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일성의 풍요로움 속에서
같은 것을 사유하는 자들은,
고단하고 먼 길을 걸어간다.
그것은 언제나 더욱 단순하고 소박한 것에 이르는 길이요,
근원적 장소의 하나로 포개진 것에 이르는 길이다.
- M. 하이데거
필자는 하이데거의 《언어로의 도상에서>에 실려 있는 <언어>를 해명하는 가운데 그의 언어론의 핵심윤곽을 소묘하려고 한다. 하이데거의 이 진귀한 글은 우리를 언어의 본질장소로 데려가 언어의 말함에 귀기울이도록 조용히 안내하는 초대장이다. 그러나 언어의 본질장소로 초대하는 그의 이 글은 비의로 가득 차 있어 그 진맥을 따라가기가 매우 어렵다. 이에 필자는 트라클의 시를 해명하는 하이데거의 사유에 집중하되, 그의 글을 사유해야 할 사태에 따라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때로는 비판적으로 때로는 토착적으로 그의 글을 창조적으로 변용하여 수용하는 가운데, 비밀로 가득 차 있는 언어의 본질장소에 대한 그의 해명을 독자로 하여금 해독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차원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이런 논의의 과정 속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소박한 언어가 어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천지만물의 오묘한 존재관계 속에서, 즉 존재의 샘에서 존재는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 샘솟아나 소리 없이 울려 퍼진다. 인간은 이러한 존재의 말없는 소리를 귀 기울여 받아 그것에 대꾸하면서 그것을 소리 나는 날말로 데려온다. 이렇듯 존재와 인간의 해석학적 대화를 통해서 존재는 언어로 생각하고 인간은 이러한 언어 속에 체류한다. 그러기에 언어는 존재의 집이요. 인간이 체류하는 본질장소이자 거처이다. 인간은 이러한 거처 안에 머물면서 이 거처를 돌보고 수호하는 파수꾼이다.인간은 말한다. 인간은 자나 깨나 어떤 식으로든 늘 말한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언어를 벗어나서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다는 생생한 현실이 잘 보여준다.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듯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표현이나 의사소통의 한갓된 도구가 아니요, 또한 말함은 인간이 행하는 여러 가지 활동 중 발성기관과 청각기관에 의존하는 하나의 활동, 즉 내면적 정서의 율동을 밖으로 표명하여 발언하는 순전한 행위만도 아니다. 말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매일매일 언어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인간이 그 안에 이미 체류하고 거주하는 삶의 터전이요, 존재의 바탕이다. 언어가 인간존재의 바탕 (Grund) 1)을 이루는 것이라면, 인간은 결코 언어의 절대적 주체, 즉 주관자일 수 없고, 오 히려 언어가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근본지반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일찍이 휴머니즘 서간> (Brief ilber den Humanismus)에서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2)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은,
----------------------------------------------------------------------
1) M. 하이데거, <철학에 기여> <전집 65권), 1989, 510쪽 참조
2) M. 하이데거, 휴머니즘 시간>, <이정표 2>, 이선일 역, 2005, 한길사, 124
쪽 참조<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숲길》, 신상희 역, 2008, 나남, 454쪽 이하 참조
언어는 존재가 그 안으로 도래하여 머무르는 장소요, 그 안에서 존재가 개시되는 처소이자 지평이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존재는 우리의 눈앞에 현존하는 어떤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 전체의 존재, 즉 하늘과 땅, 인간들과 신들을 포함하는 일체만물의 존재를 가리킨다. 이러한 천지만물의 존재는 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동하면서 하나로 어우러진 채 조화롭고 친밀하게 존재한다. 각각의 사물들은 저마다의 고유성을 유지한 채 친밀하게 존재하면서, 조화로운 세계에 귀속한 채 그때그때마다 저 나름의 방식으로 하늘과 땅, 신적인 것들과 인간적인 것들을 자기 안에 모아들이면서 세계를 품고 드러내고 있다. 세계는 사물들에게 각각의 고유성을 허락해 주고, 사물들은 세계를 드러내면서, 무한한 존재관계의 한가운데에서 그때그때 현성한다. 이러한 천지만물의 오묘한 존재관계 속에서 시원적인 생명의 노래가 태곳적 이래로 고요하고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렇게 고요하고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생명의 노래가 곧 존재의 말없는 소리 (die lautlose Stimme des Seins) 요. 존재의 언어이다. 따라서 인간이 말하기 이전에, 이러한 태곳적 언어가 이미 우리에게 말 걸어오면서 말하고 있다. 언어가 말한다. "본래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그때마다 언어에 상응하여 응답하는 한에서만 비로소 말한다. 인간은 이러한 언어의 시원적 울림을 통해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이요, 존재는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의 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존재는 자신의 진리를 개시하고 수호하는 인간을 언어 속에 정주하고 머무르도록 허락해 줌으로써, 인간을 그의 본질 안에서 지켜주고 보살펴준다.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
-----------------------------------------------------------------------
3) 여기서 '무한한'이라는 뜻은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아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4) M. 하이데거, <헤벨 - 가까운 집안친구>,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 전집 13권),148쪽 참조
로 언어 속에 숙명적으로 체류하기에,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인간본질의 거처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정적의 은은한 울림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다. (..…) 인간의 본질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고유함 속으로 데려와지며, 이러한 그의 본질은 언어의 본질인 정적의 은은한 울림에 고유하게 내맡겨진 채 머무른다. (…) 오로지 인간이 정적의 온은한 울림에 속해 있는 한에서만 죽을 자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소리로 울려 퍼지는 말함을 행할 수 있다. "6)이런 점에서 인간의 말함은 천지만물이 노래하는 생명(존재)의 노래와 무관하게 홀로 자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죽을 자들로서의 인간의 말함은 천지만물의 존재가 우리에게 말없이 건네주는 생명의 소리와의 친밀한 관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의.말함은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의 존재의 언어가 말하는 저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말함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만 본래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근본통찰을 담고 있는 하이데거의 언어론은 언어를 학문적으로 대상화하여 단순히 인간의 역사적 문화적 정신적 사회적 차원 안에서 고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바탕을 이루는 언어의 본질 장소로서의 존재의 시원적 차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 차원으로부터 존재의 언어가 우리에게 말 건네는 시원적인 소리를 귀 기울여 받아내려는 숙고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존재의 시원적 차원은 존재가 스스로 길을 내면서 만물을 움직이는 도(道)의 차원이고, 그의 사유는 이러한 도의 움직임에 청종하면서 뒤따라가는 도 닦는 사유 (Weg-bahmendes Denken) 이기에, 7)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문 학자들조차 그의 언어론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근본까닭은 바로 여기에 - 즉 사유해야 할 사태
----------------------------------------------------------------------
5) M. 하이데거, <휴머니즘 서간>, <이정표 2>, 178쪽 참조
6) M. 하이데거,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전집 12권), 27쪽 이하 참조
7) M. 하이데거, <언어의 본질>, <언어로의 도상에서>, 186쪽 이하 참조
자체의 높고 깊고 넓은 심연에 놓여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언어의 본질장소로 우리를 데려가리고 시도하는 하이데거의 글 하나를 범례로 삼아 그의 언어론의 핵심윤곽을 소묘하려고 한다. 그 글은 <언어로의 도상에서>에 실려 있는 <언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은 게오르그 트라클 (1887-1914) 의 시 <어느 겨울저녁>을 해명한 것이다.
