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경과 이후
올가을에 들어 대형 태풍 세 개가 우리나라와 중국과 일본을 휩쓸면서 풍수해 재난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추석 이전 우리나라 동남해안을 스친 힌남노와 며칠 전 상하이에 상륙한 무이파에 이어 어제오늘 일본 열도를 횡단하는 난마돌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세력의 태풍이란다. 태풍이 올 때마다 대자연의 장엄한 위력 앞에 우리 인간의 힘이 얼마나 미미한지를 깨닫고 있다.
구월 셋째 월요일 새벽 일본 규슈로 상륙해 방향을 튼 태풍 영향으로 바람이 불고 비가 흩날렸다. 우리 지역은 태풍 직접 영향권이 아니라 마음이 놓였지만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머물렀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안철환의 ‘호미 한 자루 농법’을 펼쳤더니 저자는 독특한 방법으로 짓는 그만의 농사법을 소개했다. 이어 ‘소로의 야생화 일기’를 읽으면서 자연 관찰의 묘미에 젖었다.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태평농법의 농사꾼 안철환이나 150년 전 미국 동부 윌든 호숫가의 시인이요 철학자는 서로 맥이 닿아 있음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자연 식생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변화무쌍한 성장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어떤 성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이고 기다려줄 줄 알았다. 법정 스님이 입적 전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흠모했던 이유를 알 만도 했다.
앞서 언급한 두 사람의 책을 읽다가 문득 내가 초라하고 속 좁은 녀석임에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면 산자락을 누비며 철을 앞당겨 피는 야생화 탐방을 나서느라 부산을 떨었다. 올봄 우연한 계기로 가꾸게 된 텃밭 농사에서도 자연의 순리에 거슬리는 농법으로 작물을 가꾸려고 했더랬다. 이 기회에 이실직고 고해성사하는 심정으로 속죄하고 싶을 따름이다.
월요일 아침나절 우리 지역은 태풍경보 속에도 바람이나 비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단지와 인접한 중학교 교정은 휴일처럼 적막했다. 태풍 경과에 대비해 관내 각급 학교는 임시 휴업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오랜 세월 교류가 있는 울산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와 오늘은 태풍으로 학교는 휴업이라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레코드판을 정리하는 중이라 했다.
나는 나대로 점심나절 이후 동선을 그려봤다. 사림동 사격장으로 올라 소목고개를 넘어가는 산책을 나서 보고 싶었으나 태풍이 완전히 사라진 기미는 아닌 듯해 마음을 거두었다. 그와 함께 아내는 날씨가 궂은 날을 틈 따 베란다에 둔 늙은 호박을 해체해 살점을 갉아 주길 바랐다. 나는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로 해치울 일이라 싶어 거실 바닥에 옮겨놓고 채칼로 긁길 시작했다.
가뭄이 지속되던 올해 늦은 봄날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가꾸게 된 텃밭 언덕에 심었던 호박에서 추석 전에 따둔 늙은 호박 한 덩이였다. 재래 장터에서 맷돌 호박 모종을 세 포기 사 심어 넝쿨이 뻗어나갈 때 이미 호박잎은 따 쪄서 쌈으로 싸 먹었고 애호박을 두 개 따 된장국과 나물로도 먹은 바 있다. 지난번 딴 늙은 호박에 이어 풀숲에 몸을 감춘 호박덩이가 더 있지 싶다.
아내의 요청으로 거실로 옮겨온 호박을 잘라 씨앗을 파내고 살점은 채칼로 긁어냈다. 맷돌 호박의 이름에 걸맞게 살점은 깊고 단단해 채칼에 긁혀져 나오는 호박 살점은 황톳빛으로 켜켜이 쌓였다. 어린 모종만 심어놓고 내가 별스럽게 가꾸지 않았음에도 누렁 호박이 영글어 이만큼 식재를 공급해준 땅의 기운과 자연의 조화에 감사했다. 자연에 대한 고마움은 어디 이뿐이겠는가.
늙은 호박을 채칼로 긁어내고 산행 중 주워온 야생 밤톨까지 껍질을 까 놓고 반송시장 우체국으로 가 소포를 한 건 부쳤다. 길을 나선 김에 도심 할인매장으로 향해 생필품을 몇 가지 사 용지호수를 둘러 집으로 돌아와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지었다. 아까 늙은 호박을 두었던 베란다로 가봤더니 창밖은 뭉게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가을답게 파랗고 높은 하늘이었다. 22.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