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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소(司馬昭)의 전횡(專橫)과 반발(反撥)하는 제갈탄(諸葛誕) -
촉(蜀)의 강유(姜維)가 큰 패배(敗北) 이후(以後), 제 스스로 벼슬을 깎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동안,
위(魏)나라에서 등애(鄧艾)는 진태와(陳泰) 함께 큰 잔치를 열어 전쟁에서 고생한 삼군에게 넉넉한 상을 내렸다. 진태(陳泰)가 낙양(洛陽)에 표문을 올려 등애(鄧艾)의 공을 알리자, 사마소(司馬昭)는 등(鄧艾)애의 벼슬을 높이고 그의 아들 등충(鄧忠)을 정후(亭侯)로 봉했다.
위주(魏主) 조모(曹髦)는 연호를 정원 3년(256)에서 감로(甘露) 원년으로 고쳤다. 사마소(司馬昭)는 황제(皇帝)의 윤허(允許)를 받지 않고 스스로가 대도독(大都督)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 삼천 명에 달하는 효장(驍將)의 호위를 받으며 다녔고, 조정(朝廷)의 모든 정사(政事)를 위주(魏主) 조모(曹髦)에게 아뢰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결재(決裁)해버렸다. 사마소(司馬昭)의 마음 속에는 찬역(簒逆)의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사마소(司馬昭)에게는 그를 따르는 유능(有能)한 모사(謀士)가 있었다. 이름은 가충(賈充 : 자는 공려(公閭)로, 죽은 건위장군(建威將軍) 가규)賈逵)의 아들이고, 사마소 수하(手下)에서 장사(長史)로 있었다.
어느날 가충(賈充)이 사마소에게 아뢴다.
"주공(主公)께서 대권(大權(을 잡고 계시지만 아직 전국(全國)의 민심(民心)이 그것을 진심(眞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하오니 은밀(隱密)하게 민심을 살펴본 후에 천천히 대사(大事)를 도모(圖謀)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사마소(司馬昭)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동쪽 지방을 살펴보고 오도록 하라. 명분(名分)이 있어야 하니 출정(出征)한 군사들을 위로(慰勞)한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 좋겠지. 현지(現地)에 있는 장군들의 속마음을 은근(慇懃)히 떠보고 나에게 보고하라."
가충(賈充)은 사마소(司馬昭)의 명을 받고 우선 회남(淮南)에 있는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제갈탄(諸葛誕)을 만나러 갔다. 제갈탄(諸葛誕)은 낭야군 남양(琅琊郡 南陽) 출신으로, 제갈량(諸葛亮)의 친척(親戚) 동생뻘 되는 인물이었다. 줄곧 위(魏)나라 조정(朝廷)을 위해 일해왔는데, 제갈량이 촉(蜀)나라의 스상(丞相)인 까닭에 한참을 요직(要職)에는 진출하지 못하다가 제갈량(諸葛亮)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마침에 중요(重要)한 직책(職責) 여럿을 거쳐 고평후(高平侯)의 작위(爵位)를 받고 회남(淮南)과 회북(淮北) 일대의 군마(軍馬)들을 총감독(總監督)하고 있었다.
가충(賈充)이 군사들을 위로한다는 명목(名目)으로 회남에 이르니, 제갈탄(諸葛誕)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가충을 위해 환영연(歡迎宴)을 열어 융숭(隆崇)하게 대접했다.
환영연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가충(賈充)이 지나가는 말처럼 제갈탄(諸葛誕)에게 묻는다.
"요즘 낙양(洛陽)의 선비들 사이에서는 천자 폐하가 너무 유약(幼弱)하여 군주(君主)의 재목(材木)이 되지 못한다는 말들이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장군은 그 소문(所聞)을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제갈탄(諸葛誕)은 의아(疑訝)하다는 표정(表情)을 짓더니 가충(賈充)의 말에 대답한다.
"못 들어봤소."
"사마소(司馬昭) 장군(將軍)이 삼대(三代)대에 걸쳐서 나라를 보필(輔弼)해왔으니 그 공이 하늘까지 닿아 위(魏)의 대통을 이어받기에 적임자(適任者)라는 소문(所聞)도 돌고 있는데 그 또한 못 들어보셨겠습니다. 귀공께서는 소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갈탄(諸葛誕)은 대번에 버럭 화를 내며 가충(賈充)을 쏘아본다.
