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입학을 환영합니다." 나의예술고 입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실,별로 기쁘지도 설레이지도 않았다. 어릴때부터 꿈꿔왓던 선화예고 ,서울예고에진학하지 못하고 결국 충북예고로 오게됬다는 사실이 서글펐다.그학교에 갈 실력도못되었겠지만,내자신에대한 기대치와 목표는 너무나도 높았다. 사실 우리학교는 무용을 오래배우고 들어오는 학생들이 거의없다. 그에비에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무용을 일찍시작했고,중학교시절 머리가 텅텅빈 애들이 무용이나하는거라는 틀에박힌 편견이 싫어서 이악물고 열심히한 공부덕분에 내신도 좀 좋은편이여서인지,선생님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중학교때까지 배우던발레선생님을 학교를진학하면서떠나고 지금의 레슨 선생님을 만났는데,다른선생님들은 나에게별다른 지적을 하시지않았지만 우리선생님은 나에게 칭찬을 하는법이 없으셨다. "체격이 엄청 좋은것도아니고,공부도 애매해.발등도 안좋고,팔다리 관절도 다튀어나와있고 몸도 다 뒤틀어져있어.네가신경써서 고치지않으면 대학가기 힘들어."레슨첫날 이런말씀을 하셨었는데 아직도 그충격이 가시지않는다.나에게 이런 쓴소리가득한 평가를내려주신분은 우리선생님이 처음이였다.자만에 빠지지 말라는 깊은뜻이셨겠지만,그당시 너무힘들었고 난 정말 학교에서 하루하루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2 내가처음 발레를접하게된건,5살 때였다.그때 엄마가 아빠와 크게싸우고 화가나셔서 나와 언니를 데리고 나오셔서 기분전환할겸 예술의전당에 갔었는데,마침그때 발레공연을 했었다.난 그공연을 우연히봤고,완전히 매료되어버렸다.엄마말씀으로는,5살짜리 어린애가1시간 넘게 눈도안떼고 계속보고 있었더라고하셨다. 그공연을 보고집에 와서 그공연에 나온음악을 흥얼거리며 그동작들을 똑같이따라했다고 하셨다. 그 이후 난 발레를 하고 싶다고 엄마를졸라 발레학원에 등록했다. "김은주 발레 아카데미."나의발레인생에 있어 첫발을 내딛은 공간이였다. 처음에는 그저 취미삼아.운동삼아 시작한 발레가 1년2년 점점하다보니 욕심이붙었다. 학원의 전공반 언니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잘하고싶다'라고 생각했고 그마음이'발레를 전공하고싶다'라는 생각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초등학교4학년때 처음으로 부모님께 발레를 전공으로 하고싶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부모님은 굉장히 많이 반대하셨다.내가 발레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것은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이었지만 역시 문제는 돈이였다. 전공으로 하려면 작품비 레슨비 의상비 콩쿨비용등 상상이상으로 돈이 많이들었다. 그에비에 우리집은 전공을 할수있을만큼 넉넉한 형편이 아니였던 것이다. 돈앞에 내꿈이 무너지는것같아서 정말 많이울었었다. 하지만 포기할수 없었다.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2년을넘게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때 날 도와주신게 학원 원장선생님이셨다. 어느날 엄마에게 전화를 하셨다. "정은이는 체격도 좋고 열심히하고 무엇보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전공을 못하게하시는건 너무 아까워요.그래서 고민해봤는데 제가 콩쿠르작품을 학원 장학생으로해서 무료도 주고싶네요.의상도 제가 빌려볼테니 아이가 콩쿨나가는것만 도와주세요.콩쿠르나가보고 정은이가 무대에 선것보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아요." 몇백단위를 오가는 작품을 그냥 주시기엔 선생님도 힘드셨을것이다.지금도 항상그 선생님께 너무감사하다. 그렇게 어떨결에 난 발레전공반에 들어갔다.
3 초등학교를졸업하고 봄방학이 되자마자 난 첫 콩쿨작품을 받았다. '에스메랄다'집시 소녀를 표현한작품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탬버린을 들고 화려한 피루엣(회전기술)이 연달아 나오는 작품으로 나에겐 첫작품으로는 너무 어려운작품이었다.처음에는 아주 어설펐지만 한달 두달 세달 숨이 너무 차서숨을쉬는것도 힘들고 다리가 다풀려 온몸이 후들거릴때까지 단하루도 쉬지않고 매일 그렇게 연습했다.하다보니 피루엣도 어느정도 좋아지고 그작품을 조금씩 소화할수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때쯤 첫콩쿨을 나갔다.처음 혼자서보는 무대에 너무떨리고 정신없어서 내가 어떻게 하고 내려온지도 몰랐었다.굉장히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울했는데 결과는 은상으로 의외로 좋았다.그이후로도 몇개의 콩쿨을 나갔는데 최우수 금상은상 등 좋은상을 탔고 부모님도 전공을 찬성하는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그때부터 난 내가잘한다는 착각으로 자만에빠지기 시작햇던것 같다.
