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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62. [역경의 열매] 조병석 (1-20) 첫 울음도 못 내고 죽을 뻔…“숨 쉬는 것만으로도 감사”
오랜 산고 끝에 태어나 무호흡 증세로 폐까지 산소 전달 못해 시퍼렇게 변색
코를 물고 인공호흡 하듯 자극하는 등 수간호사의 긴급 처방 후 기적적 호흡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의 갓난아기 시절 모습.
“응애~ 응애~ 응애~”
갓난아기의 가녀린 울음소리조차 너무나도 반갑게 들려왔고, 숨을 쉬고 있다는 오직 하나의 사실이 깊고도 진한 감사함으로 느껴지게 만든 1966년 겨울 서울 서대문의 새벽. 어머니의 뱃속에서 오랜 시간 터널 속의 사투를 벌이다가 힘겹게 세상의 틈바구니로 튕겨 나온 한 갓난아기가 있었다.
깡마른 체구와 함량 미달 몸무게의 그 아기는 우렁차게 울거나 여린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무호흡 증세 때문에 산소가 폐까지 전달되지 못하고 있었다. 핏덩이 붉은 색깔의 아기는 점점 시퍼렇게 변색됐다. 이는 결코 살아있는 아기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분만실의 간호사들은 많은 경험을 통해 얻게 된 노하우를 총동원했다. 희망의 작은 불씨를 가슴에 끌어안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아기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흔들고 주무르고 꼬집고 때리고. 있는 힘껏 물리적인 자극을 계속 가했다. 이렇게 해야만 아기에게 생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겼다. 그러나 노력과는 달리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점 더 새파랗게 변해가는 아기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분만실 밖에 있는 가족들도 안에 있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그때 연배가 있는 수간호사가 황급히 분만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먼저 아기의 코를 입술로 물고, 인공호흡을 하듯 자극을 줬다. 뒤이어 핏덩이의 항문을 힘껏 빨아주는 긴급 처방도 했다. 이마 옆으로 수간호사의 땀방울이 계속 흘러내렸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긴박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깊은 절망 가운데 하늘 위의 기적이 나타났다. 그 아기는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응애~ 응애~ 응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리게라도 첫 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죽을 줄 알았던 아기가 극적으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분만실 안팎의 모든 사람이 ‘감사와 놀라움과 기쁨의 눈물’로 물들어갔다. 까만빛 도시의 깊은 밤 위로 하얀 눈꽃 송이가 날아와 하나둘 쌓여가듯. 익숙한 영화 속, 더 친근한 프롤로그의 낯익은 장면처럼. 힘겨웠지만 따뜻한 삶의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됐다.
나는 그 당시의 여러 가지 현장 상황들을 떠올릴수록 명확한 깨달음을 얻는다. 이것은 순전히 영적인 깨달음이다. 이 모든 기적은 그때의 갓난아기 조병석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귀하신 뜻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은혜. 이것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약력=1966년 출생, 가수 여행스케치의 리더,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음악 감독, ‘별이 진다네’ 등 200여개 창작곡 발표.
* [역경의 열매] 조병석 (1) 첫 울음도 못 내고 죽을 뻔…"숨 쉬는 것만으로도 감사"
* [역경의 열매] 조병석 (2) '불공평한 세상' 프레임에 갇혀 '아웃사이더'로 변모
* [역경의 열매] 조병석 (3) 삐뚤어진 나의 마음에도 따스한 봄바람이 솔솔
* [역경의 열매] 조병석 (4) 마을 분위기에 서서히 동화되며 순수한 마음 돋아나
* [역경의 열매] 조병석 (5) 논두렁 밭두렁 뛰어다니던 학창시절 동화 같은 추억
* [역경의 열매] 조병석 (6) 뒤늦게 배움에 눈뜨며 6학년 땐 부반장 임명 '기적'도
* [역경의 열매] 조병석 (7) 언젠가 다가올 엄마와의 이별 생각에 눈물이 '글썽글썽'
* [역경의 열매] 조병석 (8)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조약돌 같은 향수 '그때가 그리워'
* [역경의 열매] 조병석 (9) 난생처음 잡아 본 기타 코드… 음악의 묘한 매력에 '풍덩'
* [역경의 열매] 조병석 (10) '통기타' 유혹에 교회 출석… 예배 반주하는 '교회오빠'로
* [역경의 열매] 조병석 (11) 신앙적 고백 담아 작곡에 도전… 습작 '그래 그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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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병석 (13) 숨 쉴곳 없던 고교시절 견딘 건 나의 짝 '형우'와 동행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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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병석 (16) 99% 합격 예상 했는데 "조병석씨, 합격명단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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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조병석 (18) 인생과 닮은 밤하늘 별 보며 '별이 진다네' 악상 떠올라
* [역경의 열매] 조병석 (19) '별이 진다네' 타이틀 곡으로 여행스케치 1집 발매
* [역경의 열매] 조병석 (20·끝) 두 번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공연 도중 머릿속 백지장
정리=최경식 기자 kschoi@kmib.co.kr
***[역경의 열매] 조병석 (2) ‘불공평한 세상’ 프레임에 갇혀 ‘아웃사이더’로 변모
공책 분실 사건으로 짝과 다툼 벌이다
엉뚱하게 내린 담임선생님 판결에 불만
점점 학교 흥미 잃고 결석하는 날 늘어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앞줄 왼쪽)씨가 초등학교 시절 동네 형, 누나들과 함께 있는 모습.
나는 출생 순서가 가져다준 행운으로 한 집안의 장손으로 자랐다. 남동생들도 2년 터울로 줄줄이 태어났기에 삼형제중 맏이, ‘큰 엉아’ 라는 애칭도 갖게 됐다.
자라던 동네는 청와대 반대편인 인왕산의 서편 아래쪽, 무학재 고개 근처였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시설이 거의 없었고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놀이터조차 없었다. 주변의 다른 아이들처럼 집 앞 골목을 중심으로 뛰어 놀았고 가끔씩 동네 형들의 인솔로 뒷산인 안산과 앞산인 인왕산 중턱까지 오르내렸다.
외형적으로는 작고 왜소한 몸집의 아이였지만, 또래 친구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생존 본능이 늘 작동했기에 ‘뺀질이’ 서울아이의 모습으로 점점 커가고 있었다.
8세가 되니 무학재 고개 꼭대기에 위치한 ‘서울 안산국민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신입생이 됐는데 날마다 같은 반 같은 분단 같은 학년 단체생활을 기본으로, 줄서기 손 씻기 공부하기 숙제하기 발표하기 시험보기 등등 현대판 사회인으로 길들여졌다.
담임선생님의 말씀과 이야기, 수업시간의 모든 설명들은 별나라나 달나라의 이야기처럼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머리로나 가슴으로나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자유분방한 성향을 지닌 나는 학교생활의 하루하루가 남모를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시는 어떤 수업시간. 숙제를 열심히 해놓은 공책이 통째로 없어졌다. 책가방을 뒤지고 또 뒤져봐도 찾지 못해 당황했다. 옆자리의 짝꿍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물끄러미 지켜보던 순간. 짝이 책상위에 꺼내 놓은 낯익은 노트. 여러 가지의 상황들을 잘 따져보고 그 공책까지 눈으로 확인을 해보니 쉬는 시간에 나의 노트를 몰래 훔쳐다가 겉장에 쓰여 있던 이름과 번호를 지우개로 다 지우고 결국엔 자신의 것처럼 이름과 번호를 크게 적어놓았던 것이다.
그 순간 범인과 ‘명탐정 코난’의 모드가 돼 옆 짝꿍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옥신각신 티격태격 말다툼을 했다. 그런데 결과물로 돌아온 건 담임선생님의 엉뚱한 판결. 모든 상황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증명을 통해 어필을 해도 그 짝꿍은 끝까지 거짓말을 하며 자기 노트라고 눈물어린 호소를 했다.
결국 학급 전체의 수업시간을 방해하는 행동을 했기에 둘 다에게 같은 벌을 주시겠다는 선생님의 말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송명희 시인의 유명한 시도 있다지만, ‘불공평한 게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짧았고 뜨거웠던 경험만으로도 이미 무언가를 체득해 버린 나는 점점 ‘아웃사이더’로 변모했다.
학교에 등교할 마음은 점점 더 흐려졌다. 가방을 메고 인사를 드리고 매일 아침마다 집을 나서긴 했지만, 방향과 목적지는 학교의 교실이 아닌 동네 형들의 숨겨진 아지트였다. 하루하루 ‘땡땡이’라는 친구를 깊이 사귀게 됐다. 지금 돌아보니, ‘불공평한 세상 불공정한 세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학교에 등교한 날보다 결석한 날들이 더 많았던 ‘소년 아웃사이더’의 시절이었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3) 삐뚤어진 나의 마음에도 따스한 봄바람이 솔솔
학교 빠지며 악화된 성적과 교우 관계
급기야 동네 형들과 물건 훔치기 까지
대책 강구하던 부모님, 멀리 이사 결정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동그라미 안)씨가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동네마다 몇 명씩은 ‘문제아’들이 있는 것처럼, 초등학교 시절 나는 빠르게 문제아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건초더미나 마른장작 위에 휘발성 기름까지 부어서 불을 붙이면 삽시간에 불이 번져 활활 타오르듯.