"그대는 대대로 위(魏)나라의 국록(國祿)을 먹고 살았는데 어찌 감(敢)히 그런 불경(不敬)한 소리를 입에 담는단 말이오!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도 마시오!"
가충(賈充)은 멋쩍은 웃음을 웃으며 대답한다.
"그저 세상(世上)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전(傳)한 것일 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
"조정(朝廷)에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 같은 신하(臣下)들은 목숨을 마쳐 나라의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해야 하는 것이오." 제갈탄(諸葛誕)의 말을 들으면서 가충(賈充)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가충(賈充)은 제갈탄(諸葛誕)과 작별(作別)하고 낙양(洛陽)으로 돌아가 사마소(司馬昭)에게 제갈탄(諸葛誕)과의 일을 그대로 고(告)했다.
사마소(司馬昭)는 발끈하며 호통을 친다.
"쥐새끼 같은 놈! 감(敢)히!"
화를 내는 사마소(司馬昭)에게 가충(賈充)이 말한다.
"제갈탄(諸葛誕)은 회남(淮南)땅에서 민심(民心)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후환(後患)이 클 것이니 하루 속히 제거(除去)해야 할 것입니다."
사마소(司馬昭)는 밀서(密書) 한 통을 양주 자사(揚州 刺史) 악침(樂綝)에게 보내고, 칙사(勅使)에게 조서(詔書)를 주어 제갈탄(諸葛誕)에게 전(傳)하도록 했다. 조서에는 제갈탄을 사공(司公)으로 봉(封)할테니 조정(朝廷)으로 상경(上京)하라는 내용(內容)을 담았다. 조서를 읽어본 제갈탄(諸葛誕)은 지난번 가충(賈充)이 자신(自身)을 방문(訪問)했을 때 있었던 일을 사마소(司馬昭)에게 일러바쳤음을 직감(直感)했다. 조서(詔書)를 그대로 믿고 상경했다가는 무사(無事)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갈탄(諸葛誕)은 조서(詔書)를 들고 온 칙사(勅使)를 불러다놓고 심문(審問)했다. 엄(嚴)한 문초(問招)를 견디지 못한 칙사가 마침내 진실(眞實)을 고(告)했다.
"이 일은 양주 자사(楊州 刺史) 악침(樂綝)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악침(樂綝)이 이 일을 어떻게 안다는 말이냐?"
제갈탄(諸葛誕)의 호통에 칙사(勅使)는 순순(順順)히 대답(對答)한다.
"사마(司馬) 장군(將軍)께서 악침(樂綝)에게도 사람을 시켜 밀서(密書)를 보냈습니다."
"뭣이야?" 제갈탄(諸葛誕)은 크게 화(火)를 내며 조서(詔書)를 가져 온 칙사(勅使)의 목을 바로 베어버렸다.
그리고 군사(軍士) 천명(千名)을 거느리고 악침(樂綝)이 있는 양주(楊州) 땅으로 향했다.
양주성(楊州城)에 당도(當到)하고보니 성문(城門)은 모두 닫혀있고 조교(弔橋 : 성문 앞 양쪽에 줄이나 쇠사슬을 건너지르고, 거기에 의지하여 매달아 놓은 다리) 또한 올려져 있어서 성(城) 안으로 진입(進入)할 수 없는 상태(狀態)였다. 제갈탄(諸葛誕)은 성 아래에서 문을 열라고 고함(高喊)을 쳤다. 그러나 성 위에서는 대답(對答)하는 자(者)가 없을 뿐더러,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제갈탄(諸葛誕)은 또 소리를 쳤다.
"악침(樂綝)! 네 이놈! 여봐라! 성(城)을 공격(攻擊)하라!"
제갈탄(諸葛誕)의 명령(命令)에 용감(勇敢)한 군사(軍士) 십여명(十餘名)이 해자(垓子 : 성 주위에 둘러 판 못)를 뛰어넘고 몸을 날려 성벽(城壁)을 타고 올라가 성(城)의 수비군(守備軍)을 죽이고 성문(城門)을 활짝 열었다. 제갈탄(諸葛誕)은 부대(部隊)를 이끌고 성(城) 안으로 진입(進入)하기가 무섭게 곳곳에 불을 지르며 악침(樂綝)의 관가(官家)로 쳐들어갔다. 악침이 누각(樓閣) 위로 달려가며 도망(逃亡)치는데 제갈탄(諸葛誕)은 성난 호랑이 같은 표정으로 손에는 칼을 번뜩이며 누각의 계단(階段)을 뛰어 올라간다.