4 중학교1학년콩쿨을 모두마치고 2학년이되어 내가 가고싶어하는 세종대학교에서 주최하는 무용콩쿠르에 나갔다.그때까지 너무 자신만만했엇다.그학교의무대에서고 교수님에게 날 보여줄수있다는것에 설레였다.별다른 실수없이 잘하고 내려왔다.만족스러웠다.중등부 저학년 클래식 결과가 얼마 있지않아 벽에 붙었다. 그런데,내 이름은 어디에도 있지않았다.내가 상을 받지 못한것이다.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생각해보니,내가 지금까지 나갔던 콩쿨들은 사설콩쿨들로 비교적 경쟁이 치열하지않은 '쉬운콩쿨'이었기때문에 상을 잘받은것이고 세종대콩쿨과같이 대학주최콩쿨이나 발레협회같은 인정받는 협회콩쿨은'센콩쿨'이였던것이다.그래서인지 선화나예원예중 학생들도 있었고 기본기부터 탄탄한 정말 잘하는아이들이 많았다.'내가 저정도는 하겠지'라는 생각은 큰 오해였다. 그콩쿨을 계기로 난다시 겸손해지기 시작했고 내춤의 문제점을 알아가기 시작했다.이무렵,발레선생님이 바뀌었다.나에게 작품을 무료료 주신 선생님이 임신을하셔서 선생님이 잘아시는 '서울발레씨어터'의 수석발레리나,발레리노이시고 부부이신 두분에게 우리학원을 인수인계하셨다.지방에서 이런 대단하신 분들에게 배울수 있는 기회가 생긴것은 정말 큰 행운이였다. 나는 특히 발레리노 선생님수업을 좋아했는데,기본기도잘 잡아주시고 발레단같은 분위기로감정표현이나 작품을 표현하는 느낌을 알아갈수 있도록 잘 가르쳐주셨다.내가지금 표정이 좋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다 이선생님 덕분인것 같다.그렇게 두분의 수업방식에 적응하다보니 중학교 3학년이되었다.
5 중3이되자,나는 예고진학을 희망했고여자선생님은 선생님이나오신 덕원예고나 서울예고시험을 보자고 하셨다.중3작품은 입시작품인만큼 신중하게 골라주셨는데,심혈을 기울여 고른 작품이 바로'차이코프스키 파드되'라는 작품이였다.조지 발란신이라는20세기 안무가의 작품으로 고전적인 클래식발레가 아닌 현대적인 느낌이 가미되고 화려한 장치없이 인간의 선으로 표현하는 56초의 아주짧고빠른 작품이다.내가 잘하는 동작이 많고 빠른 작품을 좋아해서인지 힘들어도 즐겁게연습했다.하지만 대학교 콩쿠르마다 상을 못탄중2의 안좋은 기억때문에 자신감은 없었다.그런 불안한 상태에서 중앙대학교 무용콩쿠르에 나갔다.내가 못한다는 사실을 안 현실을 파악한 나로써는 예전에 나간콩쿨때보다 훨씬 떨렸다.그래도 운이좋았는지 그날은 실수없이 잘하고 무대를 내려왔다.중앙대 콩쿨역시 끝나자마자 결과가 나왔는데,나는 또 상을 못받으려니 하고 있었는데 수상자명단에 내이름이 있었다.결과는 동상.동상이였지만 그 어느때보다 기뻣다.그이후로 자신감이 조금 회복되었는지 다른 콩쿨에 나가서는 많이 떠는일이업어졋고,다른대학콩쿨에서도 동상이나 장려상같은 작은 상은 받을수있었다.하지만 중3마지막콩쿨이였던 세종대콩쿨에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상을 받지 못했다.그때난 결심했다.열심히해서 꼭 세종대에서 상을받겠다고.
