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기한 노릇이다. 카페에 가입 후 많은 글을 읽어내려가며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탐구를 할 적에 가족력까지 탐구한 한 사람의 글을 읽고 나도 우리 친가와 외가쪽을 한 번 생각해보았는데 사연없는 집 없다고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의 조부모와 외조부모 중 생존해 계시는 분은 이제 할머니밖에 안계신다. 내가 전역하던 날 쓰러지신 외할머니는 내가 이곳으로 어학연수를 오고 14일후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6남매중 유일한 딸이여서 더욱더 아파하셨고 지금도 아파하신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는 어머니가 외할머니께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신다. 그 마음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에 생각이 워낙 많은 어머니라 계속해서 그 자책감으로 본인을 옭아맬것 같아 걱정이다.
외할머니는 외손자인 나와 외손녀인 우리 누나도 아끼셨다. 나는 군시절 외박이나 휴가를 받았을 때 의무감에 외할머니를 찾아뵙곤 했다. 외가에 있는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 할머니가 밥을 먹고 가라고 해도 나는 집에가서 샤워하고 쉬고싶은 마음에 부대에서 먹고 왔다는 거짓말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바보다. 나도 할머니가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우리 모두는 외할머니가 건강할 줄만 알고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할머니의 건강관리를 해드리지 않았다. 자식이 6명인데도 몸에 좋은 보약 한첩 못드셔보고 차디찬 냉골방에서 중풍을 얻으신 할머니.. 할머니를 방치한 큰외삼촌과 큰외숙모가 미웠고, 힘들어하는 엄마가 불쌍했다. 그런 엄마를 위로해주지 못하고 시간이 해결해준다며 침묵하는 아빠도 답답했다.
나는 항상 명절마다 큰 집인 안동과 외가를 갔었다.
큰 집도 6남매인데 남자형제 3명에 여자형제 3명이다. 큰아버지는 안동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하다 퇴직하셨고 작은 아버지는 안산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어려운 형편을 꾸려나가고 계신다. 고모 중 1분은 이혼을 하셨고, 나머지 2분은 잘 생활하신다.
이혼한 고모는 내가 중학교 시절 우리 집에서 1달인가 2달인가 같이 지내기도 했다. 지금은 자세한 소식을 잘 모르지만 ...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아버지한테 간간이 듣긴 했다. 옛날 우리 친가는 안동지역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던 유지였다고 한다. 아빠의 어린시절 기억으로는 머슴만 5명이 넘었다고 하고 말 그대로 대궐같은 기와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남부러울것 없던 집이었다. 쌀독에는 항상 쌀이 가득차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베푸는걸 좋아하셨고 그것을 당연시하셨다고 한다. 부랑자들을 집으로 불러 쌀밥을 해먹이고 쌀도 가득가득 퍼다 주셨다고 한다. 명절이면 온동네 사람들이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러오고 아무 문제가 없어보였다. 누군가 보증을 부탁하며 서류를 가져오면 확인도 안해보시고 도장을 찍어줄 정도라고 하셨다. 모든게 잘 흘러갔다.
당시 할아버지의 사촌-이 분은 내가 군복무 당시 돌아가셨다 - 이 할아버지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소유지를 조금 팔아 돈을 마련해주셨는데 이 망할놈의 사촌이란 것이 계집질에 그 돈을 홀라당 까먹었다. 그럴수도 있겠거니 하신 할아버지와는 달리 이 사촌은 계속해서 돈을 구걸했고 마음약하신 할아버지는 계속계속 뒷바라지를 또 하신 모양이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결심을 하신 할아버지였지만 이제는 여기저기 도장을 찍어주셨던 보증이 문제가 되고 이 개같은 사촌이 땅을 홀라당 다 팔아먹었다. 당시 이 망할놈의 사촌은 그 시대에 드물게 동국대 국어교육학과에 재학중이었다. 이 문제로 할아버지는 대학교육시키면 계집질하고 난장친다며 아들자식들에게 기술을 배우라고 강요하셨다고 한다.
당시 큰아버지는 이미 교육대학에 진학한 상태였고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금은방 수리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공부가 하고 싶기도 하고 독립심도 있어 할아버지의 말을 거스르고 대구에 있는 큰누나(나에겐 고모)집에 얹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학력컴플렉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교육에 대한 강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상고를 졸업한 뒤 안동으로 돌아와 금고에서 근무하며 야간대학을 졸업하셨는데 말그대로 주경야독이다.
오전에는 근무를 하고 오후와 야간에는 학교수업을 듣고 숙직을 자처하며 새벽 5시까지 은행입사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새벽 아침밥을 먹으러 집에 가면 할머니가 간식을 준비해놓으셨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와 큰엄마의 갈등이 심했다고 한다. 큰아버지가 결혼할 당시 아버지가 지금의 큰엄마는 안된다며 한바탕 난리를 치셨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은 성사됐고 아버지와 큰엄마의 갈등은 아버지의 결혼 후 고스란히 나의 어머니에게 돌아왔다.
