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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창작소설
홍연아는 인천 세관에 다녔다. 그녀가 공무원이었는지 아닌지는 자세히 모른다. 아마 그에 준하는 여성이었을 거라는 추측이다. 내가 왜 이리 애매 모호한 말을 하느냐 하면 홍연아가 세관직원이 아니라고 급구 부인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그녀는 세관직원이라는 신분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신분을 숨긴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다.
특수직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반드시 국가비밀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으며 또한 보안사항으로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 것을 생활화하고 있는데 그 원인이 있진 않을까 싶다.
그녀에게 전화를 하면 인천세관입니다. 라고 말한 것으로 봐선 인천항만청 세관 여직원이 거의 확실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속썩일 때마다 그녀는 "우리 직원을 부를 거야" 라는 말을 사용하곤 했다. 내가 "너희 직원이 누구인데"? 라고 되물으면 그녀는 눈을 예쁘게 흘기며 "나 아는 형사들 엄청 많어 혼나고 싶어"라는 말로 겁을 주곤 했다.
홍연아는 쭉 빠진 늘씬한 키에 사슴 같은 인상을 풍기는 어여쁜 아가씨이다. 그녀는 무척이나 내성적이고 얌전한 아가씨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갸름한 계란형으로 그녀의 해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까만 밤하늘의 은하수가 쏟아지며 별빛에 취해 나의 심장은 한동안 박동을 멈추었다.
어디 그뿐이랴, 그녀를 으스러지게 안아 보고 싶은 동물적인 충동 때문에 목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지그시 억누르는 곤욕을 치러야했다. 나는 그녀를 마주 바라 볼 때마다 내 안의 이성과 또 다른 나의 타오르는 욕망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
나는 군 생활을 인천 월미도에서 했다. 월미도 경비대에서 천또라이와 나는 단짝이었다.
그와는 선후배간이라 해도 군 생활이 불과 2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나이도 한 살 터울 지는 탓으로 그냥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다.
그가 또라이 라고 불리는데는 워낙 심성이 착하고 악의가 없으며 사람이 좋으니까, 그런 애칭이 생긴 것일 수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그는 여자들을 사귀는데 귀신같은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젊은 혈기를 갖진 전우들은 그런 그가 한없이 부럽기만 했고 동시에 애인 없는 병사들의 질투심을 유발하여 그를 천또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는 무려 50명이 넘는 아가씨들을 애인으로 사귀고 있었다.
한참 뛰어 놀며 젊음을 과시해야 할 나이에 철창신세 같은 병영생활은 병사들을 지치게 했는데 그런 악조건 속에서 벌어지는 천또라이의 애정행각은 부러움을 초월하여 신비스러움마저 들게 했다. 나는 그에 대한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고 그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천또라이와 함께 외박을 나가게 되었다. 나는 집에 가는 것을 제쳐 두고 그와 어울리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천또라이에게 여자 사귀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내심 거절하면 어찌하나 하는 조바심이 들었는데 그는 그런 일쯤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쉽게 허락을 하며 나를 이끌고 동 인천 역으로 향했다.
많은 인파가 소용돌이치는 어수선한 동인천역, 그곳에서 대담하게 펼치는 그의 활약은 너무도 놀랜 나머지 뒤로 홀라당 자빠질 만큼 충격적이었다.
혼잡하기로 소문난 한 동인천역 광장이니 오고가는 사람들이 오죽 많았겠는가. 어깨를 부딪치는 인파 중엔 아가씨들도 상당히 눈에 뜨이는데 천또라이는 그 중에서 비교적 예쁜 아가씨를 골라 접근했다.
역광장을 무심코 지나가는 아가씨에게 성큼 다가선 그의 몸짓엔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아주 당당히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천또라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가 아가씨를 꼬시는 것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그의 손동작, 입놀림, 얼굴표정 하나까지도 빠짐없이 머리에 새겨두고 견학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천또라이는 예쁜 아가씨에게 접근하여 이렇게 말했다.
천또라이: "꾸벅" 히힛 안녕하세요"
아가씨: "어머 누구시죠"
천또라이: "초면에 실례가 많군요"
"????"
저 휴가 나온 군인입니다 아가씨 모습에 반해서요"
"???!@!!@!!!
"펜팔 한번 해보고 싶거든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히힛"
" ???~~~~~!!!!!
처음 본 낯선 군인으로부터 펜팔제의를 받은 아가씨는 어리벙벙한 표정이 되어 당혹스러워 했다. -,.-;;
"저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 저는 인하대학교 3학년 다니다가 군인이 되었어요 지금 제대를 얼마 안 남긴 군인입니다 군 생활이 참으로 외롭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인파속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낮선 군인이 가까이 다가와 적극적으로 던지는 프로포즈, 난생처음 이런 일을 겪는 아가씨로선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답하는 아가씨의 목소리는 잔뜩 위축이 되어 목기소리만큼 작았다.-,.-*;;
천또라이: "실례인 되는 줄 잘 알겠지만 주소 좀 부탁드립니다"^^ ^^ ^@^"
아가씨: "네"-----****
아가씨가 몹시 난처해하든 말든 천또라이의 데쉬는 멈추지 않는다. 연신 굽실거리며 애원하는 천또라이의 행동은 순진한 아가씨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천또라이는 주소를 가르쳐 주겠다고 허락하기 이전에 잽싼 동작으로 흰 메모지를 아가씨의 가슴에 들이밀었다.