담임 선생님을 향한 불만과 불편하고 불안한 옆 자리의 짝꿍. 같은 반 친구들 시선까지도 의식이 되는 상황이라 ‘땡땡이’로 일관했던 학교생활은 시험 성적도, 교우 관계도 모든 것들이 좀 먹고 곰팡이가 번지듯 흔들렸다.
1학년을 지나 2학년 3학년이 되는 동안 불량스러운 동네 형들과는 더 가까운 관계가 됐고, 급기야 ‘위험한 동행’을 하는 사이가 됐다. 심지어 이웃 마을의 마트에 여러 명이 함께 들어가서 나쁜 짓을 벌이기도 했다. 시끌벅적하게 과자나 음료들을 고르는 체하다가 다른 일행들이 주인 아주머니의 시선을 가리면 표적이 된 상품들을 몰래 주머니에 넣어 훔치는 일까지도 서슴없이 행했다.
이런 나쁜 행동들은 꼬리가 길기에 머지않아 탄로가 났다. 가까운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의 여러 수다방과 소통들 속에서 불량스러운 행동들이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던 시점, 왜소하고 숫기도 없던 나를 장손·장남으로 귀하게 여기며 애지중지 키우시던 부모님께서는 옛날 역사적인 사례를 빌려 무언가를 실천했다.
왕이 바뀌거나 나라를 새로 세울 땐 기존의 수도를 천도한 것처럼 부모님은 검고 더러운 악의 근거지에서 멀리 이사를 가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맹모삼천지교’를 감행했다. 지도의 좌표상 서울의 왼쪽 지역인 서대문구를 떠나 오른쪽 끝자락의 변두리였던 지금의 송파구 가락시장 건너편 가락동·문정동쪽 옛 지명으로는 ‘평화촌’으로 이사를 갔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등 총 2시간쯤 가야하는 먼 거리였다. 지인들은 하나도 없었다. 주변의 모든 환경들이 바뀐 낯선 상황 속에서 다시금 적응을 해야 했다.
그 당시엔 ‘평화촌’, 즉 가락동·문정동이 강동구였고, 지금처럼 강남3구로 개발이 되기 전이라 주변에는 작은 야산, 동산들과 논·밭이 많았다. 농사에 쓰일 소들과 젖을 짜내는 젖소와 돼지우리들, 여러 가지 종류의 닭들도 흔히 볼 수 있는 환경이었다.
가꿔지지 않은 들녘에는 온갖 풀벌레들과 개구리 울음소리, 새들의 지저귐까지. 날마다 새로움과 신비로움을 안겨줬다. 꽁꽁 얼었던 산골짜기의 얼음조각들이 녹아 냇물이 돼 흐르듯 삐뚤어진 나의 마음 밭에도 어느새 따스한 봄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삶의 터전과 환경을 바꾸면서까지,낯선 곳으로 멀리 이사를 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부모님의 마음에 확실한 울림이 오고 결심이 선 뒤 곧바로 실행하게 된 ‘맹모삼천지교’. 지금 돌이켜보면 주님께서 이 모든 걸 다 주관하고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된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4) 마을 분위기에 서서히 동화되며 순수한 마음 돋아나
낯선 동네에 이사 온 불편함과 두려움이
순박한 아이들의 웃음과 장난스런 행동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어린 시절 집에서 밥을 지었던 가마솥.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허둥지둥 보내고, 급작스런 이사와 함께 맞이하게 된 전학. 촌스러운 티가 팍팍 풍겼고, ‘싼티’까지 솔솔 머금은 옷차림과 ‘뗏구정물’이 줄줄 흐를 것처럼 투박한 얼굴을 가진 3학년 2반의 동기생들.
처음에는 말도 잘 섞지 않았고, 너무너무 어색해서 불편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씩 차츰차츰 익숙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놀라움까지 생겼던 그 시절의 소년. 부엌에서 끼니를 위해 밥을 짓고 솥뚜껑을 열었을 때 구수한 누룽지 냄새에 코끝부터 기분 좋은 반응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듯, 학교 분위기에 천천히 녹아 스며들었다. 마음 깊은 골짜기까지 따스함을 전해주는 순수한 동요의 울림처럼 조금씩 조금씩 동화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는 나.
새로 이사 온 마을에서는 공동 화장실을 함께 쓰며 살아야 했고, 공용 수도꼭지도 여러 개가 있었다. 시내버스 노선이라곤 570번 달랑 하나뿐이었던, 변두리 동네 ‘평화촌’. 철거민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주해 온 사람들을 수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서울시에서 만들었다는 그 동네.
6·25전쟁 이후 급하게 피난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판자촌은 아니었지만, 마을의 모든 시설들이 공동체의 공익적인 삶을 위해 조성된 상황이라 화려하거나 높은 고층 건물들은 하나도 없었다. 소박함과 척박함의 경계 사이에서, 생활고가 자주 느껴지는 마을의 분위기는 초등학교 3학년 전학생이었던 나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혔다.
하지만 순수하고도 순박한 아이들의 꺄르르르 천진난만한 웃음 소리와 장난스런 행동들, 이웃사촌 마을 주민들의 따뜻하고 수수했던 말투와 움직임들은 싫든 좋든 상관없이 매일 매일 자연스레 보고 또 볼 수밖에 없었다. 피부 호흡을 통해 느껴질 만큼 충분하게 체득돼 자라날 수 있는 1차적인 환경이 됐다. 아는 지인이 아무도 없는 낯선 동네로 이사를 온 뒤 왠지 모를 불편함과 두려움의 생각들만 잔뜩 튕겨져 나왔던 소년의 마음 밭 한가운데엔 ‘순수’라는 작고 예쁜 싹이 돋아났다.
장남인 나의 장래를 위해 선택하게 된 부모님의 급작스런 이사. 낯설고도 어색함이 흐르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겪어내고 익숙해져야 했던 일련의 과정들은 유연한 삶을 살아가려 하며 직업의 귀천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늘 겸손하려는 마인드를 가진 지금의 나에게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됐다.
서울의 오른쪽 끝자락 경기도 성남시의 모란시장과도 그리 멀지 않았던 변두리 마을 ‘평화촌’이라는 흑백 필름 속. 그 시절의 이런 저런 다양했던 삶의 흔적들은 지금까지도 작사 작곡 편곡 연주 가창으로 녹여낼 수 있는 값진 샘물이 됐고, 날마다 ‘감사’라 새기며 빛을 낸다.
바로 그 마을에서 하나님도 처음으로 만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5) 논두렁 밭두렁 뛰어다니던 학창시절 동화 같은 추억
‘실습준비물’로만 여기던 곤충·물고기
마을 어디서나 친구들과 쉽게 채집
잡은 메뚜기·개구리, 별미로 먹기도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어린 시절 뛰어놀았던 논두렁 밭두렁.
메뚜기와 방아깨비, 여치와 풍뎅이, 땅강아지와 물방개, 개구리와 올챙이, 송사리와 피라미, 붕어와 미꾸라지 등등.
자연과목 수업에서 필수적으로 행해지는 다양한 실습을 위해 등교 시간에 생물(동·식물)들과 곤충들을 학교 앞 문구점이나 잡화점에 가서 ‘실습 준비물’로 구입해야 했다. 그런 일들이 학기 중엔 몇 번씩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고도 재미있었던 것은 논두렁 밭두렁을 가로지르는 개울이나 냇가, 동네 어귀의 동산이나 뒷산, 마을의 어디를 가더라도 생물들을 쉽게 채집하고 구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잘 몰랐었지만 졸업 후 청소년, 청년, 어른이 되면서 너무나도 ‘감사한 경험치’였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 때 그 시절 곤충 채집을 하려고 구불구불 꼬불꼬불한 곡선미가 물씬 느껴졌던 논두렁 밭두렁을 살금살금 걷거나 다람쥐처럼 후다닥 민첩하게 뛰었던 학창시절의 동화 같은 추억들을 지금도 가끔씩 떠올려본다.
항상 미소 짓게 만드는 만화. 놀랍고 신비로운 마법 같던 이야기인 신밧드의 모험 속 램프의 거인 ‘지니’처럼, 엉뚱하면서도 재미난 모양의 풍선껌을 달덩이만큼 높고 커다랗게 부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좋은 습관’이 됐다.