"악침(樂綝)! 네 아비 악진(樂進)은 지난날 나라에 큰 은혜(恩惠)를 입었거늘, 그 자식 된 놈은 어찌하여 그 은혜에 보답(報答)할 생각은 않고 역적(逆賊) 사마소를 따른단 말이냐!"
제갈탄(諸葛誕)은 막다른 길에서 벌벌 떨고 있는 악침(樂綝)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그리고 바로 사마소(司馬昭)의 죄목(罪目)을 모조리 적은 표문(表文)을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또, 회남(淮南)과 회북(淮北)에 주둔(駐屯)하고 있던 십만(十萬)의 군사와 양주(揚州)에서 투항(投降)한 군사 사만(四萬)을 집결(集結)시키고, 마초(馬草)와 식량(食糧)을 확보(確保)하여 진군(進軍)할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사마소(司馬昭)의 대군(大軍)을 감당(堪當)하기에는 병력(兵力)이 부족(不足)하였으므로, 동오(東吳)에 도움을 요청(要請)하기로 했다. 자신(自身)의 아들 제갈정(諸葛瀞)을 볼모로 보내면서 함께 사마소(司馬昭)를 토벌(討伐)하자고 제의(提議)할 참이었다.
이무렵 동오(東吳)는 승상(丞相) 손준(孫峻)이 병(病)으로 죽고 그 사촌동생 손침(孫綝)이 나랏일을 보고 있었다. 손침(孫綝)은 성질(性質)이 우악(愚惡)스럽고 사나워서 대사마(大司馬) 등윤, 장군 여거(呂據), 왕돈 등을 죽이고 대권(大權)을 장악(掌握)하고 있었다. 오주 손량(吳主 孫亮)은 총명한 군주였으나 이미 권력이 손침(孫綝)에게 넘어가 있는 터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손침(孫綝)은 제갈탄(諸葛誕)으로부터 풍성한 뇌물과 인질을 받더니 기꺼이 제갈탄을 돕기로 했다. 대장 전역(全懌)과 전단(全端)을 주장으로 삼고, 우전(于詮)을 후군장으로 삼아 뒤따르게 하고, 주이(朱異)와 당자(唐咨)를 선봉장(先鋒將)으로, 문흠(文欽)을 향도관(嚮導官)으로 삼아 모두 합쳐 칠만(七萬)의 군사(軍士)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출정(出征)시켰다.
한편, 제갈탄(諸葛誕)의 표문(表文)이 비로소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朝廷의 모든 권한이 사마소에게 있으니 그 내용을 사마소(司馬昭)가 가장 먼저 알게될 수밖에 없었다. 사마소는 격분하여 당장(當場)에 군사를 몰고 가서 제갈탄(諸葛誕)을 치려는 기세였다.
그것을 보고 가충이 간한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주공께서는 부친과 형님의 기업(基業)을 이어받으셨으나, 아직 그 은덕이 천하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하니 천자를 내버려두고 출정하셨다가 조정에 변이라도 일어나면 후회가 크실 것입니다. 그러니 태후와 황제께 주청하여 두 분을 모시고 출정하도록 하십시오."
"그러하겠군. 즉시 궁으로 가야겠다."
사마소는 궁으로 가서 태후에게 아뢴다.
"제갈탄(諸葛誕)이 모반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신이 문무백관들과 의논하여 막을 방도를 정하였으니 태후께서는 황제와 함께 어가를 타고 친정(親征 : 임금이 몸소 전쟁터에 나가 정벌함)하시어 선제의 뜻을 이으소서."
"신의 뜻대로 하시오." 태후는 사마소가 두려운 나머지 순순히 허락했다.
사마소는 이번에는 위주 조모를 찾아가 출정을 청했다.
이에 위주(魏主) 조모(曹髦)는,
"이미 대장군께서 천하병마를 통솔하고 있는데 짐이 굳이 가야하오?" 하고, 묻는다.
