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 여행 / 백현
시어머니가 올해로 90세가 되었다. 치매가 점점 심해지는 남편을 보살피느라 날로 쪼그라드는 어머니. 일 저지르기 좋아하는 내가 “구순을 기념해서 가족여행 가면 어떨까?” 했더니 다들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더 말짱한 지금 가야 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가자. 이왕이면 계절 좋을 때 가자고 잡은 여행을 지난 주말에 다녀왔다.
부모님을 모시고 광주에서 출발한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금요일 오후 네 시였다. 막내 시누이가 잡아 놓은 모항해나루가족호텔에 체크인하고 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 정면에 바다가 보였다. 이름은 호텔인데, 콘도처럼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시설이 다 되어있다. 부자가 함께 쓸 침대방과 사위들이 잘 방, 그리고 여자들이 몽땅 자게 될 거실로 이루어져 있다.
쉬고 있으니, 대전에서 출발한 손위 시누이 부부가 왔다. 큰 커트를 끌고도 몇 번을 왕복하며 한 달쯤 살러 온 것 같은 짐을 푼다. 과일만 해도 바나나, 참외, 수박에다가 대파도 한 단, 달걀도 한 판, 양파도 망째 나온다. 아침 한 끼는 콩나물밥을 해 먹으면 어떨까 싶어서 콩나물을 시루째 털어오신 시어머니를 딱 닮은 딸이다. 마지막으로 서울서 내려오는 막내 시누이 부부가 물김치, 배추김치에 각종 양념통을 들고 나타났다.
아침에 떡국이나 간단하게 끓여 먹고 나머지는 밖에서 사 먹고 편하게 지내자고 했는데,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시누이들을 보니 머리가 띵했다. 혹시나 해서 준비했다고 한다. 에라, 모르겠다. 자매님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묻어가는 것으로 노선을 정한다. 그나마 괜찮은 며느리가 되는 비결이다. 빠른 판단 후 마음을 내려놓는 것, 그리고 나서 흔들리지 않는 것까지.
아버지가 식당에 가서 식사할 수 있을지의 갑론을박 끝에 결국 포장 해오기로 했다. 형님을 앞세운 일부는 격포항 수산시장에 회를 뜨러 가고, 아가씨는 남아서 밥을 하고 매운탕에 쓸 육수를 준비한다. 나도 남아서 멸치 똥을 따는 대업을 완수했다. 미처 풀지 못한 시누이 가방에서는 멸치볶음을 비롯한 몇 가지 반찬이 더 나왔고, 우리는 풍족한 저녁을 먹었다.
사실 나는 대단한 시누이를 거느리고 있다. 살림이 9단인 형님은 요리도 잘한다. 아이엠에프(IMF) 때에 권고 퇴직을 했는데, 동네에 죽집이나 반찬가게를 열려고 했을 정도다. 아가씨는 한식과 중식 요리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영양교사이다. 절대 미각을 가졌단다. 천 명 넘는 학생의 급식을 만들 때도 간을 보면 뭐가 부족한지 금방 안단다. 게다가 아주 빠르게 척척 차려내기까지 한다.
이런 시누이가 좋기만 했을까? 어디서든 내 몫을 못 해본 적이 없는데, 결혼해서 맞은 명절이나 시댁 모임에서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힘들었다. 눈치 봐서 설거지하고, 요리하는 사람 옆에서 잔심부름이라도 해야 했다. 하나 있는 며느리가 부엌을 딱 휘어잡고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할 수 있으면 피차가 좋으련만. 못하는 나도 미안하고, 그렇다고 나를 함부로 부리지 못하는 그녀들도 답답했겠지.
웬만한 노력으로는 역할을 확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뭐, 부엌을 막 장악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가족이니 서로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지내면 될 일이었다. 어머니랑 시누이 셋이 부엌에서 얘기하며 음식을 만들 때 나는 조카들을 데리고 방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거나 유명 빵집에 데려갔다. 사위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 하면서 마늘을 까기도 했다. 상에 숟가락 놓고, 접시에 반찬 담아 내고, 식후에 설거지나 뒷정리에 힘을 보태면서 버텨온 세월이었다.
짐작했겠지만, 우린 2박3일 여행하는 동안 딱 한 끼만을 사 먹을 수 있었다. 살러 왔냐고 놀렸던 식자재를 꽤 먹어 치우기도 했지만, 워낙 많았기에 체크아웃할 때도 여러 번 날라야 했다. 막내가 가져온 김치 남은 것까지 가져가느라 형님의 짐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이만큼 가져오기를 얼마나 잘했냐며, 그 덕에 잘 먹었다고, 제일 좋아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모처럼 자기 시간을 가졌다. 거실 앞의 베란다에서 벽에 등을 대고 바다를 보며 햇볕을 쬐며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이 자리에 없는 큰 시누이를 생각하셨을 것이다. 20여 년 전에 쉰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큰딸. 그리고 중학생 때 이름 모를 열병으로 져 버린 막내아들을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지.
광주에 도착해서 가는 길에 칼국수 포장을 했다. 부모님 댁에 가서 여행 짐을 풀어드리고 점심으로 같이 먹었다. 약도 챙겨드리고 쉬시라고 말씀드리고 나오는데, 문 앞까지 따라온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네가 욕봤다.”
첫댓글 구순 여행을 기획하신 선생님 덕분에 시댁 식구들은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지셨을 것 같습니다. 어머님이 얼마나 행복하셨을까요? 큰일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욕 보셨네요.
열심히 먹어주는 입도 있어야지요.
맞아요. 맛있게 먹어주는 입이 꼭.
성심당 튀김 소보루 선물 받아서 먹었어요. 진짜 맛있더라구요.
시댁 식구들과 2박 3일 여행에 입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척척 나왔네요. 시누이들도 대단하지만, 선생님 추진력이 즐거운 여행을 마무리 했군요.
시누이들이 보통 손이 아니네요. 그래도 성격 좋은 며느리 덕에 어머니가 흐뭇하셨겠어요.
내내 재밌게 읽다, 끝에 어머니 말씀에
코가 시큰합니다.
대단한 시누이들 꼬리내리게 한 선생님이 더 대단한 분입니다. 구순 여행, 큰일 하셨습니다.
어느집이나 추진하는 사람이 있이야 일이 되지요.
그런점에서 선생님 칭찬합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큰 효도하셨군요.
적당히 치고 빠질 줄 아는 선생님, 저랑 닮았네요. 하하하!
추진력은 선생님이 월등하십니다. 저는 시댁에서는 잘난 척 안해요. 뭐 시킬까봐요. 히히히.
우리 장모님도 여행 가면 식당 차릴듯이 싸 가셔요. 맛있게 먹는 건 좋지만, 고생하시니 줄이라고 해도 안 되시네요.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