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했다.
그 약속은, 그 약속을 기억하는 자들이 모두 죽은 뒤에야 지켜졌다.
뚜벅뚜벅뚜벅- 뚜벅뚜벅뚜벅-
유나는 걸었다.
'이봐! 어딜가는 거야!'
1시간 전, 엘핀스톤의 방문 앞에서 동상처럼 굳어있다가 어디론가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는
유나를 겨우 잡아끈 소연의 물음에 유나는 겨우 말로 대답할 수 있었다.
'열 식히러. 이 상태 그대로 버몬트 만나면, 나랑 그 자식 둘 중 하나는 오늘 죽어.'
'말 똑바로 해! 네가 죽을리는 절대로 없으니까 분명 그 자식이 골로 가겠지! 참아! 엘핀스
톤이 죽을 만큼 맞은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버몬트는...'
'알아! 아니까 지금 이렇게 라도 화를 삭히려는 거 아냐! 그 자식이 잘못한 거 없는 거 알
아! 나도 안다고! 설령 잘못했다고 해도 내가 엘핀스톤 대변자도 아닌데 나서서 응징할 생
각따윈 조금도 없어! 다만 난! 나는...!'
'이런 꼴을 보고 겪게 하려고 당신을 여기로 부른 게 아니었다.'
죄책감과 흥분이 기묘하게 혼합되어 유나의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조절이 안될 것 같아.'
걷고 또 걸었다. 1구역을 지나 2구역, 3구역, 다시 뒤돌아서서 2구역, 그리고 1구역. 그러는
와중 도무지 지금 자신이 어디를 걷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아무도 없는 공간.
알 수 없는 기기, 파이프, 구조물들로 꽉 차 있지만 공허하기 짝이 없는 공간. 그 한가운데
멍하니 서서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려고 애썼다. 잘못한 것은 없다. 그는 분명 스스로의 의
지로 이 곳에 왔다. 오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나? 내게는 그럴 권리도 의무도 없다. 여기까지
와서 버몬트와 마주 보고 망가지든 말든, 그로 인해 자신이 그토록 기피하던 혈통의 굴레
속으로 돌아가던 말던 나는 상관없다. 내가 신경썼던 건 오직 하나였다.
클라우제비츠의 부재 후, 반쪽 군주인 버몬트를 옆에서 지켜줄 보루.
아니, 수호뿐이 아니다. 이것은 수호와 감시라는 이중의 임무다. 감시하는 이도, 감시당하는
이도 의식하지 못하는 기막힌 구조의 관리체계. 엘핀스톤은 자신에게 조금 과한 권한이 주
어지더라도 트라우마 때문에 한 발자국도 선 밖으로 나가지 못할 거고 버몬트는 엘핀스톤한
테만은 껄끄러워하며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그렇게 만들어놓으면 된
다. 이것을 생각해낸 뒤 나는 얼마나 스스로를 흐뭇하게 여겼던가. 내게 있는 망상가, 책략
가의 기질. 그것을 충족시킨 후 나는 얼마나 오만방자 하게 웃었던가. 그 다음 바로 자기혐
오에 빠져 쓰게 비웃었을지언정 나는 지배하는 것도 통제하는 것도 내멋대로 주무르는 것도
멈추지 않을 최악의 폭군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고 있는 주제에
정작 나 혼자 브레이크 없이 달리고 있었다. 늘상 의심해오던 내 자제력을 대체 뭘 믿고 이
렇게 시험하고 있는 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구역질이 난다. 이 손으로 하고 있는 모든 일이 갑자기 더럽고 추악하
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의든 아니든 난 아직 결정되지 않은 당신의 인생을 가장 확실하게
정해진 궤도 위로 올려놓았다. 당신은 분명 한없이 고독하지만 동시에 자유로운 삶을 선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평범한 여자와 결혼해서 강아지같은 자식새끼들을 놓고 평범
하게 늙어갈 수도 있겠지. 분명 당신은 평생 팬드래건의 정국와 힘의 역학관계에서 자유로
울 수 없었겠지만 분명히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정치적 생물로 정의했지만 그건 내 정의일 뿐, 당신 역시 당신의 사촌처럼 변해서
다른 길을 모색할 수도 있다. 나는 그 가능성을 알고 있다. 소홀하게 취급했지만 분명 나는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나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찌나 한심한지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결국은 내가 다 망쳐버린 꼴이 아닌가.'
물론 이 손으로 당신의 목을 조른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웃었었다. 당신을 슬슬 버
몬트 쪽으로 몰아넣으려고, 순수한 호의로 당신에게 다가간 내 친구의 말을 들으며 웃었었
다. 당신과 버몬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이야기해주더라고 좋아하던
내 친구의 말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젠장.
'힘든 일이겠지만 둘의 사이가 좋아진다면 팬드래건 쪽에서도 이득이겠지.'
이런 말로 교묘하게 내 친구를 부추기면서 당신이 갈 수 있는 길을 오직 하나로 줄여버렸
다. 그리고 내가 이미 통제권을 잃은 상태에서 사태는 제멋대로 굴러갔다.
<버몬트가... 버몬트가 알아. 그가 로날드 팬드래건이라는 사실을.>
유나는 벽을 향해 서서 그 위를 짚은 양손에 기댄 채 허리를 숙이고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머리를 굴렸다.
이제 누구를 상대로 게임을 벌인단 말인가. 이대로 손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건가. 사태
가 망가져가는 꼴을? 어떻게 나올지 짐작조차 못하겠어. 버몬트의 목을 조른 것은 분명 이
손. 이 손으로 한번 더 네 목을 졸라야 해? 너에게 참아달라고 이야기 할까? 그가 필요하니,
그의 능력을 이대로 썩히긴 너무 아까우니 모른 척 해달라고. 그를 로날드로서 대우해버리
면 일이 너무 복잡해지니 이대로 묻어달라고. 네가 오르게 될 옥좌에 가장 근접한 사람들
중 하나를, 내가 필요하니까 그냥 눈감아 달라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건 내가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정치'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너 역시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건, 결국 그 망할 놈의 '정치'라는 것
때문이겠고.
