게 다르게 다가선 것은 1년 전부터 였다. 그 전과 달리 아내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 숨을 내쉬는 날이 늘어갈 뿐 식사 때 조차 간단한 말도 하지 않았다. 준호는 그러던 어느 날
설거지를 하던 아내에게 요즘 무슨 일이 있느냐고 힘든 것을 나에게 말해보라고 말했다. 아내의
대답은 매우 뜻밖이었다. 당신에게 말하는 것조차 쳐다보는 것조차 싫으니 이혼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잔뜩 골머리를 앓는 듯 아내는 짜증나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 것 조차 힘겨워 했었다.
그러나 준호는 그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가족을 사랑했다.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해서
열심이 일하고 퇴근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와 자식들을 보는 즐거움에 살아
왔다. 헌신적이고 바른 생활을 해오던 그였기에 아내의 말을 더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퇴근 시간은 늦어졌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면 아내의 아이들은 한 방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그는 거실에서 맥없이 주저앉아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아내와 함께 자던 방은 텅 비어 있었
다. 거실에서 아내의 마음이 변해 돌아오는 길을 마중 나가 있는 것처럼그는 기다렸지만 아내는
아무런 말도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서 돈만 벌어오는 기계가 된 것 같았
다. 누구도 자신을 반겨주지 않았고 이해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출근했다. 직장에 나가서
일하는 즐거움도 없이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비를 맞으며 그의 차가 소방서의 주차장에 도착했
다. 소방서 내에는 동료 소방대원들이 일찍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30대 후
반으로 보이는 소방대원이 준호에게 다가온다. 흰머리가 검은 머리 사이에 힐끗 보이고 사건이
없는 시간에 입는 복장 차림으로 걸어오는 습이 견고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준호가 옷을 갈아
입는 곳까지 따라와 짙은 회색 철제에 베이지색 철문으로 된 옷 장이 주욱 나열된 곳에 몸을 기
대 준호를 바라본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준호를 쳐다보던 눈을 밑으로 내리며 말했다.
"술 냄새가 나. 소방대원에게 술은 금해야할 사항이야."
준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힘겨운 듯 얼굴을 찡그리고는 옷을 갈아입고 철
제 옷장문을 쾅 닫는다. 나무늘보처럼 느릿 느릿한 걸음으로 준호는 말없이 그 소방대원을 지나
쳐 대기실 안의 의자에 앉았다. 건너편 방에서 누군가가 티비를 보는지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준호가 있는 방은 큼지막한 흰 책상 위에 누군가가 읽다만 듯한 신문이 펼쳐져
있고 닫혀진 창문밖으로 투두둑하며 비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비가 내리는 날은 화재가 일어
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런 날씨에 비번인 소방대원은 가족과 나들이를 나갈수도 없고 밖을 돌
아 다닐 수도 없는 집에서 꼭 쳐밖혀 쉬어야하는 억울한 기분일 것 이다. 모처럼만의 쉬는 날을
가족과 집 안에서 비갠후의 무지개를 기다려야 하는 날이다. 나이 어린 몇 몇 대원들이 준호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장기를 둔다.
소방서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준호보다 경력이나 나이가 적은 이들이었다. 그 들에게 화재가 났
을시에 불을 효과적으로 진압하는 요령과 사람들을 안전하게 구출하는 노하우를 전해주는 것은
준호를 비롯한 경험 많은 소방대원들의 몫이었다. 오후가 지나고 저녁이 되자 빗줄기가 약해졌
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날씨가 많이 풀렸고 하늘도 먹구름들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해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퇴근할 시간이 되자 준호는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 안에는
옷을 갈아입는 소방대원들이 보였고 천장에 하얀 형광등이 6개 중 3개 만이 켜져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준호는 옷을 벗어 갈아 입었다. 그리고 소방서의 오른편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준호는 집으로 가는 길에 빵집에 들러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로
케와 샌드위치 그리고 슈크림 빵을 사들고 우유를 큰 것으로 하나 골라 계산대에 놓고 그 것들을
포장해서 차 안에 실었다. 더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는 차 앞 유리에 와이퍼를 껐다. 한강
다리를 건너 집에 도착하자 그는 빠른 걸음으로 2층 층계를 올라가 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
렀다. 세 번, 네 번씩 초인종을 눌렀지만 집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집열쇠가
포함된 열쇠고리를 꺼내어 5개가 넘는 열쇠들을 차례 차례 열쇠 구멍에 집어넣고 열쇠 구멍에 집
어 넣고 돌렸다. 7번째로 열쇠를 넣고 돌리자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집 문이 열렸다. 그는 신발
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 여보?"
준호는 아이들 방문을 열며 아내를 불렀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거실의 소파 앞에 놓
인 무선 전화기 옆의 하얀 명함 크기의 메모지를 확인한다.
“일주일만 친정에 다녀올거예요. 그렇게 아세요."
준호는 곧장 친정으로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장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모님, 애들 엄마 좀 바꿔주세요."
한참을 뜸들이던 장모님이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게."
전화기에서 왜 전화를 바꿔줬냐며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고 얼마 후 아내의 목소리가 전
해져 왔다.
“일주일만 친정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여보, 도대체 왜 이래? 세 달 동안 함께 있으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잖아."
“그 세달이 나와 아이들에겐 너무 길어요."
“여보, 당신이 나에게 이럴 순 없어."
“어차피 결과는 같아요. 잘 들어요. 당신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나에게 지옥이라구요. 제기랄,
알아듣겠어요?"
준호는 아무 말도 없이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다.
전화기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고 얼마 후 전화가 끊겼다. 준호는 전화기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방 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 컴컴했다. 그칠 것 같았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가영은 식사를 차리고 있다. 3층 짜리 커다란 단독추택의 내부는 가영과 음식과 청소를 맡아 해
주시는 아주머니만 있어 휑한 느낌마저 들었다. 둘의 사이는 매우 좋았다. 가영은 아주머니에게
사모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가영씨라는 이름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10년 전 낳았던 아들은 2년
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고 있다. 그녀는 아들과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통화할 수 있다
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재벌가의 둘째 아들로 건축과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는
CEO였다. 매일 밤 7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던 남편은 6개월 전부터 집에 오는 시간이 많이
늦더니 현재에는 일주일에 세 번 가량만 집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이유를 남편에게 묻지
않아도 될 만큼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남편이 10살 연하의 미모의 아나운서와 열애
중이라는 기사가 떠돌았고 실제로 남편은 집에 들르는 시간이 매우 적었다. 가영은 남편에게 몇
일 전에 이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남편은 딱 잘라 거절했고 언론사를 상대로 고소하기 까지에
이르렀다. 가영이 품는 의심들을 모두 진실로 밝히겠다고 말했지만 늦게 들어올 때 마다 둘러대
는 회사 일에 대한 핑계는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그의 회사는 성장하고 있었고 현재 좋은 상황
이었다. 또한 기자들에게 돈을 주고 자신에게 유리한 기사를 쓰게 만드는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더욱 속박되었고 답답했다. 남편은 아내와 잠자리 조차 갖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노리개나 인형
처럼 중요한 모임이나 자리에 참석할 때에 지인들과 대중들을 위해 함께 다닐 뿐이었다. 사람들
은 가영을 좋아했다. 가영은 전직 영화배우로 영화계에 있을 당시 여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
한 강한 내면의 소유자였고 남성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던 스타였다. 그러던 그녀가 영화계를
은퇴한 것은 서른 살을 넘기면서 부터였다. 영화제 시상식이 끝난 파티에세 당시 재벌의 아들이
던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만난지 두 달만에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다. 재벌의 둘
째 아들이던 남편은 서울 연희동에 살림을 차리고 아내와 함께 살았지만 결혼한지 세달 째 될
무렵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시작되었다. 그녀의 남편은 다혈질적이었고 폭력적인 면이 다분했다.