사마소는 곧바로 핑곗거리를 찾아 대답한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무제(武帝 : (曹操조조)께서는 천지를 종횡무진하셨고, 문제(文帝 : (曹丕조비)와 명제(明帝 : (曺叡조예)께서는 우주(宇宙)를 품는 웅대(雄大)한 뜻을 지니시고 큰 적과 대적(對敵)할 때마다 반드시 친정(親征)하셨습니다. 폐하(陛下)께서도 선제(先帝)의 유지(維持)를 계승(繼承)하여 역적을 물리치셔야 하옵니다." 조모(曹髦) 또한 태후(太后)와 마찬가지로 사마소의 기세에 눌려 사마소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사마소(司馬昭)는 낙양과 장안의 군사 이십육만 명을 동원하고, 진남장군 왕기(鎭南將軍 (王頎)를 정선봉(正先鋒)으로, 안동장군 진건(安東將軍 陳騫)을 부선봉으로 삼았다. 그리고 감군 석포(監軍 石包)를 좌군장으로, 연주 자사 주태(兗州 刺史 周太)를 우군장으로 삼아 태후와 황제의 어가를 호위하며 회남을 향해 진격했다.
제갈탄(諸葛誕)을 도우러 온 동오(東吳)의 선봉 주이(朱異)가 처음으로 사마소의 군사와 마주쳤다. 주이가 말을 휘몰아 앞으로 달려나오자 이에 질세라 위군에서는 왕기(王頎)가 앞으로 나섰다. 둘이 맞붙은지 불과 삼 합만에 주이(朱異)는 패(敗)하여 달아났다. 주이(朱異)의 뒤를 이어 동오(東吳)에서는 당자(唐咨)가 달려나와 왕기(王頎)와 대적(對敵)하려했으나 당자(唐咨) 역시 삼 합을 넘기지 못하고 크게 패했다. 승세(勝勢)를 몰아 왕기는 전군을 휘몰아 오군(吳軍)을 무차별 공격했다. 결국 오군은 오십 리나 패퇴하여 그곳에 영채를 세우고, 수춘성에 있는 제갈탄에게 패전 소식을 알렸다. 오군의 처참한 패전 소식을 들은 제갈탄은 직접 나서기로 하고 문흠과 그의 두 아들 문앙(文鴦)과 문호(文虎)와 함께 정예병을 이끌고 나갔다.
사마소(司馬昭)는 제갈탄(諸葛誕)이 오군(吳軍)과 결탁(結託)하여 싸우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산기장사 배수(散騎將史 裴秀)와 황문시랑 종회(黃門侍郞 鍾會)를 불러들여 적을 물칠 계책을 논의했다.
종회(鍾會)가 사마소에게 말한다.
"오군(吳軍)이 제갈탄(諸葛誕)을 돕는 것은 오직 실리(實利)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더 큰 이익(利益)을 제공하여 그들을 유인(誘引)하면 금방 넘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사마소(司馬昭)는 종회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겨 즉시 명을 내렸다.
"석포와 주태는 석두성(石頭城)에 가서 매복하고, 왕기(王頎 또는(기基)와 진건陳騫)의 정예병은 그 뒤에 대기하도록 하라. 그리고 편장 성쉬(偏將 成倅)는 군사 수만을 이끌고 나아가 적을 유인하고, 진준(陳俊)은 소, 말, 나귀, 노새에 상품(賞品)을 가득 싣고 가다가 적이 습격하면 그 자리에 모조리 버리고 달아나도록 하라."
그날 제갈탄(諸葛誕)은 오나라 주이(朱異)를 왼쪽에, 문흠(文欽)을 오른쪽에 포진 시켰다. 제갈탄이 위군 진영을 바라보니 아직 위의 군마들이 말끔히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것이 기회라고 판단한 제갈탄은 대군을 휘몰아 일제히 진격했다. 위의 장수 성쉬는 크게 당황한 듯 급히 후퇴하고, 위병들은 끌고가던 소와 말 등을 그대로 두고 달아나버렸다. 위군이 버리고 간 소와 말, 나귀에는 귀한 재물이 가득했다. 제갈탄을 돕기 위해 온 오군들은 그것을 보더니 서로 손에 넣으려고 바빠서 싸움에는 관심을 전혀 두지 않았다. 군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어수선한데 갑작스럽게 어디선가 포소리가 터졌다. 그러더니 좌측에서는 석포의 군사들이, 우측에서는 주태의 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제갈탄이 급히 군사들을 수습하여 퇴각을 하려는데 다시 왕기와 진건의 정예병이 엄습해 오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곧이어 사마소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치자 제갈탄은 황급히 패잔병들을 데리고 수춘성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성문을 꼭 걸어잠그고 말았다.
