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 산90-14
갈매못 순교자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터
부여 삽티는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석두 루카 성인이 안장된 곳이다.
병인박해(1866) 때인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성인, 즉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Aumaître, 吳, 1837~1866, 베드로) 신부와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
황석두(黃錫斗, 1813~1866, 루카) 회장과 장주기(張周基, 일명 樂韶, 1803~1866, 요셉) 회장은 그 머리들을 사흘 동안
장깃대에 매달았다가 그 몸과 함께 아무렇게나 모래밭에 군인들이 묻었다.
이에 다섯 성인 가운데 황석두 성인의 시신은 그 조카이자 양자인 황천일(요한)이 주선하여 황기원(안드레아) 등의 가족들이
황석두 성인의 시신을 거두어 현 홍산면 상천 2리에서 내산면 금지 2리로 넘어가는 지방도의 고개인 ‘삽티’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황석두 성인의 유해를 안장한 곳으로 추정되는 홍산 삽티의 ‘즘터’에서는 1964년에 산림개간 작업을 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시기의 성물(聖物)이 담긴 옹기가 발견 되었다. 당시 산림작업에 참가하여 현장에서 그 발견을 목도한 박종선(안드레아)은
현재 금지2리(산정말)에서 살아온 신자로서 그 사실을 증언한다.
그 ‘즘터’는 금지2리에서 삽티를 남쪽으로 넘어 홍산면 상천2리에 닿기 전 오른쪽 계곡 너머 경사지에 위치한다.
그 경사지는 상천리에서 도앙골(내산면 금지1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의 성화당 고개 아래 계곡과도 만나는데,
그 현장은 현재 개인사업자가 절개 평토하고 여러 동(棟)의 공장을 건축하였다.
그 경사지였던 ‘즘터’는 아마도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였고 성물이 담긴 옹기도 황 성인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차기진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그 ‘즘터’의 윗자락은 모 문중의 재실과 묘원이 10여 년 전에 조성 되어 있고,
그 옆 경사지 일부를 천주교회 측에서 2013년 초에 매입하여 성역화를 계획하고 있다.
도앙골의 신자들은 아마도 삽티의 그 ‘즘터’로 넘어 다니며(성황당 고개를 넘어) 홍산 지역의 다른 곳 신자들과 연통하고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금지1리의 주민들도 도보로 홍산 읍내 방향에 일보러 다니던 과거사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성물 옹기를 발견한 곳을 ‘즘터’라 일컫는 것으로 추정하건대, ‘삽티 교우촌’의 잔류 신자들이 대를 이어 살던
옹기 제작지로 추정할 수도 있다.
삽티 계곡은 황석두 루카 성인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기원(안드레아)과 황천일(요한)이 주도하여 교우들이 모여 살던 교우촌이었다.
그곳에 황석두 루카 성인은 산막골에서부터 가끔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이 황씨 조카들도 잡혀가 서울에서 순교하게 되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유해를 안장해드린 사람들마저 순교하여
그 후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전주교구 정읍 신성리 공소에서 살던 황 마르타는
1922년 4월 6일 정식 증언자로서 치명자들에 대한 증언을 하였는데 그는 황석두 성인의 종손녀(從孫女)로서,
그의 백부인 황 예로니모가 직접 갈매못에서 치명 장면을 목격하고 와서 들려준 얘기를 증언하였다.
시복재판에서 증언하기를 갈매못 모래밭에 가매장된 황석두의 시신을 황석두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황천일 요한이
4월 그믐에서 5월 초승 사이에 수습하여 홍산 삽티에 이장했는데(《병인박해 순교자 시복재판기록(1차)》6권 1095쪽과 111쪽),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鴻山)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964년에 그곳 일대를 개간 작업하던 외교인들이 항아리와 그 속에 들어 있는 십자가 및 성모상을 발굴하였다.
그 발굴 유물은 지금 서울 절두산 성지 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 그 유물이 발굴 된 그곳은 아마도 황석두 성인의 유해 안장 사연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추정지는 신천 강씨(信川康氏) 종산의 재실 뒷편이다.
대전교구 하부내포 성지 전담 윤종관 신부는 최근 황석두 성인의 추정 안장지 일대 8만 2500㎡(약 2만 5000평)를 매입해
훗날의 성지 조성에 대비하고 있다.
■ 순교자
◆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 (1813∼1866)
‘재건’이라고도 불렸던 황석두는 충청도 연풍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고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안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안 주교를 몇 십 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5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황석두 루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회 출판 사업가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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