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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사무 1,24-28
복 음 : 루카 1,46-56
그때에
46 마리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7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48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49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50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51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52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53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54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55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56 마리아는 석 달가량 엘리사벳과 함께 지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나빔anawim’의 노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주석책을 보던 중 한눈에 반갑게 와 닿은 ‘아나빔anawim’이란 말마디였고
지체 없이 강론 제목을 ‘아나빔anawim의 노래’로 택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찬미 감사가인 마니피캇이나 화답송 후렴의 한나의 찬미감사가가 모두 아나빔의 노래입니다.
아나빔anawim이란 하느님밖에 의지할 것이 없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나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 모두가 본질적으로 하느님밖에 의지할 이 없는 아나빔임을 깨닫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함께 부르는 떼 창은 얼마나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지요.
얼마 전 우연히 유투브를 통해 광화문 촛불집회 시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모 가수의 애국가를 들으며,
또 모가수의 아침이슬을 들으며 순간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함께 떼 창을 하는 모습이 참 숙연해 보였습니다. 흡사 아나빔의 노래를 연상케 했습니다.
예로부터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민초들의 애환哀歡과 소망所望이 담긴
민초民草들을 위무慰撫하는 민요들 역시 일종의 아나빔의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노래의 힘은 위대합니다.
이의 가장 적합한 본보기가 우리 분도수도승들이 매일 평생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함께 노래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입니다.
그러니 우리 수도승들은 아나빔의 후예들이고 대부분의 시편 찬미가들은 아나빔의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누가 무슨 기쁨으로 사는가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삽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 분도수도자들의 고백일 것입니다.
사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매일 ‘하느님의 노래방(?)’ 이라 일컫는 수도원 성전에서 하루 일곱 번의 아나빔의 노래인
시편 찬미가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면서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전례의 궁극 목적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나빔의 노래인 시편 찬미가를 부르며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위로와 치유의 구원을 체험하는 수도자들입니다.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바치는 아나빔의 노래, 시편찬미가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노래를 뺏는 것은 죽음과도 같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의 마리아는 살기위해 하느님께 기쁨과 감사의 마니피캇 찬미가를 바치지 않습니까?
기뻐도 찬미, 슬퍼도 찬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해야 살 수 있는 아나빔들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이렇게 하느님께 찬미감사가를 노래함으로 맺힌 한을 풀어야 살 수 있습니다.
아나빔의 대표격인 마리아와 한나입니다. 마리아와 한나의 처지가 참 흡사합니다.
마치 옛 우리 신앙의 어머니들을 대하는 느낌입니다.
기도로 얻은 아들이라 다시 하느님께 바치는 가난한 한나는 진정 아나빔의 전형입니다.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고백한 후 예배를 드리며 터져 나온 한나의 노래가 바로 1독서후 이어지는 화답송입니다.
영원한 도반 엘리사벳의 구원의 위로와 격려를 받은 후 즉시 터져 나온 마리아의 노래가 바로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두 가난한 여인의 기도 내용 역시 흡사합니다. 주님 안에서 구원받아 기뻐 뛰는 가난한 영혼들이
구원자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감사가의 본격적 내용은 과히 혁명적입니다.
가난한 여인들의 입을 빌려 고백한 가난한 민초들의 소망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가난한 민초들의 애환과 소망이 가득 담긴 만민평등의 하늘나라를 꿈꾸며 바친
영원불멸의 찬미감사가 성모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입니다.
하여 주님의 종인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교회의 수도자들은 매일 저녁 성무일도 끝 무렵에
한 목소리로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께 마니피캇을 바칩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당신의 아나빔인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끝으로 가난한 아나빔의 간원기도와도 같은 오늘 저녁성무일도 ‘오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 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성인 천 명을 세 그룹으로 나눠서 각각 다른 내용의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자신의 기분을 숫자 1~6으로 객관화시켜서 간단하게 표시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그룹은 짜증났던 일을 자세히 쓰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은 하루 중에서 좋았던 일을 자세히 적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관찰한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특별히 어떤 그룹이 행복감이 크게 증가했을까요?
좋은 기억을 쓴 사람들의 행복감이 크게 증가했습니다.