자아, 이제 어떻게 나올 거냐..... 네가 까발리던 말던 내 목적은 이루어진다. 지금처럼 일손
이 딸리는 팬드래건에 행방불명 중이던 방계왕족이 돌아오면 어떻게 되는 지 아느냐? 팬드
래건은 엉망이 된다. 그것도 에스프리 유전자를 소유한 왕족이라면 말이야. 거기에 네가 죽
고 못사는 형님까지 끼면 팬드래건은 그야말로 내부분열이다. 잘하면 내전으로 치닫고 역시
나 10년동안은 투르는 물론 커티스도 넘볼 수 없게 될 걸. 살라딘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의
뼈는 투르에 묻힐 거다.
다만......
그래, 다만...!
유나는 이를 갈았다.
그 아저씨가.... 돌아가야만 하지. 그 지긋지긋한 왕좌로.
말하지 않는다면 양자택일이군. 엘핀스톤은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서 왕궁으로 기어 들어가
던가 영영 멀리 떠나버릴 걸. 그 남자는 그런 남자지. 의심을 살 짓은 아예 하지 않는 게 그
의 생존철학이었을 테니까. 그를 보호해주던 신하의 가면이 벗겨진 이상 그는 하루하루 피
를 말리며 네 곁에 붙어있어야 할 거다. 그리고 너는 그런 그를 지켜봐야 하는 거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그의 트라우마는 저 잘나신 흑막의 수괴 벨제부르 군이 열심히 자극해주고
가셨으니까 그는 네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끝내 네 곁에 붙어있을 거다. 단, 그는 한
번 붙어있으면 끝까지 붙어있는 만큼 한번 떠나면 영영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거지. 이번 한
번은 왔다. 네가 아니라 '그'가 명령했으니까. 다음에는? 글쎄...?
유나는 씨익 웃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 웃음은 순수 100% 허세였다. 사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웃고 있는 지 울고 있는 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불길하고 차갑고 피냄새가 나는, 허
세였지만 실제로 살을 베는 칼보다 위험했다. 그녀의 머리속은 어느새 차분하게 정리가 되
어있었다. 사실, 이 일은 그리 큰 일도, 복잡한 일도 아니다. 감정. 그 감정. 그것만 조절하면
된다. 점점 기고만장해지는 이 자신감이 방심으로 이어지지만 않으면 돼. 날로 달로 오만해
지는 잔인함을 일반백성들과 세라자드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내가 제일 잘났다는 얼굴
을 하고서 약점따위 보이지 않으면 돼. 누군가의 품안에서 꺽꺽거리며 울지만 않으면 된다.
뭐가 그리 어렵나.
로날드 팬드래건이 팬드래건 왕족사에 다시금 이름을 남기게 되든 말든 상관없다. 어느 쪽
으로 가든 내 목적은 이루어질 테니까. 이루어지게 만들 테니까. 요는 엘핀스톤이 팬드래건
정계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지. 설령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손해볼 것은 없다. 그
불쌍한 중년이 다시 코꿰여서 팬드래건으로 돌아가버릴 지도 모른다는 건 조금 오싹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
무엇보다.......
"어차피 인생은 러시안 룰렛....이라고 했던가."
입술을 아득 깨문다. 도박과는 평생 인연이 없었지만 유나는 생애 최초로 하드 베팅의 낭만
을 코 끝에 걸고 판을 돌렸다.
판이 돌아간다.
붉은 판, 검은 판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리볼버의 실린더가 짤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때마침, 기내 스피커에서 경고음과 함께 기계음성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 앞으로 30초 후, 자비단에 도착합니다. 착륙할 때의 충격에 대비해주십시오.
"....또 울었어요?"
경님의 부은 눈은 자꾸 비빈 탓인지 잘 가라앉질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왜 그리 신경
을 쓰느냐는 듯한 억양에 경님은 또 뭔가가 왈칵 북받혀올랐다.
"자꾸 울지 말아요. 내가 다 미안해지네."
"......멍든 거... 사라져서 다행이예요."
"이런이런, 이러다가 내 얼굴이 문제가 아니라 경님씨 눈알 빠지겠어요. 이제 좀 그만 울어
요."
"아니, 참으려고 하는 데...... 잘... 안되는 것 같아요..."
맨 처음 봤을 때의 핏자국도, 상처도 최유마법에 의해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다. 흔적이라면
기껏해야 눈가의 불그스름한 자국 정도인데 이 정도 상흔에는 치유마법도 별 소용이 없었
다.
"얼음 좀 가져왔어요."
얼마나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는 지, 경님은 이전과 완전히 사람이 달라보일 정도였다. 자꾸
울려고 하는 것만 빼면 그녀는 평소 그녀를 애 취급하며 마음을 놓지 못하는 친구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아, 고마워요."
비닐 주머니 속의 얼음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엘핀스톤의 왼쪽 눈가에 얹혀졌다.
"휴우, 좀 살 것 같네. 한밤중에 혼자 움직이다가 들킬 수도 없고 얼마나 조마조마했다고요.
빨리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
'거짓말. 내가 기다린다는 거 알면서도 문 안 열어줬잖아요.' 어울리지도 않는 너스레까지 떨
며 여유로운 척 하는 이 사람을 눈 앞에 두고 있자니 경님은 억울해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
았다.
"....경님씨."
"............"
"정말이예요. 이제 내 말 좀 믿어줘요. 그 애가 때린 게 아니예요. 정말 사고였다니까요. 서
로 이리저리 밀고 당기다가 내가 넘어지는 바람에...."
"......쿡"
예상치 못하게도 그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웃음소리였다.
"...?"
"......그래도 동생인가보죠."
"예?"
"지금 그랬잖아요. '그 애'라고. 지금까지는 꼬박꼬박 대공, 혹은 그 분이라고 말했으면서."
"......."
".......바보같은 사람.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주제에 '그 애'한테 맞기는 왜 맞아요."
"그, 글쎄, 맞은 게 아니래도요...."
"대체 어떻게 넘어졌길래 이마가 찢어지고 광대뼈는 멍들고 뺨은 붓는다는 거예요?"
그는 끙끙대며 열심히 변명을 주워넘겼다.
"이, 일단 한대 맞은 건 사실이지만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이었어요. 엉겹결에 균형을 잃었더
니 파이프 모서리에 부딪혀서 찢어지고 바닥에 넘어지면서 광대뼈에도...."
"됐어요. .......그렇게 열심히 변명 안해도 돼요. 버몬트에게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엘핀스톤은 잠시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이 들고 있던 얼음팩을 열어 작은 얼음조각 하
나를 경님에게 건네주었다.