우리는 트라클의 시를 해명하기 이전에, 먼저 묻는다. 왜 하이데거는 언어의 본질장소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시도함에 있어 언제나 횔덜린, 릴케, 트라클, 게오르게 등과 같은 시인들의 시를 전면에 내세워 다루는 것일까? 그의 통찰에 따르면, 시인은 인간들과 신들의 사이에 있는 반신의 존재로서, 신들의 언어와 눈짓을 찰지하여 그것을 민중에게 전해줌으로써 한 민족의 역사적 삶의 세계를 열어주는 천부적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8)
시인은 성스러운 존재의 빛이 일체의 것 안에서 찬란히 빛나기 시작하는 이러한 사이영역을 열어놓고 이 영역 안에 상주하는 천지만물의 성스러운 존재를 시짓는 말로 수립한다. 시인이 시를 짓는다는 것은 이렇듯 존재를 개시하고 존재를 수립하는 행위요, 그것은 일찍이 자연 (pos)의 신성한 모습 속에 스스로를 감추면서 머무르고 있던 신들의 눈짓과 존재의 비밀을 시어로 담아내는 것이다. 9)
시인은 세상의 근원 가까이로 귀향하는 가운데 이러한 비밀을 시로 짓되, 그것의 비밀을 벗겨 해체하는 방식으로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밀을 비밀로서 수호하는 가운데 시를 짓
-----------------------------------------------------------------
8) M. 하이데거, 마치 축제일처럼 ..…>, <횔덜린 시의 해명>, 신상희 역, 2009,아카넷, 97쪽 참조:
"하지만 그대 시인들이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 신의 뇌우 아래, 맨머리로 서서, / 아버지의 불빛을 몸소 제 손으로 잡아, 그 천상의 선물을 노래로 감싸 / 민족에게 건네주는 것이리라.
9) 신상희, <시짓는 사유: 사유하는 시>,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40집, 2009,210쪽 참조.
는다. 100 그래서 시인의 시짓는 말함은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신들과 성스러운 자연 (존재)의 도래를 조용히 부르기 위해 천부적으로 사용되는 호명함이다. 여기서 천부적으로 사용되는 호명함이란, 사물과 세계를 부르고 호명하는 시인의 시짓는 말함이 시인 자신의 자의적 의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명되어야 할 것 자체, 다시 말해 시로 지어져야 할 것 자체, 즉 존재의 성스러움이 그 자신의 본질로부터 시인의 순결한 영혼과 그의 입을 통해 말해지도록 명하고 있는 것이요, 이런 방식으로 성스러운 것의 존재가 시인에게 말을 선사하면서 그 자신이 시인의 시짓는 말속으로 도래해 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를 개시하고 수립하는 시인의 시짓는 말은 인간의 모든 언어 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말해진 것이요, 그 안에는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언어의 본질이 비밀스럽게 현성하고 있는 것이다. 11)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하이데거는 순수하게 말해진 것으로서의 시 안에서 언어가 말하는 언어의 본질장소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언어의 말함에 의해 시인의 본질이 근원적으로 결속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몇몇 시들을 선택하여 우리를 이러한 언어의 본질장소로 데려 가려고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선택한 트라클의 시가 우리에게 이러한 결속의 적합성을 보증해 주면서 언어의 근원적 경험을 열어주고 있는지, 이제 우리는 그 시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기로 하자.
------------------------------------------------------------------------
10) M. 하이데거, <귀향>, <횔덜린 시의 해명, 45쪽 참조,
11) 이런 점에서 언어의 근원은 '시짓는 말'(Dichtendes Wort) 에 존립한다 (M. 하이데거, 《회상》, 신상희 역, 2010, 나남, (33) 참조) : '따라서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 <횔덜린과 시의 본질>, <횔덜린 시의 해명》, 81쪽 참조).
어느 겨울저녁
창가에 눈이 내리고
저녁 종소리 오래 올려 퍼지면,
많은 이들에게 식탁이 차려져 있고
잡은 잘 정리되어 있다.
더러 방랑길에 오른 이들은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문가로 다가온다.
대지의 차가운 수액을 머금은
은총의 나무는 금빛으로 빛난다.
길손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다.
아픔으로 인해 문지방은 단단히 굳어졌다.
그때 순수한 밝음 속에서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가 빛난다.
이 시는 세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연은 창가에 눈이 내리고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인간 거주지의 바깥 풍경과, 모든 것이 잘 정리되어 있고 많은 이들을 위해 식탁이 차려져 있는 인간 거주지의 집안 풍경 (일상 세계) 을 시어로 담아내면서, 사물들이 세계를 드러내는 사물들로서 다가오도록 부르고 있다. 둘째 연은 첫째 연과는 대조적으로 인간 거주지의 바깥(낯선 타향)에서 집 없이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방랑하는 몇몇 길손의 인생행로를 시어로 담아내면서, 땅과 하늘, 죽을 자들과 신적인 것들을 자기 안에 모으는 은총의 나무를 호명하고 있다. 이러한 호명을 통해서 시인은 사물들을 드러내 주는 세계(사방 세계)가 다가오도록 부르고 있다. 셋째 연은 길손(죽을 자) 들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 (낯선 타향) 밖으로부터 빵과 포도주(사물)가 성스럽게 빛나는 집안(성스러운 고향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면서, 사물과 세계를 위한 친밀한 장소(사이-나눔)가 다가오도록 부르고 있다.
하이데거는 순수하게 시적으로 말해진 이 시 안에서 언어의 말함을 찾으려 하고, 더 나아가 언어의 본질장소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시도한다. 그렇다면 이 시 안에서 언어는 어떻게 말하는가? 첫째 연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강가에 눈이 내리고, 저녁 종소리 요
래 울려 퍼지면.….” 첫째 연, 즉 시인의 언어는 날이 저물어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에 소리 없이 창가에 떨어지는 눈을 호명하면서 말하고 있다. 내리는 눈과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호명하는 시인의 말함은 “말 속으로 부르고 있다". 12)
시인의 호명하는 말함은 고즈넉한 겨울저녁에 정적의 은은한 울림이 울려 퍼지는 곳으로, 다시 말해 존재의 언어가 현성하는 본질장소로 사물들을 데려오면서 부르고 있다.
사물들을 호명하는 시인의 부름은 그 안에서 일체만물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현성하는 존재의 열린 장 가까이로 사물들이 다가오도록 부른다. 시인의 말함, 즉 시인의 호명하는 부름은 이전에 부름받지 않아 부재하던 사물들의 현존을 이러한 존재의 가까움 속으로 데려와 초 대하는 식으로 부르고 있다. 호명하는 부름은 초대함이요, 초대함은 사물들이 존재의 가까움에 도래하여 다다르도록 명하는 것이다.
“명함은 사물들을 초대하여, 그것들이 사물들로서 인간에게 다가와 관계하도록 한다. 눈 내림은 인간을 밤의 어둠 속으로 저물어가는 하늘 아래로 데려온다. 저녁 종소리의 울림은 그들을 죽을 자들로서 신적인 것 앞으로 데려온다. "13)
눈이 내리고 저녁 종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곧,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존재의 소리 (Stirime des
-----------------------------------------------------------------------
12) M. 하이데거,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18쪽 참조 여기서의 '말' (Wirt)은 단순히 소리로 발화되는 인간의 말(das menschliche Wort), 즉 낱말들(Wörter)이 아니라, 참말(Sage)로서의 말, 즉 '존재의 샘' (Borm des Seins) 으로서의 말을 가리킨다.