사마소(司馬昭)는 천자의 어가를 항성(項城)으로 보내놓고, 자신은 제갈탄이 있는 수춘성으로 향했다. 수춘성을 사방으로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마음 한 편에서는 오군의 역습을 걱정하고 있었다. 오군이 안풍(安豊)으로 물러나 주둔하면서 배후를 노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종회(鍾會)가 사마소(司馬昭)에게 말한다.
"제갈탄(諸葛誕)이 비록 패하여 수춘성 안으로 달아났다고는 하지만 수춘성 안에는 식량과 마초가 아직 많이 있을 것이고, 오군은 안풍에 주둔하고 있으니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있다 하겠습니다. 또 우리 군은 수춘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고 있는데 제갈탄이 지구전을 쓰겠다하면 굳게 지킬 것이나, 다급해지면 결사적으로 싸우러 나올 것입니다. 혹시나 저들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을 때 오군이 협공을 해오면 상황은 우리에게 아주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는 삼면만 공격하시고, 남문의 큰 길 하나는 터놓으셔서 적이 스스로 달아날 길을 열어주십시오. 적들이 달아날 때 그 뒤를 치면 완승은 문제 없습니다."
사마소(司馬昭)는 오군(吳軍)의 기습이 여전히 불안하여 종회에게 묻는다.
"오군이 배후를 습격해오면 어떻게 하나?"
"오군(吳軍)은 원정길을 왔으므로 군량 수급이 원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날랜 기병들을 데리고 뒤를 교란하기만 해도 저들은 퇴로가 끊길까 두려워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사마소(司馬昭)는 종회(鍾會)의 어깨를 다독이며 흐뭇해했다.
"그대는 과연 내 장자방(張子房 : 한고조 때의 뛰어난 모사 장량(張良)의 자)이로다!"
그리고 즉시 왕기에게 남문을 공격하던 군사들을 철수시킬 것을 명하였다.
안풍에 주둔하고 있는 오(吳)나라의 손침은 선봉장 주이를 불러다 놓고 문책을 했다.
"수춘성 하나도 얻지 못하면서 장차 중원을 어찌 도모하려고 하느냐? 또 패전했을 때에는 네 목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주이는 본채로 돌아와 장수들을 불러모으고 손침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대책을 상의했다. 후군장 우전이 먼저 계책을 내놓는다.
"수춘성 남문의 포위가 열려 있으니 제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서 제갈탄을 돕겠습니다. 장군이 위군에게 싸움을 걸어 접전 중일 때 우리가 달려나가 협공하면 사마소의 군사들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음...... 좋은 계책이오. 허나......"
주이가 망설이자 전역, 전단, 문흠이 주이가 걱정하는 바를 알겠다는 듯 우전과 함께 수춘성에 들어가 싸우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우전과 세 장수는 군사 일만을 이끌고 수춘성 남문을 통해 성으로 진입했다. 그 모습을 지켜 본 위군은 즉시 사마소가 있는 본영에 그 사실을 보고했다 .사마소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오군이 성의 안팎에서 협공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즉시 왕기와 진건을 불러 명을 내린다.
"그대들은 각자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나가서 주이가 오는 길을 끊고 뒤를 쳐라." 두 장수가 사마소의 명을 받고 출동했다.
주이가 작전을 실행하려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격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큰 함성소리가 나더니 왕기와 진건이 군사들을 휘몰아 짓쳐왔다. 왕기와 진건의 엄습에 주이가 이끄는 오군은 또 대패하였다. 주이는 얼마 전 손침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아 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손침이 주이를 호출했다.
손침은 주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고함을 쳤다.
"못난 놈! 번번이 패하는 너 같은 놈을 장수라고! 이 놈의 목을 쳐라!" 주이는 대꾸도 하지 못하고 무사들에게 끌려나가 당장에 목이 떨어져 나갔다.
손침은 곧장 주이와 함께 왔던 주장 전단의 아들 전의도 불러들였다.
"또 위군을 물리치지 못하고 대패하는 날에는 너희 부자도 내 얼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장수들을 차례로 책망하고 손침은 건업(建業)으로 돌아갔다.
손침이 건업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종회가 사마소에게 말한다.