그리고 동물 애호가나 자연보호를 기본으로 하는 시민 단체들은 싫어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만, 그 시절엔 실습 준비물에 들어가는 학비를 아끼고 절약한다는 그럴 듯한 이유로 채집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네를 몇 바퀴나 돌고 돌고 또 돌아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여러가지 배움과 학습을 통해 성장을 한다는 학생의 본분을 빙자해서 일어난 웃픈 사건’이 있었다. 더 많은 양의 채집과 사냥에 가까운 행동으로 과하게 욕심을 부린 것이다.
아이들의 주머니와 소쿠리나 망에 한가득 잡혀 온 메뚜기들과 각양각색의 무늬를 등판 위에 그렸던 손바닥만한 크기의 개구리들. 어머니께서 손수 잘 씻어서 손질을 하신 후 프라이팬에 볶아 주셨던 그 녀석들의 고소하고도 신선했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별미였다. 이는 당시 그 소년들의 기억 속엔 그대로 남아 있다.
‘먹방’ 얘기는 아니겠지만 맛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글로 나누다보니, 봄이면 마을의 낮은 담장들 사이로 피어난 찔레꽃의 여린 순들을 손으로 톡 잘라서 껌이나 과자 대신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싱그러운 단물을 빨아 먹었던 기억들. 밀을 손으로 툭 털어서 끼니를 해결했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런 행동을 말리지도 않으셨던 예수님의 이야기처럼, 동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누렇게 잘 익은 벼를 따다가 고사리 같던 손으로 비벼서 하나 둘 떨어지는 풋알갱이들을 먹었던 순간들.
그렇게 살았던 서울 변두리 평화촌 논두렁 밭두렁의 푸르른 기억들이 오늘따라 더 따스한 추억으로 익어간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6) 뒤늦게 배움에 눈뜨며 6학년 땐 부반장 임명 ‘기적’도
전학 온 뒤 수업시간에 집중했지만
선생님 말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방과 후 ‘나머지 공부’ 시스템으로
느리지만 꾸준함으로 성적 끌어올려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 씨가 새롭게 전학을 오게 된 서울 중대초등학교 전경.
초등학교 시절 내내 ‘땡땡이’로 일관했다. 이런 학교생활 때문에 정상적으로 등교해 출석한 날보다 결석한 날이 훨씬 더 많았던 문제아의 행보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여러가지 밭에 뿌려진 씨앗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도 이미 오래전에 비유의 말씀으로 하셨듯. 황무지 같은 돌밭, 길바닥이나 가시밭 위에 뿌려졌던 한 아이의 작고 여린 씨앗이 전학 후 토양의 질이 달라지고 찰진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뿌리도 깊이 내려 싹을 틔웠다.
가녀린 줄기의 구석구석까지 거름으로 알차진 양분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그 중심도 점점 굵어지고, 추후에는 싱그럽게 푸르러 풍성한 잎들을 가진 아름다운 모습의 아름드리 나무로 날마다 더 멋스럽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엉뚱한 자리에 잘못 끼워서 옷 전체를 엉키게 한 첫 단추를 다시 열어 뺀 뒤에, 원래 제자리를 찾아 제대로 끼운 감사의 시간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3~4학년까지는 선생님의 말씀과 수업시간에 들었던 대부분의 설명들이 귀에는 잘 들어왔지만, 머리와 가슴으로까지 전달되지 않았던것 같다. 진정으로 내 것이 돼가는 소화와 학습의 과정을 감당하기엔 물리적으로 과부하가 있었다. 과목별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고 기억한다.
어쩌면 매사에 소극적이었고 아웃사이더적인 성향을 띠었던 건 ‘이해력이 부족한 유전자를 가졌기에 흥미와 관심 유발의 기회가 적었거나 천성적으로 게으름을 타고 났거나’였을 것이다.
상식적이고 객관적인 흐름을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따라가기엔 어려움이 있는 ‘조금 느린 학습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엔 지금처럼 조기교육의 열풍으로 어른들보다도 더 바쁜 하루하루를 매일 살아가며 전문적으로 학원을 통해 배우는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조금 느린 학습자였던 나는 ‘나머지 공부’라는 단순한 방과 후 시스템을 가져야만 했었다.
6학년이 됐을 땐 나머지 공부의 시간이 복습과 예습을 동시에 하는 발전적인 충전의 열매로 맺어졌다. 이는 오히려 ‘선행학습’으로의 귀한 시간이 됐다. 시험 점수도 6년을 통틀어 처음으로 90점 95점 100점을 맞는 행보로 이어졌다. 학급 간부인 반장과 줄반장 사이의 완충지대요, 총무격인 부반장으로 선출되는 ‘기적’도 일어났다.
리더십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내가 부반장으로 임명된 것은 마치 무소속으로 출마한 ‘듣보잡’ 초짜 후보가 지역구에서 3선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는 것처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정말 믿을 수 없는 대사건이 됐다.
아무리 생각해보고 또 생각을 해봐도, 초등학교의 마무리인 6학년 졸업반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팀의 리더로서 30년 넘게 ‘여행스케치’를 이끌 수 있도록 미리 예비하신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였음을 또 한번 깨닫는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7) 언젠가 다가올 엄마와의 이별 생각에 눈물이 ‘글썽글썽’
즐거운 소풍 마치고 쉬어가던 중
지나가는 연로한 마을 할머님들과
어머니가 오버랩 되는 환상 본 후
갑자기 밀려온 아쉬움과 서운함에…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 씨의 어머니 박주자 여사.
초등학교 6학년 봄 소풍. 늘 설렘으로 밤잠도 설치다가 이른 새벽 시간에 눈을 부비고 간만에 일찍 일어난다. 그리고나서 어머니 옆에 앉아 열심히 잔소리를 해가며 함께 김밥도 싸고 좋아하는 음료와 과자도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던 시간.
지금의 올림픽 공원 쪽 백제 시대의 유적지로 잘 알려진 몽촌토성으로 소풍을 가게 됐고, 같은 학급 친구들과 함께 정말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은 편의점에 늘 상시로 있는 흔한 메뉴가 됐지만, 그 시절엔 1년에 몇 차례만 먹을 수 있었던 귀한 특식인 김밥과 병에 담긴 사이다를 맛나게 먹었다. 조별 대항으로 여러 가지 게임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고 언제나 마무리는 항상 설렘 반 기대 반이었던 보물찾기로 끝났다. 돌아오는 길에 홀쭉했어야 할 소풍 가방은 보물찾기로 받은 상품까지 넣었기에 더욱 두툼해졌다.
여러 추억들로 더 행복해진 오후의 끝자락. 등에 차오른 땀을 좀 식히기 위해 마을의 물탱크가 있던 언덕 위에 잠시 앉았다. 다소곳이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기지개도 펴보고 앉아 있었는데 눈앞을 지나가는 마을의 할머니들이 있었다.
지금은 유모차를 미시거나 전동 휠체어나 단거리를 오고 가는 소형 스쿠터가 있다지만, 눈 앞에 계시던 연로하신 할머니들이 보행 보조 장치로는 오직 지팡이 하나가 전부였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을 깊이 파고드는 생각이 있었다.
매년 새 해를 맞이하고 또 그 해를 묵은해로 다시 돌려보내야 하는 열두 달 365일을 살다보면, 동네엔 몇 번의 장례식이 늘 있었기에 인간이 겪고 있는 ‘생로병사’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어머니가 그 할머니의 모습으로 오버랩되는 환상이 보였다.
소풍의 기억들과 가방을 가득 채운 선물, 상품들로 인해 기분도 한껏 ‘업’이 돼 걸어오던 그 길 위에서 갑자기 눈물이 글썽글썽 거리다 엉엉 울게 됐다. 엄마와의 이별도 언젠가는 맞이해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마음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어도 만능 슈퍼맨, 원더우먼이 돼 주시는 엄마와의 이별, 사별을 언젠가는 맞이해야 한다는 현실.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는 날이 온다는 현실을 믿을 수도 없었고, 믿어지지도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있던 물탱크를 뒤로 한 채 단칸방이었던 집으로 투벅 투벅 걸어가는 내내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언제나 따뜻했던 엄마의 손을 부여잡고 실컷 더 울었다. 믿기 어려운 그 순간의 서운함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이야기 했던 그 아이. 그 때부터 감성쟁이가 되는 시작점이었던 것 같다. 소풍의 백미이자 기분 좋은 마무리가 ‘보물찾기’였다면 지금까지 뮤지션으로 200여 곡의 작사·작곡을 하게 된 결정적인 감정선의 보물찾기는 바로 소풍날의 마무리를 울림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8)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조약돌 같은 향수 ‘그때가 그리워’
남녀공학 변신시도한 일신중학교 입학
상위 성적 유지하며 ‘모범생’ 애칭도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왼쪽 두번째)씨가 중학생 시절 담임선생님, 학우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색한 까까머리 중학생이 된 나는 우등생의 길로 달려갔다. 얻어걸렸겠지만 ‘부반장’이라는 간부로 초등학교 6학년을 보냈기에 그 흐름은 일신중학교에 입학해서도 계속됐다.
