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설
장광설(長廣舌)은 본디 ‘길고(長) 넓은(廣) 혀(舌)’라는 뜻이다. 하지만 원래는 ‘긴 것을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잘 표현하는 말솜씨’를 이르는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보통의 경우는 ‘쓸데없이 길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장광설의 유래를 중심으로 그 생성 배경과 함축했던 의미를 살핀다.
원래 장광설은 부처의 신체적 특징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여러 특징을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라고 한다. 이들 중에 삼십이상의 하나인 “길고 넓은 혀”를 일컬어 ⟨대설상(大舌相)⟩ 혹은 ⟨장광설(長廣舌)⟩이라고 하며 여기서 비롯된 성어이다. 불교 경전에서 이르고 있는 삼십이상 내용 중 몇몇 예이다.
/ 발바닥이 평평한 모습(足下平安立相) / 발바닥에 2개의 바퀴가 있는 모습(足下二輪相) / 손가락이 긴 모습(長指相) / 손발가락에 갈퀴가 있는 모습(手足指網相) / 손이 무릎까지 내려간 모습(正立手藦膝相) / 터럭이 위로 향한 모습(毛生上向) / 몸이 금색으로 된 모습(金色相) / 40개의 이가 있는 모습(四十齒相) / 혀가 긴 모습(大舌相) / 연꽃 같은 눈(眞靑眼相) / ....... /
예로부터 인도에서는 ‘도(道)를 깨우친 자는 혀가 길다’로 여겼다. 따라서 혀가 긴 경우는 ‘깨달음이 일정한 경지에 이른 사람’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부처의 혀는 이마에 닿을 정도로 길고 넓은 대설상 혹은 장광설이었다. 혀가 넓고 길고 부드러워 진리를 설법하기 좋은 혀를 일컬어 초기에는 ‘길고긴 내용을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잘 표현하는 말솜씨’를 가리켰다. 이처럼 ‘높은 지혜를 나타내는 장광설이 언제부터인지 시부지기 ‘쓸데없는 너스레만 많은 수다를 뜻’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변용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교에서의 장광설은 여전히 변함없이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성불에 이르도록 이끌어주는 부처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넓고 긴 혀’는 뛰어난 지혜나 빼어난 웅변을 상징했다. 한편 불가에서는 부처의 말씀인 장광설은 깨달음을 얻는 이의 성스러운 말씀이면서 우매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자비의 말씀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우리 역사에서 ‘길고 넓은 혀’를 가졌던 인물의 예이다. 신라 48대 왕위에 오른 경문왕은 화랑 응렴(膺廉)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 그의 침전엔 매일 밤마다 뱀 떼가 몰려왔다고 한다. 모든 궁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뱀을 내쫓으려 하자 왕이 자기는 뱀이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며 그대로 두라고 했다, 또한 잘 때는 혀를 내놓고 자는데 얼마나 혀가 큰지 배를 모두 덮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문왕의 혀는 자기를 지켜주는 존재(뱀 떼)가 옆에 있을 경우에 한해서 내밀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지혜를 함부로 드러낼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뱀 떼는 왕실에 튼튼한 기반이 없었던 왕을 지켜주기 위해서 모여든 지지 세력으로 지난날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화랑도를 묘사한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귀띔이다.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로 60여 년 전의 일이었지 싶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조금은 꼬장꼬장한 선생님의 수업이 시작될 무렵에 누군가 한 친구가 심기를 건드리는 불경죄를 저질렀던 것 같다. 분기탱천한 선생님이 아예 책을 덮어놓고 한 시간 내내 강력한 질타와 훈계(?)를 계속하셨다. 숨을 죽이고 들어야 했지만 야단치는 게 전부로 분노를 여과 없이 직설적으로 마구 쏟아냈던 장광설이 분명했다. 그렇게 한 시간 내내 50여명이 야단을 맞았음에도 무슨 훈계 말씀을 들었는지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 때 얼마나 끔찍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오늘날 장광설의 대표적인 예는 국회에서 합법적으로 허락되는 ‘고의로 긴 발언을 함으로써 의사일정을 방해하는 행위’인 필리버스터(Filibuster)가 아닐까 싶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참으로 한심한 장광설이 분명해 쓴 웃음이 절로 나기도 하며 때로는 어린 청소년들이 그 내용을 볼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인 손주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무언가 일이 생길 때마다 자초지종을 따져가며 세세히 얘기해 이해를 도우려고 할 경우 이따금 내 말을 중지시킨다.
“할아버지 뜻은 충분히 알겠는데 요약해서 간단히 얘기해 주시면 안돼요?”
라는 주문을 한다. 쓸데없이 중언부언하며 장광설 펴지 말고 요약해서 핵심만 얘기해 달라는 솔직한 속내의 표현이다. 물론 현대의 세속적인 장광설을 염두에 두었던 얘기는 아니다. 그럴지라도 예로부터 쓸데없는 다변(多辯)이나 요설(饒舌)을 교묘히 끌어다 붙여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경고로서 ‘말 많은 집(言甘家)은 장맛도 쓰다(醬不甘)’라고 일깨웠다.
요즈음은 간단한 에세이(essay)도 길이가 길면 읽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지는 풍조 때문에 어쩌면 예수나 부처의 알토란같은 말씀도 길면 외면할 개연성이 다분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세속적으로 통용되는 장광설은 가능한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점점 정신적으로 메마르고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모든 중생을 제도해 줄 ‘불법의 장광설’은 더더욱 증가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닫힌 소견이나 편견의 벽을 깨고 열린 마음으로 대인적인 견지에서 다시금 되새겨 볼 문제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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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 : 부처가 인간과 다른 모습을 지닌다는 믿음 하에 부처의 형상을 표현한 32가지 모습과 80가지 특징을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
춘하추동, 겨울호, 2024년 11월(제8호), 2024년 11월 5일
(2024년 5월 16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