6 마지막 세종대콩쿨이 끝나고 고등학교 입시 원서를 써야했다.나는 덕원예고를 쓰려고했었고 덕원을 가겠다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학비를 알아보시고 굉장히 반대하셨다.사립예고여서 학비도그렇고 레슨비고어마어마했고 아는 친척도없는 서울로 혼자 보낼수없다는 의견이셧다.그래도 내가계속 원서 쓰겠다고 억지를부리자 그럴거면 이제 무용그만하라고 말씀하셨다.억장이 무너지는겄같았다.아빠는 공립이고 집에서 가까운 충북예고 아니면 이젠 발레를 그만두고 인문계로진학해서 공부하라고 하셨다. 발레를 하기엔 부담스러운 형편을 알기에 더이상 억지를 부릴수없었다.발레를 계속하려면 내겐 선택의 여지가없었고,난결국 충북예고입시를 봤다. 여기까지가 나의 이학교에들어오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였다.학교에들어가서 고1때도 많은 일이있었지만 분량관계로 생략할까 한다.내가 정말 쓰고싶은 이야기는 고2때부터이다. 고2가되면서,다시 콩쿠르에 나가기위에 레슨선생님께 작품을 처음 받았다.우리 선생님은 내가 못하는 동작들을 늘게하는게 우선이라고 내가 취약한 느린 아다지오계열 작품들을 선정하셨다.기나긴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레이몬다 아다지오'라는 아주 고전적인 클래식 작품으로 화려한태크닉 보다는 발레의 정적인 라인을 보여주는 아주 서정적이고 예쁜 작품이였다.이작품의 느낌을 살리려면 팔동작을 아주 정확하고 예쁘게 써야 하는데,나는 다리동작은 어느정도 되는데 팔동작이 아주 안됬었다.내 팔의 모양이 팔꿈치의 뼈가 튀어나와 아래로쳐진모양처럼보이고 손목이 자꾸 꺾여서 남들보다 두배새배는 더 신경써야 똑바로뻗친 것처럼 보였다.그래서 그런지 그작품을 내가 지금껏 한작품들중에 가장 많이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소화하기에 아주 오랜시간이 걸렸다.그렇게 고2의 첫콩쿨의 막이 올랐다.첫콩쿨은 연습삼아 사설콩쿨로 나갔는데,무난하게 했는지 결과가 금상이였다.중1이후한번도 큰상을 받은적이 없어서인지 작은콩쿨이였지만 기분은 아주좋았고 오랜만에 보람을 느꼇다.그콩쿨이후 두개의 콩쿨에서 은상을 받고 드디어 내가 벼르고버르던 세종대콩쿨 참가신청서를 썼다.이콩쿨에서의 수상이 중학교때부터 거의3년이상 생각하고있던 목표였다. 힘들고 포기하고싶을때마다 이목표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참가신청서를 쓴 날부터 콩쿨전날까지 오로지 머릿속엔 내작품을 하면서 받았던 지적,음악 카운트,동작동작마다 달라지는 표정등 완전히 작품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있었다.드디어 세종대콩쿨날이 되었고,난정말 비장하게 몸을풀고 분장을 받고,의상을입고 무대에 나가기 바로전까지 지적받았던 부분들을 되새기면서 무대에 올랐다.객석에앉은선생님도 보이고 2층의 심사위원들.노란 조명이 내 머리 위에서 뿌옇게 반짝거리고 지난 일년동안 듣고 또듣고 질리도록 듣고 움직이던 레이몬다 아다지오 음악히 고요한정적을깨고 흘러나왔다.놀랍게도,한동작한동작 할때마다 지적받았던 부분들이 선생님이'그래!그거야!'라고 했을때의 몸의 느낌이였다.실수없이 음악이끝낫다.연습실에서 가장 잘햇을때의 느낌이엿다.해냈구나. 무대 바깥으로 내려오는데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이런2분을위해 지난3년이라는 시간동안 아프고 힘들고 눈물흘렸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후회없이 열심히 보낸 시간들이값어치있는 것이니 이제는 결과야 어떻든 만족하기로 결심했다.선생님이 이제껏본것중에 오늘이 가장 잘 했다고 하셔서 뿌듯했다.1시간정도 기다리니 결과가 나왔는데,정말 너무떨려서 기절할정도였다.그런데 믿을수없는 결과가 나왔다.일단 내가 동상을 받았다,장려상만이라도 받으면좋겟다고 생각한 나로써는 정말 너무나도 감사하고 만족스러워해야 했겟지만,그날 정말 못햇던 아이가 큰상을 받았다.그때 난 머리를 세게얻어맞은듯 했다.내가 아무리열심히해봐야,누군가느말안해도 아는 그런 비리로 너무도 쉽게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것을 얻는다는걸.상장을 받았지만 기쁘지가 않았다.그앤 큰상을받고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다.정말 진심으로 너무나도 짜증났다.집에가려고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엄마께 전화가 오자마자,눈물이 터져 나왔다.터미널에서 한시간넘게 혼자 정말 서럽게도 울었다. 7 그콩쿨이후로,난 거의 일주일동안 발레할 의욕을 잃었었다.열정적이 아닌 형식적인 발레를 아무생각없이하다가,내가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콩쿨이 인생의 전부는아니다.그런 일로 동요하지말자.독해지자.강해지자.그런 비리와는 상관없는 누가봐도 감동을 받을수 있는 실력을 만들자고 마음먹었다.사실 지금도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포기하고싶고 그만하고싶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가 좋아서 하는일이고 부모님의 허락도 정말 힘들게 얻어내고 그렇게 했던 발레니까.절대로 포기하지 않을것이다.무용은 열정이 없으면 절대 성공할수없다고들 한다.난내가 가장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초등학교때의 그 마음가짐으로 돌아가서,다시 열정넘치는 발레를 할것이다.지금도,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