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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과 지혜의 분기점
갈라디아 3:1~9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여러분은 어리석은 결정과 행동으로 인하여 손해를 보고 고통을 당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어리석도다’에 해당하는 ‘어리석음’은 영어로는 ‘foolish’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헬라어 원에서는 ajnovhto"(아노에토스)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명치 못한 분별이 없는’ 이란 뜻입니다. 이 단어에는 ‘미련하다’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제 일생에서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고 미련한 행동을 한 것이 있다면 감당할 수 없는 빚 보증을 서서 수치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은 것이었습니다. 잠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보증을 선 것입니다. 되풀이되는 어리석음을 행할 때 이것을 미련하다고 합니다.
잠 27:22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고집과 더불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때 고난을 겪고 고통을 당하지만 쉽게 어리석음을 벗어버리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온전하게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어리석은 행동과 말을 하고 삽니다. 중국의 고사성어에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란 말이 있습니다. 한번 이기거나 지는 것은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늘 있는 일이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 라고 하면 ‘실수는 누구나 저지르는 것이니 기죽지 말아라’ 라는 정도의 말로 사용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잘 해보려고 노력했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수고했지만 현명치 못한 결정으로 가슴을 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세월이 지나면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까지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내용이 달라집니다. 어리석은 신앙을 갖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무엇일까요? 시 53:1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저주입니다. 어리석음에 길든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육체를 벗어나 영혼의 상태로 심판의 주이신 하나님께 세움을 받게 됩니다. 영혼에 묻혀 있는 수많은 죄는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변명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 영혼의 때가 있음을 잊고 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부자 농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밭을 일구고 부지런히 농사를 지은 결과 풍성한 수확을 이뤘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합니다. 어느 정도로 얻었느냐 하면 쌓을 곳이 없도록 거둬들인 것입니다. 그는 행복한 고민을 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작은 곳간은 헐어내고 큰 곳간을 만들어 거기에 잔뜩 쌓아 두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얼마나 흐뭇한지 모릅니다. 세상 살맛 난다고 느꼈습니다. 풍성함 속에 행복에 젖었습니다.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자신에게 위로를 주며 기쁨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 보고 있는 주님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입니다. 이 부자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성실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어쩌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그에게 문제입니까? 세상의 것은 흔들어 넘치도록 가지고 있고 여러 해 쓸 물건을 곳간에 쌓아 두었지만 자기의 영혼의 때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받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스스로 현명하게 살고 부러움을 받고 살았다 하더라도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어리석음이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들이 행하고 있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리석음으로 헛된 신앙을 살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아브라함의 지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어리석음과 지혜의 분기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인도를 받느냐 아니면 육체의 생각에 따르고 있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되는 분기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바울이 경험한 어리석음에 대한 지적입니다.
갈3: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며 강한 어조로 꾸짖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은 롬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어리석도다”라고 판단하여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이것을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어리석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였던 악행에 대하여 사도행전 21장에서 스스로 고백합니다. 행22:3~4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라고 합니다.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어 죽임에 넘기기도 하였고, 결박하여 옥에 넣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자기 열심에 도취하여 스스로 의를 행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으로 거듭난 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생명의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입니다. 어리석음은 우리의 노력과 수고로 벗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죽음과 사심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지혜로운 순종의 길을 걸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자기가 행하였던 어리석은 행위를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꾸짖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도 지켜야 의를 이룬다고 믿고 행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믿음으로 인하여 지혜로운 행위를 가지게 된 아브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3:2에서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삼위일체를 이루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은 율법을 행하여 의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 보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하는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땅에서 삶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가 있고 주님 앞에 영혼의 상태로 서게 되는 날이 있음을 깨닫고 그때를 위하여 준비하는 지혜를 주십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이룬 것이 아니라 믿음에서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 아들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내 살붙이 아들 아닙니까? 이 아들을 불태워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에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선뜻 순종합니다.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아침 일찍 아들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짊어지게 하고 3일 거리를 걸어갑니다. 그 시간 동안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며 변덕을 부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끝까지 순종하여 모리아 산의 정상에 이르러“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위가 인간의 노력으로 된 것이냐는 것입니다. 100세에 낳은 자기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불태워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침 일찍 일어나 순종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정한 아버지와 같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에서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가능합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생리가 끊겼습니다. 그런데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것이 아브라함이 절대로 하나님을 믿고 따를 기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 안에서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령은 우리 안에 오셔서 말씀에 순종하도록 합니다. 계2:10절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영어로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 라고 합니다.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말씀이 이뤄지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마음에 변경함이 없습니다. 히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변함없으신 주님이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마음에 요동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성령의 지배를 받았다는 또 다른 증거는 그 입의 고백대로 실현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것도 아니요, 계시로 말미암은 것도 아닌 오직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대로 되지 않았던가요? 그 이유는 성령께서 아브라함 안에 머무셨다는 증거입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는 성령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성령을 주십니다. 그 성령으로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하게 하고 내 믿음에 변함이 없는 진보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이란 내 뜻대로 내가 선하게 여기는 것에 열심을 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지배를 받지 않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여기에는 외형상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은데 변화는 없습니다. 행함으로 인하여 상급을 받을 것 같은 착각을 하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설 때 상급이 없습니다.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지혜는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내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내 노력으로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안에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땅의 속한 사람이 영원한 신령한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어리석음과 지혜의 분기점은 성령 하나님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는 모든 것은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십시오! 그분에게 자신을 의탁하십시오! 성령과 더불어 악한 영들과 싸움에서 승리하십시오! 또한, 내가 연단을 받는 것은 미련함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때는 나의 어리석음을 회개하는 중요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비결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