"눈에 대고 있어요. 벌겋게 부어서 보기 흉해요."
".....고마워요."
엘핀스톤도 경님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경님은 열심히 눈꺼풀 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
심하며 얼음조각을 문질러댔고 녹아서 흐르는 물이 옷을 적시지 않도록 연신 손바닥으로 훔
쳐냈다.
"......나는....."
문득 엘핀스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모르겠군요. 무척 놀란 건 사실이지만....."
"뭘요?"
"그 애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요."
".......사촌형제잖아요."
'당연하죠.'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을 경님도, 듣는 엘핀스톤도 알았다.
"예. 우린 혈육이죠. 그것도 과거를 공유한.......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걸 잊고 살았을까."
".........당신에게도 존과 버몬트는 다른 사람인가요?"
"그 애를 오랫동안 보지 못한 건 나도 필립과 마찬가지예요."
그는 잠시 옛날을 회상하듯 먼 곳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믿지 않을 겁니다. 그 작은 아이가....."
이 무릎 위에서 잠들었던 적도 있던 그 아이가...
<그때 나를 안아주었던 팔이, 내가 기어올라갔던 무릎이.... ....바로 이것이라고... 지금 그렇
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로날드 형님.>
불에 달군 송곳이 살을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그 아이가 어떤 표정이었는
지 기억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잊고 싶어.
<늘.... 늘... 곁에 있었다고, 늘 지켜보고 있었다고, 그럼에도 모른 척 해왔다고 말씀하고 계
시는 겁니까!>
"어쩌면.....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눈 앞에 있는 버몬트 대공은...... 내 사촌동생 존이 아니라고요."
가장 소중하여 늘 이 가슴에 품고 있었던 추억이, 늘 작고 예쁜 아이로만 남아있었던 네가,
힘겹게 살아온 모든 시간의 지주였던 그때의 그 기억들이..... 선량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더 이상 힘겨운 방랑을 계속해야
할 이유도 없었어. 너를 모른 척 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널 외면했지. 차마
네가 죽는 모습만은 볼 수 없어서 널 지켜주고 싶다며 곁에 머물렀지만 결국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그 알량한 옛 추억이었을 뿐. 너에게서 도저히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고 판
단했을 때, 알맞게도 누군가가 구실을 제공해주었지. 로날드 팬드래건은 또 다시 분란의 씨
앗이 된다고.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미 변해버릴 대로 변해버릴 널 계속 사랑할 자신도, 바
라볼 자신도 없던 나는 너의 추악함을 빌미로 나의 비겁함을 가렸어.
"그 회피가 결국..... 그 아이의 악행을 방치한 꼴이 되버렸지만 말입니다."
".....후회....하세요?"
경님의 목소리는 약간 쉬어있었다.
"글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 앞으로 30초 후, 자비단에 도착합니다. 착륙할 때의 충격에 대비해주십시오.
어디 구석진 곳에서 죽치고 앉아있던 크리스티앙에게도 안내방송은 들렸다.
손끝에서 빙글빙글 돌리던 연초를 피울 생각은 없다. 그것은 크리스티앙이 즐기는 일종의
놀이와 같은 것이었다. 금방 쉽게 손안에 들어오는 것을 일부로 한동안 몸에서 떼어놓아보
는 것. 어렸을 적 부터 그랬다. 너무나 맛있어 보이는 초콜렛 무스케잌을 한참이나 눈 앞에
다 놓아두고 반짝반짝한 포크로 몇번씩 찔러보았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접시를 돌려가며 이
쪽에서도 보고 저쪽에서도 보았다. 삼각형으로 잘린 케잌 위에 소복히 얹힌 초콜렛 파우더
와 체크무늬를 그리며 뿌려진 시럽의 모양을 살폈다. 결국 함께 마시는 홍차가 차갑게 식어
버릴 때가 되어서야 어린 크리스티앙은 맛있는 케잌을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깨끗하게 모
조리 먹어치웠다.
그때 그 입안에서 퍼지던 달콤함, 부스러기 하나 남지 않고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 쨍 하는
소리를 내며 접시에 부딪히던 작은 포크, 어린이용 머그컵에 담겨있던 연한 홍차.
"크리스티앙, 여기 있었군요!"
노을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죠안이 씩씩한 걸음걸이로 침묵을 깨고 들어왔다. 소연에게 응
징해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도 잊었는 지 그녀는 크리스티앙을 찾아내어서 사뭇 반갑다는 투
였다.
"우리도 나중에 잠시 자비단에 놀러가지 않을래요? 그래도 명색이 투르의 수도..... 크리스티
앙?"
그제서야 그녀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크리스티앙은 무릎을 세운 채 그 사이에 고개를 파
묻고 들지 않았다.
"죠안....."
처음엔 그것이 자신의 이름인지도 몰랐다.
"죠안... 죠안.... 어쩌면 좋을까...."
축축히 젖은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크리스티앙?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해놓구선!' 며칠 전부터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던 그의 모습이, 그러나
쉽게 지나치고 잊어버릴 만큼 사소했던 그의 모습이 죠안의 머리속에서 차례로 정렬했다.
몸을 숙이고 크리스티앙의 어깨를 붙잡은 그녀의 손 위에 크리스티앙의 손이 겹쳤다. 손등
은 눈물과 비탄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난.... 형을 사랑하지 않았어..."
고양이가 그려진 탁한 오렌지 색의 머그컵.
그 안에 가득 담겨있었던 연한 홍차. 웃으면서 그 안에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타주었던 건
언제나 형이었다.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아니었던 거야..."
죠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체에 급속도로 중력이 가해졌다. 엔진음이 요란해졌다가 다시 사그라드는 소리를 듣고있
자니 어쩐히 거대한 동물의 호흡을 듣는 것 같다고 소연은 느꼈다. 살짝 느껴지는 진동은
비행기와 비슷하면서도 같지는 않았다.
이윽고 라이트 블링거가 완전히 자비단에 도착했을 때, 유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연락은 해뒀으니 누가 마중 나와있긴 할거예요."
세라자드를 먼저 자비단으로 보내놔야 하는 게 은근히 마음에 걸리는 지, 유나는 자꾸만 세
라자드가 쓴 후드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해는 이제 막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노을이라고
하기엔 아직 하늘은 파랗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빨리 오세요."