아가씨는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천또라이로부터 건네 받은 종이에 자신의 주소를 적는다. 아가씨는 국군장병 아저씨에게 뭔가 봉사활동을 했다는 심정이었을까. 아니면 인파가 붐비는 역광장에서 낯선 군인과 실랑이하는 것이 두려웠을까. 그 부분은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손쉽게 자신의 인적사항을 건네주는 아가씨의 행동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주소(인적 사항)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 받은 천또라이는 아가씨에게 다시 한번 깍듯히 예절을 갖추어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것은 그가 행하는 헌팅의 마지막 남은 절차인 듯 했다. 또한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몇 발자국 배웅해주는 세심한 배려를 한다. 그리고 언제 그런 준비를 했는지 모를 하얀 손수건을 흔드는 멋진(?) 폼까지 부린다.^o^**
이미 처음부터 정해 놓았던 예정된 코스인 1차 목적을 달성한 천또라이는 "히죽""히죽" 회심의 미소를 흘린다. 그는 어깨를 흔들며 보무도 당당한 개선 장군의 모습이었다. 이때 나는 연애 교수님(천또라이)의 실습을 겸한 기상천외한 강의에 한껏 놀라 있었다. 나는 조마조마했던 마음과 한없이 부러운 눈길과 약간은 비굴한 웃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아가씨를 꼬시는 일은 불과 5분만에 이뤄진다. 그런 일을 한시간 정도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천토라이의 호주머니엔 열 명의 꽃다운 애인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완벽하게 그의 기술을 전수 받았어야 하는데 중간에 잔머리를 굴렸다. 잔머리 굴린 것이 뭐냐 하면 천또라이가 흘리는 여자들에 대한 재 헌팅이다. 넘치면 흘러내린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에겐 꼬시는 여자들만큼이나 버리는 여자들도 무척 많았다.
"짱돌"
"응" 왜"
"나 편지 좀 써 주라"
천또라이는 비슷한 내용으로 여럿에게 보내는 글에 대하여 미숙했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대필을 사정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천병장" 연애편지는 내 전공분야 아니냐 걱정하지 말어 얘! 너 흘리고 다니는 여자 있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헤어지는 여자들 말이야"
"그래 있다"
"너랑 절교한 여자들은 어차피 너랑은 끝난 사이잖아"
"응" 그런데 뭘"( 멀뚱멀뚱한 표정)
"그런 여자 있으면 나 줘 임마"
천또라이는 여자를 양보하라는 내 말에 어이가 없나보다.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살핀다. 그렇다고 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야 친구 좋다는 것이 뭐냐? 네가 버리면 쨔샤 어차피 그 여자 다른 놈한테로 가잖어 아무렴 친구가 갖는 것이 좋지 않니? 그리고 짜샤 너 50명을 전부 데리고 살 것은 아니잖어 나 같으면 그 중에 제일 예쁜 가시나로 주겠다"
단호하고도 간곡한 내 요구를 천병장으로선 거절하기 힘들었나보다. 내 요청을 거절하면 우리들 우정에 금이 갈 수도 있다는 무언의 위협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봐"
대답을 해 놓고 천또라이는 뒤통수를 긁적인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애인을 양보한다는 것이 조금은 쑥스러운가보다.
"고맙다 라면 끊는 전우야 히힛"
그런 일이 있고 몇 일이 지난 후 그에게 넘겨받은 여자가 바로 홍연아였다.
"돌맹아 이 여자 너 가져 임마"
천병장이 내민 종이쪽지 안엔 홍연아의 주소와 인적사항이 들어 있었다.
"천병장" 너 이 여자 싫냐?
" 응 나 이 여자 정말 싫어"
"이 여자 못생긴 것 아니냐?
나는 천또라이가 방금 건네준 종이쪽지속의 홍연아의 인적사항을 가리키며 조금은 불안해진 표정으로 그의 의중을 실험해 본다.
"야 너, 나를 어떻게 보는 거냐? 내가 웬만한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줄 놈이냐!
짜식 특별연수교육(동인천역의 아가씨 헌팅을 말함)까지 다녀온 놈이 우째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느냐?
" 푸하하하핫 미안! 미~~~안! 알았어 라면 끊는 전우야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그리고 우리는 군 매점으로 달려가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빨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 아이스크림은 홍연아를 건네준 보답으로 내가 산 아이스크림이다.
나는 주머니에 들어있는 회심의 전리품인 홍연아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는 메모지를 꺼내어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 메모지를 요리보고 조리 보고를 꽤 여러 번 반복했다.
나는 그 즉시로 연아를 향한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주특기가 유감 없이 발휘되는 순간을 미룰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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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연아님!
까아만 밤입니다 소리 없이 깊어만 가는 어둠의 장막, 그 너머에서 고운 꿈에 잠든 연아님을 그려봅니다. 옷깃만 살짝 스쳐도 인연이라 했지요. 가느다란 인연 한 조각을 부여잡고 소리 죽여 연아님을 불러 봅니다.
