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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의7
信天함석헌
제7강 영원한 대제사 예수(제5장 1절 〜 10절)
5장 1. 그것은, 모든 대제사장은 다 사람 가운데서 취하여낸 자로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에 관한 일에 대하여 세움을 입어 죄를 위하여 예물과 희생을 드리는 자다.
2. 저는 그자신이 역시 연약(軟弱)에 싸여있는 고로 무지하고 미혹하는 자를 능히 친절히 생각하여 줄 수 있다.
3. 이렇기 때문에 그는 또 백성을 위하여서와 같이 자기를 위하여서도 죄를 위하여 드릴 필요가 있다.
4. 또 그 존귀는 누구나 제 자신이 취하는 것이 아니요 아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는 것이다.
5. 그와 같이 또한 그리스도도 대제사장 되는 영광을 스스로 취하신 것이 아니요, 도리어 그를 향하여 “네가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하신 이가
6. 이같이 또 다른 곳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班次)를 쫓는 대제사장이라“ 하셨다.
7. 그는 육체에 계시는 날에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자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원(懇願)을 올리셨고 그 경외(敬畏)하심을 인하여 들어주심을 얻었다.
8. 그는 아들이시면서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고
9. 그리하여 완전하심을 얻어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어
10.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얻었다.(히브리서, 제5장 1~10절)
드디어 본론이다. 제 4장까지에 있어서 저자는 혹은 아들과 천사와의 비교로 혹은 아들과 모세, 아론과의 비교로 예수는 우리의 영원하신 대제사장인신 것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제 4장 말(末)절에서 “그런 고로 우리는 불쌍히 여기심을 받고 때에 합한 도움이 되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로 나갈 것이다” 함으로써 그하고 싶은 말의 대체를 일단 끝내었다. 그리고는 제5장에서 다시 어조를 새롭게 하여 그 대제사장이라는 의미를 자세히 풀어 말하기 시작한다. 이 단은 대제사직의 의미와 그 자격에 대한 설명이다.
1. 대제사장직의 의미
예수를 대제사장이라 하니 대제사장이란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은 그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저들은 모세가 율법을 세우고 아론이 첫째 대 제사장이 된 이래 그 제도를 가지고 왔다. 국가의 주권이 없어진 때에도 이것만은 깉어 있으리만큼 이것은 저들에게 중요하고 거룩한 전통이었다. 고로 그들은 대제사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 깊은 전통이 반드시 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님은 허다한 사실이 항상 증언하는 바다. 그뿐 아니라, 역사 깊은 전통일수록 신성한제도일수록 도리어 속뜻은 다 새어버리고, 말라죽은 껍질만이 깉어 있는 법이다. 유대인의 경우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들 은 매년 대제사장의 손을 빌어 속죄제(廢罪祭)를 드리면서도 그것이 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하는 것은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저들이 만일 그것을 생각하여 깨달았다면 예수를 이해 못했을 리 없었다. 그것은 고래의 제사직은 그리스도 예수를 예표(豫表)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에게 있어서 제사직의 의미는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의 영원한 대제사임을 설명하려하여서 우선 제사직의 뜻부터 밝히려 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인간에게서 취하여내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에 관한 일에 대하여 세운자다. 즉 인간의 대신관계(教神關係)에 있어서 인간의 대표가 되는 것이다. 제사제도에 있어서 첫째 알 것은 이 인간의 대표라는 사실이다. 대표는 각 사람의 할 일을 대신하여 하는 자다. 대제사장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할 일을 대표하여 하는 자다.