사소한 문제들인 성격의 차이에서 오는 감정 싸움도 가영에게는 무거운 짐처럼 너무 벅찼다. 식
탁에 올려놓은 반찬이 엉망이라느니 하루종일 집안일도 안하고 밖으로 나도는 것 같다느니 남자
가 생긴 것 같다느니 하는 의심들은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었고 급기야 가영의 뺨을 때리며 손지
검까지 하는 바람에 그녀와 남편의 관계는 급속하게 냉각되었다. 차가운 눈 빛만이 서로에게 오
갔다.
가영은 결혼 후에 헌신적으로 살아왔다. 남편을 위한 건강 식단으로 식사를 준비했고 큰 집으로
인해 청소하기 힘든 파출부를 도왔으며 아주머니와 함께 장을 보고 요리를 만들었다. 아이가 생
길 무렵에는 차분하고 따듯한 음악들을 들으며 태교했고 친구들과 만나며 행복한 시간을 가졌었
다. 그러나 결혼하고 난 뒤 부터 남편은 아내를 점점 멀리했다. 그가 필요할 때에만 그녀를 찾고
다시 헌신짝처럼 내팽게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는 아내를 때리며 학대하는 남편이 되었다가 얼
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내를 품에 안고 위로하는 교활한 인간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린 잘
될거야. 남편의 폭력은 언제나 이 말로 끝이 나곤 했다. 가영은 말 없이 식사를 준비한다. 남편
에게 전화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날은 집에 늦게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않는 날이다.
가영은 아주머니와 함께 김치등의 반찬이 있는 식탁에 숙주나물과 고사리와 도라지를 무쳐 내어
놓고 오후에 장을 봐 온 양념이 된 불고기를 넙적한 후라이팬에 세 주먹 정도 넣고 물을 조금
따라 넣은 후 가 스레인지의 불을 중간 정도로 조절하고 데운다. 가영은 일하는 아주머니와 함께
음식을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고 네 가지 음식을 데울 수 있는 가스 레인지의 오른쪽 판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재첩국을 손잡이 부분이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는 쇠국자로 조금 떠서 간을
본다. 가영은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간이 딱 맞아요. 조금만 더 끓이면 되겠어요."
“그렇지? 그나저나 날마다 저녁상 차리랴. 아침상 차리랴 하면 먹는 사람이 있어야 음식을하는
사람도 기분이 나는데 회장님은 늘 밖으로만 도시니 정성을 쏟는 사람의 마음도 몰라주고 가영씨
가 많이 외롭겠어."
가영은 아무 말도 못하고 끓고 있는 재첩국을 국자로 떠서 사기 그릇에 두 그릇 담아낸다. 아주
머니는 가영의 얼굴을 힐끗 보더니 어두운 표정의 그녀처럼 표정이 어두워진다. 가영은 김이 모
락 모락나는 밥을 압력 밥솥에서 두 공기 퍼서 식탁에 올린다. 아주머니는 가영에게 주방 일은
자기가 하겠다고 말했지만 가영은 한사코 거부했다.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함께 저녁식사를 한
다. 아주머니는 가영의 밥그릇에 불고기와 반찬을 얹어 주셨다. 가영은 아무 말 없이 잘 먹는다.
두 사람의 화제는 미국에서 유학중인 아들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기숙사에서 생활중인 가영의 아
들은 친척이 살고 있는 LA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친척 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만남을 가졌다. 가영은 아들이 유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이 대견스러웠고 무척 고마웠다.
남편은 아들에게 있어 차가운 아버지였다. 대화나 여가생활을 함께 하지 않았고 오로지 교육에
대한 것만을 요구했다. 그는 아들의 양육을 책임졌다. 아들은 걸음마를 걸으면서부터 치열한 생
존법칙의 세계로 인도되었다. 아버지로 부터의 사랑이 결핍된 어린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의 손길
이 더욱 필요한 나이가 되었지만 남편은 아들을 엄격하고 냉정한 최고의 교육이라 논의 되고 있
는 미국의 한 사립학교로 훌쩍 떠나 보냈다. 가영은 가족과 떨어진 생활을 해야하는 아들의 외로
움을 염려해 남편에게 너무 이른 유학이라며 만류했지만 그녀의 의견은 털 끝 만큼도 받아들여지
지 않았다. 아들이 유학을 떠나기 전의 그 해 봄에 집 앞 정원에서 찍은 사진 한 장만이 보물처
럼 그녀가 잠들기전에 느낄 수 있는 아들의 채취이자 그리움이었다. 아들의 이야기를 하던 가영
이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그이는 독재자예요. 하지만 누구보다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지요."
아주머니가 가영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영씨,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현명한 여자예요. 회장님은 가영씨에게 슬픔
만을 가져다 줄 거예요. 회장님과 헤어지세요. 이런 삶을 계속 살 순 없어요. 친구를 만나러 밖
을 나가도 남자가 생겼다며 의심하고 폭력을 쓰는 남편으로 인해 감금 되다시피 이렇게 살아선
안되요."
“하지만 저에겐 아이가 있어요."
가영의 말에 아주머니가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가영씨는 이겨낼거예요. 아들도 되 찾을 거구요."
식사를 마친 가영이 2층의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고 아주머니는 식탁을 치운다. 가영이 방 안의
침대 옆에 앉아 동양화가 그려진 스탠드 옆의 사진을 집어든다. 아들이 유학을 가기 전에 찍은
사진이다. 가영이 사진을 보고 있을 때 쯤 방문이 살며시 열리고 남편이 들어왔지만 가영은 눈치
채지 못했다. 남편이 저음의 목소리로 아내에게 쏘아 붙였다.