"알았으니까 세라자드야 말로 조심하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야 해요."
"예."
옆에서 누군가가 '푸훗'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찌릿하고 쳐다본 곳에선 램버트가 흠흠 거리
며 헛기침 중이었다.
"뭐야? 뭐가 웃긴 거죠?"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는 악덕재상에게 램버트는 조금도 쫄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독특한 억양이기도 해라. 그 안에 있는 선의의 조롱기를 읽지 못할 유나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저런 일로 바쁜 몸.
"알았죠? 내일 아침 일찍 우리가 도착하면, 맞이하러 나오지 말고 술탄궁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케먈한테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요란하게 해놓고 있으라고 말해놨으니 세라자
드도 이것저것 챙겨입고 있어요."
"하지만...."
"귀찮아도 참아요."
"....알았어요."
그 광경을 보고 있었던 건 이미 찍힌 램버트만이 아니었다. 한동안 조용하게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하던 죠엘, 록슬리, 아델라이데 등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죠엘은 무엇 때문인
지 등을 돌리고 서있었고 록슬리는 계속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 광경에 넋이 빠진 것
같은 사람은 의외로 아델라이데였다.
'.......엄마같군.'
본인이 듣는다면 마시던 콜라가 기도로 잘못 넘어가 질식사할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광
선검으로 사방 10m 반경을 초토화시켜버릴 소리였다.
"알겠죠? 이번에는 꼭꼭 내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자비단 구중궁궐 안에 있어야 해요. 어차
피 반나절만 기다리면 나도 궁안으로 들어가요."
".......그래도 다시 갈 거잖아요."
쿵 하고 가슴 속 어딘가가 내려앉은 것도 잠시, 유나는 거의 기적적으로 표정을 일그러뜨리
진 않을 수 있었다.
"남극, 갔다오는 거.... 빨리 돌아오나요?"
정말 놀랐다. 너무 놀랐다. 이 말이었나? '간다' 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
을 생각해버린 유나와 달리 세라자드는 남극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자기를 떼어놓
고 간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글쎄요? 빨리 끝난다면 일주일도 안되서 돌아오겠지만...."
"....겠지만?"
"그렇게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있었다. 약올리는 척 웃어보이니 세라자드 역시 토라진 척 하며 입
술을 내밀며 '피-'라고 중얼거렸다.
표정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부쩍 그녀가 어려보였다. 손이 들어올려졌다. 조심스럽게 이마
위에 손끝이 닿았다. 그녀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손가락 하나가 이마 옆선을 타고
흐르다가 슬쩍 손바닥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제서야 그녀도 부드럽게 웃었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발 그 말대로만 해줘요."
유나는 세라자드의 손을 한번 꼭 잡았다가 놓고는 벽면의 스위치를 눌렀다. 기잉- 하는 소
리를 내며 천천히 라이트 블링거의 해치가 열렸다.
천천히 자비단을 둘러싼 초원지 특유의 흐릿한 녹색 섞인 황토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
침내 그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을 때 세라자드와 유나 뿐만이 아닌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맨 처음 보인 것은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슬슬 붉어지는 태양빛 때문에 자주빛의 복장
은 훨씬 짙어보였다.
여자였다.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묶어 올리고 있었다. 한 손은 허리에 걸쳐져 있고 다른 한손은 아무렇
게나 허벅지 아래로 던져놓았다. 그 방만한 포즈조차 사냥 직전의 맹수같았다. 손이 올려진
허리의 반대편에 매달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이 투르에서 그걸 소유할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을 제외하면 그
녀뿐이었다.
일부러였던 것 같다. 명백하게. 이 거대한 해치가 열리는 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는 데.
해치가 완전히 열리고 나서야 그녀는 몸을 살짝 돌려 뒤를, 유나들을 쳐다보았다.
적색 와인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한번, 눈이 마주쳤다. 예리하게 좁아졌다가 살짝 웃
음을 머금으며 풀어지는 눈동자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선 보석을 능가한다. 그 보석이 내
는 광채로 좌중을 압도하는 것 따위, 그녀에겐 쉬운 일이다.
모로 돌아선 몸은 순식간에 정면을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몇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유나는 세라자드의 손이 자신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는 것을 느꼈다. 세라자드의 바로 앞, 세
라자드가 그녀의 존재감에 얼굴색이 변하기 직전,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땅에 닿아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간략화된 맹세의 동작이었다. 예리체리를 비롯한 투
르의 모든 군관들이 그들의 최고사령관이자 주군의 앞에 나설때마다 취하는 동작.
칼리프 앞에서도 까딱 숙여지기만 했던 그녀의 고개다.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각도로 숙여졌지만 그 아래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오만하다는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
었다.
"신, 예니체리 얀 지슈카, 지엄하신 술탄을 뵙습니다."
유나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세라자드의 악력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끼고 뭔가 대신 답
하려 했다.
"그대가 나와줄 줄은 몰랐군요. 여러모로 폐를 끼쳤어요."
....세라자드가 한발 빨랐다.
".......별 말씀을."
얀의 대답은 약간 늦게 나왔다. 그 앞의 공백이 세라자드를 책망하는 의도로 쓰였다는 걸,
유나는 알아차렸다. 세라자드는 이제 거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유나의 옷자
락을 움켜잡고 있었다.
"몰래 숨어들어가야 한다는 건 알지만, 마중은 그대 혼자 뿐인가요?"
그녀의 말은 흔들리지도 도중에 멈춰지지도 않았다. 얀이라는 사람의 특성때문일까? 엄연히
주군으로서 하문한 것일 텐데도 세라자드의 물음은 자못 건방지고 철없게 들렸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궁궐 안에 무사히 듭실 때까지 곁에서 지켜야 하겠으나 백
성들의 이목이 있는 지라 곳곳에서 매복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 곁에 있는 건 경 혼자 뿐이란 이야기군요?"
"예. 폐하."
숙여졌던 얀의 고개가 살짝 들렸다.
"혹여, 신의 실력이 의심되신다면..."
얀이 무슨 의도로 그 말을 꺼냈는 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세라자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
았다.
"아니요. 그럴리가. 지슈카 경이 투르 제일의 예니체리라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짐에게도 그러한 권리는 없어요."
".......황공하오신 말씀입니다."
