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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22년 3월 20일 주일 오전 예배
사도행전 설교
성경낭독 : 사 55:1-9; 눅 13:1-9
본문 : 행 12:1-25
제목 : “베드로의 엑소더스 1”
주일 오전 예배 찬송
경배찬송 – 시 66편 1,5,6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 34편 6,7,9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 16편 1,3,5
성경낭독 후 찬송 – 시 19편 3 (고정)
설교 후 찬송 – 시 20편 1,3,4
성찬식 찬송 – 시 65편 5,6 (고정)
폐회찬송 – 시 102편 9 (고정)
베드로의 엑소더스 1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 받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본 환상과 고넬료 집안에 성령님께서 내리시는 일을 통하여, 이제 새 시대의 교회를 향한 길이 열렸습니다. 구속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크신 뜻은 이제 이방인들도 이 교회 속으로 들어오는 일을 통하여 세상에 밝게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헬라인들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진전으로, 또 교회가 어떻게 온 세계를 향하여 확장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로 읽게 될 때는, 성경을 신변잡기적으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문맥’이 중요해집니다. 성경을 단순히 내 개인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읽으면, 어떤 본문의 사건이 ‘왜 거기에 위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를 매우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치밀한 구속 역사의 발전 과정으로 읽는다면 개개의 사건들이 위치한 자리가 굉장히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지금 지나고 있는 이 본문들의 위치를 봅시다. 10장과 11장은 고넬료 사건과 그것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 설명하는 장입니다. 그리고 13장부터는 1차 선교 여행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10장부터 시작되는 교회의 이방인에게로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부분이 13장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끼어 있는 11장 마지막의 두 사건과 12장 전체의 한 사건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너무나 쉽고 당연한 대답이겠지만, 이렇게 문맥 안에서 읽어보면 이 부분들은 명백하게, 이방인에게로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 일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즉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상관없어 보이는 오늘 12장의 ‘베드로의 탈옥 사건’ 역시, 교회가 온 세계를 향하여 확장되어 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한 과정으로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이 맥락 안에서 보지 않으면, 이 본문의 이야기는 ‘한낱 신기한 에피소드’ 정도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문맥을 완전히 단절시켜 버린 후에 갑자기 뜬금없이 “여러분이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곧 베드로처럼 감옥에 갇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까지 보호해 주십니다!” 이렇게 설교한다면, 어떻게 이렇게 읽는 것을 사도행전의 역사가 진행되어 가는 일을 바르게 읽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베드로의 탈옥 사건이 구속 역사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사건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곧 고넬료의 사건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교회의 이방 세계로의 전파가 선언된 것이 13장에서 선교사들의 파송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위하여, 그 서론이 되는 이야기, 그 의미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펼쳐주고 계시는 그런 이야기들로 이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베드로 사건과 출애굽의 연결점들
1. 순교한 야고보와 체포된 베드로
베드로의 기사를 읽을 때, 처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일이 ‘유월절’ 어간에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두 번째 사건인 베드로의 탈옥 사건은 유월절과 관련하여 일어났습니다.
1)
첫째 사건은 야고보의 죽음이었습니다.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왜 헤롯이 야고보를 죽였는지 그 배경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아그립바 1세’인데, 그는 유대에 친화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들께서도 익히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왕이었던 헤롯은 ‘헤롯 대왕’으로서 ‘이두매’, 곧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에돔 사람인 헤롯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그립바는 헤롯 대왕의 손자로서,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감정을 삭히고자 하스모니안 왕조(중간기 때 유대 왕조, 마카비 가문)의 공주인 마리암네와 결혼을 하여 낳은 아들이었던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아그립바에게는 유대 혈통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환영을 받았고, 아그립바는 “유대교를 믿고 유대교의 관습을 따랐다”고 합니다.