13) 같은 책, 19쪽 참조.
Seins)이다. 이러한 존재의 소리로서의 소박한 언어가 시 안에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눈내림과 저녁 종소리의 울림은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 그때마다 현성하는 존재의 언어이다. 시인은 이렇게 정적의 울림으로서 은은히 울려 퍼지는 존재의 언어에 조용히 귀 기울임으로써, 이렇게 울려 퍼지는 언어의 말함을 시어 속으로 담아 놓는다. 따라서 시인의 시짓는 말함은 이러한 존재의 언어의 말함에 상응하는 하나의 순수한 응답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시짓는 말함이야말로 인간의 비시적인 말함에 비해 본래적인 말함이고 근원적인 말함이다. 14)
시인에 의해 호명된 사물들은 이렇게 부름을 받은 채 땅과 하늘, 죽을 자들과 신적인 것들을 자신에게로 모아들인다. “이 넷은 근원적으로 하나로 어우러져 화동하는 것이다. 사물들은 이 넷의 사방(das Geviert) 을 자기 곁에 머물게 한다. 이렇게 모아들이면서 머물게 함이 사물들의 사물화 (das Dingen) 이다. 우리는 사물들의 사물화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져 머무르는, 하늘과 땅, 죽을 자들과 신적인 것들의 사방을 세계라고 명명한다. "15)
시인의 호명하는 부름 속에서 호명된 사물들은 사물화하면서 세계를 펼쳐보이는데, 이러한 세계 안에 사물들은 머무르면서 그때그때 저 나름의 방식으로 사방을 모으면서 세계를 드러내는 사물들로 존재한다.
둘째 연은 세인들이 거처하는 집을 떠나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방랑하는 몇몇 죽을 자들을 부르고 호명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죽을 자들이 걸어가는 어두운 오솔길은 생사의 경계를 걸어가면서 죽음을 죽음으로서 참답게 떠맡으려는, 죽음을 향한 비장한 인생행로이다. 그들의 인생행로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인들이 거처하는 낯선 타향을 존재의 진리가 성스럽게 현성하는 친밀한 고향으
--------------------------------------------------------------------------
14) M. 하이데거, <언어와 고향>, <사유의 경험으로부터), 180쪽 참조 "(시인의) 시짓는 말함은 처음으로 사방의 모습을 빛남 속으로 불러내어 데려온다."
15) M. 하이데거,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19쪽 참조
로 인도하길 원한다. 그들은 이윽고 문가에 이른다. 문가는 낯선 타향과 친밀한 고향의 경계이자, 이 둘을 서로 이어주는 존재의 관문이다.
죽을 자들이 이러한 존재의 관문에 이르자, 그 앞에는 세계를 모으면서 밝혀주는 은총의 나무가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둘째 연의 셋째 행과 넷째 행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를 고유하게 부르고 있다. 둘째 연의 시구들, 즉 시인의 언어는 이렇게 방랑자, 오솔길, 문가, 은총의 나무를 '호명하는' 가운데, 사물들을 세계로 도래하도록 '부르고', 또한 세계를 사물들의 현존 속으로 도래하도록 '초대하면서' 말하고 있다.
시인이 호명하는 은총의 나무는 견실하게 땅속에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의 축복을 받고 있다. 땅의 차가운 수액과 하늘의 밝은 빛을 머금은 은총의 나무는 죽을 자들에게 소중한 결실을 선사해 주면서 금빛으로 빛난다. 금빛 광채는 자기 주위에 현존하는 모든 것을 환히 비추어 드러내 보여주면서도 일체의 것을 자기 안에 비호하여 감싸준다. 이렇게 금빛으로 빛나는 은총의 나무는 땅과 하늘, 죽을 자들과 신적인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진 사방세계를 자기 안으로 모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환히 빛나는 세계의 광채 안에서 사물들은 비로소 사물들 자신으로 존재하게 된다. 사물과 세계의 이러한 긴밀한 관련에 대해 하이데거는 '사물들은 세계를 낳고 (gebärden), 세계는 사물들을 베풀어 준다(gönnen)'고 말한다. 16)
사물들이 세계를 낳는다는 것은, 사물들이 세계를 밖으로 내어놓되, 그 세계를 사물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여 떼어 놓는 방식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자기 안에 간직하고 품어주는 방식으로 세계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세계가 사물들을 베풀어 준다는 것은, 사물들이 사물들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세계가 자신의 빛의 증여를 아낌없이 허락해 준다는 것을 말한다.
사물들과 세계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요, 하나가 다른 하
----------------------------------------------------------------
16) 같은 책, 21쪽 참조.
나를 일방적으로 포함하거나 병합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관통하면서 하나로 어우러져 친밀하게 존재하는 한가운데를 통과한다. 이 '한가운데'는 사물과 세계가 공속하는 친밀성의 설계으로서, 그곳은 존재의 진리가 생기로서 고유하게 생기하는 가까움의 영역이요, 일체만물이 서로 화동하여 조화롭고 긴밀하게 관계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의 중심, 즉 사이-나눔 (Unter Schied)의 친밀한 영역이다. 세계와 사물의 친밀성은 이 둘이 순수하게 스스로 나누고 또 나뉘어져 머무르는 사이의 나눔의 영역에서만 현성한다. 사이-나눔이라는
말은 여기서 눈앞에 현존하는 대상들 사이의 구별이나 구분, 혹은 차이를 가리키지 않는다. 사이-나눔은 오로지 '유일무이한 하나'로서만 존재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17)
사이-나눔은 단적으로 존재의 유일무이성을 가리키는 근원어 (Urwort) 이다. 사이-나눔의 사이쪽은 동일성의 본질이 유래하는 친밀한 존재의 근원이요, 사이-나눔의 나눔 영역은 일체만물의 차이의 본질이 유래하는 존재의 터전이다. 18)
이들은 서로 떼어내어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자체로부터 시원적으로 공속하는 불일불이적(不一不二的)인 존재 자체의 근원적 장소이다.
시이-나눔은 그 자체로부터 이러한 존재 자체의 근원적 장소로서의 한가운데를 서로 갈라놓는데, "이러한 한가운데를 향해서 그리고 이 한가운데를 관
-----------------------------------------------------------------
17) 같은 책, 22쪽 참조.
18 신상희, <하이데거의 사이-나눔>, <시간과 존재의 빛, 한길사, 2000 참조 사이-나눔'이란 낱말 안에는 일찍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참다운 인식의 차원으로 강조한 '저녁의 인식' (Abenderkenntnis)과 '아침의 인식' (Margense kenutnis)이 비밀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여기서 저녁의 인식이란 사물들을 각각의 상이한
차이의 상(象) 속에서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지칭하는데, 이러한 저녁의 인식만으로는 참다운 인식이 완성되지 않는다. 저녁의 인식은 아침의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침의 인식이란 피조물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상들을 걷어내고 그 차이들을 여읜 채 신 자신인 하나 가운데서, 즉 존재의 동일성 속에서 사물들을 직관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신과 피조물을 하나 가운데서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사람을 에크하르트는 '고귀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통하면서 세계와 사물들은 서로 화동하여) 하나로 어우러진다. "19)
사이-나눔은 세계와 사물의 차이를 서로에게 실어 나르면서 화합한다.사이-나눔이라는 말 안에 기입되어 있는 사잇줄(-)은 이러한 화합의 관계, 화동의 관계를 함축한다. 이런 점에서 사이 - 나눔은 천지만물의 근저에서 동이화(同異和)의 고요한 울림으로서 생기하는 존재 그 자체이다.