70명이 정원인 한 학급에서 상위 5% 안에 드는 성적을 유지했고 늘 자신감으로 살아갔다. 나름 잘생긴 ‘모범생’이라는 애칭도 얻었다.
‘짧게 깎은 머리와 똑같은 교복에도 서로서로 다른 멋을 부리며 꿈 많았던 시절엔~’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여행스케치의 7집 앨범 타이틀 ‘향수(그 때가 그리워)’도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의 학창 생활을 베이스로 만들어졌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의 시스템은 ‘남녀7세 부동석’이라는 옛 말씀처럼 합반도 아니었고 남녀가 각각 다른 층, 다른 건물, 다른 교실을 사용하는 분반의 개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볼 수 없었던 규칙과 체벌이 난무하는 ‘웃픈’ 풍경들이 참 많았었다. 같은 운동장을 쓰는 같은 이름의 중학교 남학생 여학생의 관계였을 뿐, 혹시라도 터질 수 있는 남녀 관계의 여러 가지 불안함 때문에 서로 다른 나라의 땅에서 자라는 나무들처럼 완전 분리 독립적인 체제였다.
그 당시 일신중학교는 여자 중학교였다가 서울시 요청으로 남녀공학으로 다시 변신을 시도하는 상황이었기에 과도한 구분과 분리정책이 시행됐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2학년이 됐을 때 1학년의 남녀공학 시스템에 큰 무리가 왔다고 판단을 했는지 후배인 1학년 남학생들의 추가 입학을 받지 않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중간에 낀 남자 중학생 5개 반이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는 상황. 1학년 10개 반 전체가 여학생, 3학년 10개 반 전체도 여학생. 마치 샌드위치 빵과 빵 사이에 맛있게 끼워넣은 햄소시지가 된 느낌이랄까. 하여튼 2학년 1학기까지는 어떤 코미디 영화스러운 상태에서 중학교 생활을 하게 됐다.
결국 중대한 결단과 실행이 찾아왔는데, 2학년 5개 반 전체를 집단 전학시키기로 한 것이다. 늘어나는 시민들의 요청과 나날이 터지는 물리적 사건과 행보들 속에서 집단 이주도 전학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나와 동년배 친구들은 일신 중학교 입학, 잠실 중학교 졸업이라는 데이터를 공식적으로 남겼다. 다사다난한 중학생 시절을 보내던 나와 친구들은 동기생들과 헤어지는 아픔도 그 시절 함께 고스란히 겪어냈다.
어쩌면 여행스케치의 리더인 나의 창작품은 아니라고 해도, 송골매 구창모 선배님의 노래인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추억의 명곡이 가슴 속에 가득 울려 퍼지며 철이 들어가는 청소년 시기를 보낸 것이다.
여행스케치의 자체 제작으로, 그 시도가 발전적이었던 7집 앨범 타이틀 곡 ‘향수(그 때가 그리워)’의 마무리 가사는 ‘그때가 그리워’다. 오늘 따라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의 조약돌 같은 추억들이, 밀밭 길을 거닐던 예수님의 귀한 말씀처럼 따사로운 봄날의 꽃잎이 돼 날아온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9) 난생처음 잡아 본 기타 코드… 음악의 묘한 매력에 ‘풍덩’
공부보다 기타연주에 빠져버린 짝꿍
미래위해 공부도 같이하라 설득하다
서로 기타와 공부 가르쳐주기로 합의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기타를 만들 때 사용한 사과나무 상자.
졸업반이자 중학 시절의 꽃망울인 3학년이 됐다. 고교 진학을 위해선 연합고사를 치러야 했고, 200점 만점 중 통상 140점 이상을 맞아야 괜찮은 수준의 고등학교에 입학이 가능했던 때였다.
면학 분위기상 야간 자율학습 시간까지 남아서 하는 공부는 필수였고, 매점 이용이나 외출 승낙까지도 너무 딱딱했던 때라 대부분 점심 저녁 두 끼의 도시락을 지참하고 등교했다.
그 시절 나는 성적이 늘 하위권을 맴돌았다. 그리로 내 옆자리엔 공부를 게을리하는 짝꿍도 있었다. 짝꿍은 교과서나 참고서 대신 항상 노래책을 펼쳐놓고 기타를 치는 주법과 코드 누르는 흉내를 냈다. 나는 짝을 볼 때마다 “친구야, 너 시험공부는 안 할 거니?”라며 늘 잔소리를 했다. 그때마다 짝꿍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며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응수했다.
연합고사 시험일은 점점 다가왔지만 공부에 무관심한 짝을 보며 나는 물었다. “그게 그렇게도 좋으니?” 짝은 “너도 음악의 세계에 한 번 풍덩 빠져 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인생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나는 또 물었다. “네가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쉬지도 않고 연습을 하고 있는 그 기타라는 악기를 치는 게 그렇게도 중요한 거니?”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고 해도 고등학교 진학을 해야 더 자유롭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거라. 나는 짝을 열심히 설득했다. 결국 마무리 된 합의점. 짝은 기타 레슨을, 나는 공부 지도를. 서로가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시스템을 가동하게 된 셈이다.
연합고사를 준비하는 중3의 ‘발전적인 콜라보’였다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공책에 그려준 기타 코드를 난생 처음 손가락으로 잡아 보고 그림의 모양을 외우다보니 나도 어느새 음악이라는 깊고 따뜻한 바다에 슬그머니 빠지는 것 같은 묘한 매력을 느꼈다.
단 현실적인 걸림돌이 됐던 건 가정 형편상 나에겐 통기타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기타 코드는 그림으로 인식 돼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외웠고 숙지했다. 짝은 놀랄 만큼 일취월장하고 있다며 부러워했다.
수업 시간이든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든 나는 짝의 시험공부에 진심으로 조언과 협력을 했고 짝은 기타 선생님이 돼 나를 신비로운 음악의 세계로 안내해주는 열정을 보였다.
합력해 선을 이뤄 영광을 돌린다는 성경의 말씀처럼, 몇 달이 지난 후 작은 열매로 돌아 온 것이 있었다. 연합고사를 잘 봐서 원했던 인문계 고교에 합격한 짝. 사과나무 상자로 연습용 통기타를 직접 만들어 짝보다도 앞선 기타연주를 선보이는 나.
사과나무 상자를 시장에서 얻어 와 분해를 하고, 톱질을 하고 못질을 하고 색칠을 하고 굵은 실과 가는 실을 잘 엮어 기타 6줄로 만들어 장착한 통기타. 제대로 튜닝 조율이 된 악기가 아닌 무늬만 기타였겠지만, 밥 먹을 때나 잠 잘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늘 곁에 뒀다.
그때 그 ‘사과나무 상자 벙어리 기타’의 작은 울림은 오늘도 감사와 은혜가 돼 온 세상을 따뜻하게 연주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0) ‘통기타’ 유혹에 교회 출석… 예배 반주하는 ‘교회오빠’로
교회 나가면 기타 마음껏 칠 수 있고
맛난 크로켓도 자유롭게 먹는단 말에
반 친구 중등부회장 따라 교회 가게 돼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다녔던 평화교회 간판. 작은 사진은 그곳에서 즐겨 먹었던 크로켓.
지난 회에 내가 손수 만든 연습용 기타 ‘사과나무 상자 벙어리 기타’를 이야기했다.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이 기타의 입소문은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평화촌 마을 안쪽에 자리한 평화교회라는 작은 예배당에 출석하는 중등부 학생회장 반 친구의 눈에도 띄었다.
친구는 전도를 목적으로 나에게 다가와 통기타의 코드와 주법 등 온갖 만담을 늘어놨다. 교회에만 나가면 무늬만 기타가 아닌 진짜 통기타를 칠 수 있다는 그럴듯한 꼬임으로 미끼를 던졌다.
최고의 인기 상표 기타가 자기네 교회엔 항상 비치돼 있다고 유인했던 그때 그 순간이 기억난다. 학생회장 친구의 얼굴이 선명하다.
게다가 부활절엔 쌍달걀을, 어린이 주일엔 장난감을, 성탄절엔 특별한 선물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가을 추수감사절엔 맛난 먹거리인 크로켓과 비스킷과 과일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설명까지 상세하게 해줬다.