천병장님으로부터 소개를 받고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연아님!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생소한 저의 글을 받으시고 얼마나 놀라셨는지요? 졸렬한 제가 이렇게 펜을 들어 인사말씀 올리는 것에 대하여 넓으신 아량이 있으시길 빕니다.
홍 연아님! 우리들이 펜팔이란 만남을 통하여 저의 힘든 군 생활과 님의 고독한 영혼을 서로 위로해 주고 감싸주는 빛고운 우정이 되길 간절히 염원합니다.
벗이여!
나는 너에게 내 손을 준다
내 자신을 벗에게 보낸다
벗도 나에게 손을 주겠는가
영원히 벗할 수 있겠는가
인생의 산보자로 나를
받아들이겠는가!
외롭고 고된 나날로 얼룩져진 군 생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만남이 복된 만남으로 이어지길 다시 한번 소망해 봅니다. 또한 암울한 어둠 속을 뚫고 은빛 물결로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처럼 한줄기 빛이 되어 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핑크빛 파노라마와 연아님의 무지개빛 향연들이 함께 어우러진 축복으로 환생하길 소원합니다.
연아님!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그 뜻이 이뤄지시길 빌면서...
그럼 목마름처럼 님의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짱돌멩이 올림
연아에게 편지를 쓴지 4일만에 답신이 왔다. 혹여 답신이 안 올 것에 대비하여 제 2 탄의 편지까지 미리 치밀하게 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던 나로서는 조금은 허망한 일이다. 단 한 통의 편지를 통하여 천병장을 향하던 연아의 마음이 쉽게 나에게로 와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또한 우습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 내 편지 문구가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다. 아무튼 나로서는 너무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 절친한 친구인 천또라이가 걱정되었다.
여자 문제로 단짝인 천또라이를 잃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연아를 향한 그의 마음을 재확인하고 싶었다. 주위에서 들리는 말로는 남자들끼리 여자 문제로 우정에 금이 가고 큰 싸움으로 번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온 나로서는 홍연아와의 교재는 불안한 모험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천병장(천또라이) 너 내가 연아를 진짜 가져도 괜찮겠니?
"응 쨔샤 괜찮다니까 그러네"
"정말이냐? 너 섭섭한 것 아니야?
"그래 나 하나도 안 섭섭해 걱정하지마"
나는 몇 번인가를 천또라이에게 다짐을 받은 후 아무런 표정변화가 없는 그를 확인하고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홍연아에 대한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했다.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는 깨소금 같은 시간들이 한 달 정도 흘러갔을 때였다. 면회소 근무병사로부터 연아가 찾아왔으니 속히 면회소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훔쳐먹다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와 나는 서너 통 정도의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는 나에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연아가 한 편 더 없이 반가웠고 실망하여 돌아서면 어쩌나하는 두렵기도 한 뒤엉켜 버린 묘한 심정에 휩싸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면회 온 연아를 서둘러 만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녀를 만나러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갔다. 숨가쁘게 군 면회소에 들어서자 어여쁜 연아의 모습이 빨려 들듯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엉덩이에 착 달라붙은 하이얀 색 판타롱 나팔바지에 연한 핑크색 부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남자들만이 모여 있는 군대에선 치마만 입고 있어도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으로 비쳐지는데 환상적인 율동미와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의 모습은 심장이 멈춰버린 듯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처음 만남이기 때문일까, 연아는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놀란 토끼 눈이 된다. 그리고 금새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 되어 시선을 어디로 고정시켜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이다 . 나는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 저" 제가 짱돌입니다 우리 초면이죠 저~~~ 반갑습니다"
"네" 홍연아라고 합니다"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바다도 구경할 겸 돌멩이님도 만나 볼 겸 찾아왔어요"
네" 그렇군요" 이렇게 찾아 주시니 참으로 기쁘기 이를 데 없군요"
처음 공중을 날아가는 파일러트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나의 기분은 오색 환상의 구름동산을 나뒹구는 기분이었다. 그녀도 긴장했는지 탁자 위의 캔 오렌지 주스를 이유 없이 만지작거리는 작고 예쁜 손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렇게 어색한 만남이 얼마쯤 흘러가자 떨리던 연아의 목소리도 차츰 밝은 빛을 내며 안정을 되찾아간다.
"연아씨! 오늘 함께 할 시간이 있으신 지요?
나는 좀더 적극적으로 리드할 필요성으로 함께 할 수 있냐는 말을 건넨 것인데 그녀는 면회소 바닥만을 응시한 채 몹시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해야하는 듯이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좋아요"
"연아님! 그럼 죄송하지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옷을 갈아입고 외출 허가를 받아야 하거든요"
"네"
연아를 위병소에 앉혀 두고 나는 즉시로 외출을 신청하여 외출증을 받아들었다. 당시 군 행정상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여자친구가 면회 올 경우는 무조건 외출이나 외박을 허용해 주었다. 나는 외출이나 휴가를 대비하여 땀흘려 손을 보아 둔 삐까번쩍 빛나는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외출복은 나의 비장의 무기였다. 옷에 풀을 먹이고 다리미질을 얼마나 많이 하였으면 전우들은 바지주름에 손이 베이니 조심하라는 농담을 건네 오곤 했다. 외출복을 갈아입음과 동시에 부리나케 홍연아가 있는 면회소로 달려갔다.