곧 죽어도 부정하진 않는 게 얀 지슈카 답다면, 이런 식으로 묘하게 상대를 누르는 건 세라
자드다운 방법이었다. 유나는 이미 자신이 등장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상태에서 어렴풋이 나
마 세라자드가 '궁중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궁중에서 태어나 자라온 그녀다. 오라버니와
함께 자기 세력 하나 없는 교단에서 살아남아 성녀의 위치에 오른 여자다. 어째서 궁정의
논리를 모른다고, 그 역학관계를 이용해서 살아남는 방법을 모른다고 생각해왔던 걸까?
얀은 약간 쓰게 웃었다. '약간 달라진 것 같긴 하군.'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이 여자는 앞으로 자신이, 그리고 전 투르의 백성이 섬길
군주인 것이다. 순진한 군주보다야 교활한 군주가 낫다. 얀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왔던 세
라자드의 모습을 죄다 위선으로 치부해버리는 오류는 범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옛날의 세
라자드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정말로, 옛날의 세라자
드는 얀 지슈카에게 있어서는 무(無)였다. 그녀가 살라딘의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무(無)였
던 존재를 유(有)로 인식할 사람이었냐 하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아니었을 거라는 데 킬링
필드 마법 스크롤(이거 무지 비싸다;;)을 걸어도 좋다.
하지만, 유나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옷자락을 죽어라 붙잡고 있는 그 작은 손을 믿을 뿐이었
다.
".......빨리 와요."
그녀가 겨우 손을 놓고 걸음을 뗐다. 걷는 속도를 늦추진 않았지만 그녀의 고개는 몇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웃어주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두번째로 눈이 마주쳤다.
"진짜 인사는 나중에 하지."
순간, 유나는 얀에게 자신이 이름뿐이나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상
기시키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 그러나 동시에 그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도 깨달았다. 저 암사자에게 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승부를 내려는 건 자신의 추함을 더할
뿐이다. 미심쩍거나 불쾌한 표정이 조금도 얼굴 위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유나는 세
라자드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린 딸만 먼 곳으로 보내는 게 이런 심정일까. 제법 의연하게 대꾸하며 술탄으로서 위엄을
지키는 데 성공한 세라자드지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유나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같은 표정의 의미를 얀이 알았다해도 아무
소용 없었을 것이다. 얀 지슈카. 예니체리였든 아니든 그녀가 눈 하나 깜짝했을까. 누누히
생각해왔다. 하루 24시간 중 21시간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뒹굴거리는 사자는 하루 수면 시
간이 총 5분 뿐인 기린의 심정따위는 모른다고.
......그 절박함을 알리가 없다고.
이윽고 세라자드를 태운 장갑차가 저멀리 사라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유나는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뒷모습은 어쩐지 말을 걸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빡빡하게
조여져있던 분위기가 풀어진 것은 경님과 소연이 우르르~ 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동작으로
뛰어들어왔을 때다.
"유나야~ 우리는 먼저 자비단에 가 있을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놀러갈꺼야. 야시장도 선다던걸? 아! 아까 방금 케먈한테서 연락이 왔는 데 내일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겠대. 하루만 참으래."
"엄밀하게 말하면 반나절이겠지. 참는 건 문제가 아닌데 말이야. 대뜸 놀러가겠다는 그 발상
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거냐?"
"....저, 저기 난데...?"
그제서야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경님과 소연이 슬슬 쫄기 시작했다.
"어디, 해파리가 무슨 생각인지나 들어보자."
".......;;"
질책의 의미라고 판단했는 지 미리 겁먹고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경님이었지만, 이내 유나
의 표정이 덤덤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이 진심임을 알았다.
"저기.... 엘핀스톤씨한테 자비단을 미리 좀 보여주고 싶어서...."
오케이. 무슨 소리인지 100% 알아들었다. 유나는 경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 버몬트가 없는 게 다행이군.'
"그럼 미리 왕궁쪽에 가 있어. 나중에 나 올때 마중나와."
"알았어!"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르르 달려나가는 일행들의 뒷모습을, 죠엘과 록슬리, 아델라이
데 3사람은 마치 주문이 걸린 것처럼 쳐다보았다.
".....대공과 국왕폐하는 아직입니까?"
"아, 이제 곧 나오실 겁니다."
아델라이데가 냉큼 대답했다.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살라딘이
었다. 유나는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져왔다.
"으흠...."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살라딘."
그가 왜 부르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방금, 아니, 방금이라기엔 좀 시간이 지났지만."
유나는 엄지손가락으로 해치 부분을 가리켰다. 한 템포 숨 들이쉬고,
"얀 지슈카경이 폐하를 모시고 갔어요."
".........."
살라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 라는 식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유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알려주어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는 지금까지 여기
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한구석에 가서 서있었다. 곧이어 자신들끼리 의논을
마친 버몬트와 철가면이 함께 들어왔다.
"자, 우선 현재 계획은 이렇다. 자비단에서의 행사는 의례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그쪽 계획
은 며칠이나 걸릴 것 같은가?"
"행사도 행사 나름대로의 문제이지만 전반적으로 도시 자체의 방어력이 얼마나 되느냐에 모
든 일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두고 보는 시일로 3일은 걸립니다."
"에.... 거기에 공식적인 행사까지 합치면?"
"팬드래건 일행이 참여해야 하는 행사는 하루 안에 끝낼 수도 있어요. 다만 제가 걸립니다.
제가 금새 휙하니 사라질 수는 없거든요. 개인적인 사정때문이라도 좀 오래남아있어야 할
것 같구요."
아델라이데는 유나가 다른 누구도 아닌 세라자드에 대한 걱정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자신이 버몬트를 비롯한 팬드래건 왕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과는 같은 듯 하면
서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힘의 역학과는 상관없는, 주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버몬트와 살라
딘 사이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 팬드래건 쪽의 행사는 최대한 줄여주겠나? 자네말대로 하루동안만이
라면 좋지. 그 다음 자네들이 행사를 마치고 일을 정리하고 있을 동안 나는 팬드래건으로
돌아가겠네. 그리고 거기에서 남은 병사들을 태우고 갈 선박을 마련해오지. 설마 바다 위에
서 우릴 침몰시키진 않겠지?"
"현재 투르에 남아있는 군병력이라고는 육해공 중에 육군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
요. 술탄 이스파히니 시절에 여기 계신 분들 중 한분이 해적떼들과 함께 개작살을 내놨죠."