그는 맛깔스러운 떡밥을 끼워서 너그럽게 풀어 놓았던 낚싯줄을 부드럽게 당기기 시작했다. 크로켓을 유달리 좋아했던 나는 진짜로 친구 따라 강남 가듯 같은 반 친구였던 학생회장을 따라 교회로 가게 됐다.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을 끝내고 크로켓을 배식으로 받아서 입에 한가득 물면, 그 고소하고 기름지고 풍부했던 맛은 ‘천국의 먹방’을 경험한 듯 행복에 풍덩 빠지게 했다. 지금까지 그 시간을 상상만 해도 나의 침샘은 한껏 자극을 받는다.
기타 고수라는 학생회장의 말만 듣고 교회라는 문턱을 넘은 후 기분 좋은 경쟁심으로 그와 가끔 대결을 펼쳤지만, 결과는 늘 나의 압승이었다. 그 친구는 중등부 회장이었기에 탁월한 사회성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 때문에 실제 연주보다는 액션과 입담으로만 기타를 잘 치는 친구였다.
누구보다 빠르게 성숙한 기타 연주를 선보였던 나는 학생 예배시간에 복음성가를 반주하는 ‘교회 오빠’로의 첫 단추를 자연스럽게 끼웠다. 야외 예배나 수련회에서도 반주자의 몫을 잘 완수하는 일꾼이 됐다.
그런데 완전 산골짜기였던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형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상경한 친구가 맞수로 등장했다. 공장에 딸린 작은 방에서 형과 함께 척박한 생활을 했고 학교에도 못 다니는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클래식 기타를 소유한 몇 안 되는 시골 친구라 늘 기타 연습이 가능했다.
교회에 가지 않는 날에 나는 이 친구의 클래식 기타를 빌려와서 열심히 연습했다. 그 시간의 총량이 오늘날의 ‘뮤지션 조병석’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3 시절 짝꿍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잔소리를 하다가 우연히 배우게 된 기타였지만, 통기타 선율의 매력은 잘 익은 과일의 향미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쉽게 열어주고 무장해제 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연’ 위에 ‘운명’을 살며시 녹여 내시는 주님의 섭리를 오늘도 수줍은 기타 연주로 찬양한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1) 신앙적 고백 담아 작곡에 도전… 습작 ‘그래 그래’ 탄생
오선지 위에 창작 노력 기울이다
간단한 코드 반복의 가요 만들어
“세상 다 준다고 해도 주님만 사랑…”
주님 만나는 소중함 감사함 표현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첫 음반으로 내놓은 ‘날다’의 코드 악보.
천진난만한 청소년 시절의 행보였겠지만 중3 시절 나의 다채로운 행동들은 대부분 발전적인 결과나 값진 열매를 맺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님께 감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세계적인 명작들의 뒷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작품들은 매력이 물씬 느껴지는 특별함이 있거나 이색적인 메이킹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명망 있는 유명 작가들의 독창적인 작품들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나도 이러한 모습들을 닮아갔다.
기타를 갓 배우기 시작한 왕초보 통기타맨인 나는 삼각대 캔버스 위의 도화지가 아닌 음악 노트의 오선지 위에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다보니 차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점 더 멋스럽게 물들어갔다. ‘창작의 열매’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음악책에 그려진 악보를 보면 대부분 음표의 고저나 길이가 다양하게 펼쳐짐으로써 설득력이 있는 공감대를 만든다. 일반적인 형태였지만 멜로디 구성을 마치 요즘 시대의 랩처럼 한 음이나 단순한 음을 계속 반복하는 형태의 음정으로 간단하게 만들었고, 코드의 조합도 누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는 ‘Am-C-E-Dm’ 달랑 4개였다.
어쩌면 어른들이 좋아하는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스타일의 가요풍으로 무작정 작곡에 처음 도전장을 내밀었다. 게다가 가사도 복음성가의 내용처럼 친구 따라 어쩌다가 교회에 간 나의 신앙적인 고백과 소망을 담았다.
굵고도 짧은 작사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세상을 선과 악 흑과 백 등 쉽게 구분되는 신앙적 이분법의 시각에 기인해 단순 무식하게 첫 작품의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제목은 ‘그래 그래’였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고 해도, 나 주님 배반 안 하리.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뭐라고 해도, 내 마음 변치 않으리. 랄랄랄 라랄랄라 랄랄랄 라랄랄라 주님을 만났습니다. 랄랄랄 라랄랄라 랄랄랄 라랄랄라 주님만 사랑합니다. 내 마음 변치 않으리.”
지금도 첫 번째 습작이 된 ‘그래 그래’를 머릿속에 다시 떠올려보면 무리한 도전 무모한 도전 무작정 도전의 행보였다는 생각이 밀려들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만나는 첫사랑의 풋풋함과 소중함 그리고 감사함을 포장이나 꾸밈없이 오롯이 순수한 청소년의 감성으로 순박하게 그렸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의 첫 번째 습작인 ‘그래 그래’는 우리 영성의 가장 밑바닥에서 중심을 잡고 있어야 하는 ‘믿음의 틀을 가감 없이 노래한 귀한 열매’임을 오늘도 고백한다.
존재감과 특색이 있는 작곡가가 된 나는 지난 30여 년간 많은 노래를 만들었고 연주와 가창까지 했고 발표했기에,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넘어 이젠 글로벌하게 지구촌 여러 곳에서도 SNS를 통해 나의 노래를 들었거나 자연스럽게 듣고 있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2) 음악과 신앙의 멘토 ‘노래하는 시인 엉아’ 이근형 전도사
전파사 운영하셨던 아버지 영향으로
팝송 접하며 올드 팝 성향에 빠졌다가
기타 잘 치는 이전도사 분위기에 매료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 멘토인 이근형 포도원교회 목사가 손주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작은 키에 짧은 목, 짝눈에 주근깨가 가득해 더 못생겨 보이는 얼굴의 외모였지만, 기타를 튕기며 복음성가를 들려주시는 이근형 전도사님(현 포도원교회 담임목사)의 털털한 웃음과 미소는 정말 100만 달러 짜리였다.
‘꿈보다 해몽’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속담처럼 주일학교와 학생회, 청년회까지 전체를 다 맡아서 가르치고 잔소리까지도 늘 구수하게 하시는 그런 넉넉한 마음밭의 소유자.
매사에 열심을 담아 몸으로 뛰며 일하시는 전도사님 모습을 볼 때마다 학생들의 마음에도 점점 믿음의 싹이 자라났고 자연스럽게 그 사부님을 닮아가고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전파사를 운영하셨던 아버지 영향으로 엘비스 프레슬리, 루이 암스트롱, 밥 딜런, 비틀즈, 롤링스톤즈, 딥퍼플, 레드 제플린, 키스, 퀸, 조안 바에즈 등 날마다 팝송을 접하는 시간이 많았다. 자연스레 몸에 밴 음악 성향은 당대의 유명한 올드팝 아티스트의 음악들이었다.
50년 전 우리나라의 전파사는 모든 전자 제품들을 판매 수리 교환까지 하는 만물상이나 마찬가지였고, 유행하는 음악이 항상 흘러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턴테이블 위를 돌아가고 있는 둥근 LP판을 신기한 듯 집어들고서 골목으로 나와 동네 꼬마들, 친구들과 함께 마치 비행접시처럼 하늘 위로 던지고 날리며 그 귀한 LP판들을 깨뜨렸다.
세계적인 팝시장의 뮤지션들을 좋아했고 영어 가사의 팝송들을 항상 접하고 살았기 때문에 원어 가사를 알파벳 스펠링이나 단어, 문장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아닌 들려오는 대로 소리가 나는 대로 한글로 받아 적어서 부르는 일명 ‘콩글리시 팝송’을 했다.
그런 나의 음악적 세계를 또 다른 형태의 감성적 호수에 빠뜨려 준 선배님이 바로 그 전도사님이셨다. ‘노래하는 시인 엉아’ 같은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전도사님 모습에 주일학교 어린학생들과 청년들은 언제나 함께 빠져 녹아드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라를 세우신 ‘일등공신’의 공로와 훈장을 가지신 담임 목사님의 경건하고도 엄숙하기까지 했던 목회 분위기와는 반대 방향의 스타일, 그런 모습의 성향을 가지셨기에 다소 젊거나 어린 성도님들은 왠지 더 끌렸으리라 여겨진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희준, 세시봉, 서수남과 하청일, 서유석, 최병걸, 김광석 등 이런 선배님들께서 보이셨던 가창력을 포함해 구수한 입담과 일맥상통한 그 전도사님은 아마도 선구자의 모습이셨다.
여행스케치가 보여주는 일상 생활사적 음악방향의 밑거름은 무엇이었을까. 따뜻한 영향력으로 전도가 된 같은 동네 같은 반 친한 동창들의 에너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인 듯 불어오는 순간 순간의 다양한 감정선들을 오늘도 그 시절의 순수함에 이끌려 적어본다. “모든 건 다 하나님의 예비와 준비하심이었구나.” ‘여호와이레’라고 다시금 적어본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3) 숨 쉴곳 없던 고교시절 견딘 건 나의 짝 ‘형우’와 동행 덕
고등학교 진학 후 시험과의 전쟁으로
경쟁의 울타리 속 쫓기는 생활 속에
아마추어 밴드 함께 만든 나의 짝과
음악 함께한 친구들이 유일한 탈출구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다녔던 대원고등학교 전경.