이 친유대적이었던 아그립바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되자,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유대인들이 싫어했던, 당시 성장하고 있던 그리스도교를 핍박하기로 결심합니다. 야고보를 죽인 것은 이런 의도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그 다음 일어나게 된 일이 베드로를 체포한 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가 왜 베드로를 체포했는지는 2절과 3절에 설명이 잘 나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정책의 일환으로 아그립바가 야고보를 죽였을 때, 3절에 보시면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그립바는 정치인이죠. 당연히 자신의 정책이 유대인들에게 먹혀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잡은 고삐를 더 옥죄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그리스도교 교회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를 체포하는 일이 그것이었습니다.
2)
아마도 아그립바는 야고보처럼 베드로도 즉시 죽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는 3절에 나와 있듯이 ‘무교절’ 절기 기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배운 대로 무교절은 유월절을 시작으로 하여 한 주간 동안 진행되는 절기입니다. 당시 유대법에서는 이 기간에 재판을 하거나 처형하는 일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그립바는 이 베드로를 감옥에 투옥하고 병사들을 시켜 지키게 합니다. 4절에 나와 있듯이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함입니다. 이 말은 무교절 절기 기간이 다 끝나고 나면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이 베드로를 지키기 위해서 군사 네 명씩으로 구성된 네 패를 붙였습니다. 열 여섯 명이나 되는 군사를 베드로에게 붙인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시 통상적인 죄수는 그저 군사 한 두 사람 정도가 붙어 있으면 족할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무려 열 여섯 명의 군사가 배치되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모습을 통해서, 베드로 한 사람이 단순히 ‘개인적 관점에서’ 여기 묶여 있는 것이 아님을, ‘시작부터 어렴풋하게’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 전체를 보여주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의 운명의 여하에 따라서 교회 전체가 달려있는 모습으로 여기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그립바의 정치적인 생각으로는, 베드로를 억류하는 일이, 당시 성장하고 있던 그리스도교 사람들 모두에게 커다란 문제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나 폭동 같은 것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에 대한 대비였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아그립바의 정치적 대응보다는, 베드로가 여기 ‘사적 이유로’ 감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본문의 시작에서부터 교회 전체를 위시하는 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2. 그런데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메시지
그런데 베드로가 투옥된 것이 ‘유월절’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본문을 잘 살펴보면, 오늘 말씀은 유월절과 관련된 어떤 사건을 매우 떠올리도록 쓰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됩니다. 이것을 성도들께서도 같이 발견해 보십시오. ‘유월절’과 관련된 어떤 구약적 사건이 이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연상되게 될까요?
1)
첫째 요소는 ‘적대적 왕’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보았듯이, 베드로의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교회를 저항하는 ‘적대적 왕’인 아그립바로부터 일어났습니다. 이 적대적 왕은 하나님의 교회를 없애버리려고 하고 있고, 베드로가 갇힌 것은 그 일환이었습니다.
2) 그 다음 요소는 ‘천사’입니다.
우리는 6,7,8절에서 베드로가 감옥을 탈출하는 장면을 보게 되는데, 이때 베드로를 감옥으로부터 탈출시켜주는 이는 ‘천사’입니다. 7절 말씀에 “주의 사자”라고 되어 있죠.
성도들께서도 아시는 대로, 헬라어에서 “주의 사자”나 “천사”로 번역되는 말은 전부 ‘전령’이라는 의미의 단어인 ‘앙겔로스’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에서는 7절에서는 “주의 사자”라고 번역했고, 9절에서는 “천사”라고 번역했지만, 다 똑같은 말입니다. 베드로를 감옥으로부터 ‘탈출’시켜주는 이는 바로 ‘천사’였습니다.
3) 그리고 셋째, 베드로가 감옥을 탈출할 때 사용된 용어들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7절에서는 “급히 일어나라”라고 합니다. 8절에서는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감옥, 곧 압제 받는 곳으로부터 탈출할 때의 모습입니다. “압제 받는 곳”과 “탈출”을 염두에 두고 이 표현들을 들어보면 연상되는 문구가 있지 않으십니까?