"기다리시느라고 힘드셨죠"
"아니에요"
연아는 여전히 눈길을 바닥에 두고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저 그럼 이제 가실까요?
아직은 첫 대면으로 수줍음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다. 내가 약간 앞장을 서고 연아가 3보 뒤에 쫓아오는 형태로 걸음을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 당도하자 연아는 이렇게 말했다.
"저 오늘 서울 삼촌댁에 가야 하는데요"
"삼촌 집이 어디인데요?
"네 서울 서대문구입니다"
"외박증을 끊고 나왔거든요 함께 가시면 안될까요 저의 집도 서울 강남구 청담동이랍
니다"
"네 그렇게 하지죠 그럼 저는 집에 가서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저기 수정 다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다녀오시죠"
버스정유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수정다방이 있었다. 뽀얀 담배 연기를 벗을 삼아 한 껏 들뜬 마음을 달래며 기다린지 약 1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연아는 핑크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좀 전의 발랄했던 나팔바지 차림에서 새롭게 꽃자주빛 한복으로 곱게 단장한 그녀는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인줄 착각할 만큼 변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황홀한 멋에 취해 멍청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우리들은 서둘러 하인천전철역을 향했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바람 따라 출렁대는 연아의 핑크빛 치맛자락이 젊은 내 영혼을 하늘 높이 둥둥 띄우고 있었다.
[연아와 천또라이의 만남]
연아는 여고를 막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취업이 된 곳이 인천 연안부두 관세청이다. 그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고집이 센 편이다. 친구도 별로 없고 혼자 있길 좋아했다.
연아가 천병장(천또라이)을 만난 것은 회사를 퇴근하고 버스를 기다리던 하인천 정류장이다.
시내를 벗어난 외곽지역이라 시내버스는 운이 좋으면 금방 오기도 하지만 손님이 밀리면 30분 이상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날 따라 버스는 도착시간이 지냈는데도 오지 않고 지루한 마음을 달랠 겸 버스가 올 방향을 향해 초조한 마음으로 응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연아를 부른다.
"아가씨"! "저기 아가씨"
연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멋진 연녹색 군복으로 한껏 폼을 낸 군인(천도라이)이였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 그는 어느새 연아 앞에 서 있었다. 군 의장대나 군악대 혹은 군 장교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는 너무나 멋진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런 천병장은 연아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연아는 얼떨결에 마주 인사를 하고 누구일까 의아해하며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 당혹해 하는 연아의 표정엔 아랑 곳 없이 그는 씩씩한 목소리로 또 이렇게 말을 한다.
"저 휴가 나온 군인입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인사를 드립니다"
이미 인사를 했는데도 천병장은 또 한 번 정중하면서 깍듯히 인사를 한다. 낮선 군인을 난생 처음 대면한 연아는 행인들이 오가는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이 참으로 기가 막히며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그런 연아의 입장엔 아랑곳하지 않고 천병장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이런 말을 건네 온다.
"저 아가씨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인사드립니다. 펜팔을 한번 해보고 싶군요. 군 생활이 너무 외롭고 힘이 든답니다. 저는 인하공대 3학년 다니다가 군인이 되었어요"
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에 대한 설명을 순식간에 해나갔다. 그리고 중택은 연아가 미쳐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흰 메모지와 볼펜을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중택이가 건네준 메모지와 볼펜을 건네 받았다.
[까짓 것 펜팔인데 무슨 일이 있을까]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중택의 군 생활이 얼마나 외로우면 길거리에서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것일까 하는 안쓰러움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씩씩하고 늠름한 군인에게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묘한 희열과 기쁨이 가슴을 들뜨게 한다. 연아는 주소와 인적 사항을 적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학창시절 국군 장병 아저씨에게라는 제목으로 의무적으로 위문편지를 쓰던 기억 때문에 군인과의 펜팔에 대하여 별로 부담을 갖질 않은 원인도 있었다. 무엇보다 연아의 모습에 호감을 가지고 그녀를 선택 택했다는 중택의 그 말 한마디가 연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5 일이 지났다. 연아의 집엔 중택의 편지가 와 있었다. 반가움과 미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설레임이 뒤엉켜버린 심정으로 중택의 편지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중택의 편지를 펼쳐 든 연아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홍연아님께
안녕하십니까?
천 중택입니다.
별일은 없으신지 몹시 궁금하군요?
보고싶은 연아님!
그 날 버스 정류장에서 처음 대면한 연아님의 모습은 저에게 한 장의 뚜렷한 칼라사진으로 남아 이렇게 긴긴밤을 잠 못 이루게 합니다.
저 멀리서 소쩍새 우는소리가 들리는군요. 구슬피 울어대는 소쩍새가 익어 가는 한 여름밤의 그리움을 뿌려줍니다. 촉촉이 젖어 드는 밤이슬처럼, 은은히 풍겨 오는 라일락 행운처럼 소리 죽여 불러 보는 홍연아란 그 이름 석자는 왠지 낯설지 않고 오랜 지우인듯 떨리는 가슴 가눌 길 없군요.