오늘날 한국사회는 사교육 시장의 천국이다. 학생 수준에 따라 선명하게 구분되고 나뉘어져 따로 따로 교육이 이뤄진다. 전문화된 시스템 아래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다.
영재교육과 조기교육, 글로벌한 선행학습이 대세를 이루는 게 현시대의 전반적인 흐름인 것 같다. 자녀들에게 하나라도 더 배우게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일하고 있는 게 요즘 부모들의 모습이다.
공동체라는 하나의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아가는 게 반세기 전쯤 새마을 운동 시대의 기본적인 흐름이었다면, 최근에는 무한 경쟁의 시대를 맞이함이 당연한 대세요,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라고 여기며 하루하루를 빠르게 무언가에 쫓기듯 달려가는 패턴의 연속이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상생’ ‘동행’이라는 단어는 항상 존재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동반자’의 모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고 여겨지는 현대사회가 됐다. 그래서 글쟁이와 작곡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나의 마음 한쪽 구석엔 늘 시린 온도의 창백함이 그림자로 남아 있다.
그 모든 그늘의 시작점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일주일마다 치러야 하는 주간시험과 월말고사, 모의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전쟁을 치르듯 견뎌내야 했다. 아마 그 당시 고등학교들은 약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성적우월주의’로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와는 사뭇 다르게 문교부에서 통일성 있게 나눠주던 하나의 교과서를 출판사가 다른 5종의 형태로 접하게 됐고, 배우지도 않았던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까지 익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마치 공부벌레를 사육하듯 날마다 우등반, 열등반의 체제로 돌아가는 고교시절의 냉혹함은 ‘생존본능’만을 불태우며 삶을 배웠던 훈련소 같았다.
그래도 감사한 추억의 실타래가 있다면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기생들 중 뮤지션이라는 구역에서 지금까지 서로 기억되는 이름표가 아닐까 생각한다. ‘윤미래’라는 걸쭉한 보컬이 있던 그룹 업타운의 리더 ‘정연준’은 같은 반 친구인 정연두의 친동생 동문, 담다디 이상은의 다른 히트곡 작곡가로 유명한 기타리스트 겸 보컬 트레이너 ‘안진우’, 캡틴퓨쳐로 활동했던 ‘송재준’ 등.
그 중에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뜨겁게 숨 쉬고 있는 이름은 여러 유명 가수들이 리메이크 한 노래, ‘옛 친구에게’ 가사의 실제 주인공이 된 ‘김형우’였다. 나의 짝이었으며 함께 아마추어 밴드를 만들었고 면목동에 살던 친구 형우. 비내리는 날을 억수로 좋아했기에 ‘형우’의 ‘우’가 ‘비 우’라고 늘 우겼던 녀석 형우.
세계적인 전설의 록그룹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를 늘 따라했던 무명 기타리스트 형우. 피튀기던 고교시절을 살아낸 건 바로 그 녀석과의 동행 때문이었다. 지금도 돌아보면 40년 광야 생활 이후 가나안 땅에 함께 들어갔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동반자 모습을 감히 닮은 우리였다고 추억의 일기장엔 적혀 있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4) 교회 울타리 밖의 넓은 세상 보여준 ‘꺽다리 철우 형’
중·고등부 교회 총학생회장 철우 선배
교회 밖 커뮤니티 한국십대선교회 소개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오른쪽)씨가 일명 ‘꺽다리 형’이라고 불렸던 김철우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생존 본능의 기술과 정신 무장이 필요했던 학창시절, 유일한 낙이 동기생들끼리 이런 저런 이야기들로 채워가는 수다방에 있었다면 마음에 잔잔한 호수같은 평온함을 주는 더욱 값진 일들은 늘 교회 안에서 이뤄지는 크고 작은 커뮤니티였다.
지금은 제주시 ‘연동 서부교회’의 담임으로 있는 동창생인 이상성 목사와 함께 나는 중3 때부터 성적이 낮은 동기생들에게 공부와 배움을 독려했고, 과외학습의 형태로도 참여해 협력을 실천하는 학생들이었다.
그 무리 중에는 일명 ‘꺽다리 형’이라고 불리우는 키다리 선배님이 계셨으니, ‘김철우’ 교회 중·고등부 총학생회장이었다. 마른 젓가락이나 어묵 꼬치의 대처럼 생긴 비주얼이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더라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상급생 형이었다.
열혈 학생회장의 모습을 띠었던 김철우 꺽다리 형은 평화교회 울타리 밖의 세상, 한국십대선교회(YFC)를 만나게 해줬다. 1년에 한두번씩 봄이나 가을에 있는 ‘문학의 밤’이라는 프로그램은 이웃 교회들과의 친분과 관계성을 유지하는 소통의 창구였다면, 강남 쪽으로 이동해서 만나게 된 YFC 단원 학생들의 모습은 신기하고도 놀라운 일이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 안목을 선물로 줬다.
YFC의 대외적인 행사 무대에서 ‘마마스&파파스’의 올드팝 명곡인 ‘캘리포니아 드림’을 기타로 연주하고 노래했던 중창팀 선배님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저런 형들처럼 멋진 뮤지션이 될 수 있을까?”라는 혼잣말로 그 감동적인 무대를 관람하고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여행스케치의 ‘최애’ 팝송이자 18번 레퍼토리는 바로 그 캘리포니아 드림이다. 열심히 연습과 카피를 했고 처음으로 연주와 완창을 하게 된 팝송이며 가장 많은 무대에서 부르고 있다.
‘집밥’ 이후 7년 만에 신곡으로 발표한 여행스케치의 싱글인 ‘키다리 아빠’라는 노래의 기본적인 모티브가 ‘알로이 시오’라는 독일계 선교사이자 고아원(소년의 집) 원장님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초적인 밑거름엔 학창시절 교회 학생회의 ‘꺽다리 형’인 철우 형과 동행했던 따스한 행보들이 한 폭의 수채화로 남아있다.
YFC를 소개해줬던 지금 그 꺽다리 형은 현재 부산 연제구 ‘이사벨 학교’의 교목이며 경남 양산에서 선교를 위한 커뮤니티 공간도 운영하고 있다. 학창 시절이나 중년이 돼 노년을 준비하는 지금이나 그 흔들림 없는 믿음의 행보가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계속 이어지길 소망한다.
참고로 현재에도 내가 YFC를 특별히 칭송하거나 그것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소중한 추억 속의 한페이지에 ‘꺽다리 형’ 김철우 목사님이 남아있기 때문에 YFC도 같이 언급을 한 것 뿐이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5) 집안의 평화를 위해 마음 속 깊이 묻은 ‘화가의 꿈’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재능 풍부해
미술대회 상 휩쓸며 화가 꿈꾸었지만
집안의 반대로 아버지와 잦은 마찰에…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의 아들이 그린 그림. 아버지를 닮아 그림 솜씨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설립 역사가 짧은 신생 학교였다. 그래서인지 열정이 넘쳤다. 전체적인 면학 분위기는 일류대에 최대한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진학시키는 걸 목표로 날마다 달려가는 시스템이었다. 진학 우선순위는 대학 이름과 객관적 레벨이 더 중요했다. 학생들이 선택하는 전공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런 학교 분위기는 점점 가시적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신생 고등학교 중 가장 많은 숫자의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는 학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우등반과 열등반으로 구분하는 시스템도 그대로 유지했다. 중압감이 느껴지는 체벌과 학생 통제도 여전했다.
그런 빡빡한 흐름 속에 날마다 시달려야 했던 나는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 여파로 우등반에서 열등반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렇지만 크게 낙심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낙천적 성향의 미대 지망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방학을 마칠 즈음이면 같은 반 친구들이 찾아와 미술이나 기술 숙제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소질과 재능이 풍부했기에 성적과 등수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큰 문제는 ‘평생 배고픔이 있을 수 있는 화가의 삶’을 반대하는 집안 분위기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엔 공부를 꽤 잘하는 우등생이었고 거기에 더해 그림도 잘 그리며 온갖 상을 받는 특기를 뽐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환영을 받으며 이웃들에게도 자랑거리가 되는 그런 시절이었다.
하지만 ‘고3’ 타이틀은 향후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인생의 미래를 준비하는 때였다. 이런 가운데 집안 반대는 쉽게 넘을 수 없는 장대 높이의 커다란 허들처럼 보였다. 특히 아버지와의 말다툼은 잦았고 그 양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한 상황으로 번져갔다.