농담 같은 어감에 당사자인 살라딘은 물론, 그 옆의 아델라이데도 엷은 웃음을 띄었다. 클라
우제비츠와 버몬트는 '오호?' 라는 감탄의 표정으로 살라딘을 쳐다보았고 죠엘과 록슬리는
어쩐지 반응이 없었다.
"그럼 이 문제는 이제 됐고, 다음은........."
자비단을 보고 싶다는 건 사실 경님의 생각이 아니었다. 엘핀스톤의 요청이었던 것이다. 잠
시 뜻을 가늠하지 못해 가만히 있는 소연에게 엘핀스톤은 예의 그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밀정노릇을 할 정도로 유능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저는.'이라고 말해서 그녀를 당황하게 만
들었고 나들이 가는 기분이 되어버린 경님이 소연을 부추겼다. 배려라기보다는 자기가 엘핀
스톤과 버몬트가 함께 있는 꼴을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유나는 그 모든 것을 묵인, 허락
했고 (사실 거의 장려하는 수준이었다) 결국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엘핀스톤과 아무 생
각이 없는 경님과 생각하려고 할때마다 옆에서 태클을 받는 소연은 일반백성들처럼 차려입
고 성문을 통과해서 자비단을 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염려되는 것은 엘핀스톤의 밝은 갈색
머리카락과 물빛 눈이었다.
"들키면 제법 소란스러워질거예요. 투르는 인종분포가 그리 다양한 곳이 아니니까."
경님은 엘핀스톤에게 두건을 씌우기로 했다. 옅은 색의 갈색이라 햇빛에 비치면 거의 금발
처럼 보이는 머리카락이지만 잘 묶어서 정돈한 뒤, 짙은 색의 두건을 쓴다면 거의 눈에 띄
지 않으리라. 하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딴 생각이 있는 듯 했다.
"....지금쯤이면 해가 졌을까요?"
"아마도요. 아까 유나한테 다녀왔을 때 노을이 거의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보름이지요?"
"그런데요?"
"그렇다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일단 나가시지요."
영문을 모르는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지만 원래 깊이 생각하는 편은 아닌 두 사람이다.
그녀들은 냉큼 옆에 있는 자신들의 로브를 챙겼다. 엘핀스톤의 흰 옷은 투르에선 제법 튀는
차림이다. 경님은 미리 구해둔 짙은 갈색의 로브를 그에게 걸쳐주려고 옷자락을 벌린 채 기
다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팔을 끼우려던 엘핀스톤은 팔을 뻗은 순간, 갑자기 풋하고 웃
더니 뒤돌아서서 한참을 키득거렸다.
"에? 이거 이상해요? 다른 걸로 바꿀까요?"
"정말..... 여러분들과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긴 합니다만."
엘핀스톤은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경님에게서 로브를 받아들어 자신이 입더니,
막 경님이 입으려던 로브를 빼앗아선 아까 경님이 했던 것과 똑같은 포즈로 옷자락을 벌린
채 우뚝 섰다.
"에스코트는 여성이 받아야 하는 거죠. 어서 입으세요."
아, 그것때문에 웃은 거구나. 알긴 알았지만 어째서 그게 그렇게 웃긴 일이 되는 지는 잘 이
해가 가지 않는 경님이었다. 여자가 남자 옷 들어줄 수도 있는 거지 뭐.
어쨌거나 아가씨 대접을 받는 게 기분나쁠 리는 없다. 허술한 로브지만 미남이 거들어줘서
입으면 밍크코트랑 다를 게 뭐람.
뒷모습이 초라해보이지 않도록 주름까지 정리를 해주고 나서, 엘핀스톤은 경님의 앞으로
살짝 걸어나오더니 팔 한쪽을 내밀었다.
"가실까요, 아가씨?"
소연이 '두사람만의 세계로 가라, 쳇.' 이라고 삐져있을 때, 유나쪽은 이미 논의를 끝내고 철
가면, 살라딘과 함께 남극 원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자리를 피했고, 죠엘, 록슬리, 아델라이
데, 버몬트만이 남아있었다. 민감한 논의들이 오갔지만 문제없이 지나갔기 때문에 분위기에
는 긴장이 풀린 뒤의 찾아오는, 부담스럽지 않은 피로감이 옅게 깔려있었다. 아무도 먼저 말
을 꺼내지 않았지만 침묵이 어색하지도 부자연스럽지도 않았다. 흡연자는 담배 한 개비가
간절하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텁텁하면서도 농밀한 레드 와인 한잔이 그리울, 그런 분
위기였다.
"팬드래건을 떠나온 지도 오래되었군요."
부담스러운 침묵이 아니었기에 그것을 깨는 것도 쉬웠다. 죠엘의 목소리에는 노인들 특유의
아련한 그리움이 깔려있었다.
"68년도 브리드산 포도주, 모리스고우산 수입치즈, 갓 구운 갈릭 브레드, 청결하고 깨끗한
시트가 깔린 푹신한 침대, 그리고 잠들기 전에 읽을 주신경전."
".....전하?"
뜬금없이 버몬트의 입에서 흘러나온 친숙한 어휘들의 나열에 일행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없다는 듯 턱을 괴고는 무심히 대꾸했다.
"누가 그러더군. 못견디게 그리운 것은 그냥 입밖에 내어보라고. 조급하게 만들수도 있지만
그냥 꾹 참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원문을 그대로 옮기자면, '허기로 죽어갈 땐 의외로 먹고 싶은 음식이름을 차례로 부르면 좀
나아지지. 자신의 비참함을 실감하게 되는 동시에, 이걸 먹기 위해서라도 이 지겨운 수업을
견디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오르거든.' ....누가 이런 말을 버몬트에게 하겠나? 당연
히 소연의 말이다.
단순한 군인인 죠엘이나 성기사인 아델라이데는 크게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록슬리는
심각해져서 물었다.
"헌데 주신경전은 왜..."
현실주의자인 록슬리에겐 새삼 이 젊은 주군이 그동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충격을 받고서
종교로 도피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큰 걱정거리인 모양이었다.
한편, 버몬트는 자신의 농담이 '진지'하게 먹히고 있는 것에 약간 실망 중이었다.