"손침이 물러갔습니다. 제갈탄은 밖에서 도울 구원병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수춘성의 포위망을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사마소는 종회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장병들을 독려하여 수춘성에 쉴 틈 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전의가 군사들을 이끌고 제갈탄을 돕기 위해 수춘성에 진입하려 하였으나 위군의 무서운 기세에 눌려 진입을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대로 물러갔다가는 손침의 손에 목이 달아나는 자신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한지라 사마소 군에 투항을 하기로 했다.
사마소(司馬昭)는 투항한 전의를 바로 편장군에 임명했다. 전의는 사마의의 은덕에 감격하여 아버지 전단과 숙부 전역에게 편지를 적은 후 화살에 묶어 수춘성 안으로 쏘아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손침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주이 장군을 죽였습니다. 주이 장군의 목을 치자마자 저를 부르더니 또 다시 패전하는 날에는 저와 더불어 아버지의 목숨까지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며 저를 위협하였습니다. 제가 수춘성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숙부를 돕고자하였으나 위군의 기세가 드높은지라 망설이다가 마침내 위군에 투항하였습니다. 사마 대도독은 저에게 편장군의 지위를 주고 후하게 대접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숙부도 잘 생각하셔서 처신하시기 바랍니다.]
전단은 아들의 편지를 받고 고심 끝에 전역과 함께 수천 군사를 이끌고 수춘성 밖으로 나와 사마소 군에 투항했다.
오군이 하나 둘 위군에 투항하자 제갈탄은 성 안에서 걱정의 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모사 장반(謨士 蔣班)과 초이(焦彝)가 제갈탄에게 말한다.
"성안에 병력은 많고 식량은 적습니다. 이런 상태로라면 성을 오래 지키는 것은 무리입니다. 차라리 전군을 이끌고 나가서 사마소 군과 결판을 내는 것이 낫겠습니다."
두 모사의 말에 제갈탄은 벼락 같이 화를 낸다.
"내가 지키겠다는데 너희들은 싸울 생각만 하니, 뭔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 아니냐! 다시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자가 있으면 참형에 처하겠다!"
사마소(司馬昭)의 군대로 이탈하는 군사들이 늘어감에 따라 제갈탄의 불안과 의심을 커져갔다.
그날 밤 이경 무렵, 제갈탄에게 사마소와의 정면 대결을 권했던 장반과 초이는 제갈탄에게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성을 넘어가서 사마소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사마소는 앞서 투항했던 전의와 마찬가지로 두 모사들을 무겁게 등용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니 수춘성 안의 장병들은 나가서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그 말을 감히 꺼내지 못했다.
위군은 수춘성 벽 둘레에 토성을 쌓아 회수(淮水)의 흐름을 막아 놓았다. 그것을 보고 제갈탄은 회수가 범람하여 위군이 쌓은 토성이 무너지면 그 기회를 잡아 군사들을 몰고 나가서 적을 공격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위군이 홍수로 혼란에 빠져있을 때 공격하면 위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 이르러서도 비는 소식이 없었다. 성 안의 식량은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어 군사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두 아들과 함께 작은 성문을 굳게 지키고 있던 문흠은 군사들이 굶주림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 보다 못해 제갈탄을 찾아갔다.
"식량과 마초가 바닥나서 굶어죽는 병사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북방에서 동원해온 군사들이라도 밖으로 내보내서 입을 다소나마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흠이 진심어린 간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탄은 불같이 성을 내며 호통을 친다.
"북방의 군사들은 모두 내 부하들인데 그들을 내쫓으라 하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너는 나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구나! 여봐라! 이 놈을 당장에 끌어다 목을 쳐라!"
아버지 문흠과 함께 같던 아들 문앙과 문호는 제 아버지가 제갈탄에게 처참한 꼴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고는 각기 단도를 빼어들고 제갈탄의 호위 무사 수십 명을 찔러 죽인 후, 성벽을 뛰어 넘어 가서 위군에 투항했다.
사마소(司馬昭)는 투항한 문앙과 문호의 목을 당장에 치려고 했다. 지난날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켰던 당시에 문앙이 위군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일에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곁에 있던 종회가 사마소에게 가만히 말을 건낸다.