"사이-나눔은 세계를 그것의 세계화 속으로 내어주고, 사물들을 그것들의 사물화 속으로 내어준다. 이렇게 세계와 사물들을 내어주면서 사이- 나눔은 그것들을 서로에게 실어 나른다. (…) 사이-나눔은 그 자체가 이미 무한한 관계의] 한가운데로서, 세계와 사물들을 처음으로 그것들의 본질 속으로, 즉 그것들의 서로 (화동하는) 향함 (Zucinander) 속으로 중재하되, 이러한 서로 향함의 친밀한 통일성을 사이-나눔은 [서로에게) 내어준다. "20)
세계와 사물을 위한 친밀한 공속의 근원적 장소로서의 사이-나눔은 사물들로 하여금 세계를 품고 잉태하고 낳아 드러내도록 사물들을 고유하게 생기하며, 세계로 하여금 사물들이 사물화하여 사물들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세계를 고유하게 생기한다. 이렇게 세계와 사물을 각각의 고유함 속으로 보내주면서 세계와 사물의 서로 나눔과 서로 향함 (das Aus- und Zueinander) 을 처음으로 열어놓는 한에서, 사이-나눔은 '세계와 사물을 위한 근원적 차원'이다. 21)
트라클 시의 언어가 사물과 세계를 부르고, 호명하고, 초대하고,명하면서 말하는 가운데, '본래적으로 명해지고 있는 것' (das eigentlich Geheigene), 다시 말해 본래적으로 초대되어 말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사물과 세계의 친밀한 장소로서의 사이-나눔 자체이다. 22)
물론 그의 시구는 사이 나눔을 고유하게 사유하고 있지도 않고 그것의 본질을 호
----------------------------------------------------------------------
19) M. 하이데거,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22쪽 참조.
20) 같은 곳 참조.
21) 같은 책, 23쪽 참조.
22) 같은 곳 참조
명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구는 소리 없이 사이-나눔을 부르고 있다. 시의 첫째 연에서는 세계를 품고 드러내면서 사물화하는 사물들이 다가오도록 호명되고 있고, 시의 둘째 연에서는 사물들을 베풀어 주면서 세계화하는 세계가 다가오도록 명해지고 있다면, 시의 셋째 연에서는 사물과 세계를 위한 근원적 차원으로서의 사이-나눔이 다가오도록 초대되고 있다. 앞에서 지적하였듯, 시인의 시짓는 말함이 존재의 언어의 말함에 귀 기울여 대꾸하는 하나의 순수한 응답이라면, 사물과 세계의 근원적 차원으로서의 사이-나눔을 초대하고 명하는 시의 셋째 연의 시짓는 말함은 천지만물의 근저에서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으로서 시원적으로 말하는 사이 - 나눔으로서의 존재의 성스러운 부름(명령)에 상응하여 이루어진 순수한 응답일 것이다. 셋째 연은 길손을 정적 속으로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길손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선다.
아픔으로 인해 문지방은 단단히 굳어졌다.
그때 순수한 밝음 속에서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가 빛난다.
하이데거는 이 셋째 연의 둘째 행을 해석하면서, 문지방은 문의 안과 밖이 서로 통과하고 지나가는 문 전체의 한가운데 (사이)를 지탱해주고 견뎌내는 주춧돌이고, 아픔은 이러한 사이의 안과 밖을 서로 찢으면서도 이러한 찢음의 나눔 속에서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모아들여 이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해석에 따르면, 아픔은 사이-나눔의 찢음을 이어주는 것으로서 문지방이며, 이러한 아픔이 사이-나눔 자체라는 것이다. 23)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 시구의 '문지방'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정당하다고 생각되나, '아픔'에 대한 그의
------------------------------------------------------------------
2) 같은 책, 24쪽 참조.
해석은 너무 과도하고 지나친 것이라고 여겨지며, 더구나 문지방을 석화시키는 것이 아픔인 이상, '아픔이 곧 문지방24) 이라는 그의 해석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필자는 방랑자의 아픔과 문지방은 마땅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는 이 시구를 해석하면서, 트라클이 표현주의 시인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언어의 본질장소를 해명함에 있어서 그는 언어의 표현적 역할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여 멀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의도는 이해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클의 시를 해명함에 있어서, 언어의 표현적 역할을 전혀 도외시할 수만도 없을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 시구에서의 '아픔'은 낯선 타향에서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방랑하던 길손이 그의 인생행로에서 겪어야 했던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의 무게와 마음의 상처를 가리킨다. 어두운 오솔길을 따라 생사의 경계를 걷는 것 자체가 죽을 자들인 인간에게는 회피할 수 없는 고통이요 아픔일 것이다. 그는 은총의 나무가 증여해 주는 존재의 빛으로 인해 이제 비로소 삶의 고뇌로부터 벗어나 빵과 포도주가 성스럽게 빛나는 고향 안으로 들어선다. 낯선 타향에서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성스러운 고향을 찾아 방랑하고 배회하였을까? 문지방은 타향과 고향을 나누는 생사의 보이지 않는 경계이자 이 둘을 이어 주면서 하나로 모으는 존재의 한가운데이다. 문지방이 사이-나눔이다. 길손이 겪었던 말할 수 없는 지고한 아픔으로 인해 그가 성스러운 집안으로 초대될 때, 안과 밖의 사이를 지탱해 주며 이어주는 문지방은 더욱 단단히 굳어진다. 그때 세상을 순수하게 밝히는 존재의 성스러움 속에서 그에게는 빵과 포도주, 즉 성찬이 증여된다. 25) 필자에게는 이
------------------------------------------------
24) 같은 곳 참조
25) 횔덜린은 그의 비가 <빵과 포도주>의 제 8연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빵은 대지의 열매이지만 빛의 축복을 받고 / 포도주의 기쁨은 천둥치는 신으로부터 온다. / 하여 우리는 거기에서 천상의 것들을 사유하노라.'