그러나 문제되는 것은 왜 그러한 대표제도가 필요하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런 제도를 세우셨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제도를 세우셨다. 적어도 역사의 초기에 있어서는 세우셨다. 이것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모세의 손을 통하여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의 역사에서 다 볼 수 있는 일이다. 명칭은 달라도 무슨 형식으로나 고대에 있어서는 인간이 어떤 대표자를 통하여 그 생명의 주가 되는 자기네의 신에 대하려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제사 종교는 인류역사의 첫 계단에 있어서 보편적인 사실이다. 고로 이것은 하나님의 교육의 1절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 제1공과는 왜 필요했느냐. 거기 대하여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다. 하나는 기술적인 문제요 둘(二)은 도덕적인 문제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대표자는 왜 필요하냐 할 때 우선 그것은 기술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할 권(權)은 다 같으나 각 사람의 시간과 노력이 이를 다 같이 허(許)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접신(接神)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초신(招神)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고로 우선 특정한 재능의 품부(稟賦)를 받은 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은 도덕적 불완전 때문에, 인격적 불비(不備) 때문에 직접 신에게 나가지 못하는 고로 특별한 대표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1의 이유는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사실 유치(幼穉)한 종교에서 이것은 사실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외양에 나타나있는 현상을 제치고 본질적인 것에 들어가면 도리어 제2의 이유가 구극(究極)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거룩’이라는 것으로 부른다. 사람이 신에 직접가지 못하고 대표자를 통하여하는 것은 그 ‘거룩’ 때문이다. 과연 유치한 종교에서 거룩은 기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기술과 거룩 그것을 혼동할 수는 없다. 거룩은 언제나 인격에 관한 것이다. 고래의 허다한 종교 중에 이 ‘거룩’을, 따라서 또 그 반대인 ‘부정(不淨)’을 가장 엄격하게 문제 삼은 것은 유대인의 종교였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는 부정한 것을 호말(毫末)도 용서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엄격한 제사제도의 종교가 발달하였다. 고로 유대교의 근본 의미는 인간을 도저히 신 앞에 설 수 없는 것으로 선언한 데 있다. 그 성전의 지성소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언제나 완전히 닫겨진 것이었다.
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없이 부정하냐. 무엇을 먹은 때문에, 무엇을 만진 때문에 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먹은 음식에, 만진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 범한 죄에 있다고 율법은 대답한다. 고로 인간이 신에 대하여 첫째 할 일은 죄의 처분이다. 저들은 생명의 주 안에 들어 갈 것으로 약속을 받으면서도, 가까이 오면 소멸해버리겠다는 선언을 받은 모순된 운명에 선 자들이었다. 그 때문에 저들은 자기네와 신과의 두 사이에 서서 그 소원과 명령을 받아들이는 자를 요구하였다. 그것이 대제사장이었다. 고로 그의 할일은 죄를 위한 제사였다.
그러나 그들이 만일 이 의미를 참으로 알았다면, 제사제도에서, 다시금 그것은 자기네의 대표가 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 대제사장들이 하나도 그 소임인 속죄제를 완성한 자가 없기 때문이다. 대제사장의 목적은 속죄에 있다. 즉 인간을 거룩케 하여 신전에 직접 설 수 있게 만드는 데 있다. 대제사장이 필요치 않게 되게 하는 자가 참 대제사장이다. 매개(媒介)의 목적은 신랑과 신부가 직접 만나 부부가 되게 하는 것이다. 3년도 두고 5년도 두고 매개로 양자간에 거래하는 자는 아직도 매개가 되지 못한 자다. 한 번 매개하여 다시 매개 노릇하지 않는 자가 참 매개, 영원히 매개한 자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도 제사제도를 없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유대교는 두고두고 수천 년을 대제사가 연년히 제사를 드려온다. 그것이 저희가 참 영원한 대제사가 못되는 증거다. 제사제도의 근본의미를 캐어 들어가면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른다.
2. 대제사의 자격
그와 같이 대제사의 의미는 죄로 인하여 부정하여져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이 된 인간을 대표하여 속죄제를 드리는 데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특별한 자격이 요구된다. 제1은 이 무지하고 미혹하는 인간을 잘 동정하고 잘 이해하여 그 약점이 어디 있는지를 잘 아는 자라야 한다. 모든 대제사장이 인간에서 뽑힌 것은 이것을 표하는 것이다. 대신(對神)관계가 단(單)히 기술적 문제라면 천사 같은 천적(天的) 존재자가 더 합당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술에 있지 않고 인격에 있다. 마음에 있다. 고로 같이 멍에를 멘 자 아니고는 이 무지막지한 인간, 이 도덕적(道德的) 허약질(虛弱質)인 인간의 세세한 사정을 알 수도 없고 따뜻한 심정으로 동정하여서 호소해줄 수도 없다. 고로 인간 중에서 빼었다. 즉 모든 인간이 다 자기네의 대표자로 완전히 신임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저 사람이면 내 심중을 나보다 더 잘 말하여 주리라 하는 자다.