지금이야 좀 덜하지만 옛날에는 명절때만 되면 엄마는 위염이 발병했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곤했다. 한가위의 풍성함은 개같은 소리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어김없이 어머니는 울었다. 참 그런게 싫었다.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엄마가 예민하긴 해도 얼마나 약한 사람이고 정이 많은 사람인데... 어릴때는 못 느꼈지만 커가면서 알게 된것은 큰엄마는 우리에게도 차별을 하셨다는 것이다. 안산 숙부의 두 자녀에게는 친절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갈등이고, 큰엄마는 안산 숙부가 벌어놓은 돈을 주식투자로 다 날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전을 수주했을 당시 안산 숙부는 그곳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오일머니를 잔뜩 벌어왔다고 한다. 큰엄마는 주식을 해서 2배로 불려주겠노라 하고 돈을 받았지만 땡전한푼 남기지 않고 말 그대로 홀라당 다 까먹어버린 것이다.
아마 그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 집 자식들에게 더 잘해주는 것일수도 있다.
고모 한명은 반미친갱이 고모부를 만나 고생만 실컷하다가 이혼을 하고 지금은 안동에서 음식점을 하신다고 한다. 안동에 있는 형제들과도 교류없이 음식점만 운영하신다고 하는데 안된 마음 뿐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돌아보는 외가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엄마는 안동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와도 외가에만 들르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셨다. 나도 외가가 더 좋았다. 내 또래도 많고 분위기도 더 좋았다. 그런데 난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외가의 그 환한 분위기가 좋긴 하지만 잘 어울리진 못했다. 아무 근심걱정 없던 어린시절에도 그렇게 잘 못 어울린것 보면 내가 문제를 가지고 있긴 하나보다.
외할아버지는 부산 남부경찰서 강력계 수사반장이셨다. 엄마의 유년시절에는 수갑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 기억도 있다고 하니 정말 수사반장하셨나보다.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와 별거하셨다. 어떤 정으로 자식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유일한 여식이였고 가장 가까우셨다. 내가 어린시절 우리집은 잠시 울산에 산 적이있다. 그때 외할머니는 부산-울산을 매일 오가시며 우리를 키우셨다고 한다. 그런 은혜도 모르고 나는 그 긴 2년동안의 군생활동안 그 긴 9박 10일간의 휴가기간동안 의무감으로 할머니를 찾아뵌게 다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해군군함을 타고 하와이를 다녀와서 입항하자마자 기념선물을 들고 할머니를 찾아뵌 날을. 핸드백과 하와이지도가 그려진 타올이였는데 .... 올해 1월 27일 전역을 하고 어김없이 난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다. 옛날보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어디 가시진 않았을텐데 ...
문을 열어보니 문이 안잠겨있는데 보이는것은 변기에 앉아있는 할머니다. 용변 보시나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인사를 해도 힘이 없으시다. 2009년 12월 31일 말년휴가를 나왔을때는 아무 이상 없으셨는데 1달도 안되는 시간에 급격히 몸이 쇠약해지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전역일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할 수 밖에 없다.
4월 9일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외가가 아닌 중환자실에서. 힘이 없으셨다.
내가 해줄수 있는 것은 손을 잡는거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일랜드에서 꼭 좋은 가방 사올테니까 꼭 나아서 외가에서 보자고 했다.
연수를 오고나서 정신없이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지나고 영어만 생각하며 지내던 도중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눈물이 핑 돌다가 그쳤다. 연세가 많았으니까라며 생각을 했다. 엄마가 구구절절이 늘어놓는 말이 다 맞았지만 나도 동의해버리면 걷잡을 수 없이 엄마가 무너질것 같아 그냥 호응만 하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릴때부터 할머니가 우리집에 찾아왔던 기억을 하나둘씩 더듬어보다 또 감정이 북받친다. 말년휴가때만 해도 내가 사온 귤이 맛있다고 하셨는데 .. 왜 난 바보같이 귤만 사갔을까. 다른것도 많았는데.
이제서야 연수가 막바지에 다다르고 조금 있으면 외할머니 묘소도 찾아뵐 수 있을것 같다. 그냥.. 너무 안쓰럽다. 앙상한 다리와 주름진 엉덩이에 세월의 흔적처럼 퍼진 욕창.. 그 차디찬 냉골방에서 6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불러보며 도와달라고 외치셨을 우리 외할머니. 보일러도 틀줄 모르는 큰외삼촌이 미치도록 한심하고 싫었다. 그깟 냉방비 아낀다고 할머니를 그렇게 놔둔것도 화나는데 더 화나는 것은 나의 이 개같은 위선이다. 할머니가 그렇게 오라고할땐 안가다가 돌아가신 후에야 이렇게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이 병신같은..
엄마가 평생 안고 갈 자책감도 걱정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 너무 소홀했다며 너무 힘들어하신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기에 더 큰 상실감을 가지고 계실거다. 의사소통 불구자인 아빠는 덮어두는 게 능사라며 배우자의 책임을 회피한다. 난 커서 아빠같은 남편은 되지 않을거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부부건만 .. 의사소통이 안되는 우리 엄마 아빠를 보고있자면 내가 답답하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니 온갖 불만은 나에게 흘러들어온다. 엄마의 흉을 아빠가 내게 말하고, 아빠의 흉을 엄마는 내게 말한다. 중간에서 난 혼란스럽다. 우리 집은 아무 문제없는 듯 보였는데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안되는구나... 서로의 감정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어느 한 부분이 왜곡되어버린 가정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