러한 해석이 사이-나눔으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중략)
우리는 이제 셋째 연의 마지막 두 행의 해석으로 넘어간다. “그때 순수한 밝음 속에서 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가 빛난다. "낯선 타향의 어둠과 성스러운 고향의 밝음을 자기 안에 모아들여 이어 주면서도 서로 나누는 사이 나눔으로서의 문지방 위에서는 세계의 순수한 밝음이 빛나고 있다. 세계가 세계화하면서 순수하게 밝아지고 청명해짐으로써,식탁 위의 빵과 포도주도 환한 빛남 속에 이르게 된다. 빵과 포도주가 환한 빛남 속에 이른다는 것은 시인에 의해 호명된 사물들이 자신의
---------------------------------------------------------------------
26) M. 하이데거,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15쪽 참조
소박함 속에서 빛나면서 참다운 사물들로서 깨어난다는 것, 즉 사물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빵과 포도주는 신적인 것들에 의해 죽을 자들에게 선사된 하늘과 땅의 결실이다. 빵과 포도주는 단순하고 소박한 넷의 어울림으로부터 이 넷을 자기 안에 모으고 있다. 시적으로 순수하게 명해진 사물들, 즉 빵과 포도주는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다. "27) 이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그러나, 실은 가장 풍요롭고 위대한 것이다. 우리의 일상 세계 속에서 순전한 먹을거리로 간주되던 빵과 포도주가 세계의 사방을 자기 안에 모으는 '성스러운 빵과 성스러운 포도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의 빛남은 일상을 떠나 일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속에 은닉된 존재의 어둠을 걷어냄으로써 일상이 일상 자신으로 순연히 드러나, 매일 매일이 즐겁고 성스러운 하루가 될 때, 28)
본래적으로 현성한다. 이렇듯 셋째 연의 마지막 두 행에서는 세계의 청명한 밝음과 사물들의 소박한 밝음이 이 둘의 친밀한 사이를, 즉 존재의 근원적 차원으로서의 사이-나눔을 철저히 관통하면서 환히 빛나고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셋째 연은 세계와 사물들을 이 둘의 친밀함의 한가운데 속으로 부른다. (…) 셋째 연은 이제 비로소 사물들의 명함과 세계의 명함을 모아들인다. 왜냐하면 셋째 연이 사이- 나눔을 말해지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둠으로써, 사이-나눔을 부르는 저 친밀한 명함의 하나로 포개짐 (Einfalt)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29)
하나로 포개진 소박한 부름의 차원, 즉 명함의 차원은 시인의 부름과 존재의 부름이 하나로 공속하는 생기(Ereignis) 의 근원적 차원이다. 오직 이러한 생기의 근원적 차원 속에서만 말함의 본질영역은 시원적으로 열린다. 오직 생기로서의 존재의 시원적 차원 안
-----------------------------------------------------------------
27) 같은 책, 25쪽 참조.
28) 일일호호(日日好好),
29) 같은 곳 참조
에서만 인간의 본질에 대해 스스로 생기하며 다가오는 언어의 본질의 생기는 본질연관과 언어의 본질에 대해 응대하며 다가가는 인간의 본질의 생기되는 본질관계가 서로 근원적으로 어우러지고 하나로 포개져 조화로운 울림 (Einklang) 으로 화음을 이룬다. 이러한 존재의 조화로운 화음이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이다. 이렇게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으로 존재의 화음이 이루어져 은은히 울려 퍼지는 근원적 장소가 참말의 영역 (Sage-Bereich) 이다. 참말은 허정(虛靜) 한 영역에서 생기하는 존재의 태곳적 화음으로 피어나 우리에게 소리 없이 다가온다. 여기서 참말은 인간적 말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참말은 '여태껏 존재한 적이 없는 더욱 고요한 시원 속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30) 존재의 "속삭이는 말" (Zusage) 이다. 31) 참말의 말함 (Sagen) 은 우리에게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으로서 조용히 속삭이듯 다가와 사태의 존재를 가리키면서 그 사태를 나타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태를 보게 하고 듣게 한다. 이런 점에서 참말의 말함은 그 본질에 있어서 가리킴이고 나타나게 함이고 보고 듣게 함이다. 32) 이러한 참말의 말함에 상응하여 인간은 말한다. 사태의 본질을 눈짓으로 가리켜 보이는 것으로서의 참말은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본질장소로 도달하도록 허락해 주고 보증해준다. 이러한 것으로서의 참말의 영역은 생기의 근원적 차원으로서의 사이-나눔의 하나로 포개집 안에서 현성한다.
그래서 트라클의 시 안에서 사이-나눔(동이화) 을 소리 없이 부르는 시인의 부름은 세계와 사물을 이 둘의 친밀한 사이 속으로 부르는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으로서의 존재의 성스러운 부름 (명령)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비로소 본래적인 부름이 되고 본래적인 명함 33)이
---------------------------------------------------------------------
30) M. 하이데거 에서의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70쪽 참조
31) M. 하이데거, <언어의 본질>, <언어로의 도상에서>, 169쏙 및 185쪽 참조
(32) M. 하이데거,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언어로의 도상에서). 137쪽 참조:
<언어의 본질>, <언어로의 도상에서), 188쪽 참조
된다. 본래적인 명함이란 세계와 사물의 친밀함이 사이-나눔의 하나로 포개지 안으로, 다시 말해 존재를 개시하고 수립하는 장소로서의 참말의 영역 안으로 다가오도록 명하는 저 근원적인 부름이다. 이러한 본래적인 명함이 말함 (Sprechen) 의 본질이다. "이것이 언어의 말함이다. 34) 언어의 말함은 순수하게 말해진 시 안에서 본래적으로 현성한다. 이렇게 현성하는 것으로서 언어는 말한다.
트라클의 시를 해명하는 <언어>라는 글에서 시인의 언어에서 존재의 언어로 사유가 결정적으로 심화되어가는 지점은 바로 이곳 (전집 12권 26쪽 첫째 단락, 단행본 28쪽 아래 단락 이하)이다. 다시 말해, 주로 이전까지의 논의 전개과정에서는 시인의 시 안에서 현성하는 시인의 시짓는 말함에 언어의 말함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면, 이 논의 이후부터는 사이-나눔으로서의 존재의 명령에 따르는 존재의 언어의 말함에 그 무게가 실리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는 명해진 것, 즉 사물-세계와 세계-사물을, 35) 사이-나눔의 사이 속으로 다가오도록 명하는 가운데 말한다. 이렇게 명해진 것은 사이-나눔으로부터 이 사이-나눔 속으로 도래하여 안착하도록 명령되고 (befohlen, 내맡겨지고 있다. "36)이 구절을 좀더 풀어서 말하면, '사이-나눔(존재)의 명 령으로부터 사이-나눔의 친밀한 사이영역 속으로 도래하여 다가오도록 명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이-나눔의 해석학적 순환이 현성하고 있
--------------------------------------------------------------------
33) M. 하이데거,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26쪽 참조.
34) 같은 곳 참조
35) '사물-세계'란 사물이 세계를 낳도록 명해지고 있는 사태를 가리키며, '세계-사물'이란 세계가 사물을 베풀어 주도록 명해지고 있는 사태를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사태는 사이-나눔의 생기영역 안에서 친밀하게 화동하면서 머무른다.
사물들은 세계 안에 머무르며, 동시에 세계는 그때마다 각각의 사물들 안에 머무른다. '사물-세계'와 '세계 -사물'의 사잇줄(-)은 이러한 사태의 친밀성을 가리킨다.