출애굽기 12장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출 12: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급히 나서야 하는” 베드로의 이야기는 마치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때 주어졌던 명령과 매우 흡사합니다. 심지어 앞서 말씀드린 “압제 받는 곳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주제에서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1) 감옥, 곧 압제 받던 곳으로부터, 2) 탈출, 곧 엑소더스했는데, 이스라엘 또한 1) 애굽, 곧 압제 받던 곳으로부터, 2) 탈출, 곧 엑소더스하였습니다. 바로 이 탈출에서 주어진 명령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급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베드로의 이 탈옥 사건 속에는
첫째, 유월절이라는 시기적 일치
둘째, 적대적 왕이라는 대적의 일치
셋째, 구원을 이끄는 이로서의 천사의 일치
넷째, 탈출하여 나설 때의 모습/명령에 대한 일치
다섯째, ‘압제’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주제에서의 일치 등
굉장히 많은 유사요소들이 산개해 있습니다.
베드로의 탈옥 사건을 읽을 때 출애굽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4) 이런 요소를 발견한 후에, 앞서 말씀드린 ‘적대적 왕’과 ‘천사’를 다시 생각해 보시면, 출애굽과의 연관성을 더욱 선명하게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은 ‘적대적 왕’이었던 바로를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압제, 곧 억압 속에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바로와 싸우셨습니다. 출애굽은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성공했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즉 출애굽 사건에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적대적 왕이 패망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는 주제가 있습니다.
이런 심상 속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오늘 말씀에 등장하고 있는 ‘적대적 왕’인 헤롯은 여러 면에서 바로를 연상시킵니다. 헤롯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바로처럼 베드로를 핍박했고, 그 핍박 속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했는데, 베드로는 감옥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결과도 보십시오! 오늘 본문이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되는지를 봅시다. 20절부터 25절까지 말씀은 이 일 후의 헤롯의 정황을 그리고 있는데, 23절과 24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여기에 우리가 방금 출애굽에서 본 그 두 주제가 동시에 나옵니다. 곧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 적대적 왕이 패망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는 주제, 곧 “대적인 왕의 멸망”과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입니다.
출애굽에서의 적대적 왕은 바로였고,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압제의 땅 애굽을 나왔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적대적 왕은 헤롯 아그립바이며, 구원받은 베드로는 압제로부터 벗어나 감옥을 탈출했습니다. 대적 애굽은 재앙으로 멸망했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었으며, 대적 헤롯 아그립바는 충이 먹어 죽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했습니다.
5) ‘천사’도 마찬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민수기 20장 16절은 출애굽이 ‘천사를 통해’ 일어난 것으로 그리고 있는 말씀입니다.
민 20:16 “우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우리 소리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서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이다.”
우리는 열 재앙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온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민수기는 애굽을 벌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이 “천사를 보내서” 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모든 요소들 속에서 베드로의 장면을 겹쳐 보면 동일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치 애굽을 탈출하던 이스라엘처럼 “천사의 인도를 받아” 그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것입니다.
6)
이렇게 오늘 말씀 내용의 ‘베드로의 탈옥 사건’은 굉장히 여러 가지 면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이 말씀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교회’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입장으로, 감옥, 곧 압제 받던 곳으로부터 엑소더스, 곧 탈출합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이 압제 받던 곳 애굽으로부터 엑소더스, 곧 탈출하는 것과 일치시켜 보여줌으로써, 베드로가 대표하고 있는 새 시대의 교회, 곧 10장에서 공인되었으며, 13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선교여행을 통해 드러날, 온 세계로 향하여 펼쳐지는 교회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문맥 안에서 베드로의 탈옥 사건을 읽게 되면, 새 시대의 교회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현저해집니다. 이방 세계로 뻗어 나가게 되는 새로운 시대의 교회가 그야말로 ‘출애굽’이라는 것이지요! 곧 이제 13장부터 일어나게 될 세계 선교의 시작이란! 하나님의 교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전 세대로부터 새로운 세대로의 출애굽”이라는 것입니다. 옛 교회로부터 탈출하여, 새 교회로 접어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 세계 교회로의 진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의미, 주제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의 교회의 새로운 시대로의 출범이 출애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우리가 교회의 이런 새로운 진전을 통하여 얻어야 하는 의미와 주제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한 시대를 마감하시고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여실 때, ‘출애굽’하신다.