(농담에 대한 반응이 웃는 게 아니라 '심각'하게 동의하며 고개 끄덕이는 거라면 다시는 농
담할 기분도 안들겠다;;)
"잠 안올때 읽으면 안성맞춤이니까."
성기사에겐 좀 곤란한 농담이었지만 젊은 여기사인 아델라이데와 풍운의 청춘을 불태우며
창세전쟁의 역사를 두눈으로 목도했던 죠엘에겐 유쾌한 농담이었다. 이번에는 제법 웃음같
은 웃음이 번져나왔다. 버몬트는 그 결과에 만족했다.
버몬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미소라기보다는 쓴웃음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델라이데는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크게 출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거의 감격이라고 표
현할 만 했다.
"하온데 전하, 필립 왕자님의 문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망할 늙은이! 아델라이데는 평생 한번 입밖으로 내어볼까 말까한 과격한 언사를 머리속에서
외쳤다. 꼭 이 상황에 그 이야기를 꺼내야겠어?! (아니, 언니 입장에서 이 아저씨가 늙은이
인 건 알겠는 데...; 정말 이 사람 아직 40대거든? --;;)
정말로 의외였던 것은 록슬리의 질문에 답하는 버몬트의 태도였다.
"형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 그는 투르에 남을 것 같아. 아니, 확실히 남겠지. 사정이 이
래서 어째 인질같은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형에게 이곳이 더 편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
실인 것 같다. 그가 행복하다면 난 됐어."
록슬리는 아, 그런가보다. 다행이군 인 정도로 물러났지만 노장군 죠엘은 거의 감격과 기쁨
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아델라이데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벙쪄버렸다.
"전하...."
"가끔 놀러와준다면 좋겠지. 엘리자베스 누님을 형과 만나게 해드려야 하니까. 뭐니뭐니해도
우리 모두의 고향이니까.... 형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참으로 그렇습니다. 전하!"
"우리쪽도 내전으로 인해 그리 상태가 좋은 게 아니니 돌아가면 무엇보다 내정에 힘써야겠
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이 노장군이 얼마나 그동안 조마조마하게 속을 태우고 있었는 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만약 여기가 시장바닥이었다면 죠엘 장군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아버지의 원수라고 해도 용서해줄 수 밖에 없는 어마어마한 축복을 해주면서 날뛰었을 것이
다. 그 정도로 그는 기뻤다. 늘 불안정하던 주군이 어른이 된 것 같아서 기뻤고, 늘 그를 죽
음의 세계로 끌고가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사신의 그림자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버
린 것처럼 반가웠다.
".......그만 다들 방으로 돌아가지. 자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이렇게 할 일 없이 죽치고 앉아있
을 시간도 아니니 말이야."
3사람의 가신들 중 여성은 오직 아델라이데뿐이었다. 그때 버몬트의 말을 들으며 느끼고 생
각했었던 건 성기사 아델라이데의 이성이 아니라 여성인 아델라이데의 직감이었다. 셜록 홈
즈도 인정했듯이 남자의 열가지 논리도 여성의 직감 하나에 미치지 못하는 법.
이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찰칵하고 스위치가 눌려진 것은 알겠다. 헐겁던 나사가 조여져서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건 알겠다. 퍼즐이 맞은 것은 알겠는 데 이런 모양은 아니었다. 이런 모양이어선
안됐다.
이런 식의 직감에 익숙하지 않은 아델라이데 였기에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주군의 변모가, 집착을 놓아버린 것이 아니라 집착의 대상을 바꾼 것일 뿐이라는 걸
상상할 수도, 추론할 수 있을 만큼의 정보도 없는 그녀의 한계였다.
"으음, 예상대로 달이 떴군요."
"보름달이라서 충분히 밝아요. 어쩔 셈이예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따지듯 묻는 소연에게 조용히 대꾸한 뒤, 엘핀스톤은 경님의 팔을 놓고 몇발자국 앞으로 나
아갔다.
".....아마 이 주문이 맞기를 바랍니다만...."
그는 품 안에서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꺼내더니 몸을 숙이고 땅 위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원을 그렸다. 나뭇가지라는 것은 모양으로 알아보았다. 그런데 달빛에 반사되는
빛깔은 은회색이었다.
원은 천천히, 정교하게 그려졌다. 휘황찬란한 달빛 아래에서 그 원이 이그러짐 없이 반듯한
모양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금을 밟지 않으면서 그 원안에 몸 전체를 집어넣은 엘핀스톤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
다. 은회색으로 빛나던 작은 나뭇가지에 갑자기 불이 붙었지만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나뭇가지가 모조리 불에타서 사라지기 전까지 허공에다 특이한 문양들을 그리며 계속 주문
을 외웠다. 공격마법 때 외우는 것의 두 세배는 될 것 같은 주문이 끝나자, 나뭇가지는 정말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엘핀스톤의 손 위에서 모조리 타버렸다. 그는 나뭇가지를 들고
있던 오른손으로 자신의 눈 위를 가리고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잠시 마법진이 발동할 때처
럼 공기가 붕 떠오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엘핀스톤이 그린 평범한 원의 주변은 어느새 빼곡
한 마법문자들로 가득차있었다.
"........맙소사..."
기계문명이 나름대로 발달했기 때문일까. 존재하는 마력의 수준치고는 안타리아의 마법응용
력은 형편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비록 에디트의 위력이라지만) 그 자신이 발군의 마도사
인 경님과 소연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놀라워요! 자체개발이예요?"
흥분해서 떠드는 경님과 소연의 눈은 엘핀스톤의 머리카락에 고정되어있었다. 달빛 아래에
서도 아까보다 훨씬 짙어진 갈색이 뚜렷이 구분되었다.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이 내려졌을 때
나타난 빛깔은, 거의 새까매보일 정도였다.
"어떻습니까? 성공인가요?"
거울이 없는 이상 자기 모습을 자기가 알 수는 없겠지. 소연과 경님은 두 말 않고 엄지손가
락을 치켜세웠다.
