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윤은주 지음 『살아가면서 꼭 읽어야 할 서양고전』
고전읽기
누군가 그랬다. 누군가 소개하는 고전 이야기를 읽고 그 고전을 안다고 이야기 하지 말라! 맞다. 더욱이 저자가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갖다 붙이는 고전의 명 대사들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원래 의미가 왜곡되고, 협소해 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그렇다. 그 것은 남자 아이가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인 성적 감정을 갖고 아버지를 적대시한다는 정신과 개념이다. 이 개념으로 원전에 선입견을 가지면 안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3부작을 읽어 보면 인간의 숭고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오이디푸스의 몸에서 점 하나 빼서 자신의 이론에 첨가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고전을 소개하는 책들을 안 좋아한다. 고전을 소개할 바에야 좋은 고전 번역서를 하나 더 내지하는 악담도 덧 붙인다. 그럼에도 안내서를 손에 잡는 것은 나의 빈약한 고전 독서력 때문일 터. 결국 거인의 무등을 타기 전 징검다리로 개웃물은 건너 가야지 하면서 말이다.
15편의 고전
이 책은 총 15편의 고전, 혹은 명저를 소개하고 있다. 이를 ‘삶, 정치, 앎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누었다. ‘삶에 대한 가르침’으로는 플라톤의 향연,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윤리학,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등 총 5편이다.
‘정치에 대한 가르침에는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1844 경제학-철학수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 미셀푸코의 감시와 처벌등 5편이다.
’앎에 대한 가르침‘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 파울루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등 5편이다.
이 고전 중 <사랑의 기술>을 20대 초반에 읽었었다. 당시 연애 경험 전무, 관심 전무인 때라, 뭐야~ 하고 넘어간 기억 밖에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좀 충격적으로 읽었다. 바로 내가 아이히만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주입식교육의 수혜자인 나로 봐서는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 3부작으로 집중해서 읽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의 설명도 잘 이해되었다. 의미가 잘 와 닿았다. <자유론>은 철학모임에서 발제하느라 읽었다. 아버지 말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한 밀의 어린 시절이 인상 깊었었다. 이 책을 읽고 공리주의란 것도 결국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설득과 동의를 거쳐 이뤄내는 가치란 생각이 들었다.
삶, 정치, 앎에 대한 고전
1부는 우리의 첫사랑을 이야기한다. 그 사랑이 주는 것이냐 받는 것이냐를 묻는다. 사랑이 결핍인지, 순간인지, 그 놈의 정인지를 따지다 보면 헷갈린다. 그 때 고전을 꺼내 든다. 에로스의 탄생 비화를 이야기하고, 에로스에 대한 철학자들의 향연을 소개한다. 그리고 권한다. '살아 숨 쉬는 매 분 매 초마다 사랑을 갈구하는 당신이라면 플라톤의 향연을 읽어 보시길.
2부에서는 ‘대중, 시민, 군중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담론이 바탕을 깔고 있다. 결국 두가지 시선으로 갈린다. 사회계약론의 두 주자인 홉스와 루소, 제자백가의 순자와 맹자. 전자는 사람의 이기성에 주목을 했고, 후자는 선함을 강조했다. 그들이 보는 현실은 하나다. 단지 어디를 주목하느냐의 차이일 뿐, 또한 그들의 지향은 같다. 어떻게 하면 이 현실을 개선해 나갈 것인가. 그러나 시선이 다르니 처방도 다르다. 이래서 우리는 싸운다. 그러나 아시길. 이들은 대중을 지배하는 지배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더 촛점을 뒀다는 것을, 홉스와 순자는 대중을 통제하는 원칙을 지배세력에게도 그대로 적용하고자 하던 것이었고, 루소와 맹자는 지배세력의 선정을 거듭 촉구하면서 그래도 안 될시에는 타도하자고 했다.
역사를 보면 대중의 비굴성과 혁명성이 공존한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봐도 그렇다. 20년 주기로 터져 나온 항거가 있다. 4.19혁명, 80년 5월과 87년 6월항쟁, 2000년대 촛불집회가 그렇다. 이러한 대중들의 역사성 때문에 고전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통치술로서 대중을 다루는 것이 홉스의 리바이어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대중의 비굴성에 촛점을 맞춘 저서라 본다. 칼 막스와 소로우의 저서는 대중과 시민의 혁명성에 기반한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비굴성과 혁명성의 현대적 변주를 보여 준다. 저자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우선 권했다. 나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먼저라 생각한다.
3부는 앎에 대한 가르침인데, 주제가 비교적 넓게 퍼져 있는 느낌이 든다. 안티고네를 통해 법과 정의, 현실과 양심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결코 쉽지 않는 판단문제다.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야 양심과 정의가 우선이겠지만 총과 칼이 있는 상태에서 개별적 존재로서 내가 어떻게 처신할 수 있겠는가? 항상 고민이 되는 문제다. 밀이 이야기 하는 토론의 자세는 배워둘 만하다. 칸트의 도덕론과 공리주의자들의 도덕론이 항상 맞대결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일상의 영역에서는 충돌할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인 선에서 내 양심에 불쾌함이 없다면 옳은 행동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최대 공약수를 찾아가면 될 일이다. 그람시의 지식인론은 80년대 청춘들이 읽었던 한완상의 지식인론으로 정리된 느낌이다. 즉 대자적 지식인과 즉자적 지식인의 개념. 그것으로 끝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건방진가? 80년대 청춘들은 비록 지적 무장은 약했을지 모르지만 실천적으로 살려하는 노력은 했다고 본다. 페디고지는 읽고 쓰고 토론하기의 공부 방법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알게 해 주었다.
대중의 반역
총 15편의 글 중에 가장 가슴에 박힌 것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이다. 이순신이 위대한 것은 그와 죽음을 같이 했던 수 많은 병사와 백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대중을 집중 조명하지 않았다. 영웅을 위대하게 만드는 소품으로 취급받았을 뿐이다. 20세기 들어 대중은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다. 왜 그럴까?『대중의 반역』은 바로 우리가 사는 산업사회, 정보화사회의 대중의 모습을 분석하고 있다. 책은 우리가 사는 우리의 모습을 민낯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군중의 무리에 스며 들어 평균을 살아 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들. 남의 눈치를 보고 정답보다 남의 많이 쓴 답을 베껴 적어낸다. 그리고 평균 점수를 보고 내 점수에 안심하고 위로받거나 불편해 한다. 그럼에도 내가 원전을 읽는다면 희망을 얻기를 소망한다. 인생은 순간 순간 선택의 삶이고 거기에 우리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받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의 반역은 자멸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의 역사는 소수의 손에 맡기고 그들의 운명에 우리의 운명을 내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역설로 꽉 차 있기를 소망한다.
책익는 마을 원진호
첫댓글 저도 요즘 새삼 고전의 소중함,고마움
느끼고 있답니다. 그 가운데 서양고전
이라...좋은 책 잘 읽어보겠습니다^^
살아계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