학력고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나는 차근차근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 혼자만 꿈을 포기하고 다른 꿈을 꾼다면 우리 가족 전체가 평안한 마음으로 함께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마음 한쪽에서 생각이 속삭였다. 이 속삭임은 계속됐고 나는 세뇌하듯 습관처럼 읊조리기 시작했다. 결국 캔버스를 부숴 땔감으로 던졌고 붓도 꺾었다. 연습으로 채색했던 스케치북은 가슴 속 깊은 창고에 묻었다.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닐지라도 당시 가족들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결정했던 나의 양보와 내려놓음이 사도 바울 선생의 모습으로 점철되며 데자뷔로 스쳤다. 바울이 누구인가. 그는 지적으로 당대 최고 유대교 학파에 속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경험도 소유했던 사람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회심해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았던가.
나는 오늘 사도 바울의 모습에서 공과대 입학 후 펼쳐진 다양한 색채의 풍경화들을 이미 스케치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한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6) 99% 합격 예상 했는데 “조병석씨, 합격명단에 없습니다”
불합격 ARS 안내 멘트에 잠 뒤척이다가
미래 ‘선몽’ 꿈꾼 후 계속 마음에 맴돌아
지원한 수원 S대학 직접 찾아가서 확인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왼쪽)씨가 오랜만에 방문한 모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기타를 치고 있다.
담임선생님은 연세대 원주캠퍼스(미래캠퍼스) 자연과학계열로 지원을 권유했다. 당시엔 질적인 부족함을 가진 게 ‘분교’라는 사회적 인식이 있었기에 유명 대학 지방 캠퍼스의 경쟁률은 높지 않았고 마음만 먹으면 장학금까지 받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중교통의 발달이 촘촘하게 이뤄진 시대가 아니었기에 통학은 꿈도 못 꿨고 자취나 하숙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이나 수도권 대학을 찾기 위해 다시 노력했다. 전기대 후기대 전문대 재수의 순서로 이어지는 게 일반적인 시스템이라, 첫 지원이 가장 중요했는데 ‘못 먹어도 고’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으로 최고의 공대, 최고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학과에 무모하면서도 무리한 도전을 택했다. 아마도 미달이나 커트라인 턱걸이, 운으로 붙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 같다. 나는 담임선생님과 학우들의 만류에도 직진했다. 역시 결과는 1차 지원 낙방.
그때 생각을 해보니 어릴 적부터 오랜 시간을 준비했던 미술학도, 그림쟁이로의 목표를 온 가족의 반대로 포기하고 딱딱한 공과대학의 엔지니어를 목표로 잡았기에 잠시나마 정신이 나갔거나 정신을 놓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하튼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나는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후기대 제2지망에 집중했다. 워낙 하향 지원이라 당락엔 부담도 없었다. 원서를 접수하고 기다리다가 그 당시엔 최신 시스템인 ARS로 합격을 미리 확인하는 방법이 있었기에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었다.
“수험번호 ○○○ 조병석씨, S대학 산업공학과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라는 ARS 여성 안내원의 멘트. 순간 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99% 합격일 거라 당연히 생각했었다. 여기도 못가고 제3지망인 전문대를 가는 건 상상도 못 했기에 더 숨이 막혔다. 그렇다고 재수를 한다는 건, 가정 형편상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잠을 뒤척이며 늦은 새벽 시간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마치 미래를 ‘선몽’하듯 특별한 꿈을 꾸게 됐다. ARS 안내원이 등장해 꽃을 들고 집까지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장면. 그리고 고등학교에 등교하던 중 같은 반 친구가 자신이 밟은 똥을 나의 어깨에 닦는 더러운 꿈이었다.
버스와 전철 그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수원의 S대학까지 가야 하는 먼 일정이었지만, 왠지 꿈의 내용이 자꾸자꾸 맴돌았고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기에 길을 나서서 수원까지 내려갔다. 도착 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살 떨리던 그 순간. 수험표의 번호 순서대로 나열된 게 아니라 합격자들의 성적에 따라 고득점자로부터 점수별로 적혀있는 명단이었다. 위부터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상단 쪽에서 눈에 쏙 들어오는 낯익은 이름 하나가 보였다. ‘조병석’.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반전처럼 그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과 그의 해몽 이야기. 성경에 꿈을 통해 역사가 이뤄지는 아름다운 기록들이 많이 있듯, 여러 목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하모니 뮤지션’으로의 첫걸음이 됐던 S대 음악 동아리 ‘도레샘’과의 끈을 이어주기 위해 꿈으로 미리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7) 음악동아리 ‘도레샘’ 입단… 싱어송라이터의 삶 시작
우연히 친구 따라 ‘도레샘’ 오디션 참가
훌륭한 기타 테크닉 덕분에 가볍게 합격
동아리 활동하며 음악적 스펙트럼 넓혀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대학 시절 함께한 음악동아리 ‘도레샘’ 멤버들.
ARS 안내원의 ‘당락 해프닝’을 재미난 무용담으로 남기고 대학에 입학한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새내기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오리엔테이션에서 ‘특송’을 불러주신 멋스러운 중창팀 선배님들의 아리따운 목소리와 퍼포먼스였다. 교회에도 예배나 집회 시간에 중창을 통해 따스한 감동을 주시는 성도님들이 계셨지만, 하모니와 세련미가 넘치는 얼굴로 노래를 부르는 남녀 혼성 선배님들의 무대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풍부한 통기타의 선율과 보컬의 멜로디, 멋스럽게 감싸주는 화음들은 미대를 포기하고 공대에 들어온 나에게 커다란 위로를 선사했다. 당시 나는 서글픔과 아쉬움 속에서 마치 황무지 돌밭 위를 걷는 듯했다.
나는 학기 초 같은 과(산업공학과)의 단짝이 된 이기원이라는 친구를 따라 ‘도레샘’이라는 음악동아리 오디션에 우연히 참가하게 됐다. 단짝이 돼가는 기원이를 응원하는 모드로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동행했지만, 굵고 짧게 연주했던 기타의 테크닉과 따뜻한 어조의 인터뷰 과정 덕분에 가볍게 합격했다.
결국 딥 퍼플이나 레드 제플린, 퀸 등 록밴드적 성향을 가진 나에겐 전자기타에서 통기타까지 음악적 스펙트럼이 더 넓어지는 단초가 됐다. 카리스마 넘치는 세계적 록음악 보컬들과 밴드를 추앙했던 나에게 통기타 중심의 중창단다운 ‘도레샘’ 동아리는 다양한 색채의 멋들을 맛보게 해줬다.
도레샘에서 나는 다양한 교훈을 얻었다. 여러 사람의 가창과 연주 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양보’와 ‘이해’가 필수라는 해답을 깨우쳐 줬고, ‘함께’ 라는 단어의 의미와 재미를 알게 해준 귀한 시간이었다.
특히 이웃 대학에서도 참여가 가능했던 모교의 ‘창작 가요제’는 상금과 부상과 존재감을 얻기에 충분한 무대였다. ‘한마음’이라는 유명한 가수처럼 ‘도레샘’ 음악 동아리 동기와 후배가 혼성 듀엣으로 출전했고, 내가 만들어 준 신곡 ‘소녀의 꿈’은 당당하게 대상을 차지했다.
함께 울고 웃고 장난치고 떠들다 싸우기도 하고, 다시 또 화해하며 걸어왔던 공동체. 학과 수업은 뒤로 한 채 날마다 사랑방이 되어준 음악 동아리 ‘도레샘’ 선후배님들과 동기생들은 이렇게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특별히 ‘소녀의 꿈’을 듀엣으로 불러 대상을 수상했고 그 상금으로 전체 회식까지 시켜준 듀엣에게 “성희와 동민아 고마워”라는 따스한 말도 이참에 전하고 싶다.
중3 때 만들었던 첫 습작, ‘그래 그래’ 이후 작곡가의 길로, 싱어송라이터의 방향으로 지금까지 살게 한 값진 시작이 됐음을 고백한다. 현재까지 30년 이상 함께 달려온 녀석들, 그리고 ‘여행스케치’의 데뷔곡이자 히트곡 ‘별이 진다네’를 멋지게 불러준 멤버 남준봉. 죽마고우와 같은 동반자 준병이도 ‘도레샘’의 후배였다. 지금도 곰곰이 다시 생각해봐도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8) 인생과 닮은 밤하늘 별 보며 ‘별이 진다네’ 악상 떠올라
제대 앞둔 시기에 야간 보초 근무 중
지나간 일들 스치며 머릿속 가득 메워
유한한 인생과 밤하늘 별들이 오버랩
아름다운 시상과 악상으로 곡 그려져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앞줄 왼쪽 세 번째)씨가 군대 시절 전우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군 입대. 2학년까지 대학을 다녔던 나도 동기생들처럼 휴학 후 입대를 택했다. 서울을 지키는 부대인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 김포공항 계류장에 있는 5분대기 특별부대인 ‘35여단’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참고로 수방사는 서울을 지키는 부대라 군기가 평상시에도 아주 삼엄했다.