그때 버스 정류장에서 혹시 연아님께서 펜팔을 거절하시면 어쩌나 싶어 마음속으로 얼마나 가슴 태웠는지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 님의 주소를 가르쳐 주시고 함께 할 수 있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점, 늦게나마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는 제대 후엔 못다 한 대학 공부를 마치고 미국 공과대학에 유학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고생이 염려가 되어 유학을 안 가려고 했는데... 제가 막내이다 보니 부모님께서 더욱 신경을 쓰시나봐요. 유학을 강력히 권하는 부모님의 요청을 뿌리치기 힘이 듭니다.
살포시 내려앉은 어둠
깊어만 가는 밤,
밤하늘의 은하수가
은색 포도알로
알알이 여물어 가는 이 밤에
연아님과 엮어갈
변치 않는 우정의 이야기와
연분홍 사연들을 모아
금빛 달무리에
흩날려보는 이 시간
짜릿한 감동이 맴도는
황홀한 밤입니다
힘들고 외로운 시간속에서도
오로지 연아님만 생각하면
힘이 철철 흘러 넘칩니다.
그럼 연아님의 꽃분홍 향기가
가득 담긴 소식을 기다립니다.
연아님이 제게 주실 소식은
오랜 가뭄 끄트머리,
쏟아지는 한줄기 소낙비처럼
내 가슴의 심금을
하염없이 울리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어여쁘신 연아님!
항상 건강하시고, 어여쁘시고
행복한 삶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병장 천 중 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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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택과 연아가 편지를 주고받은 것도 벌써 다섯 번째이다. 그저 군 생활이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단순한 위로의 글로 시작한 일인데 이렇게 가슴 깊이 자리할 줄은 그녀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바다엔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물속으로 곤두박질 치듯이 비행하는 갈매기 떼, 멀리서 때론 아주 가까이에서 바다를 가르며 바삐 물가름을 하는 연락선과 어선들, 머나먼 이국 땅에서 화물을 싣고 온 커다란 상선은 거대한 기중기의 힘을 빌려 연신 무거운 화물을 쏟아내느라 바삐 움직인다.
이런 장면은 사무실의 창문을 통하여 늘 보아왔지만 왠지 처음 보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상념에 젖는다. 연아는 중택과 점점 달아오르는 사랑을 통하여 자신이 생각해도 신비롭고 놀라운 심정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중택씨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푸른 하늘에 떠가는 작은 조각구름을 보며 먼지 낀 내무반의 창가를 홀로 서성거리며 하염없이 그리움을 태우는 것은 아닐까!? 날개가 있다면 훨훨 날아가서 중택씨가 있는 창가에 앉아 그리운 그이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중택씨! 커다랗게 질러 댄 큰 소리에 놀라 거대한 바다가 뒤집어지도록 목이 터져라 불러 보고 싶은 이름이여! 내 사랑이여!”
"아! 중택씨~~~!!!!
연아는 중택이의 이름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소리나지 않게 나직히 힘주어 불러본다. 이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부르며 어깨를 톡톡 친다.
"연아야 얘 연아야"
"응""희정이구나" 왜?
"너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몰하게 하니"
"응" 아무것도 아니야"
"계집애 너 아무래도 이상하다 얘"
"뭐가?
"응" 전엔 너 안 그랬는데" 근무시간에 넋을 놓고 창가만을 줄곧 응시하는 걸 보면 너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구나?
"기집애두 무슨 일은, 뭐가 무슨 일이냐 니 할 일이나 해"
"연아야 너 연애하지? 그렇지? 내 눈은 못 속인다 그 남자 누구냐? 궁금하다 얘"
"얘 너 제발 신경 좀 끊어라 내가 지금 21살인데 연애할 남자라도 있으면 좋겠다"
희정과 연아는 단짝이다. 늘 붙어 다니며 서로를 염려해 주고 아껴 주는 사이였으며 여자들 세계의 전형적인 절친한 친구이다.
희정은 자신의 예감이 빗나 간데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지만 밝고 명랑했던 연아가 요즘 들어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기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을 거란 막연한 궁금증을 가진다.
연아는 희정에게 중택과의 관계를 얘기하고 푼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모든 것을 희정에게 밝히기엔 중택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비록 절친한 친구일지라도 그이와의 애틋한 마음이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모든 것을 말해 주리란 각오였다.
꿈같은 데이트
담배 연기 자욱한 영 다방을 뒤로하고 중택과 연아는 월미도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멀리서 길게 누워있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득하게 손짓하는 영종도, 드넓은 바다의 적막을 가르고 통통소리를 내는 무리 진 어선들, 저물어 가는 바다엔 거친 파도와 싸우며 고단했던 하루해를 마감하고 밤의 휴식을 찾아 크고 작은 어선들이 부두로 몰려든다. 먼 항해 길을 떠나온 지친 삶의 훈장인 듯 까맣게 그슬린 어부들의 바쁜 몸놀림에 고단한 삶의 한숨이 풀풀 묻어난다.
어선들을 반기는 갈매기 떼의 몸짓이 흰 강아지의 재롱만큼이나 눈을 간지럽힌다. 주인을 반기는 강아지가 연신 꼬리를 치며 바짓가랑이를 물고 흔들 듯이 갈메기떼는 어선들의 움직임을 따라 하늘 가득히 이리저리 어지러운 흰 물결을 뿜어내고 있었다.