하루는 하루 24시간, 아니 어쩌면 내 삶 전체가 행복으로 가득 차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얻으려고 하고, 또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노력을 평생 기울인다고 해도 과연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을 만들 수가 있을까요?
사실 행복만이 있는 삶은 절대로 있지 않으며, 또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앞선 실험에서 보듯이 자신의 삶을 별 것 아닌 것처럼 간단하게 생각하는 것은 행복해지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또한 짜증나는 나쁜 기억을 기억하는 것 역시 행복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딱 하나의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은 어떨까요? 사실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자신에게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기는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건네는 기분 좋은 인사말, 산책을 하기에 좋은 날씨,
뒤뚱거리면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웃는 어린아이의 모습 등을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좋은 일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작은 것을 통해서도 좋은 기억을 충분히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우리들이 잘 아는 ‘마리아의 노래’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어떻습니까?
구구절절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계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분,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분이라고 고백하십니다.
사실 이런 이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불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모님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모든 세대가 성모님을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단순히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고 깨닫기 때문에 행복하신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혹시 행복할 수 없는 이유만을 들면서 내게 찾아온 행복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은 자식에 대한 감사의 예배요,
<화답송>은 그 때 드린 한나의 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들은 “마리아의 노래”는 자비의 노래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크게 드러내는 노래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는 노래입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찬미의 노래요,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혁명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에서, 마리아는 당신 영혼이 주님 앞에서 용약하며 기뻐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마리아는 하느님께서는 작고 보잘것없고 비천함을 결코 무시하거나 거들떠보지 않으심을 노래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자리를 눈여겨보시고 다정하게 굽어보심을 노래합니다. 굽어보시는 그분을 관상한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느님께서 그런 자리에 즐겨 들어오심을 노래합니다.
곧 그 작고 비천한 자리에 들어오시기 위해 당신보다 더욱 더 작아지고 보잘 것 없고 비천해지심을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자신보다 작은 주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작고 보잘것없는 자기 안에 들어오시기 위해, 자기보다 더 작아지신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작고 비천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하기는커녕, 바로 그 작고 비천함이야말로
비로소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유일한 자리요, 복된 자리임을 알아듣고 기뻐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알아보는 것이 마리아의 기쁨의 진원지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세상의 빛나고 높고 큰 자리, 곧 ‘중심(中心)’은 하느님의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리에 버티고 앉은 인간의 영광만이 드러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낮고 어둡고 보잘것없는 자리, 곧 ‘변방(邊方)’이야말로 하느님과 그분 영광의 자리라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니, 이 노래는 바로 그런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 앞에 열어줍니다.
곧 당신 자신을 낮추신 하느님의 현존, 곧 당신 자신의 ‘크심’을 아낌없이 내려놓으시고
아주 작고 보잘것없고 허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나보다 더 작은 모습으로 계신 하느님이요.
있는지도 없는지도 그 존재를 잘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마치 아무것도 아닌 자의 모습으로 계시는 분으로서의 현존입니다.
이런 분과 진정으로 만나면, 그것은 진정 크나큰 은총이요 기쁨입니다.
내가 뭔가가 되거나 뭔가를 이루어 내서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어도 되는, 그저 충만한 기쁨입니다.
이는 결국, 자신보다 작아진 주님을 만나는 데서 오는 기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들보다 작아진 주님을 체험해 본 적이 있는가?
나보다 작은 하느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
그것은 참으로 거룩한 사랑의 체험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낮아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우리 앞에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않을 수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을 만난 사람은 곧 자신보다 작아진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진정 자신이 누군가의 앞에서 그렇게 작아져 본 적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서 그토록 작아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정 사랑해 본이라면, 곧 사랑한 이 앞에서 작은 자가 되어 본이라면,
자신 앞에 사랑으로 작아진 하느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예전에 있었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 무렵에는 커피를 마시면 컵에 경품이 있었습니다.
아는 자매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이 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가지고 열어보면서 말을 하였습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
보통은 ‘Please try again.'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지더라고요.