36) 같은 곳 참조
다. 거듭 강조하건데, 이 문단에서는 말함의 차원이 시인의 시적인 부름에서부터 사물과 세계의 호명(명명)으로, 그리고 이러한 호명에서부터 초대함과 명함으로 다가오던 이전까지의 논의의 전개과정이 더욱 심화됨으로써, 이제는 시인의 시짓는 말함에서부터 사이-나눔(존재)이 명하면서 죽을 자들을 불러들이는 참말의 본질영역 속으로 언어의 말함이 언어의 본질장소를 향해 한층 더 심화되어감으로써, 사유해야 할 사태 (언어) 자체가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본질차원으로 논의의 결정적인 심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유해야 할 사태에 따라 숙고하면서 깊이 이해하는 것이 이 글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해석하여 자기 것으로 수용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 서 하이데거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시인이 세계와 사물들을 호명하여 부르기 이전에, 존재의 성스러운 부름으로서의 “사이 - 나눔의 명령(Geheip)이 세계와 사물들을 이 둘의 친밀성의 하나로 포개짐 속으로 부름으로써, 언어는 말한다. "37)
사이-나눔은 세계와 사물을 이 둘의 친밀성의 하나로 포개진 한가운데 속으로 모아들여 (Ge), 이 둘을 각각의 고유한 본질 속으로 다가오도록 명한다(heiBen). 이렇게 모아들여 명하는 것이기에, “사이-나눔은명령이다. "38) 사이 - 나눔의 명령, 즉 존재의 명령은 세계와 사물을 동이화의 무한한 관계의 중심 속으로 부르는 가운데, 죽을 자들 역시 이러한 관계의 중심 속으로 다가오도록 부른다. 이러한 명령으로부터 모든 명함 (초대하는 부름) 자체는, 즉 사물을 사물화 속으로 다가오도록 명하는 부름과 세계를 세계화 속으로 다가오도록 명하는 부름은 이러한 사이 나눔의 명령에 속해 있도록 이미 부름을 받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사이- 나눔의 명령에 순응하고 이에 귀 기울여 그 소리를 받아냄으로써 그 소리를 시에 담아 사물과 세계를 부르고 명하는 것이
-----------------------------------------------------------------
37) 같은 책, 27쪽 참조.
38) 같은 곳 참조.
다. 세계와 사물들을 부르는 존재의 성스러운 부름으로서의 사이-나눔의 명령이 정적의 은은한 울림 (das Gelaut der Stille)이다. "언어는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 말한다. 정적이 세계와 사물들을 각각의 본질 속 으로 내어줌으로써, 정적은 고요하게 한다. 이렇게 고요하게 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사물을 내어준다는 것, 바로 이것이 사이- 나눔이 고유하게 생각하는 사건 (Ereignis)이다. "39)
사이-나눔은 세계를 세계화하는 세계로서 사물 속에 고요히 머물게하고, 사물을 사물화하는 사물로서 세계 속에 고요히 머물게 한다. 세계와 사물을 사이-나눔의 하나로 포개진 친밀한 한가운데 안에 고요히 머물게 함으로써, 사이-나눔은 이중적으로 고요하게 한다. 사이-나눔은 사물들이 세계의 호의 속에 고요히 머무르게 함으로써 고요하게 하고 세계가 사물 속에서 넉넉해지게 함으로써 고요하게 한다. “이와 같이 이중적으로 고요하게 하는 사이-나눔 속에서 정적은 스스로 생기한다. "40)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으로서 현성하는 사이-나눔은 세계와 사물을 자기 안에 고요히 머물게 함으로써,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 스스로 생기한다. 이렇게 생기로서의 존재의 시원적 차원 안에서 스스로 생기하면서 사이 -나눔은 일체만물에게, 각각에게 고유하고 적합한 존재의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사물들은 사방세계 안에 고요히 머무르면서 사물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되찾아 사물 자신으로 깨어나 생기한다. 사물은 세계의 호의 안에서 사물 자신의 본연적 모습으로 생기하되, 사물의 사물성은 생기의 비밀스러운 본령 속으로 물러나 고요히 비호된다. 그리하여 사물의 존재가 베풀어 주는 풍요로움은 어떠한 이성의 칼날로도 해명될 수 없는 신비하고 수수한 상태로 머무른다.
이런 점에서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으로서 현성하는 사이-나눔은 일체만물을 세계 속에 고요하게 하면서도 일체만물에게 생명(존재)의 활
-----------------------------------------------------------------------
39) 같은 곳 참조
40) 같은 책, 26쪽 참조.
기를 선사하고 허락해 주는 정중동의 한가운데요. 존재의 원천이자 천지만물의 샘이다. 이러한 "존재의 샘'에서 정적의 은은한 울림이 샘솟아나 소리 없이 울려 퍼진다. 존재는 이러한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 현성한다(toesen). 이것이 현성하는 "본질의 언어" (die Sprache des Wesens), 42) 즉 존재의 말없는 소리요, 존재의 시원적 언어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의 시어로 표현하면, “순수한 무화(Nichtung) 속으로 울려 퍼지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 시-원 (An-Fang)의 소리"43) 이다. 시원의 소리, 이것은 천지만물의 근저( 虛,空,沖,無)에서 울려 퍼지는 정적의 공명이다. 이러한 정적이 침묵의 근원이요, 천지만물에 울려퍼지는 온갖 소리의 지평이다. 천지만물, 즉 자연에 은은히 울려 퍼지는 소리, 이것을 노자는 <도덕경》 (23장) 에서 '희언자연'(希言自然-자연은 말이 드물다)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곧 도(道)의 언어이다. 도의 언어는 천지 사이에 부는 풀무의 소리처럼, 비어 있으나 다하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멀리 퍼져 나간다. 44) 도는 은닉되어 있어서 그것을 온전히 부를 이름이 없되, 천지만물이 화동하여 울려 퍼지는 도의 위대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45) 이런 점에서 존재의 시원적 언어와 도의 시원적 언어는 동일한 차원 (die selbe Dimension)에 있다.
이러한 존재의 시원적 언어에는 천지만물이 존재의 조화를 노래하면서 소리 없이 울려 퍼지는 자연의 수수한 노래가 흐르고 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먼동이 트면서 해가 솟아나는 소리이기도 하고, 석양의 노을과 함께 찬란한 금빛 햇살을 증여하면서 날이 저무는 소리이기
--------------------------------------------------------------------------
41) M. 하이데거, <언어의 본질>, <언어로의 도상에서>, 159쪽 참조.
42) 같은 책, 204쪽 참조.
43) M. 하이데거, <에르하르트 케스트너를 회고하며>, <사유의 경험으로부터》,241쪽 참조.
44) 노자, <도덕경>, 5장 참조(天地之間,基猶堂籥乎,虛而不屈,動而愈出).
45) 같은 책, 41장 참조(大音希聲,道隱無名).