넘치는 파도가 물고 온 소금끼 머금은 비릿한 바다바람, 그 속에 담긴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오솔길이 중택과 연아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했다. 먼 바다에서 희미한 수평선 끝자락을 서서히 태워오는 붉은 노을이 푸른 바다를 지글지글 삼키고 있었다. 노을이 바다를 삼켜버리자 하늘 한 귀퉁이가 시뻘건 불기둥으로 누워있고 차츰 어둠의 검은 연기가 기다란 장막을 드리운다.
.
"연아씨 춥지 않아"
중택은 한여름의 바다이지만 혹여 바닷바람이 괴로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연아의 의중을 물어본다.
"네" 춥지 않아요 모처럼 맛보는 바닷바람이 너무도 상큼하군요"
연아는 희미하게 미소짓는다.
중택은 연아의 가족사항이 궁금했다.
"부모님은 다 무고 하시구요 형제들은 또 어찌 지내는지요?
직접적으로 연아의 가족 사항을 묻기가 쑥스러웠던 중택은 안부인사를 대신하여 간접적으로 묻는다. 이를 눈치챈 연아가 쑥스러운지 입을 가리고 얼굴을 숙이며 잠시 가던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소리 죽여 웃는다.
"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님과 동생들이 있지요"
"네 그렇군요"
중택은 가장이 없는 불우한 가정을 가진 연아의 고단했을 어린 시절이 연상이 되어 잠시 목이 메인다.
"연아씨!
"네"
"연아씨는 꿈이 뭐예요"
연아는 꿈이 뭐냐고 묻자 갑자기 망막하다. 그리고 어렵게 장사를 하며 집안을 이끌어 가는 어머님의 주름진 손등과 삶에 지친 안쓰러운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은 장녀로서 어머님을 도와주고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뒷바라지하며 결혼을 늦게 하리라는 굳은 다짐을 했던 기억이 되 살아났다.
연아는 중택의 느닷없는 질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빈혈에 시달렸다. 그런 이유로 겁이 많았고 왠지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체념을 하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중택/ 연아!~~연아씨~~!!
중택은 연아의 어깨를 살짝 건드린다.
연아/ "네~~에"
중택이 약간은 짓궂게 어깨를 건들이자 연아는 짐짓 놀랜다. 또한 그이의 질문에 아무런 응대를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는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녀는 어색한 순간에서 벗어나고자 살며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아씨! 배고프지 우리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응"
중택은 다정하게 연아의 손목을 이끌며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했다. 연아는 중택의 낮선 손아귀를 가볍게 뿌리치지만 그 힘은 미약했다. 마음만 뿌리치고 싶었을 뿐 그이의 손아귀에서 도저히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아니 어저면 연아는 중택이 자신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보듬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연아는 중택의 손이 무척이나 따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푸른 제복을 멋들어지게 걸쳐 입은 중택, 노을빛 햇살을 머금은 구릿빛 얼굴, 그이는 노을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눈동자에선 연아를 향한 애증의 별빛이 쏟아지고 그녀는 허공을 두둥실 유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택을 가까이 둔 연아는 중택이 내뿜는 젊음의 향기와 두근거리는 사랑의 열기가 몸을 가눌 수 없으리 만치 황홀한 나락, 그 한가운데를 걷는 아늑함에 이끌려 하염없이 젖어들었다.
[중택 만나다]
"여보세요"
"죄송합니다만 홍연아씨 좀 부탁합니다"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홍연아에게 전화 받으라고 말하는 희정의 목소리가 중택의 귀에까지 가느다랗게 들려 온다
"네" 누구세요"
"연아씨군요 하하하하하"'
"저 천 중택병장입니다"
연아/"아~~!!!"네에"
홍연아는 잠시 머뭇거리며 작은 소리로 대답한다. 타는 갈증과 같이 기다리던 중택의 목소리이건만... 이렇게 갑자기 그이의 전화를 받고 보니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처음 대면하던 버스정류장에서 환하게 미소짓던 그의 늠름한 영상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연아님 반갑군요" "그 동안 별 일 없으시구요"
느닷없이 찾아든 전화에 잠시 대화를 머뭇거리는 그 사이에 중택의 깍듯한 인사말이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네 별일 없습니다"
"네 제가 오늘 외박을 나왔거든요"
"네 "
"연아씨를 동인천역 근처에서 한번 뵙고 싶거든요 퇴근 후에 시간이 있으시면 차라도 한잔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6시 넘어야 퇴근을 하는데요"
"네 괜잖습니다 저는 기다리는데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랍니다 그러니 염려 마세요 기다리는 동안 줄곧 연아씨만을 생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줄곧 자신만을 생각해준다는 중택의 말에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 참느라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무진 애를 쓴다.
"동인천역 있는 근처의 영다방이라고 아시나요"
"네 잘 알아요"
"그곳으로 나오세요"
"네 6시반 정도면 만나실 수 있겠네요"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어요 수고하십시요 연아님"
"네"
중택은 공중 전화박스에서 수첩을 꺼내들고 은숙 영희 강화 영숙 은영이 등등 무려 열 군데가 넘는 여자친구들에게 전화를 한다.
"여보세요" 은숙이니?