“오늘은 누구와 만났지? 어떤 남자를 만나고 다니기에 옷을 이렇게 입었냔 말이야!"
남편이 아내에게 두 세걸음 다가서며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나와 결혼한 이후 이 검은 스커트는 입은 적이 없어. 너와 내가 만나서 처음으로 자던 날 입
었던 옷이라구. 기억해?"
남편의 말에 가영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아니예요. 오해예요. 전, 절대."
“시끄러워! 몇일 내로 집 밖에 경호원을 두겠어."
남편이 가영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침대 위로 넘어 뜨렸다. 가영은 저항했지만 남편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손이 가영의 가디건을 벗기고 블라우스를 거칠게 뜯자 단추가 후두둑 떨어져
나간다. 하얀 브레지어를 위로 들추고 한 손으로 드러난 가슴을 잡아 만지며 거칠게 애무했다.
그의 머리가 침이 잔뜩 묻은 유두 밑으로 내려가고 그의 뭉툭한 손이 가영의 스커트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음부를 더듬던 손을 스커트에서 빼내어 가영의 뺨을 수차례 때리기 시작했다.
“넌 내꺼야. 어디에도 못 가. 누구도 나를 배신할 순 없어. 누구도."
가영이 터져 피가 흐르는 입술로 남편에게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원하는대로 해주겠어요. 그러나 키스는 안되요. 절대."
가영이 남편을 바라보며 옷을 모두 벗기 시작했다. 남편이 바지 지퍼를 내리고 가영에게 다가갔
다. 준호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소파 앞 책상에는 술병이 널브러져 있고 먹다만 고로케가 놓여져
있었다. 벽에 걸린 달력 앞으로 걸어가 손가락을 10월 8일 일요일에 멈춘다.
“일요일이군"
그는 나즈막히 속삭였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를 한 뒤 면도 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면도
를 했다. 그러고 난 뒤 갈색 가죽점퍼와 노란색 와이셔츠 그리고 베이지색 면바지와 구두를 신고
집 밖을 나와 주차장의 차를 운전했다. 같은 시간 가영은 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 벽에 걸린 시
계를 보니 오후 12시가 조금 넘었다. 남편은 출근했는지 자리에 없었고 침대 옆의 스탠드가 놓인
작은 서랍장 위에 하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메모를 읽어 내려간다.
<오늘도 늦게 들어올거야. 괜찮아. 내 말대로해. 다 좋아질거야.>
그녀는 남편의 폭력 뒤에 항상 말하는 이 문구가 두려웠다. 가영은 브레지어를 채우고 팬티를
입고 분홍색 스커트와 연분홍빛 블라우스와 연한 노란색 가디건을 차례대로 입고 침대에 앉아
메모지 뒷 편에 볼펜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명동에 있는 친구가 운영하는 체인점에 갈거예요. 기다리지 말아요. 늦을 거예요.>
가영은 메모지와 볼펜을 스태드 옆에 놓고 계단을 내려간다. 주방에서 아주머니가 집 밖을 나서
는 가영을 향해 말했다.
“가영씨 점심 식사 하셔야죠?"
“생각없어요. 친구에게 갔다 올 거예요. 미안해요."
가영은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아탄다.
“명동으로 가주세요."
그녀가 탄 택시가 출발 할 때 쯤 얼마간의 간격을 두고 검은색 그랜져가 쫓아왔다. 차 안에서
짧은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은 건장한 두 남자 중에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회장님, 사모님의 뒤를 쫓아가고 있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가는 중입니다."
그러자 전화기에서 회장 특유의 굵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남자를 잡아."
준호는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따스한 햇살이 비춰들어왔다. 창문 밖에 거리를 걸
어가는 사람들 중에는 나들이를 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그 모습들을 고개를 돌려 바
라본다. 그의 차는 계속 달린다. 고층 건물들의 유리창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차를 운
전하던 준호는 거리의 명동타운이라는 옷가게 이름을 보고서야 여기가 어디인지를 자각한다. 그
는 차를 몰던 중에 커피와 음식을 파는 테이크 아웃 체인점을 발견한다. 가영이 타고 있는 택시
가 명동의 커피와 음식을 파는 테이크 아웃 체인점 앞에 멈춰서고 그녀는 핸드백에서 가죽 지갑
을 꺼내 돈을 지불한 뒤 택시에서 내려 체인점 안으로 들어갔다. 가영의 뒤를 쫓던 검은색 그랜
져가 체인점 앞의 도로에 멈춰섰다.
“안녕하십니까?"
여종업원들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그녀를 맞아주었다. 체인점 안에는 10개 정도의 테이블과 한
테이블당 4개씩 배치되어 있는 소파의자가 있었고 4명의 종업원들이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가영은 카운터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윤미야, 오랜만이야."
카운터를 보던 친구는 그녀를 보고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영아, 너무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지냈어? 잠시만 기다려줘."
친구는 종업원을 한 명 불러 조용히 말했다.
“잠시만 카운터 좀 맡아줘. 5분이면 돼."
가영과 그녀의 친구는 창가 쪽의 빈 테이블로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 시각 준호는 가영이 들어
간 체인점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중앙의 테이블에 앉았고 앞주
머니가 달린 노란색 앞치마의 목과 허리에 달린 끈을 매듭을 지어 묶어 걸은 여종업원의 무엇을
주문하겠냐는 물음에 카푸치노 하나와 치즈케이크한 조각을 주문했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종업원을 불러 에스프레소를 한 잔 주문했고 가영을 보며 물었다.
“가영아 뭐 마실래?"
가영은 종업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같은 것으로 주세요."
친구가 가영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게는 에스프레소 맛이 좋아. 그래 그동안 뭐하며 지냈어?"
친구가 밝은 얼굴로 물어오자 가영은 힘없이 말했다.
“나야 잘지내지. 남편도 역시 잘지내고."
“신문 읽었어. 남편에게 여자가 있다라는 기사 말이야. 어떻게 된거야?"
가영은 흔들리는 눈 빛을 친구에게 고정시키며 말했다.
“그 이는 결백하다고 말했어. 나 외에는 어떤 여자도 없다고 했는데 그런 얘기를 믿을수가 없
어. 그이는 매일 같이 늦게 들어와. 들어오지 않는 날도 수두룩하지."
그녀가 친구와 말하는 사이 준호의 테이블과 가영의 테이블에 동시에 주문한 것들이 놓여진다.
준호는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신다. 가영은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 거리며 친
구에게 말했다.
“어떤 날은 여자 화장품 냄새와 향수가 와이셔츠에 잔뜩 묻은 채 집에 오기도해."
가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벙어리가 되지. 그이에게 이게 누구의 냄새냐하는 식의 작은 의심이라도 했다간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거든."