그러나 쌍방에 중보자로서는 이상 한편의 신용만으로는 될 수 없다. 양편이 다 신용하는 자라야 한다. 대제사장은 인간이 신임 할 수 있는 동시에 또 하나님의 신임을 받는 자가 아니면 안된다.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신임하시기 때문이다. 대의사(代議士) 모양으로 국민에게 선거하라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임명하시는 것이다. 유대의 제사제도가 선거제로 되지 않고 하나님이 아론의 자손을 지정하시게 된 것은 이것을 표(表)함이다.
그런데 그 유대교의 제사제도에 표시된 두 가지 자격이 일개 인격 위에서 완전히 실현되는 날이 드디어 왔다. 곧 나사렛 예수다. 저는 인간의 모든 고통, 신산(辛酸), 모든 연약(軟弱)을 다 맛보아 아신 이요, 또 하나님이 완전히 신용하여 세우신 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구약 중에 예언했던 메시야의 생애 그대로 들어맞았는데 그중 하나인 시(詩) 제 111편 4절에는 그를 가리켜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대제사장이라” 하였다. 역사가 오소서 오소서 하고 기다리던 자가 이제 왔다. 저는 과연 완전히 영구히 제사의 직을 단번에 완성하시었다. 그리하여 그 제사제도를 아주 소용없이 폐하여버리셨다.
3. 순종에 의한 구원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하여서 이 영원한 제사직을 완성하셨나. 유대교의 대제사장은 예물과 희생(犧牲)으로 제사하려 하였거니와 그는 무엇을 드려 제사하였나. 순종에 의하여서다. 그는 우리가 보기에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는 아들, 아들 중에도 외아들이라 하고 싶은 이인데 그 자신의 사신 일을 보면 기도로 사셨다. 마치 다 죽은 주검이 되어버린 우리나 다름이 없으신 듯이 생명의 아버지께 사실 일을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원(懇願)을 올리었다. 그 갯세마네의 마지막 저녁만을 말하는 말이 아니라 온통 그의 생애가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였다. 눈물로 하는 간원이었다. 자기 죄를 인(因)하여서냐, 인류의 죄를 위(爲)하여서냐, 그런 설명을 우리는 모른다. 다만 다 죽었던 듯한 생명 가운데서 한 생명이 일어나서 하늘을 향하여 타올라간 것을 볼 뿐이다. 타올라가면서 전지(全地)를 뒤덮은 암흑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고난 때문에 저는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고, 죽으려는 사람처럼 고규(苦叫)했고, 싸우는 사람처럼 노호했고, 소원(訴寃)하는 자처럼 앙탈을 했으며, 어머니처럼 애원했다. 그리하여 그것을 하나님이 들으시었다. 들으시어서 하늘에 통하는 길은 다시 열렸다. 구원의 근원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의 경외하심을 보신 것이다. 그는 그 고난 중에서 완전히 순종하였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루시라고 십자가에 향하면서 기도하였다. 이 순종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의 양방의 신용을 얻어 한 편으로 인간을 완전히 동정할 수 있게 되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의 가납(嘉約)하심을 입게 된 것은 이 성의(聖意)에 대한 절대 순 종 때문이다. 두뇌의 명석(明晳), 재능의 초출(超出), 신비로운 견신술(見神術)에 의함도 아니요 다만 아버지께 순종하는 이만큼의 겸손 때문에 저는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그 대제사직의 완성은 저에게는 아들로서의 인격을 완전케 하심이요 우리에게는 구원을 완전케 함이요 하나님께는 그 섭리를 완성하심이다.
저는 왜 순종을 배울 필요가 있었나. 왜 순종이라는 좁은 문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셨나. 우리 때문이다. 죄 때문이다. 개척자가 연 길을 따라가는 자는 밟는다. 그보다도 따라오는 자의 올 것을 생각하고 개척자는 길을 연다. 예수에게 십자가가 필요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요, 예수에게 순종이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시기 위해서다. 우리가 아버지에 대한 반역으로 인하여 지성소 외정(外庭)에서 떨고 섰게 쫓겨났다면, 이제 그리로 다시 들어가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는 것은 절대 순종 이외에 다른 길이 없을 것 이다. 그런고로 그가 먼저 순종의 본을 보여 우리로 따라가게 하셨다. 그리고 그 길은 참 길이요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직(直)히 나갈 수 있게 되었는 고로 저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서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