도 하고, 밤하늘에 달빛과 함께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이기도 하고, 청명한 하늘에 뭉게구름이 한적히 노니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때로는 비와 우박을 동반하면서 천지를 진동하는 번개와 천둥의 소리이기도 하고, 바람이 부드럽게 대지를 어루만지는 소리이기도 하고, 우거진 숲속의 나뭇가지 사이로 나뭇잎과 함께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이기도 하고, 들길이 부드러운 미풍과 함께 조용히 건네주는 소리이기도 하고, 46) 샘물과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면서 산새들과 정겹게 조우하는 소리이기도 하고, 강물이 묵묵히 흐르는 소리이기도 하고, 파도가 해안의 암석과 모래알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푸른 대지에 새싹이 돋아나는 소리이기도 하고,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때가 되면 천지신명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결실
-----------------------------------------------------------------------
46) 하이데거는 사유의 경험으로부터>에 실려 있는<들길> (89쪽)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들길은 길 주변에 자신의 존재를 갖고 있는 것을 모아들이고, 들길 위를 걸어가는 모든 것에게 그 자신의 것을 전해준다. (…) 언제나 그리고 도처에서 들길 주위에는 동일한 것이 건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 (das Einfache)이야말로 상주하는 위대한 것의 수수께끼를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직접 찾아오지만 오랜 성숙을 필요로 한다. '언제나 동일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축복을 감추고 있다. 들길 주위에 머무르면서 자라난 온갖 사물들의 광활함이 세계를 선사한다. 독서와 인생의 옛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말해지지 않은 세계의 언어 속에서 신은 비로소 신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들길이 건네는 소리는 들길의 미풍에 감싸여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말한다. 그는 자신의 유래에 예속된 자로되,작위성의 노예가 아니다. 들길이 건네는 소리에 인간이 속해 있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의 계획에 의해 지구를 정리하고 정돈하고자 헛되이 시도한다. 현대인들 가운데 들길의 소리에 예속된 자는 무척 드물다. 이러한 위험이 밀려들고 있다. 기계의 소음을 거의 신의 목소리로 간주하는 그들에게는 오직 그런 소음만이 귓전에서 맴돌 뿐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뿔뿔이 흩어지고 길을 잃는다. 분산된 자들에게 단순하고 소박한 것은 그저 단조롭게 보일 뿐이다. 단조로운 것은 권태롭게 만든다. 짜증난 이들은 단지 천편일률적인 것만을 발견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은 달아나 버린다. 그것이 주던 조용한 힘은 고갈되고 말았다.
을 거두어들이는 소리이기도 하고, 황량한 겨울 들녘에 눈보라가 몰아치면서 어둠이 내리는 소리이기도 하다. 47)
그래서 존재의 시원적 언어가 정적의 공명으로서의 이름 지을 수 없는 무명(無名)의 언어, 즉 상도(常道)의 언어라고 한다면, 자연의 수수한 노래는 존재자의 존재의 언어로서의 유명(有名)의 언어, 즉 비상도(非常道)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둘은 하나로 포개져 있으면서도 둘로 나뉘어져 현성한다. 이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말하면, 고요한 물과 일렁이는 물결이 한 몸을 이루어 동거하고 있듯이, 48) 존재의 시원적 언어와 자연의 수수한 노래는 상입상즉(相入相卽)하면서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이치를 보여주는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친밀한 관계로 서로 얽혀 있다. 49) 예컨대, 적막한 밤 어느 산사의 풍경이 바람에 조용히 흔들릴 때, 은은히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는 정적의 존재.즉 침묵의 소리를 말없이 알려준다. 이러한 존재의 은은한 울림을 밝은 마음으로 수수히 받아들일 때, 인간은 비로소 세상의 밤을 파수하는 깨어 있는 자로 존재한다. 그는 밤을 파수하면서 존재의 말없는 소
--------------------------------------------------------------------------
47) 타고르가 노래한 "님의 목소리"는 이렇게 수수하면서도 성스러운 자연(존재)의 말없는 소리일 것이다 (타고르, 《기탄잘리>, 박희진 역, 2002, 현암사,
아울러 자연의 수수한 노래에 언제나 귀 기울이며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다음의 고백도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조용한 저녁, 누군가 뿔피리 부는 소리가 들린다. 이즈음에는 뿔피리 소리가 자연의 탄식처럼 들린다. (…) 곤충들의 울음소리, 빙판 갈라지는 소리, 아침에 닭의 해치는 소리, 그리고 밤에 개 짖는 소리 등에 어떤 울림이 있듯이 자연도 늘 어떤 울림을 갖고 있다. 울림은 자연의 건강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하느님의 음성은 깨끗한 종소리와 다르지 않다. 나는 충심으로 소리를 통해 멋진 건강을 마신다.
나는 소리를 주신 하느님에게 감사드린다" (헨리 D. 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윤규상 역, 2003, 도솔,57쪽 이하 참조).
48) 수파불리 (水波不離),
49) 여기서 자연적 관계란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요소가 차이를 지탱하면서도 한 묶음으로 결합되어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동거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이중성의 존재양식"을 말한다(김형효, 2002, 《하이데거와 화엄의 사유》, 청계,115쪽 참조).
리에 청종한다.
존재의 말없는 소리는 참말의 본질영역으로부터 죽을 자들에게 조용히 속삭이면서 다가와, 죽을 자들로 하여금 말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본질 속에 참답게 체류하도록 허용해 준다. 죽을 자들은 이렇게 여래(如來)처럼 다가오는 존재의 말없는 소리를 단순하고 소박한 말함 속으로 모은다. 50) 죽을 자들이 존재의 명령으로부터 참말의 영역 속으로 부름받은 채 존재의 말없는 소리에 기분적으로 조율되어 저 나름의 방식으로 말하는 그의 단순하고 소박한 말함을51) 하이데거는 '상응하여 말하는 응답함' (Ent-sprechen) 이라고 부른다. 상응하여 말하는 응답함이란 존재의 말없는 소리가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 말하는 그런 언어의 말함에 죽을 자들이 조용히 귀 기울여 이에 응답하는 말함이다. 죽을 자들로서의 인간이 참말의 영역에 귀속해 있는 한에서만, 그리고 이러한 참말의 영역으로부터 천지만물이 존재의 조화를 노래하면서 우리에게 말없이 다가오고 있는 한에서만, 그리하여 그가 이러한 정적의 은은한 울림에 초연히 내맡겨진 채 존재의 성스러운 부름, 즉 진여(眞如)의 소리에 청종할 수 있는 한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본래적 으로 말한다. 52) 이렇게 청종해서 듣는 것이 “사유의 본래적 몸짓"53) 이
-------------------------------------------------------------------------
50) 이런 점에서 김형효는 존재의 말없는 소리를 법성(法性)의 원음圓音)이라고 해석하면서, 고요의 본질이 차연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다 (김형효, 같은 책, 124-125쪽 참조).
51) 인간의 모든 말함은 언제나 근본기분 (Grundstimmmung)에 조율된 채 말하는데, 이러한 "근본기분 안에서는 존재의 소리 (Stimme)가 말하고 있다" (M. 하이데거, 《회상>, 72쪽 참조).