이야기 도중 체인점 안의 몇 몇 남자 손님이 가영을 쳐다보며 말하고 지나갔다.
“쟤 영화배우 김가영 아니야?"
“한물 갔지. 쟤 이혼 안했나? 걸레 같은 년. 남자가 생긴 것을 눈치 챈 남편이 이혼하자고해도
재벌 남편에게 거머리처럼 붙어 기생한다더군."
“이혼 못 하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던데?"
손님들이 말하며 카페를 나가고 가영을 뚫어져라 보며 지나던 아기 엄마가 딸아이와 손잡고 체
인점 밖을 나가며 말했다.
“아무하고나 자는 창녀 같은 년."
가영이 놀란 표정으로 에스프레소가 담긴 잔을 쏟자 그녀의 친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
의 휴지로 테이블을 닦아낸다.
“미안해."
가영이 어쩔줄 모르며 말하자 친구가 너무도 환한 표정으로 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오전에 난 기사 읽었어. 남자가 생겼다며?"
친구는 가영을 웃으며 바라보며 눈한번 깜박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의심만 가득한 여우인줄 알았어. 그런데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자
신의 모습은 까맣게 잊고 사는 창녀더군."
가영은 놀란 눈으로 친구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친구는 가영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돈 따윈 필요없어. 그 더러운 몸뚱아리 가지고 여기서 사라져줘."
친구의 얼굴이 일순간 차갑게 경직되었다가 풀렸다. 5분이 지나자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
터로 돌아갔다. 남편은 항상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고, 자신의 뜻대로 상황을 이끌어 왔
다. 그녀는 현실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항상 때묻은 검은
손에 놀아나곤 했다. 중앙의 테이블에 앉았던 준호가 치즈케이크를 한 입 베어 먹고 커피와 음식
이 나오는 주문대로 걸어가 계산을 하고 모카커피를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한다. 그 때 가영이 자
리에서 일어나 체인점 출입문 쪽으로 걸어간다. 준호가 포장된 모카커피의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시고 출입문으로 걸어가다 가영과 부딫힌다. 가영의 연분홍빛 블라우스에 커피가 쏟아
지고 당황한 그녀가 손으로 옷을 쓸어낸다. 준호는 종업원이 건네준 휴지를 가영의 손에 쥐어 건
네주고 연신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해댔다. 가영이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평정을 찾으
며 휴지로 옷을 닦아낸다. 준호가 블라우스에 그려진 커피 자국을 보며 가영에게 말한다.
“길 건너 편에 여성 의류점이 있어요. 그 곳에 가면 비슷한 옷이 있을거예요. 제가 옷을 사드
릴께요. 5분도 걸리지 않을거예요."
준호가 솟 짓을 써가며 말하자 가영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좋아요."
두 사람은 체인점에서 나와 오른쪽 옆의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의류점으로 향한다. 체인점 앞
도로변에 주차해있던 그랜져 승용차가 가영이 탄 차를 뒤 쫓는다. 준호는 운전을 하면서 가영에
게 말했다.
“좋은 날씨예요."
가영이 준호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어보였다.
“아들 사진인가요?"
가영이 차 안에서 앞 유리창 쪽에 놓인 사진을 보며 말했다.
“네, 아들과 딸 아이의 사진이예요."
준호가 사진과 가영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아들과 딸을 무척 사랑하시나보죠?"
“네. 그렇지만 그 애들에게 저란 존재는 없어요. 아내가 애들을 데려갈 것 같아요. 가끔 애들
얼굴이나 볼 수 있으면 다행이죠."
“죄송해요. 제가 괜한 것을 물었군요."
“괜찮아요. 아내와 아이들은 저를 돈만 벌어오는 기계쯤으로 여기죠. 그리고 나이가 드니 이혼
하기를 바라더군요."
그가 운전하던 차가 의류점 앞의 도로에 멈춰서고 그녀와 그는 함께 여성 의류점에 들어갔다.
검은색 그랜져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주시한다.
환한 형광등이 실내를 밝히는 의류점 안을 천천히 걸으며 가영이 옷을 살피고 있다. 점원이 가
영에게 물었다.
“무엇을 찾으세요?"
“블라우스 좀 보여주세요. 뭐든지 잘 어울리겠지만 옷 색상도 고려해주시구요."
준호가 점원에게 웃으며 말했다. 점원이 블라우스가 진열된 곳을 살피다가 노란 빛이 감도는 베
이지색 블라우스를 집어 가영의 상체에 갖다 데어 본다. 그러더니 베이지색 블라우스를 골라 두
가지 색상의 옷을 번갈아 가영의 몸에 데본다.
“제가 볼 때는 노란 빛 블라우스가 낫네요. 어떠세요. 손님?"
“저는 베이지색이 나은데요?"
가영의 말에 준호가 웃으며 말했다.
“밝은 옷이 잘 어울려요. 더 화사해 보이는데요."
가영이 준호의 말에 싫지 않은 듯 포근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노란 빛으로 할께요."
가영이 말하자 점원이 손을 가영의 등 너머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쪽에 탈의실이 있습니다. 손님."
가영이 옷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간다. 가영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남자의 감성적인 말에
눈 빛에 별을 가져다 놓은 것 처럼 밝게 빛난다. 옷의 단추를 채우고 탈의실에서 나와 준호의
옆에 서자 준호가 잘 어울린다며 칭찬한다. 준호는 점원에게 돈을 지불하고 두 사람은 의류점 밖
을 나온다. 준호가 가영과 한 두 걸음을 걷다가 멈춰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다.
“그럼, 이제.."
말을 잇지 못하는 준호에게 가영이 물었다.
“저와 바에 함께 가지 않으실래요?"
준호가 진지한 눈 빛으로 가영에게 말했다.
“좋아요."
“제가 안내할께요. 가영이 말하자 준호가 조수석 차문을 열어준다. 가영이 차에 타며 준호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준호가 말한다.
“민준호예요."
준호가 조수석 문을 한 손으로 쾅 닫고 빙 돌아와 운전석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는다. 가영이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가영이 말하려하자 준호가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알아요. 김가영씨죠."
가영이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짓자 준호가 시동을 걸며 말한다.
“예전에 당신 영화를 좋아했어요."
차가 출발하고 얼마 후 거리를 유지하며 검은색 그랜져가 뒤따라간다.
가영은 차창 밖을 턱을 괴고 바라본다. 여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바
라본다. 높고 낮은 빌딩들을 쳐다보던 가영이 준호에게 말했다.
“여기서 좌회전이예요. 그리고 조금 더 가면 건물 7층에 괜찮은 바가 있어요."
