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an Baez 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틀랜트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 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UNESCO)의 콘설턴트 일도 맡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린 존 바에즈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고, 한때는 아버지를 따라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살기도 했다. 그녀의 부친은 물리학자로 MIT 등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초빙되는 교수였지만,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존 바에즈는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로 여러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 존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과 가정적 환경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존 바에즈가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4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는 합창반에서 노래를 했고, 1956년엔 그녀만의 첫 기타를 구입해 이곳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57년엔 간디주의 철학자인 아이라 샌드펄(Ira Sandperl)을 만나 그녀로부터 강한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1958년 존 바에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신의 데모 음반을 제작해 음반사에 보내지만 레코드 취입을 거절당하고, 아버지가 MIT와 인근의 몇 개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매사추세츠주의 벨몬트로 이사한다. 보스톤 대학에 등록한 그녀는 학업보다는 자신의 뮤지션 경력을 꽃피우는 데 치중했다. 그녀는 처음엔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의 작은 클럽들에서 노래했는데, 곧 그리니치 빌리지로 옮겨 갔다.
그녀가 정식으로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59년 캠브리지의 포크 음악 클럽인 '클럽 47'에서였다. 존바에즈는이곳에서 빌 우드(Bill Wood)를 만났고, 얼마후엔 테드 알레비조스(Ted Alevizos)까지 합류하여 앨범 지의 커버스토리로 실리게 된다. 1955년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발생한 흑인들의 버스승차거부운동은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좀더 자세한 사항은 <유리병편지> 79호를 참조하시길).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간디의 비폭력노선을 추구한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존 바에즈는 1963년 3월 25만 명의 민중과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확대를 요구하며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거리 행진에 참여했고, 이들 앞에서 <우리 승리 하리라(We Shall Overcome)>을 노래했다. 이 해 8월엔 노예해방 선언 백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대행진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너무도 유명한 연설의 서두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을 말했다. 이 행진엔 존 바에즈, 밥 딜런, 피터 폴 앤 매리, 해리 벨라폰테, 마할리아 잭슨 등의 쟁쟁하고 의식있는 뮤지션들이 함께 했다.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하고, 부통령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65년은 존 바에즈에게 그리고 미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녀는 1965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에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6월 17일 미국의 B-52 폭격기가 북베트남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며 베트남전은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면전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엔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물론 피트 시거(그는 50년대 '위버스weavers'를 이끌며 학생 포크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매카시즘 선풍 때 공산당으로 몰리기도 했다),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포크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였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의 음악에 많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고, 존 바에즈의 노래는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노래들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해 포크 음악이 배출한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존 바에즈는 자신의 수입 중 60%가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총탄과 포탄이 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녀는 세금 징수에 불복했고,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존 바에즈는 자신의 주장을 좀더 널리 알리기 위해 흑인 공민권 확대를 위한 콘서트와 반전 등 여러 현장에서 무료로 공연하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다. 이 해 연말 존 바에즈의 앨범은 그래미상의 '베스트 포크 레코딩' 부문 수상 후보작이 되었다
이 해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연인 관계를 끝냈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이 두 사람은 포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저항 정신을 실천한 운동가였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은 당시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 - 인종차별, 베트남전, 세대간의 갈등 등 - 을 저항과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담아냈고, 삶에 대한 열의와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했던 청년 문화의 대변인이었다. 물론 존 바에즈에게 끼친 밥 딜런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밥 딜런을 가장 중요한 포크 뮤지션으로 주목받도록 한 사람이 존 바에즈란 사실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뉴스위크>지는 "포크송의 여왕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을 왕자로 책봉했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도록 했고, 포크 음악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 서로 많은 교감을 이루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프로테스탄트 포크라는 포크 음악의 순수함을 밥 딜런보다 더 오래 지켜나갔고, 포크 음악의 대중화란 측면에선 밥 딜런보다 더 많은 공로를 끼쳤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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