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신부가 되가지고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품은 나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
주님의 성탄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면, 판공성사도 준비하고, 어려운 이웃들과 김치를 나누고,
구유를 만들고, 성당을 장식하고, 봉사자들에게 선물을 준비하고,
레지오 마리에는 연차 총친목회를 하고, 전례연습을 하고, 음식 장만을 하고,
아이들은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성가대는 연습을 하면서 바쁘게 지냈습니다.
주님의 성탄이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흥겨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교구에 있으니, 성탄이 가까이와도 마음도 바쁘지 않고, 덤덤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묵상하는 성모님의 마음은 저의 무딘 마음을 깨우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성탄을 기억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왜 우리는 신앙인이 되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거두어 주셨으니,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2016년 성탄을 기다리면서 성모님은 마리아의 노래를 준비하였듯이,
우리들 각자의 노래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많이도 필요 없이 단 한 사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신앙이라고 해서 모두 일률적인 것이 아니라 천차만별이더군요.
깊은 신앙이 있는가 하면 얕은 신앙이 있습니다. 초보신앙이 있는가 하면 원숙한 신앙이 있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있는가 하면 뜨거운 신앙이 있습니다. 값진 신앙이 있는가 하면 값싼 신앙이 있습니다.
신비로운 현상과 황홀한 체험, 지속적인 성공과 축복만을 추구하지 고통과 십자가는 거절하는 싸구려 신앙도 있습니다.
결국 신앙에도 성장이 필요하고 성찰과 쇄신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어릴 때 키가 무럭무럭 자라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먹어댔습니다.
친구와 둘이서 앉은 자리에서 귤 한 박스를 바닥내기도 했습니다.
자장면 곱빼기를 시켜먹고 나왔는데도 속이 헛헛해 다른 중국집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죽기 살기로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서면 배가 고팠습니다. 자고 나면 키가 크던 시절이었습니다.
마구마구 키가 자라던 어느 순간, 원인도 모르게 여기 저기 뼈마디가 아프곤 했었는데...
어르신들은 단박에 알아차리고 이렇게들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별 것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키 크느라 아픈 거다, 성장통이란다.”
키가 자랄 때 성장통을 겪듯이 신앙이 자랄 때도 당연히 성장통을 겪습니다.
그리도 열렬하던 신앙이었는데 어느 순간 무덤덤해지고 냉랭해집니다.
갑자기 별 의미를 못 찾겠고 무미건조해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느님 부재체험을 시작합니다.
어찌 보면 신앙의 성장통을 겪는 전형적인 증세입니다.
이런 순간 꼭 겹쳐지는 것이 있습니다.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이요 사람입니다.
꼭 이럴 때 악연을 만납니다. 꼭 이럴 때 이해하지 못할 억울한 사건을 겪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즉시 드는 생각이 이런 것입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시련이?’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럴 수 가 있는가?’
이럴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더 규칙적인 기도생활입니다. 더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입니다.
더욱 정신 집중해서 성경을 읽는 일입니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입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군가 나를 열렬히 응원해 주는 동료 인간입니다.
다행히도 나자렛의 마리아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몇 명 있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겪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삶은 우리를 마냥 죽어라죽어라 코너로 몰아가지만은 않습니다.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답답한 마리아의 길이었지만 따뜻한 동반자들이 있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안심이 되는 튼튼한 성채 같은 요셉 성인이 계셨습니다.
마리아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해준 사촌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이자 스승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이런 듬직한 동반자들의 호의와 배려에 힘입어 단기간에 놀랄 정도로
신앙의 성장을 이뤄낸 마리아는 강한 확신을 갖고 그 유명한 성모 찬가를 노래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복음 1장 46~49절)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된 여가수의 어린 시절,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소녀는 산동네에서 할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찢어질 정도로 가난했지만 할머니는 현명했고 교육을 잘 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할머니는 항상 손녀를 열심히 응원해주었습니다.
틈만 나면 하셨던 말씀이 “너는 내게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란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항상 너를 응원한다!”였습니다.
할머니는 소녀에게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누군가가 버리고 간 낡은 피아노를
정성껏 닦고 조율해서 선물로 주었습니다.
아무리 서투르다 해도 소녀의 연주가 끝나면 언제나 열렬한 할머니의 박수가 뒤따랐습니다.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정성에 힘입어 소녀의 연주솜씨는 일취월장하게 되었고,
그녀를 재능을 눈여겨 본 한 음악가의 도움으로 마침내 소녀는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비상하게 되었습니다.
