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정상 길
스무 해 훌쩍 넘게 걸었던 청량산(淸凉山 : 323m) 정상 길을 잠정적으로 중단한 상태이다. 전문 산악인이 아닐지라도 산에 푹 빠진 애호가로서 동네 뒷산인 청량산을 지천명 후반부터 여든의 문턱에 접어든 올해 사월말경까지 꾸준히 오르내렸다. 여기서 청량산은 신마산 밤밭고개 언저리 월영마을 아파트 뒤쪽에서 덕동 쪽으로 길게 뻗은 형태의 산으로 건강에 별다른 이상에 없는 사람이라면 큰 무리 없이 정상까지 오갈 수 있는 번듯한 등산길이 있다.
지천명에 이르렀을 무렵 급격하게 나빠진 건강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그를 극복하려고 청량산 5~8부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개설한 임도(林道) 4km를 왕복하는 노정을 몇 해 동안 걸으며 건강을 되찾기 위해 진력했다. 시나브로 체력을 여투며 임도를 걷다가 어느 해 봄부터 정상을 오르내리는 등산로를 걸었다. 집에서 나서 청량산 정상 또는 반대편 산 중턱에 있는 일본군이 설치했다는 방공포대 터(유산 삼거리 쪽에 위치함)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거리는 10km 안팎으로 2~3시간씩 소요되었다. 그 길을 적어도 20년 이상 매주 5~6회씩 오갔기 때문에 5천 번 이상을 오르내린 정든 길이다. 이의 누적 거리는 졸잡아 5만 7천 Km(52주 × 5회 × 22년 × 10km(1회 왕복) = 57,200km) 이상을 걸었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물론 그동안 집 밥이 물리고 지겨울 땐 이따금 밖에서 맘에 드는 외식을 하듯이 주위의 다른 산길을 걷는 외도도 즐겼다. 예를 들면 만날 고개를 거쳐서 쌀 재를 지나 바람 재에 이르는 노정, 무학산 둘레길, 서원곡에서 무학산 정상을 거쳐 대곡산을 지나 만날 고개에 이르는 길, 먼등 골 돌탑을 거쳐서 팔용산 정상을 오르내리는 길을 걷기도 했었다.
결국 20년 이상 5천 7백번 이상 왕복했던 길이기 때문에 등산로의 형태나 길바닥에 박힌 큰 돌부리나 겉으로 들러난 나무뿌리까지 몽땅 꿰고 있어 허풍을 떨면 눈을 감고도 오갈만큼 익숙해졌다. 그렇게 낯익고 정든 길인데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현재는 중단하고 호시탐탐 다시 도전할 기회를 엿보며 벼르고 있는 맹랑한 처지에 몰려있다. 지난 5월 첫날이었지 싶다. 하루 전 청량산 정상을 거쳐 반대편 산 중턱에 자리한 방공포대 터(址)까지 갔다가 돌아와도 아무런 탈이 없었다. 그런데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왼쪽 발뒤꿈치에 통증이 심해 도저히 걸을 수 없는 돌발 변수가 돌발했다.
발을 질질 끌고 컴퓨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찾아봤더니 족저근막염(足底筋膜炎 : Plantar Fasciitis)이라고 했다. 하루 동안 상태를 지켜보다가 견디기 힘든 통증이 지속되어 떠밀리듯 병원을 찾았다. 의사에게 “일주일에 대여섯 차례 동네 뒷산에 10여 Km를 2~3시간에 걸쳐 오르내렸는데 이틀 전에 갑자기 이런 증상이 나났다고 장황스럽게 설명했다.” 잠자코 얘기를 듣고 난 뒤에 의사가 냉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결론부터 얘기했다.
“여든의 문턱을 넘어선 여태까지 등산을 다닐 수 있도록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 우선 감사드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의사로서 조언한다면서 등산을 당장 중단하고 대신 수영을 하라고 권했다. 상태가 심하니 주사 한 대 맞고 다 나을 때까지 운동하지 말고 조신하게 쉬라고 했다. 만일 앞으로 등산을 지속한다면 병원을 계속 넘나드는 악순환이 거듭된다고 잔뜩 엄포를 놓았다.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어 5월 한 달은 집안을 빙빙 돌며 상태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6월에 들어서면서 통증이 거의 사라져 아파트 둘레 길을 한 시간 가까이 걷기 시작했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신마산 해운초등학교 앞의 약간 오르막에 평지에 자리한 ‘SK 오션 뷰’이다. 8개 동(棟)으로 9백 여 세대가 거주하는 아파트로서 여덟 개의 동을 빙빙 둘러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다.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걷는 주민들이 상상 외로 많이 있다. 한 바퀴를 노량으로 걸으면 대충 10분 남짓 소요된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산에 못 가는 대신 이 길을 매일 한 시간 정도씩 조심스럽게 걸으며 적응 시험을 했다. 다행이 탈이 없어 6월말 경부터는 집에서 나서 청량산 정상을 오가는 등산로 대신에 임도(林道) 중의 일부를 걷고 있다. 왕복 7Km 정도를 오가고 있는데 별다른 탈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머지않아 조금 더 적응 시험을 거친 뒤에도 큰 이상이 없으면 정상을 오가는 등산로를 다시 걸을 참이다.
무시할 수 없는 게 세월이던가. 일상화가 되어 별 다른 생각 없이 거의 매일 등산을 반복하면서 지천명의 중반 무렵부터 여태까지 특이한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쩌다가 타의에 의해 등산을 중단하고 나서 곰곰이 돌이켜보니 크게 달라진 두 가지가 뚜렷했다. 먼저 하나는 등산 초기에 오르내림을 막론하고 나를 추월에서 앞 서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모두가 추월해 지나갔고 나보다 느리게 걷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다른 하나는 등산로 옆에 자리한 나무들 대부분이 어렸는데 지난 20여 년 동안 울울창창하게 자라 숲의 터널을 이뤄 한 낮에도 햇볕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변했다. 그뿐 아니라 숲속이 늘 어두컴컴해진 상태이다. 이 두 가지가 세월이 수월찮게 흘렀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움직일 수 없는 징표가 아닐까.
언젠가는 등산로 걷기를 접어야 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시점을 심폐 기능과 다리 근육이 허락할 때까지가 아닐까 라고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뜻 하지 않은 발바닥의 염증 즉 족저근막염이 심통을 부려 내 나름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흩트리며 재를 뿌릴지 몰랐다. 의사 선생님의 조언을 정면으로 거슬리는 격이 될지 모른다. 그래도 조금 더 시험과정을 거치면서 예후를 주의 깊게 지켜보다가 이상 징후가 발현되지 않는다면 청량산 정상을 오가는 등산길을 다시 걸을 요량이다. 봄이 오면 오래된 고목의 우듬지에도 새순이 돋지 않던가. 이런 맥락에서 의지가 꺾이지 않기를 다짐한다.
마산사랑, 추억을 품다, 마산문협 사화집 제11집, 2024년 10월 22일
(2024년 7월 21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