52) 진여의 소리는 신성의 빛이 열리는 존재의 성스러운 차원 안에서 샘솟아나 소리 없이 다가온다. 이러한 진여의 소리 안에 '신은 비로소 신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신성의 눈짓으로서의 진여의 소리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부름과 같은 것이리라. 존재의 시원적 소리가 그 궁극에 있어서 하느님의 부름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자연의 수수한 노래에 하느님의 부름이 깃들어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는 한스 큉이 지적하고 있듯이 어쩌면 "신의 베일"과 같은 것일지 모른다 (한스 큉. 줄리아 칭,
다. 따라서 시원적으로 사유하는 인간의 말함은 "존재의 은총에 대한 메아리"이요, 이 메아리는 존재의 말없는 소리라는 그 말 (Wort)에 대한 인간의 대답 (Anticort)"이다. 54) 이런 점에서 존재와 인간의 말함은 참말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존재와 인간의 해석학적 대화 이다. 존재와 인간의 해석학적 대화를 통해서 존재는 언어로서 생기하고 인간은 이러한 언어 속에 체류한다. 55)
여기서 '해석학적인 것'이란 문학작품이나 성서를 해독하는 해석의 특정한 방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낱말의 어원이 되는 헤르메노이에인 (epuVeev 의 근원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헤르메노이에인'은 신들의 사자인 헤르메스 신이 역사적 운명의 소식과 기별 (Botschaft und Kunde) 을 가져와 앞에 펼쳐 놓듯이, 56)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반신의 존재이자 신들의 전령인 시인에 의해 말해진 것을 펴놓는 그런 해석 (Auslegung)을 뜻한다. 따라서 해석학적 대화란, 우리에게 말 걸어오면서 다가오는 존재의 소식과 기별에, 즉 천지만물의 오묘한 존재관계의 중심 속으로 우리를 불러들이는 진여의 소리에 주의를 기울여 청종함으로써 이러한 존재의 소리 없는 울림을 소리 나는 낱말로 데려오는 것을 뜻한다.
-------------------------------------------------------------------------
칭, 1994, 《중국종교와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198쪽 참조). 다시 말해서, 존재 안에서 그리고 존재의 현성을 통해서 신이 스스로를 은닉하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자신을 비밀스럽게 알려오는 그런 신의 베일과 같은 것일
지 모른다.
53) M. 하이데거, <언어의 본질>, <언어로의 도상에서>, 165쪽 참조
54) M.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나중말>, <이정표 1>, 신상희 역,
2005, 한길사, 184쪽 참조.
55)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존재는 언어에 근거하고 있으나, 이러한 언어는 본래 대화 속에서 비로소 생긴다. 그러나 대화는 언어가 실현되는 하나의 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는 대화로서만 본질적일 수 있다" ( <횔덜린과 시의 본질>, <횔덜린 시의 해명), 72쪽 참조).
56) M. 하이데거, <언어에 관한 대화로부터〉, 《언어로의 도상에서>, 115쪽 이하 참조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언어의 본질, 즉 정적의 은은한 울림이 죽을 자들의 귀 기울임을 위해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 소리로 울려 퍼지기 위하여 죽을 자들의 말씀을 필요로 할 경우에, 이러한 생기는 스스로 생기한다. 오로지 인간이 정적의 은은한 울림에 속해 있는 한에서만 죽을 자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소리로 울려 퍼지는 말함을 행할 수 있다. 죽을 자들의 말함은 호명하는 부름이며, 이것은 사이-나눔의 하나로 포개짐으로부터 사물과 세계가 다가오도록 명하는 부름이다. 죽을 자들이 말하는 가운데 순수하게 명해진 것이 詩로 말해진 것이다. 본래적인 시는 결코 일상 언어의 한 차원 더 높은 방식( 노래, 가락)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일상적 담론은 망각되어 버릴 정도로 지나치게 남용되어서, 이제는 아무런 부름도 거의 울리지 않는 그런 일 것이다. "57)
하이데거는 인용된 이 대목에서, 인간의 본래적 언어는 인간 내면의 소리를 밖으로 발성해 내는 것으로서의 일상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詩로 말해진 것 안에 고요히 머무르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詩로 말해진 것은 단순히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존재와 인간의 해석학적 대화 속에서 참말의 영역
으로부터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은닉하고 비호하기도 하는 존재의 증여에 의해 현성된 것이다.
인간의 본래적 말함은 존재의 명령이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으로 울려 퍼지는 참말의 본질영역 속으로 죽을 자들을 초대하여 고유하게 동이화하는 식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죽을 자들은 모든 것에 앞서 세계와 사물을 사이 - 나눔의 하나로 포개짐 속으로, 다시 말해 동이화의 한가운데 속으로 다가오도록 부르는 저 존재의 명령에 청종해야
------------------------------------------------------------------------
57) M. 하이데거,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28쪽 참조, 일상 언어는 세계와 사물을 시원적으로 부르는 본래의 환기력을 상실해 버린 진부해진 시이다. 본래적 시는 일상 언어의 가능근거이다.
만 한다. "죽을 자들이 말하는 모든 말 (Wort) 은 이러한 청종(Gehor,聽從)으로부터 그리고 이러한 청종으로서 말한다. 죽을 자들은 자신들이 귀를 기울이는 한에서 말한다. 비록 그들이 부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사이-나눔의 정적의 명하는 부름에 주의를 기울인다. 58) 죽을 자들이 이러한 존재의 명령에 귀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죽을 자들이 참말의 영역 안에 머무르면서 존재의 샘에서 샘솟아나는 정적의 은은한 울림으로서의 존재의 부름을 받아내어" (entnehmen) 59)
그 부름에 대꾸하면서 (entgegmen) 그것을 소리 나는 낱말로, 즉 발성화되는 언어로 데려오는 것이다. 이렇게 귀 기울여 들으면서 받아내어 대꾸하는 말함이 상응하여 말하는 응답함' (Ent-sprechen)이요, 존재의 참말에 뒤따라 말하는 응답함(Ent-sagen als Nach-sagen)이다.
"진정으로 귀 기울여 듣는 모든 행위는 그 자신의 고유한 말함을 억제한다(an sich halten). 왜냐하면 듣는다는 것은 청종하고자 스스로 뒤로 물러나 자제하는 (sich zurrickhalten) 것이요. 이러한 청종을 통해서 귀 기울여 들음은 정적의 은은한 울림에 고유하게 동화된 채 머무르게 된다. "60)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샘에서 샘솟아나는 존재의 성스러운 부름, 즉 진여의 소리를 제대로 귀 기울여 듣고자 채비하는 일이다. 이렇게 채비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비로소 정적의 은은한 울림에 뒤따르며 귀 기울이려고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울림 앞으로 다가가 들으려고 하는 가운데 마치 그 은은한 울림의 명령을 향해 우리가 먼저 앞질러 다가가려고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61) 이
-----------------------------------------------------------------------
58) 같은 책, 29쏙 참조.
59) 같은 곳 참조. 여기서 받아낸다 (entmektmen) 는 것은, 모세가 시나이 산 위에서 하느님의 명령, 즉 십계명을 받아내어 적어 두었듯이, 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
닌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마치 헤르메스 신과 같이 역사적 운명의 소식을 귀기울여 받아내어 민중에게 전해주는 신들의 전령이다.
60) 같은 곳 참조.
61) 같은 곳 참조.
렇게 뒤로 물러나면서 앞질러 다가가는 가운데, 죽을 자들은 자신의 본질을 그 근저에서 기분적으로 조율해 주는 존재의 말없는 소리가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 즉 존재의 화음으로서 다가오는 언어의 본질장소 안에 거주하고 체류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언어의 본질장소, 즉 참말의 본질영역은 인간이 존재의 이웃으로서 그 안에 거주하면서 존재의 진리를 개시하고 보살피는 참다운 삶의 거처이다. 인간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 동이화의 고요한 울림으로서 울려 퍼지는 존재의 태곳적 화음에 밝게 깨어 있는 마음으로 응대하면서 이러한 거처를 돌보고 수호하는 파수꾼이다. 하이데거의 <언어>는 우리가 이러한 언어의 본질장소안에 거주하는 것을 배우도록 조용히 인도해 주는 더할 나위 없이 진귀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