준호가 차를 몰고 바가 있는 건물 지하의 주차장에 세웠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건물 안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려 바 안으로 들어간다. 레드카펫이라는 글자에 전기가 들어오는
간판 밑의 출입문을 지나 바 안으로 들어가자 내부에는 수백장의 CD가 진열되어있고 손님으로부
터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틀어주고 있었다. POP ART계열의 작품들이 바 안의 절절한 곳에 전시
되어 있었는데 간혹가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바텐더에게 말해서 사는 경우도 있다며
가영이 준호에게 귀뜸해 주었다. 가영과 준호는 두 명의 바텐더가 안에 있고 긴 테이블이 있는
등받이가 없는 높은 의자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가영은 마티니를 주문했고 준호는 위스키를 시
켰다. 바 안에는 유앤미 블루의 천국보다 낯선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준호가 말했다. 당신 영화
를 좋아했어요. 그녀의 남자와 젊은 몽상가들을 특히 좋아했어요. 대학을 다닐 때 혼자서 극장
에 가서 보곤 했어요. 그녀의 남자를 기억하시죠?"
“물론이죠. 제가 첫 여우주연상을 탄 작품인데요. 그 당시 라스트 씬을 찍을 때 감정이 너무
북받쳤어요. 남자를 떠나보내고 카페 안에서 우는 장면이었는데 한 번 눈물을 흘리니 계속 눈물
이 나오는 거예요.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은 그 장면을 계속해서 찍었죠. 그리고
10분이 지나서 제가 눈물을 멈추자 컷을 외치셨어요. 감독님은 그 것을 보석 같은 눈물이라고 말
하셨어요.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대학을 다녔다구요?"
“네. 사회체육과에 다녔어요. 대학을 졸업하고부터는 소방서에 다니게 되었구요"
“소방관 이었군요."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게 제 직업이었죠."
바텐더가 위스키와 마티니를 테이블 위에 내놓자 준호가 한번에 들이킨다. 가영이 유리잔을 들
고 술을 조금 마신 뒤에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당신의 작품이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던 해에 당신은 결혼한다는 발표를 했어요. 당신은 결
혼 전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는 것을 끝으로 영화계를 떠났지요. 정말 아쉬웠어요. 당신
의 연기는 아름다웠거든요. 눈부신 광채가 났어요. 계속내어줘요"
준호가 바텐더에게 위스키를 계속 내어 달라고 손 짓하며 말했다.
가영이 마티니를 한모금 마시며 말한다.
“남편은 결혼 전과 다른 사람이었어요. 결혼 후에 저는 의심받고 감금 당했죠. 그는 저를 큰
행사나 필요할 때에만 데리고 다녔어요."
“왜 그와 이혼하지 않지요?"
“그는 절 놓아주지 않을거라 했어요."
“그는 그저 늙은 사자일 뿐이예요."
“그이는 외롭고 슬픈 사람이예요. 그리고 저에겐 아들이 있어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착한 아
이예요. 이혼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경험시켜 주고 싶지 않아요."
준호가 위스키 잔을 비우고 말했다.
“결혼이라는 관행을 따르고 나면 우리는 왜 우리가 결혼했는가라고 묻게 되지요. 우리가 어디
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생각하게 되요."
“하지만 모든 목적은 헌신함으로써 유지된다는 걸 까맣게 잊게 되고 말아요."
“당신은 진짜가 된 적이 몇 번이나 있나요? 정말 나다운 일을 한 적이 있나요?"
“수 많은 강자들은 약자의 섬칫한 손톱에 가슴이 찢어져요. 강자는 그 것을 받아들여요. 그리
고 아무 희망도 없이 살죠."
“그렇게라도 살고 싶나요?"
준호가 위스키 잔을 비우고 말했다.
“그렇게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그래선 안되요. 늘 같은 궤도일 뿐이예요. 캄캄한 어둠 속을 헤메이죠."
바텐더가 오디오에 CD를 바꿔넣자 존 레넌의 IMAGINE이 흘러나온다. 준호가 위스키 잔을 계속
비워대며 가영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쉬워하고 있어요."
그러자 가영이 말했다.
“하지만 후회하며 사는게 우리 일부죠."
준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준호가 위스키잔을 비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호가 일어나자 가영이 준호를 따라 일어난
다. 준호가 계산을 하려고 하자 가영이 자신이 돈을 내겠다며 말하고 돈을 지불한다. 준호와 가
영은 바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1층에서 내렸다. 준호는 주차장으로 향하고 가영은 건
물을 나와서 천천히 걸어간다. 준호의 차가 도로에 들어서고 저만큼 앞서서 거리를 걸어가던 가
영이 있는 지점으로 차을 운전해간다. 준호가 차를 가영의 걸음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움직이며
조수석의 창문을 열고 말했다.
“바다에 가지 않을래요?"
가영이 걸음을 천천히 걸으며 준호를 쳐다보고 다시 앞을 보며 생각한다. 가영이 준호의 차로
다가가자 준호가 차를 멈추고 가영이 탑승할 때 까지 기다렸다가 출발한다.
“부산에 가요."
가영이 준호에게 말했다. 준호는 차를 운전하고 가영은 창 밖을 조용히 바라본다. 휴일 날이라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고속도로에 진
입하고 얼마 후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랜시간을 달리던 차는 휴게소에 들러 기름을 넣
고 준호와 가영은 햄버거와 콜라를 마시며 허기를 때웠다. 차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을 가로 지
르고 있다. 밤이 깊어 차 안이 추워지자 준호는 히터를 틀었다. 가영이 몸을 살짝 뒤척인다. 장
시간을 달리던 차가 드디어 부산에 도착한다. 준호는 여관에서 방을 잡을까 생각하다가 그냥 지
나친다. 준호는 바다가 보이는 부둣가에 차를 멈춰세웠다. 주위는 헤드라이트를 끄면 온 통 깜깜
해질 것 같았다. 준호는 헤드라이트를 끄고 피곤한 듯 그대로 잠이 들었다. 이른 아침이 되자 가
영이 눈을 뜨고 잠에서 일어났다. 앞 유리창 너머로는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푸른 빛 바다 가
운데 노란 태양이 빛나는 길을 내고 있었다. 가영은 준호를 흔들어 깨웠다. 준호가 깨어나자 가
영이 준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저기 앞을 봐요. 아름답죠?"