확실히 투르의 재생력은 놀라웠다. 아니, 놀라웠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정작
그 재생의 원동력 중에 하나였던 경님과 소연조차 경악시킬 정도였다. 사실 경님과 소연이
본 것은 폐허가 된, 무인도시가 되어버린 자비단이었다. 케먈이라는 사상 최강의 행정가가
세운 복구계획 아래 예니체리 중의 예니체리 얀 지슈카와 불세출의 용병단 시반 슈미터가
치안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상태에서 일사담의 뉴딜정책이 시행되자 도시는
거짓말처럼 부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일행을 맞이한 것은 별빛이 무색해질 정도의 야외조명이었다. 공기자
체가 빛나고 있는 것처럼 밝았다. 해가 진 지 제법 오래된 시간인데도 거리를 아직도 붐비
고 있었다. 아직도 어디선가 퉁탁퉁탁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는 야간에도 공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케먈이 반쯤은 자랑삼아 가르쳐준 야시장은 자비단 왕궁 앞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둥근 전등이 눈을 아프게 할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다양함과 혼란
함과 어지러움에 경님은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투르 내의 물산이란 물산은 이곳으로 다
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 일사담이 약간의 재주를 부린 모양이었다. 인명피해가 적었다
고는 하나, 가장 황폐화된 것은 역시 북부이고 그 북부의 중심이자 제국의 수도인 자비단은
그 피폐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가장 먼저 복구되어야 할 도시였다.
"뭔가 딴 세상같군요."
"다른 나라 사람한테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도 그래요."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인구유입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인구는 약간의 골치거리인 모
양이다. 야시장 건너편, 즉, 왕궁의 정반대방향에 밀집되어있는 판자촌이 슬쩍 눈길을 끌었
다. 엘핀스톤이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동안 소연은 잽싸게 노점에서 석류 세 알을
구입했다. 석류 외의 다른 품종도 풍부했다. 손으로 집어든 과일도 제법 묵직했다.
"식량부족같은 건 확실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몬스터 고기덕분인지는 모르겠지
만."
"예?"
"그런게 있어요. 모르는 게 세상사는 데 좋아요."
이 과일은 언젠가 살라딘과도 함께 먹은 적이 있었다. 새콤한 과육을 와작와작 씹으면서 그
신맛에 소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찡그린 눈으로 다시금 완벽하게 재기한 제왕의 자
태를 감상했다.
왕궁은 거대했다. 자비단이란 도시의 한가운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공간을 차지
하고 있는 왕궁은 그 주변이 뺵빽한 시가지로 둘러쌓여있는 것이 약간 이상할 정도로 신기
루같은 건물이었다. 거대한 돔과 육중한 벽은 희미하게 아이보리 색을 띈 대리석으로 쌓아
올렸다. 낮에 멀리서보면 건물 전체가 새하얗게 빛날 정도였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기둥
과 발코니, 벽과 계단 하나하나마다 정교한 문양과 함께 치밀하게 색색깔의 광물들로 세공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침이 되어 유나일행이 도착하면 정말 근사하겠군."
"저 왕궁에서부터 자비단 시내 곳곳이 꽃과 불꽃으로 장식된다고 했어."
"승리의 깃발을 드리우고 열광어린 환호가 팡파레처럼 울려퍼지는 가운데 여러분의 친구가
입성하겠군요. 승자로서."
어느새 세 사람은 아직 복구가 덜 끝난 성벽 위로 올라가서 나란히 앉은 채 눈 아래 보이는
화려한 풍경과 지평선과 더불어 눈 앞으로 불쑥 다가올 것 같은 왕궁을 바라보았다. 왕궁
곳곳은 계속 불이 켜져있어서 생기는 빛의 그라데이션이 건물 곳곳에 신비감을 더하고 있었
다. 왕궁 자체가 어둠이라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있는 등대섬 같았다. 등대의 존재감이 바
다를 압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맞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왕궁의 꼭대기에서부터 온갖 색상의 깃발이 휘날리고 꽃이 비처럼 내리는 가운데 개선장군
처럼 입성하는 친구의 모습을 상상하며 경님과 소연은 동시에 한숨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우리도 그냥 같이 들어올 걸 그랬나?"
"안돼안돼. 난 그 자리에서 졸도해버릴꺼야."
"미리 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며칠간 이 도시는 인간세상과는 격리된 듯한 분
위기가 계속 될테니까요."
"사실은 지금도 그런 걸요."
"..........."
엘핀스톤은 말없이 성벽에 걸터앉아 허공에서 덜렁거리는 자신의 발 바로 아래를 쳐다보았
다. 이른바 슬럼가였다. 왕궁을 중심으로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빛은 점점 옅어져서 성벽 바
로 아래쯤 되면 완전한 암흑이었다. 곳곳에 작은 등불이 켜져있었지만 이내 곧 꺼지곤 했다.
이 성벽 위에서 이 도시를 바라본 사람이 그들뿐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들 중 적지 않
은 수가 성벽 바로 아래의 현실을 목도하고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을 지도 모른다. 이 도시
라고 해서 빈곤과 황폐를 피해갈 수 있을리가 없다. 그것은 그 누가 아무리 유능한 행정가
든, 상인이든, 재상이든, 왕이든 상관없는 문제다. 어디에나 가난은 존재한다. 배고픔과 질병
이라는 이름의 비참함은 존재한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밤하늘 아래 한껏 떠오른 보름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비단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완벽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 아니며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결점, 어쩌면 그 이상의 결점을 눈 앞에서 목도해도 분노하거나 탄식할 마음
이 들지 않는다. 이미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너무도 아름답기에 그만 모른 척 회피하고 싶
어져버린다. 그 결점조차 미덕이라고 우기고 싶어진다. 기만이고 환상이다.
그 기만과 환상이, 투르를 일으키고 있는 힘들 중 하나라는 것을 엘핀스톤은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이 팬드래건을 떠나온 이유였다는 것도 기억해냈다.
불필요한 내전과 통치자의 잔인함을 모조리 덮어씌운 위대한 팬드래건의 영광이 너무도 추
악해서 떠나온 그가 여기서 똑같은 것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면하지도 비난하지도, 꺼
리지도 않는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분명한 위선이며 기만을, 두 눈 멀쩡히 뜨고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힘이
이곳에는 있었다.
엘핀스톤은 마침내 이 성벽 위에서 이 도시를 바라보며 투르가 팬드래건을 이길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엘핀스톤을 비롯한 모든 팬드래건 수뇌부가 해내지 못한 일을, 어
째서 '그녀'는 할 수 있었는 지 깨달았다.
자비단.
진실을 기만하여 더욱 아름다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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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님에게 말하는 엘핀스톤의 말투가 약간 달라진 거..... 눈치채셨나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