"누구세요"
"나 천병장이야"
"어머 천병장님 휴가 나온신 거에요"
"아냐 외박 나왔어"
"네에"
은숙은 외박이란 말에 다소 실망했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힘이 쭉 빠진다.
"왜? 기분 나뻐"
"피~~~이""아니 뭐 기분 나쁠 것까지 없구 휴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 것에요"
"별일 없나 궁금해서 전화를 한 것이야 은숙이가 정말로 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 정말 내가 보고싶은 거야 괜히 해본 소리 아녀"
은숙아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냐? 괜히 해본 소리라는 말, 너 절대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라 나 그 소리 또 들으면 진짜로 화낼 거야"
중택의 목소리는 다소 톤이 높아지면서 격앙되어 있었다.
"알았어 미안해 다신 그런 소리 안할께 화내지 말어 정말 미안해"
좀 전의 명랑하며 자신감에 넘치던 은숙의 목소리는 약간 풀이 죽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심했나봐 네가 내 마음을 몰라주니 순간적으로 흥분했던 것이야 그러니 너도 너무 마음에 두지 말어 나 좀 전의 일 다 잊었다 알았지 은숙아"
"응 고마워"
은숙은 잠시 전에 중택의 마음을 실험하려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언제나 변함 없이 굳은 믿음과 늘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천병장이다. 은숙은 분홍 비단치마를 곱게 차려입고 꽃구름 위를 걷는 황홀한 환상에 빠져든다.
"오늘 시간 있어"
은숙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자신이 먼저 중택에게 만날 것을 제의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체면이 필요하겠는가하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것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가진 은숙이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아참 그것을 이야기 안 했다"
"뭔데?
"오늘 우리가족들이 다 모여서 회식하는 날인데 어쩌면 좋지 너한테 저번 때 말 했잖어 미국간 큰 형 말이야 그 형이 방학이라서 잠시 귀국했거든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회식하자고 미리 약속이 되어 있어 그래서 나도 특별외박을 신청하고 이렇게 나온 것이야"
"그럼 내일은 안될까?
"내일은 부대에 귀대를 하는 날이잖아 너 만날 시간이 없을 것 같애 어떻하지 "
"나는 회사에 결근을 하면 되는데.....
"은숙아 너 마음을 크게 가져라 우리들이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나 많은데 초조하게 생각하면 주위 사람들이 비웃는다 네가 남자랑 데이트를 위해서 회사에 빠진 것을, 누군가 알면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을 하겠니?
"하긴 그러네 내가 너무 내 욕심만 생각했나봐"
"은숙아 나는 말이다 너를 만나고 싶어서 아주 탈영하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야 하지만 그럴 적마다 앞으로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야 할 긴 시간들을 생각했단다 지금은 비록 괴롭더라도 순간적인 욕망들에서 눈을 돌리고 참는 인내의 미덕을 생각해야 해 "
"중택씨 미안해 내가 너무나 경솔했어 날 보고 싶어도 절대로 탈영하면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나 탈영 안 해 그리고 네 마음 충분히 이해해 나도 사실은 네 마음과 같거든 하지만 나 마저 흔들리면 우리 둘 사이는 정말 힘들어지잖니 내 말 알았지? 은숙아"
"응 알았어"
"그럼 이만 전화 끊는다 항상 몸 건강하구"
"응 부대에 귀대하기 전에 꼭 전화해 알았지 몸조심하구"
"그래 염려 말어 내가 누군데 널 잊겠냐 안녕"
"또 만나 안녕"
중택은 은숙에게 전화를 끊고 영희, 강화, 영숙, 은영 등등의 여자 친구들에게 은숙이에게 행했던 식의 말들과 같은 내용을 비슷하게 엮어서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자신에게 속아주는 여자들이 한편으로는 귀엽고 또 한편으로는 그럴 수 없이 유쾌한 심정이었다.
애당초 중택은 여자에 대하여 어떤 악의를 가지고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5형제의 집안에 막내인 중택에게 집안에서 여자라고는 어머니 한 분뿐이다.
아버지는 고향이 황해도이고 육이오 사변 때 월남을 하셨다. 아버지의 일가친척과 부모형제는 전부 이북에 계셨으며 4형제가 모두 남자들이다. 이렇게 집안에 여자라곤 어머니 밖에 없는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성장한 중택은 어릴 적부터 어머님이 유일한 여자로 알고 성장해 왔으며 여자에 대하여 막연하게나마 동경과 환상을 키워왔다.
특히 어머니는 중택의 어리광을 그럴 수 없이 너그러이 받아주시고 형들과의 다툼에서도 자신이 먼저 형들을 골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늘 일방적으로 중택의 편을 들어주셨다. 형들의 입장에선 그런 어머님의 태도가 야속했을 것이다. 형들은 동생이지만 중택과 함께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동생을 잘 돌봐주지 않는다고 호통치는 어머님 때문에 난처한 곤경에 빠졌기에 말썽 많은 동생이 눈엣가시처럼 성가시기만 했다.
나이가 들면 철이 든다고 했던가, 이제 중택의 나이도 20세가 되고 보니 서먹서먹했던 형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원만해졌다. 그런데 성인이 되자 어릴 적부터 자릴 잡은 여자들에 대한 막연한 환상은 그대로였는데 그런 심정이 이성교재에서 나타났다.