준호는 가영과 함께 일출을 바라보았다. 준호의 눈 빛을 바라보던 가영의 눈 빛이 빛나고 있었
고 가영의 눈 빛을 바라보던 준호의 눈도 빛나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떴다. 두 사람은 바닷가
를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이 걷는 길에 파도가 살며시 밀려왔다. 가영이 준호의 팔짱을 끼고 파도
가 밀려 올 때 마다 구두가 젖을까 발을 굴렀다. 준호는 가영의 그 모습을 보며 따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어린시절에 아버지와 바닷가에 온 적이 있어요. 아주 어릴 때 였는데 저는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아버지는 회색 정장 차림이셨어요. 우리는 해변을 손을 잡고 걸었지요. 그리고 근
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어요. 우리는 연어구이를 먹었어요. 그 땐 제가 회를 못 먹었거든요. 아
버지는 외교관이셨어요. 일이 바쁘셨지만 시간을 내어 저와 여행을 많이 다니셨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에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강도에게 당하
셨거든요."
준호가 가영을 보며 말했다.
“슬픈 일이군요.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는 제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사진을
항상 가지고 다녀요."
가영이 지갑을 꺼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진을 준호에게 보여준다.
“어머니와 많이 닮았네요. 어머니께서 미인이세요. 아버지 역시 미남이시구요. 좋은 분 이셨을
것 같아요."
준호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좋은 분이셨어요. 저는 먼 친척에게서 자랐어요. 사고로 부모님을 두 분 다 잃었지만 힘들 때
마다 부모님을 생각하고는 해요. 그럼 부모님은 저에게 힘을 주시고는 했죠. 마음 속 깊은 곳에
서 슬퍼하지 마렴. 넌 언제나 잘해왔잖니라고 말씀하시면 그럼요 저는 해낼거예요라고 말했어요."
이야기를 듣던 준호가 말했다.
“같은 곳을 바라봤군요."
가영이 물었다.
“무슨 의미이죠?"
준호가 가영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죠. 그래서 알 수 없는 힘이 생기는 거예요."
가영이 준호의 눈을 쳐다보며 수수께끼 같은 말에 궁금한 얼굴 표정을 지었다. 준호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말했다.
“제 말은 당신이 힘들 때 마다 당신의 부모님들은 당신이 바라보는 곳과 같은 곳을 바라 본 것
이라는 거죠. 해낼 수 있다는 가영씨의 마음에 부모님의 마음까지 더해진 거죠."
바닷물이 밀려들자 가영이 준호의 반대편으로 가서 몸을 그에게 기대며 팔짱을 낀다. 둘은 서로
를 마주보고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들이 걷는 모래사장에는 아무도 없다. 가영이 준호의 두 손
을 마주 잡고 천천히 걸으며 노래 부른다.
<처음의 시간에 우리는 늘 함께였죠.
그대의 미소는 나에게 눈물로 짓죠.
멀리있지 않아요. 너와 난 가까운 곳에
그래서 슬프지 않죠. 세상이 우리를 갈라 놓아도
우리가 행복했음을 기억해요.
언제까지나 함께 영원하죠. 끝이란 없어요.
내가 눈을 감으면 그대와 만나기 때문이죠.
나를 보나요. 나는 그대와 같은 곳을 보고 있어요.
우리가 말했던 곳에는 언제나 태양이 뜨죠.>
가영이 애절한 눈 빛으로 준호를 바라본다.
“내가 눈을 감는 날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준호가 가영을 안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해변에서 나와 식당이 늘어선 거리를 걷는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팔을 조금씩 흔들
며 걸어간다. 가영이 준호를 보며 말한다.
“배고프지 않아요? 뭐 먹으러가요."
“바닷가에 왔으니까 회먹으로 갈까요?"
“좋아요"
두 사람은 사람 좋아보이는 할머니가 하시는 횟집 안으로 들어간다. 싱싱하게 보이는 살아움직
이는 물고기들이 가득한 수족관이 식당 앞에 있고 방 하나당 10명이 둘러 앉아 먹을 수 있는 방
이 5개 정도 있었다. 준호는 가장 안 쪽의 빈 방으로 가영을 데리고 간다. 할머니가 두 사람이
있는 방으로 다가와 묻는다.
“뭐 드릴까요?"
준호가 가영을 보며 말한다.
“뭐 먹을까요?
“오늘 제일 싱싱한 것으로 먹어요."
준호가 할머니께 말한다.
“오늘 가장 싱싱한 것으로 주세요. 그리고 소주도 가져다 주세요."
“네, 그럴께요. 광어하고 아나고가 갓 잡아서 싱싱해요.
할머니가 나가자 아들로 보이는 남자가 스끼다시를 가져다 준다. 꽁치 구운 것과 옥수수 철판
구이와 과일등이 나왔고 가영과 준호는 젓가락을 들어 먹기 시작한다. 맛있게 보이는 방울 토마
토를 본 가영은 그 것을 준호의 입으로 가져다 주었다. 준호는 입을 벌려 그 것을 먹고 웃음 짓
는다. 준호가 가영을 보며 말했다.
“바다 밑에 사는 여자와 바다 위에 사는 남자가 있었어요. 두 사람은 서로의 세계에 대해 이야
기만 들을 뿐 만날 수 없었어요. 그게 그들만의 법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에 바다 밑에 사는 여
자가 바다 위로 올라갔어요. 같은 시간에 바다 위에 사는 남자도 날개를 펄럭이며 바다 밑을 살
펴보고 있었어요. 마침내 바다위로 고개를 내민 여자가 처음 본 것은 바다 속을 들여다 보고 있
는 남자였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처음 보는 순간 강한 감정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 것은 회오리
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어요. 두 사람은 밤마다 몰래 만나게 되었죠. 바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여자는 날개를 펄럭이는 바다 위의 남자를 매일 만났죠. 그러던 어느 날 바다 밑의 사람들
이 바다 위의 남자를 만나러 가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를 감옥에 가뒀어요. 그 이후 바다 위의
남자는 그녀를 매일 밤 기다렸지만 만날 수 없었어요. 지금까지도 바다 위의 남자는 얼굴을 바다
속에 넣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고 그 눈물이 바로 지금의 소금이 되었다고 해요."
가영이 준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소주와 회를 담은 접시를 가져다 주셨고 두 사람은
회를 먹기 시작했다. 회를 한 점 먹은 준호가 소주잔에 소주를 따라 마신다. 이를 지켜보던 가영
이 준호의 소주 잔에 소주를 따라주고는 말했다.
“당신이 소방관이었을 때는 어땠나요?"