첫째,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출애굽’이 보여주는 교회의 진전입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한 시대를 마감하시고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여실 때 출애굽 하신다.”
우리는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에서 바울 사도께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새로운 교회에 편입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쓰고 있는 말씀들을 읽습니다. 바울 선생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었으므로 유대인들이 그 새로운 열차에 몸을 옮겨 싣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롬 11:11-14)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의 시대마다 새롭게 교회를 세우실 때에, 그때마다 이전의 교회로부터 탈출하시고(출애굽) 새로운 교회로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1) 이런 예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구약 교회로부터 신약 교회로의 진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옛 종들(선지자들) 모두를 소진하시고 난 후 최종적으로는 “아들을 보내셔서”(눅 20:13; 막 12:6) 옛집을 허무시고, 새집으로 나아가는 일을 실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새 시대가 열렸을 때 구약의 교회였던 유대인들은 교회의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고 최선을 다해 옮겨타야만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애굽 시대를 청산하시고 그 땅을 나갈 때 애굽인들과 중다한 잡족들은 최대한 탈출하는 이스라엘에 올라탔어야 했듯이 말입니다. 옛 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교회로 하나님께서 나아가시는 것에 편승했어야만 합니다.
2) 조금 더 쉬운 이해를 말씀드려보자면 노아 홍수 시대의 교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시대는 모두 홍수 속에 잠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의 교회의 출범을 깨달았다면 옛 시대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빨리 방주에 올라탔어야 합니다(비록 하나도 타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새 시대를 여실 때, 이전의 교회로부터 출애굽 하십니다.
3)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개혁도 이러한 진전, 곧 옛 교회로부터 새 교회로의 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계시가 기록되고 있던 시대’와 ‘계시 종결 이후의 시대’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계시 종결 이후의 역사 속에서도 이렇게 역사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교회가 어둠 속에 있고, 감옥에 갇힌 바 되었을 때, 그 압제를 뚫고 새로운 시대의 교회로 하나님은 나아가시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빨리 거기에 올라타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시기에 하나님은 새 교회의 시대를 여셨고, 따라서 이것 역시 출애굽이었습니다.
2. 배도한 교회
그리고 이 사실에서 파생되는 둘째 교훈으로서, 우리는 ‘옛 교회’가 ‘새 교회’로 옮겨타지 않을 때, 그 교회가 ‘배도한 교회’가 되는 것을 봅니다. 이 또한 구속 역사 안에서 항상 발견하게 되는 교회사적 진리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탈옥 사건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약간은 충격적인 사실 하나는, 베드로가 이렇게 하나님의 교회, 새 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예표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때 베드로를 억압하고 있는, 바로와 애굽의 역할을 하는 이는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출애굽의 시대에는 애굽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압제하고 핍박했지요. 바로 왕은 그 대표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신약 시대가 시작되고 그리스도교가 새로 출범하게 될 때, 그 바로와 애굽의 역할을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옛 언약교회’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헤롯 왕과 유대인들이 ‘새 교회’의 적대자들이 됩니다. 조금 전까지 ‘옛 교회’였던 이들이, 이제 ‘새 교회의 원수’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행전 전체에서 계속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알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시작 시기에 이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은 유대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처음 적은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적은 이방의 창과 칼을 가진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많이 핍박하고 죽인 이들은, 다름 아닌 ‘옛 교회’였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배도한 교회’의 정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배도한 교회는 단지 ‘뒤떨어진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배도한 교회는 교회의 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핍박자가 됩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야고보를 죽이고, 또 베드로를 투옥하면서,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면서......그렇게 교회의 적이 됩니다.