성공한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언제나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제 성공은 전적으로 할머니 덕분입니다. 많이도 필요 없이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되요.
나를 이해해주고 믿어주는 단 한 사람, 나를 전적으로 응원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되요.
바로 그 한 사람을 얻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까요?”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었네!
전삼용 요셉 신부
도자기를 배우겠다는 한 청년이 도자기를 잘 굽기를 유명한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도자기 장인은 젊은이를 잘 맞이해 주었고 공장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이런 저런 좋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더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젊은이가 거실에 있는 유리상자 안에 든 꽃병을 보며 감탄해마지 않았습니다.
“저 작품은 정말 귀한 것이겠군요. 선생님께서 만드신 것입니까? 저에게 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얼마면 되겠습니까?”
도자기 장인은 고개를 휘저으며 젊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나에게 얼마를 준다고 해도 저것은 팔 수 없는 물건이라네.
내가 자네와 같은 젊은 시절 하는 일은 잘되지 않고 그래서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우연찮게 다른 도자기 공장에서 쓰고 남아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흙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주어다가 저 꽃병을 만들고 구운 것일세.
나도 처음엔 저렇게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그러나 버려진 흙으로도 저 정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고,
그때부터 술과 도박을 끊고 열심히 정진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네.
내가 남아 버린 아무 쓸데없는 흙을 가지고 저런 작품을 만들었지만,
또한 저 작품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라네. 그런데 어찌 돈을 받고 팔수 있겠나.“
대학생 때 돈을 벌어보겠다고 용역회사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건축하는 사람들이 이 용역회사에서 사람들을 불러다가 쓰는데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 데려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불려가지 않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야말로 ‘나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이구나!“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하느님은 일꾼들을 부르는 포도밭 주인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도 가장 나중에 불리는 이들이 주인에게 칭찬받는 가장 첫째가 되고,
첫째로 불렸던 이들은 가장 늦게 온 사람들과 자신들을 똑같이 대우한다고 주인에게 불만을 토로하여 꼴찌가 되고 맙니다.
사실 가장 나중에 불린 이들은 누구도 데려가지 않던 세상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도밭 주인은 그 사람들을 가장 쓸모 있는 일꾼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실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었다가 좋은 주인을 만나 첫째가 되었다면 그 사람들은 주인에 대해 너무 고마워할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주인도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가장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자기 자신도 만족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을 표현할 때,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는 시편을 인용하십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가장 천대받고 가장 큰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지만
하느님은 그 천대받는 돌로 당신 나라 건설을 위한 주춧돌로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비천한 당신 자신의 처지를 굽어보시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큰일을 하셨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 능력도 쓸모도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인간구원을 위한 가장 귀한 도구가 되게 하신 하느님을 어떻게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와는 모든 것을 다 가졌었지만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했기에 불만스럽고 우울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면서 당신 자신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일을 보고는
비천한 자신을 통해 앞으로 세워질 교회에 은총을 전달해주는 중재자로 쓰인다는 것을
깨닫고 저절로 찬미가 흘러나온 것입니다.
하느님은 또한 이렇게 비천하게 자신을 낮추는 한 시골 여인을
세상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여인으로 만듦으로써 그 작품에 대해 얼마나 또 감사한 마음을 지니겠습니까?
마치 도자기공이 버려진 흙으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 기뻐하는 것처럼
하느님 또한 가장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시는 것을 가장 행복해하십니다.
그리고 그 비천한 이로 만든 작품은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는 하느님의 가장 고귀한 보물이 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성덕에 다다랐느냐는 질문에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모두가 열심히 영성의 계단을 오를 때 자신은 한 계단도 오를 힘이 없는 불쌍한 존재라고 합니다.
그렇게 불쌍하게 한 계단도 오르지 못하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기 불쌍하여
그녀를 집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나게 하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고,
자신 또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자신을 써 주시는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약 성모찬송처럼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으로 살고 싶다면
성모님처럼 자신을 아무 쓸모도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인정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버려진 돌을 머릿돌로 만드는 것을 즐기십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성모찬송을 듣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