“예전에 말이죠. 전 최고의 소방관이 되고 싶었어요. 대학을 나와서 소방관이 된 후부터는 화
재가 난 곳에 사람을 구하는 일에 제일 먼저 뛰어 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에 3층짜리 상가 건물
에 큰 화재가 났어요. 일하던 식당 아주머니와 손님들 공장직원들의 대부분이 모두 대피했고 저
를 비롯해 소방대원들은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려대고 있었지요. 그런데 한 공장직원이 3층 건물
안에 5살난 자기 아들이 자고 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저와 동료 한 명이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 갔어요. 2층에서 난 불이 3층까지 번져 있었고 불 길이 거셌죠. 3층의 공장 안으로 들어서
자 재봉틀과 불이 붙은 옷가지들이 널려 있더군요. 저는 계속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러자 함께
들어온 한 동료가 뒤에서 위험해라고 소리치는 거예요. 그리고나서 천정이 내려 앉았어요. 다시
돌아가기란 불가능해 보였어요. 앞을 보고 아이를 찾았지만 아이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어요. 그
런데 제 오른편 재봉틀 책상 밑에서 콜록, 콜록하는 기침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
책상 밑을 보니 아이가 수건으로 입을 막고 쓰러져 있더군요. 저는 그 아이를 품에 안고 나갈 길
을 찾았어요. 그러던 중 비상문을 하나 발견했어요. 무척 오래된 듯 보였죠. 철문으로 되어 있었
는데 근처에 있던 재봉틀을 들고 문고리를 내려 쳤어요. 그리고 문을 열어보니 외부로 돌출된 외
관이 보이는 비상계단이 있더라구요. 그리고 그 계단으로 내려와 아이를 엠뷸런스에 태웠어요."
준호가 말을 한 수 소주 잔을 비웠다. 그리고 가영의 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가영이 턱을 괴
고 있던 손을 풀어 말했다.
“대단한 소방관이었군요."
“젊은 시절의 얘기예요."
“아니요. 지금도 충분히 젊어요."
가영이 준호를 보며 미소지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횟집을 나왔다.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밤 바다 위에는 달이 빛나고 있었다. 가영이 준호에게 말했다.
“보고 싶어요."
준호가 가영을 차분히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리운가요?"
“당신이 곁에 있는데도 당신 안의 모든 것이 보고 싶어요."
준호와 가영은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둘의 모습을 서울에서 부터 쫓아온 검은색 그랜져
안에서 건장한 두 남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두 남자 중에서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
“회장님, 잡았습니다."
그러자 핸드폰에서 굵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잡아둬, 내가 직접 가겠네."
준호는 모텔 카운터에서 키를 받아들고 가영과 함께 방에 들어간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 두 사
람이 서로의 얼굴을 감싸 안고 키스를 나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서로의 입술을 포개고 다시 입
술을 떼어 눈빛을 확인한다.
“사랑해요."
가영이 눈을 지긋이 감으며 말하고 준호와 깊은 키스를 나눈다. 준호가 가영의 목에 입을 맞춘
다. 준호의 손이 가영의 연노랑 가디건의 단추를 푸르고 노란 블라우스를 벗겨냈다. 가영은 준호
의 가죽점퍼를 벗기고 벨트를 풀었다. 준호가 가영의 스커트를 벗기자 가영은 준호의 옷들을 모
두 벗겨냈다. 속옷 차림의 두 사람은 서로를 어루만져 안으며 침대 위로 누웠다. 가영을 누르는
자세가 된 준호가 그녀의 브래지어를 찬 가슴을 부드럽게 만지며 가슴에서 배꼽까지 입을 맞추며
내려갔다. 부드러운 애무가 이어지자 가영이 팬티를 벗는다. 그리고 준호와 격렬한 키스를 나눈
다. 준호 역시 팬티를 벗고 두 사람은 열정적인 섹스를 한다. 열정적인 몸 짓이 이어지고 두 사
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얼마 후 준호와 가영은 서로를 꼭 끌어 안는다. 두 사람은
한 침대 위에서 잠이 들었다.
이불을 덮고 있던 준호가 침대에 걸터 앉아 옷을 줏어 입는다. 가영이 잠에서 깨어 준호에게 말
했다.
“어디 가려구요?"
이불로 몸을 가리고 가영이 상체를 일으켰다.
“술 좀 사오려구요."
준호가 가죽점퍼를 입으며 말했다.
“오면서 오렌지 좀 사 가지고 와요."
“그럴께요."
준호가 가영에게 몸을 굽히고 다가가 이마에 키스를 한다. 준호가 방을 나가자 침대에 옆으로
누워있던 가영이 눈을 깜박인다. 그러던 가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차례대로 입는다. 방을 나
온 준호가 카운터로 다가가 묻는다.
“여기 슈퍼마켓이 어디에 있지요?"
카운터 안에서 티비를 보던 아저씨가 작은 칸막이 유리창으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모텔을 나가서 왼쪽 길로 가다보면 있어요."
“고맙습니다."
준호는 모텔 밖을 나와 왼쪽 편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랜져 차량의 안의 검
은 양복 차림의 180센티미터가 넘을 법한 큰 체구의 두 남자가 차에서 내려 뒤쫓아 갔다. 준호와
의 거리가 좁혀지고 두명 중 한명이 손을 뻗어 준호의 뒤에서 오른쪽 어깨를 툭툭 쳤다. 준호가
뒤돌아보자 어깨를 쳤던 남자가 준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준호가 휘청거리자 복부를 때리고
앞으로 숙여진 준호의 얼굴을 무릎으로 차 올렸다. 준호의 입술이 터져 피가 많이 흘렀다. 남 자
가 쓰러진 준호를 일으켜 뒤에서 잡았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복부와 얼굴을 수차례 때렸다. 준
호가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며 피를 뱉어냈다. 어두운 밤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쓰러진
준호의 배를 뒤에서 붙잡던 남자가 발로 걷어찼다. 준호의 입에서 푸우우, 푸우우 하는 힘든 숨
소리와 피가 흘러 나왔다. 그 때 벤츠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그들을 향해 깜박인다. 그러자 두 남
자는 준호를 때리던 것을 멈춘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있던 벤츠 차량의 뒷 좌석의 문이 열리
고 캐쥬얼 복장을 한 가영의 남편이 골프채를 하나 들고 준호에게 걸어왔다. 그는 골프채로 준호
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말했다.
“내 아내에게서 사라져. 안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주지."
그는 준호의 얼굴에 주머니에서 꺼낸 봉투 안의 든 돈을 뿌려댄다. 그리고 벤츠를 향해 걸어간
다.
준호를 폭행한 두 남자는 모텔 안으로 들어간다. 가영의 남편이 차에 탑승하자 얼마 후 가영이
모텔에서 두 남자에게 끌려나온다. 가영이 쓰러진 준호를 보며 슬픈 눈 빛을 흘린다. 준호가 가
영을 보고 똑바로 일어서려 하지만 다시 쓰러지고 만다. 건장한 두 남자가 가영을 벤츠의 뒷좌석
에 앉히자 곧 벤츠가 출발한다. 두 남자 역시 그랜져에 타고 차를 몰고 사라진다. 준호는 길바닥
에 두 손을 집고 몸을 일으킨다. 다리가 부들 부들 떨리지만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의 차에 다
가간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간신히 앉는다. 그는 시동을 걸고 차를
운전한다. 차창 밖으로 거리의 풍경들이 지나가고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주변에 나무와 꽃이 핀
것들이 보인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자 화려한 네온사인과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의 차가 집에 다다르자 그는 차를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계단을 오르며 자신의 집 문 앞에 선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집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는
불을 켜지 않아 캄캄했다. 준호는 벽을 더듬어 화장실의 불을 켜고 안으로 들어가 거울을 본다.