그리고 35여단 구성원들은 후반기 교육까지 전문적으로 받고 자대 배치를 받은 병사들이 거의 없었고, 대다수 부대원은 여러 보직의 임무와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멀티맨 스타일’의 장병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여러 가지 형태의 상황극처럼 말도 많고 탈도 참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인내와 용기’를 갖고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지냈다. 지금 생각해도 군 생활을 나름 잘 버텨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야간 보초로 근무를 서고 있었다. 때는 제대를 앞둔 시기였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일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소중했던 순간들, 눈물 났던 시간들, 피하고만 싶었던 훈련의 나날들, 너무나 미웠던 이상한 고참들, 전우애로 뭉쳤던 동기생들 등등. 마치 영화를 보는 듯 많은 생각으로 캄캄한 밤하늘을 더 푸르르게 느끼던 깊은 밤이었다.
‘결국 모든 건, 이 또한 지나가더라’라는 명언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영원한 건 없구나. 마치 영원할 것처럼 우리가 착각을 하거나 자신을 세뇌하며 살고 있구나’ 하며 깨달아지는 시간이었다. 순간의 감정, 찰나의 느낌, 연상되는 이미지와 선입견, 사랑하고 사모하고 좋아하는 마음, 존경심을 갖게 된 위인들, 경험치와 배움으로 얻게 되는 지식의 창고까지도 말이다.
인생의 여행 기간이 평균 80년 정도 시간을 가지고 있듯, 모든 것들은 다 유한성을 가졌다는 생각 속에 아쉬움과 서글픔까지 생겼다. 영원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라 더 아름다운 행보의 작품들도 만들어지고, 아끼려는 애정이 생기고 가슴 속 잔잔한 울림도 느낄 때가 있다.
인생의 모든 것들이 유한한 시한부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타이머를 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나는 자연스레 밤하늘 한가득 메워진 뭇별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별들이 나 조 병장의 가슴속 깊은 곳에 살포시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별이 진다네’라는 표현으로 시상과 악상이 교차하며 아리따운 그림이 그려졌다.
나는 지금 다시 보초를 서며 꿈꾸었던 그 초소 너머로 펼쳐진 밤하늘의 작은 조각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교회의 청년이었던 나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직접 빚어서 손수 별 비와 별 무리로 내려주신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가슴 가득 울려 퍼진다.
‘사랑과 철학’을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니 오늘 밤하늘에도 수줍은 듯 ‘별이 진다네.’
***[역경의 열매] 조병석 (19) ‘별이 진다네’ 타이틀 곡으로 여행스케치 1집 발매
보컬은 ‘도레샘’ 후배이자 지기 남준봉
여행지의 다양한 소리들 ‘흡음’한 위에
통기타 하나로 하모니를 형성해 제작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주도해 만든 수많은 음반들.
‘별이 진다네’라는 노래를 만들고 연주한 건 나였지만 멋스럽게 노래를 불러준 보컬은 여행스케치 멤버 가운데 한 명인 ‘준봉’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여행스케치 첫 1집은 ‘기념 음반 옴니버스’ 앨범이었다. ‘도레샘’의 후배이자 지금은 30년 지기 멤버가 된 ‘남준봉’의 소개로 서울음반과 만나게 됐다.
이 즈음에서 주님께 감사할 것이 있다. 나는 군대에서 만든 ‘별이 진다네’라는 노래를 1집 타이틀 곡으로 하고 싶었다. 습작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이 노래에 대한 애착이 무척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반사에서 1집 주제곡을 허락할지는 미지수였다. 쉽지 않아 보였다. 가수가 생각하는 방향과 음반사가 생각하는 방향이 다른 경우가 무척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신기하게도 기도는 곧바로 응답을 받았다. 음반사의 모든 직원들, 심지어 여러 미디어 계통의 지인들 사이에서 ‘별이 진다네’가 1집의 타이틀 곡이 되는 게 당연하다는 의견이 대세를 형성했다. 애써 부연 설명을 하거나 강요하거나 누군가의 힘으로 ‘밀어 넣기 식’의 행위는 전혀 없었다. 오로지 기도의 힘이었다. 미리 손수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또다시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현재에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수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들에는 늘 ‘여행’이 1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여행이라는 주제를 음악이나 그룹 이미지에 녹여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여행지의 다양한 소리들을 현장감 있게 다 ‘흡음’을 하고, 그 위에 통기타 하나로 하모니를 형성하는 1집을 만들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대중의 큰 공감을 얻었다.
이후 음악에도 동네의 가까운 형 오빠 누나 언니 같은 친근하면서도 목가적인 이미지와 노래들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별이 진다네’ ‘옛 친구에게’ ‘초등학교 동창회 가던 날’ ‘운명’ ‘시종일관’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눈을 감으면’ ‘향수’ ‘왠지 느낌이 좋아’ ‘달팽이와 해바라기’ ‘기분 좋은 상상’ 등 수많은 애창곡들을 만들어냈다.
지금껏 여행스케치가 발표한 노래 가운데 90% 이상은 조병석이라는 축복의 통로를 통해 발표됐다. 처음에는 나 자신의 특별한 재능과 신념으로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때는 교만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성과가 나 자신의 능력만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님을 알게 됐다. 30년 음악인으로서 그동안의 여정을 돌이켜보니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손수 내려주신 귀하고도 값진 선물이었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낀다.
‘99%의 내려주심과 1%의 행함’이 총합을 이루는 것임을 깨달으며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은 날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역경의 열매] 조병석 (20·끝) 두 번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공연 도중 머릿속 백지장
돈과 명예 쌓이며 주님 멀리하다
교통사고 후 역경 시달리며 회심
초심으로 돌아가 주님께 매달리자
역경 벗어날 회복의 힘 부어주셔
그룹 여행스케치의 리더 조병석씨가 한 공연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신앙적인 삶을 살겠다고 고백했다.
여행스케치의 리더로, 작품을 만드는 싱어송라이터로, 프로듀서로 명예가 쌓이고 경제적 여건도 좋아지고 인맥도 쌓이다 보니 조금씩 주님과 멀어져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안 좋은 일을 하면서도 ‘이 정도는, 요만큼은, 괜찮겠지’라며 스스로 세뇌하듯 속였다. 또 ‘만약 죄가 된다면 회개함으로 몽땅 지우고 다시금 리셋하면 되니깐’이라며 어이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첫 사고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때 ‘드디어 올 게 왔구나’라는 선명한 획이 바로 그려졌고 참을성의 한계에 다다르신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치셨음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됐다.
음악 작업 후 새벽 시간에 귀가하던 중 경부고속도로에서 첫 번째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결과 기억상실증에 걸렸고 안면 수술까지 해야만 했다. 뇌파가 지속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회복에 걸린 시간 만 5년이었다.
그리고 3년 후엔 업무로 이동 중 경기도 수원에서 두 번째 교통사고를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목덜미에 영구적인 철심을 4개나 박아넣었다.
이후 머리에 가해진 심한 충격 여파로 공연 시간에 가사와 코드가 기억나지 않아 실수를 연발하는 어리바리한 가수가 됐다. 레퍼토리 대부분을 직접 만들었고 이미 수천 번쯤 불렀기에 자신 있게 가창과 연주를 하려는데, 갑자기 하얗게 채색되는 눈앞과 텅 빈 머릿속 현실은 정말 극복하기 쉽지 않았다.
역경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회사 운영에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직원들은 모두 떠나갔고, 폐업하는 과정에서 나 홀로 15억원의 채무를 떠안게 됐다. 압류와 파산 등으로 점철된 역경의 나날들이 이어졌다.
이처럼 끝없는 역경의 과정에서 나는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회심’이었다. 회심하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전심으로 주님 앞에 회개하고 성경을 완독하고 참된 소망을 기도로 간구했다.
오랜 시간 누워있던 병실 침상 위에 뿌려진 눈물의 읊조림은 ‘회개의 멜로디’와 ‘간증의 가사’가 됐다. 여담으로 오랜 시간을 병석에 누워 있었기에, ‘병석’이라는 본명을 ‘루카’라는 예명으로 바꾸기도 했다.
결국 이 모든 역경의 원인 제공자는 나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분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흔들림 없는 믿음을 소망했더니 다시금 역경에서 벗어나 회복할 수 있는 힘을 부어주셨다.
함량 미달의 가객 조병석은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주님만을 믿으며, 그분께서 내려주시는 귀한 은혜를 더 따뜻한 멜로디와 하모니로 찬양하고 연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