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410) / 스웨덴
칼스크로나 항구(Naval Port of Karlskrona; 1998)
블레킹게 주[Blekinge County]에 위치한 칼스크로나(Karlskrona)는 17세기 후반 유럽의 계획된 해군 도시의 뛰어난 사례이다. 당시 도시 계획과 많은 건축은 이후에도 지속되어 오늘날까지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시설물과 함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칼스크로나 해군 기지는 유럽에 있었던 비슷한 해군 기지 프로젝트의 모델이 되었다. 강대국 스웨덴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독특한 유산인 이곳은 도시 계획・공업 지대・전원 지대 사이의 통일성을 창조하려는 북유럽식 바로크 운동의 유산이기도 하다. 전체가 효율성과 미적 경관을 키우려는 일관성 있는 장기 목표를 두고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 여전히 기반 시설과 열린 공간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칼스크로나는 1680년에 건립되었다. 그 시기에 강대국 스웨덴의 영토에는 지금의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스코네(Skane)・블레킹게(Blekinge), 고틀란드 섬과 독일 북부 지역까지 포함되었다. 발트 해 지배를 향한 첫 단계는 스웨덴이 북해의 항구들로 가는 직접적인 접근로를 확보하고, 덴마크를 물리쳐 발트 무역의 핵심인 외레순드 해협[Oresund Sound]을 통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685년 로스킬레 조약[Treaty of Roskilde]으로 덴마크와의 평화가 성립되자 스코네・블레킹・고틀란드 섬이 스웨덴 영토가 되었다. 주둔지와 조선소가 보데쿨(Bodekull)의 작은 항구에 설치되었고, 국왕 카를 11세를 기리는 뜻으로 칼스함(Karlshamn)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덴마크의 단기 점령(1676~1679) 이후로는 해군 기지로 이상적인 곳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카를 11세(Karl XI)는 바모(Wamo)와 트로소(Trosso)의 섬에 새로운 도시 건립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곳이 칼스크로나로 알려지면서 항구와 해군 기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이곳 덴마크 구역에서 상인과 무역상은 크리스티아노펠(Kristianopel)과 론네뷔(Ronneby)의 기존 도시에서 자진 철수를 선언해 이 새로운 도시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그 지역은 점차 스웨덴에 동화되었다. 칼스크로나에서 발달한 해군 기지는 조선소와 저장 시설을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스웨덴 왕국의 방어 책임자인 병참감(兵站監) 에리크 달베르그(Erik Dahlbergh)가 지휘했다. 가옥은 스톡홀름에서 파견된 해군 건축가와 장인을 수용하도록 지어졌다. 조선소는 건물 2채가 있는 정박지・부두 2곳・대장간 2곳・창고 5곳으로 시작했는데 첫 선박 건조장은 1680년 12월에 설치되었고, 이듬해 최초의 선박이 진수되었다. 1683년 칼스크로나가 행정 중심지가 되자 달베르그는 도시와 도시 요새화에 대한 명확한 계획을 구상했다. 1772년 구스타프 3세가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하던 시기에 칼스크로나는 스웨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이 시기에 칼스크로나는 대단히 활발하게 활동하여 처음에는 덴마크, 이후에는 러시아를 겨냥한 대형 함선을 건조하였다. 도시에서는 건물 신축이 함께 재개되었다. 구스타브의 군사적 모험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절대 권력을 장악하려는 국왕에게 분개한 귀족 소속 정적들에게 암살당했다. 1809년 핀란드를 상실하면서 스웨덴 제국의 꿈은 무산되었다. 구스타브 암살과 1809년 핀란드 상실에 의해 국가의 정치적 쇠락이 있었긴 하지만 칼스크로나는 계속해서 스웨덴 해군의 주요 기지였다. 해군 및 육군 전술과 기술력 발전에 발맞추기 위하여 19세기와 20세기에는 많은 현대화와 확장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목조 선박은 1880년대까지 강철 선박을 위해 자리를 내주지 않는 바람에 조선소는 새로운 기술 습득이 늦었기긴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낡은 요새는 현대화되고, 공습에 대비한 새로운 방어 시설이 설치되었다. 그 때 이후 해군 지역에서의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스웨덴 방어 체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790년 칼스크로나는 화재로 매우 심각하게 훼손되었는데 그 결과 파괴된 건물은 석재로 다시 지었으며 원래의 거리 배치는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었다. 칼스크로나 계획에는 전략적 필요성에 고전적 이상이 통합되어 있다. 장엄한 공공건물이 줄지어 선 중앙 광장에서 방사형으로 뻗어 나오는 넓은 중심 도로가 있는 바로크식 설계는 현재의 도시와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는 함대 사령관 한스 바하트마이스터(Hans Wachtmeister)의 명령에 따라 에리크 달베르그와 칼 매그너스 스튜어트(Karl Magnus Stuart)가 설계하였다. 도시의 중심은 트로소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인 스토르토르게트(Stortorget; 대광장)이다. 여기에는 도시의 두 주요 성당으로 18세기 초반에 지은 헬리가 트레팔리겟 키르카(Heliga Trefalighets Kyrka; 삼위일체 교회)와 프레드릭스키르칸(Fredrikskyrkan), 같은 시기에 지은 로드후세트(Radhuset; 시청), 그리고 이후에 지은 콘서트 홀, 시립 도서관, 우체국 같은 공공건물이 있다. 항구는 도시 남부에 있는데 원래는 현재 일부만 남은 인상적인 성벽으로 도시와 분리되었다. 연병장 남쪽에는 감레 바르베트(Gamle Varvet; 옛 조선소)가 있다. 이곳은 주로 18세기 말에 지은 수많은 훌륭한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칼스크로나 조선소 총감독인 프레드리크 헨리크 아프 채프만(Fredrik Henrik af Chapman)이 1780년부터 1808년 사망할 때까지 위임을 받아 실력 있는 대가인 조선 기사와 건축가들이 이곳의 많은 건물을 설계했다. 아미랄리테스라텐(Amiralitetsslatten; 포병 부대) 맞은편에는 매립지 주택 막사, 군수창고, 작업장, 병원이 있다. 이들이 건축된 지점은 1704년부터 오로라 요새[Aurora Bastion]가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