코피가 흘러 굳어있고 입술이 터져 있었다. 입 안도 찢어진 듯 통증이 전해져 왔다. 웃옷을 벗어
세탁기 위에 올려 놓자 몸 곳곳이 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준호는 샤워기의 물을 틀어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얼굴에 난 피를 물로 씻어 내면서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흐.."
그는 화장실 벽에 기대어 주저 앉으며 눈을 감고 크게 웃는다. 그리고는 손으로 입을 막아 더
이상 웃지 않으려 한다. 같은 시간 가영은 집 안에 갇혀 있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음식을 만드는
것을 돕는 가영의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아주머니가 어두운 표정으로 가영과 함께 음식을
만든다. 된장찌개를 두 개의 그릇에 담아내자 아주머니는 가영을 식탁에 앉힌다. 정장을 입은 가
영의 남편이 마의를 벗고 식탁에 앉아서 가영을 노려본다. 그리고는 실룩거리는 입으로 말했다.
“이혼할 생각은 꿈도 꾸지마. 넌 어디에도 못 가."
말을 마치자 남편이 수저를 들며 밥을 먹는다. 가영도 따라서 밥을 먹는다. 준호가 소방서 탈의
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있다. 준호에게 술을 먹지 말라고 당부하던 동료가 다가와 말했다.
“어제 어디 갔었어? 내가 너하고 다른 동료하고 비번을 바꿔서 별 문제는 없을거야. 무슨 일이
생기면 미리 말을 하라구."
동료 소방 대원이 준호에게 말하고 탈의실을 나간다.
준호가 탈의실을 나올 때 쯤 벨이 울리고 소방대원들이 허겁지겁 옷을 갈아 입고 소방차에 탑승
한다. 준호 역시 탑승한다. 차는 화재 현장으로 이동한다.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 위를 달리던 소
방차 2대가 화재 현장에 도착했다. 붉은 벽돌의 3층 주택의 건물 전체가 불에 휩쌓여 있었고 3층
이 특히 심했다. 3층에 어린아이가 나오지 못했다는 주민의 말에 동료 소방대원이 준호를 보며
올라오라고 말했다. 두 소방관은 계단을 올라가서 3층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참을 헤메이던
동료 소방관이 연기에 질식해 쓰러져 있는 아이를 발견하고 품에 안아서 준호를 스쳐 문 밖을
빠져 나갔다. 동료 소방관이 아이를 구출해 주택 밖으로 나왔지만 준호는 나오질 않는다.
“제길!"
동료 소방관이 화난 목소리로 자리에서 뛰더니 다시 3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중에
불 길이 더욱 거세짐을 느낀다. 그가 3층에 다다르자 집 안에 멍하니 서 있는 준호를 발견하다.
그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준호의 팔을 붙 잡고 집 밖으로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내
려와 무사히 나왔다. 소방호스를 잡고 물을 뿌려대는 한 소방관이 고개를 떨군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렸다. 준호는 소방서 옆의 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퇴근했다. 거리를 지나치며 왼손은 차 창 밖
에 걸치고 나머지 오른 손으로 운전하고 있다. 그 시각 가영은 자신의 방 안의 창문을 열고 하늘
을 바라본다. 준호는 한강 다리를 건너던 중에 다리 중간 지점에서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린다.
그리고 다리 난간 위로 올라가 균형을 잡으려 한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씩 난간 위를 곡예하는
듯 걸으며 노래를 부른다. 가영이 바닷가에서 자신에게 불러 주었던 노래였다.
<처음의 시간에 우리는 늘 함께였죠.
그대의 미소는 나에게 눈물로 짓죠.
멀리 있지 않아요.너와 난 가까운 곳에 그래서 슬프지 않죠.>
노래를 부르며 난간을 걷는 중 휘청이고 다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걸음을 걷는다.
같은 시각 가영도 자신의 방에서 창문을 열고 기대어 준호와 같은 노래를 부른다.
<세상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우리가 행복했음을 기억해요.
언제까지나 함께 영원하죠. 끝이란 없어요.
내가 눈을 감으면 그대와 만나기 때문이죠. 나를 보나요.>
노래를 부르던 준호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휘청이고 난간 위에서
강으로 떨어진다. 검은 강이 준호를 삼켜 버린 듯 흐르고 있다. 가영이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마
저 부른다.
<나는 그대와 같은 곳을 보고 있어요.
우리가 말했던 곳에는 언제나 태양이 뜨죠.>
준호가 떨어진 난간 옆에 문 열린 그의 차가 서 있고 그 뒤로 수 많은 차들이 멈춰서서 경적을
울리고 있다.
하얀 구름이 조각처럼 퍼져있는 푸른하늘 아래 숨진 이들이 안치되어 있는 묘지안에는 많은 사
람들이 거닐고 있다. 묘 앞에서 가족들이 꽃다발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 묘지 앞에서
선글라스를 낀 가영이 아들의 손을 잡고 서 있다. 그녀는 한 손에 든 꽃다발을 대리석으로 된 묘
비 앞에 놓는다. 그리고 나즈막히 말한다.
“준호씨, 저예요. 아들을 데려왔어요. 당신과 헤어진 날 이후로 줄 곧 당신을 생각해 왔어요.
그리고 말할께 있어요. 이혼했어요. 남편과 이혼을 하자 그는 제 아들을 데려가려 했어요. 온 갖
술수를 부려 저를 생매장하려 했지요. 재판은 제게 불리하게 돌아갔어요. 하지만 재판이 막바지
에 이르던 날에 상황이 역전되었어요. 집안 일을 해주시던 아주머니의 증언으로 그녀의 용기가
제 남편이 감추던 모든 악행을 세상에 끄집어냈거든요."
말을 하던 가영의 선글라스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을 되찾았어요. 끔찍했던 지난날을 모두 떠나 보냈죠. 그런데 당신은 왜 여기 있는 거예
요?"
가영이 선글라스 밑으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낸다.
"대답 좀 해봐요."
그녀의 아들이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 안았다. 그 때 어디선가 노란 나비 한 마리가 춤추듯 곡
선을 그리며 묘지에 앉는다. 햇 빛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날에 김준호라고 적힌 묘비에는 사랑하
는 사람과 같은 곳을 바라보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