계시록에 ‘음녀’가 나옵니다. 그리고 제가 이전에도 가르쳤듯이, 성경에서 ‘음녀’는 ‘순결한 신부’의 타락한 모습입니다. 성경에는 여자의 두 모습이 나오는데, 한편에 순결한 신부가 있고 반대편에 음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음녀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하지 않고 순결한 신부가 타락할 때 음녀가 됩니다. 곧 음녀는 ‘배도한 교회’입니다.
계시록 17장 6절에 이 사실이 명시적으로 나옵니다. 음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하던 시기 이전의 때에, 누가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을 죽여 그 피에 취했습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즉 음녀는 ‘타락한 신부’이며, 따라서 교회입니다.
다시 정리합시다. 순결한 신부가 타락하여 음녀가 됩니다. 음녀는 ‘배도한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은 누구일까요?
세상이 아닙니다. 타락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실 때, 거기에 가장 강력한 걸림돌이 되는 것은, 하나님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아닙니다. 타락한 교회! 배도한 교회! 바로 이 교회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으로부터 신약으로 전진할 때 유대인들이 그러했고, 종교개혁의 시기에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항상 배도한 교회가 음녀가 되어 교회를 핍박하고 죽입니다.
우리는 이런 점들을 보면서 교회가 ‘사탄의 회’가 되지 않았는지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순결한 신부로서 교회를 부르시되, 그 순결한 신부가 박해와 곤란 속에 처하게 된다면, 그것은 악한 교회로부터일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서도 진리이지만, 역사 속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3. 하지만 승리하시는 하나님
이제 마지막 셋째 주제를 살피면서 말씀을 맺읍시다.
우리는 첫째와 둘째 주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의 교회를 세우실 때, 옛 교회로부터 출애굽하시고, 그때 옛 교회, 곧 배도한 교회는 ‘음녀’가 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펴야 할 마지막 주제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응입니다.
1)
저는 조금 전에 “성도들과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음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행전에서도 이미 많이 나오고 있는 살기 등등한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배도한 교회, 음녀들의 박해로부터,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시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대적의 심장에서 빼낸 이를 칼로 사용하셔서,오히려 대적의 심장을 찌르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방식이요, 교회를 일구어가시는 방법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대적의 심장에서 빼낸 이!”, “그래서 오히려 대적의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된 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시대의 교회를 일구어가실 때, 평범하게 사도들 중 누군가를 세우셔서 새 시대의 교회를 세우실 수도 있다고, 세계 교회 건설의 역군으로 사용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될 때, 그때 사용되는 이는, 세계 교회를 건설할 이는, 일반적인 사도 중 누구나, 혹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 중 누군가가 되었어도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강력하게 교회를 대적하던’ 바울을 불러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승리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음녀의 핵심 세력, 음녀의 심장 중에 있던 이를 회심시키시고 개종시키심으로써! 그를 칼로 사용하셔서 다시 그 음녀의 심장을 찌르셨습니다.
2)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교회를 훼방하는 어떤 책동도, 결코 교회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교회의 대적’이었던 헤롯은 충이 먹어 죽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합”니다. 23절과 24절의 대비를 잘 보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교회를 세워나가심에 있어서 대적에게 결코 패배하지 않으신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만물은 다 주의 것이며, 그분의 뜻을 따라 움직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음녀의 심장에서 빼낸 자를 칼로 만들어 그 음녀의 심장을 찌르실 수 있는 분이시고, 가장 강력해 보이는 대적의 왕을 한 방의 치심으로 즉시 죽이실 수 있는 권능자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결론을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대적은 망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흥왕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가 많고, 목사와 장로들 중에 도둑놈들이 너무 많고, 정치권에는 콩고물을 얻어 먹으려는 정치 목사들이 득실득실하기 때문에, 교회를 볼 때마다 신물을 느끼십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너무 두려워도 마십시오! 혹 그런 이들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망가질까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대적의 역사 속에서도 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나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실 교회를 바라보면서 인내합시다.
그분의 교회는 그분의 것이니, 우리는 그분만 바라보고 정진합시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