만나는 여자들마다 전부 예뻐 보이고 사귀고픈 욕심에 사로잡힌다. 중택은 그것이 제비기질인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속칭 여자에게 돈을 뜯고 골려주는 악덕 제비가 아닌 이 여자 저 여자를 상대로 즐기자는 바람둥이형이며 한량 기질을 타고 난 것이다.
연아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중택은 당구장을 찾았다. 그의 당구 실력은 150을 친다. 하지만 그의 실제로 당구실력은 250 이나 300실력이다. 그는 150을 놓고 져본 기억이 없다.
중택은 150을 놓고 치다가 2판은 이기면 영리하게도 한판은 일부러 져준다. 게임을 일방적으로 이기기만 하면 상대방 선수가 당구가 짜다고 놀릴 것이 분명하며 심지어는 사기당구라고 악담하며 욕설을 퍼붓는 사람까지 있기에 두 판을 이기면 한 판은 꼭 져주는 꾀를 부리고 있었다.
당구장에서 처음 만난 상대와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중택은 연아와의 약속한 시간을 기억해 냈다. 시계는 저녁 6시20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게임 벗으로서 자신을 상대해준 손님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당구장 문을 나선다.
계속 이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글 후기
소설이라곤 난생처음 써본 소설이 [첫사랑]라는 윗 소설이다. 맨 처음 쓴 원본은 소설이랄 수도 없었다. 아무런 형식도 없이 그냥 생각나는 데로 주절거린 글이니 그런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에게 벅찬 감격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초안으로 엉성하게 꾸며졌던 본래의 소설[첫사랑]을 가지고 자욱한 안개속을 헤매는 듯한 힘겨운 싸움은 시작되었다. [나의 글이 곧 나의 진정한 글 스승]이란 각오로 뭔가 허점은 없나 검토하고 수정하고 고치고 보완하는 일을 수십 번 반복했다. 어떨 땐 글(소설창작)을 연구한다는 것이 너무나 머리 아파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천리 길도 한 걸음씩이라 했듯이 하나하나 배운다는 자세로 끈기 있게 매달렸다.
그런 노력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글의 맥락과 허점들이 서서히 보이며 글에 대한 구도가 제법 그럴싸하게 잡혀가는 나 자신의 글 실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누구라도 오를 수 없는 까마득히 높은 절망의 절벽을 사투 끝에 올라간 암벽등반가의 심정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황홀경이였다.
나는 여느 소설을 볼 때마다 내가 소설의 주인공인 듯 착각한다. 또한 소설의 주인공이 그럴 수 없이 부러웠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소설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질 않았다. 그리하여 내가 만든 소설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되길 자청했다.
독자들은 내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이 글을 실화로 알고 나에게 바람둥이 아니냐고 묻기도 하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이 글은 실화가 아니고 필자가 꾸민 가상의 이야기이며 단순한 소설에 불과하다. 또한 나는 바람둥이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사랑에 목말라하기 때문에 남녀간을 주제로 한 사랑 시라든가 그에 준하는 소설을 쓰는데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
이강석 올림 ^*^
첫댓글 허~거~덩~!!! 님아~~~!!! 하루에 조금씩 올려 주심 안될까요??? 눈이 @#$%$%^&&%$##@ 합니다요... 내가 쪼매 이상하나??? 존 글이 넘 길어서.... 나중에 시간 남 읽어야 겠네여...
감사합니다.^^*
애~고 다읽을려면 힘도든디...참 고생하셨네요.ㅎㅎㅎ좋은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재미있다고 말씀하시면 이어서 계속 쓰려고 했는데 아무도 그런말 안하네요. ㅜㅜㅜㅜ
읽기 쉽게... 조금씩 잘라서 하루에 쪼매씩 올려 주소.... 그람 독후감 제출 할께여...ㅎㅎㅎ
강석님~재미있게 읽었어요~하지만 글은 좀 짧으면 더 쉽게 읽히 겠지요?그리고 재미까지 있음 금상첨화~ㅎ~긴글 수고 많으셨어요~건필하소서~^.~
넘 길다요...쪼매씩만 쪼개서 올림 좋을낀데...다시한번 천천히 읽을께요..
감사합니다.^^*
내안의 천사님,베사메님 감사합니다.^^* 님들의 뜻을 존중하여 짧게 올릴게요. ㅎㅎㅎㅎ
후~아~ 다 읽었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인가?? 글 때문인가?? 머리 아포....ㅎㅎㅎ... 일단은 잘 읽었슴돠....담 편은 쪼매 짧게 부탁 함돠...도대체 분량이 얼마나 되는디요??? 앞으로 내 머리 깨지게 생겼당...ㅠㅠ... 이렇게 길면.... 우띄 안 읽어 줄끼야요...ㅎ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실력이 보통이 아니시네여..계속 이방에 올려주시면 안될까여?,,,Ch00┃순정 애정소설으로 올려주소서..^^
원래 소설 제목이 창피하게 왜그러니란 것인데 제목이 너무 위압감을 주기에 첫사랑으로 바꾸었어요.그런데 글 실력이 있어야 연재를 하죠. 잘나가다가 제가 꼭 삼천포로 빠집니다. 어느정도 글을 쓰면 콱 막혀서 글이 한줄도 안나옵니다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