"죄는 이들이 아니라 문흠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문흠은 이미 죽었고, 두 아들은 수춘성 내부의 형세가 다급해져서 항복해왔는데, 이들을 죽여버린다면 성 안의 결의만 굳어지게 할 것입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사마소는 종회의 말에 따라 문항과 문호를 장막에 불러들여 좋은 말로 위로하고, 준마와 비단을 하사했다. 그리고 둘을 편장군 관내후(偏將軍 關內侯)에 봉하였다. 문앙 형제는 뜻밖의 후한 대접에 감격하여 말을 타고 바로 수춘성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수춘성 둘레를 돌며,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벼슬까지 받았다. 너희들은 어찌 항복하지 않고 가만히 있느냐?"
하고, 소리쳤다. 성 안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어찌보면 문앙은 사마소의 원수인데 저렇게 중용되었다. 아무 거리낄 것이 없는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성 안의 많은 군사들이 위군에게 항복하자 하는 마음이 커져만 갔다.
제갈탄은 그것을 알고 주야로 직접 성 안을 순시하면서 탈주하려는 자들을 잡아 죽여 항복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겁을 주었다. 그럴 수록 수춘성 내의 군심은 심하게 요동쳤다.
종회는 성안의 민심이 완전히 제갈탄에게서 등진 것을 파악하고 사마소에게 고한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이 기회에 전면 공격을 하십시오." 사마소는 크게 기뻐하며 삼군에 공격을 명했다.
사방에서 위군이 떨쳐일어나 일제히 수춘성을 공격하는데, 이때 북문을 지키던 수문장 증선(守門將 曾宣)이 성문을 열어 위군의 진입을 도왔다.
제갈탄은 사마소의 군대가 성안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 황급히 수백 명의 친위병을 거느리고 샛길로 빠져나갔다. 조교를 건너 성 밖으로 나가려는데 뜻밖에도 조교 앞에서 위군 대장 호분(胡奮)과 맞딱뜨렸다. 제갈탄은 제대로 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호분의 칼에 목이 잘려나갔다. 제갈탄을 호위하던 친위병들은 모조리 사로잡혔다.
서문 쪽에서는 왕기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쳐들어 가는데 문 밖으로 나가던 동오 장수 우전과 마주쳤다. 왕기가 우전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너는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느냐!"
우전은 화를 내며 왕기에게 대꾸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구하려고 출전하였는데 적에게 항복하고 마는 것은 의인(義人)이 행할 도리가 아니다!"
그리고는 말을 마치자마자 투구를 벗어 던지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친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싸움터에서 싸우다 죽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이냐!" 우전은 칼을 휘두루며 왕기에게 달려들었다. 삽심여 합 쯤 싸웠을 때, 우전은 인마(人馬)가 모두 지쳐버려서 군사들의 싸움이 어지러운 가운데 휩쓸려 죽고 말았다.
수춘성에 입성한 사마소는 제갈탄 일족을 모두 잡아다 효수형에 처하고 삼족을 멸했다.
그리고 끌려온 제갈탄 친위병을 불러다가 꿇어 앉혀놓고 물었다.
"너희들은 항복하겠느냐?"
제갈탄의 부하였던 포로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역적에게 동조하느니 차라리 제갈 장군과 함께 죽겠다!" 하고, 외치는 것이었다.
"멍청한 놈들! 저놈들을 모두 성 밖으로 끌어다 죽여 버려라!"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마소는 포로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하고는 문루(門樓)에 올라 죽기를 기다리는 포로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포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항복하면 죽음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사람이 죽어나갈 때까지도 이들의 입에서는 항복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포로를 처단하는 것을 모두 지켜본 사마소는 크게 한숨을 짓더니 말한다.
"충절(忠節)만은 대단하구나. 죽은 자들을 관을 갖추어 매장해 주어라."
제갈탄을 도우러 출전했던 오군의 대부분은 위군에 항복했다. 이들의 처리를 두고 배수가 사마소에게 아뢰었다.
"오군의 가족들이 모두 동남 강회(江淮)에 남아 있으니 투항병들을 그냥 두었다가는 반란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희 나라와 내응해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생매장 시켜버리십시오."
배수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종회가 화들짝 놀라며 사마소에게 말한다.
"안 될 말입니다. 병법에서도 전국위상(全國爲上 :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싸움을 최소화하여 적국을 온전히 두고 이기는 것이 상책이라는 뜻)이라 하였습니다. 원흉(元凶)만 처단하면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또 산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어진 자가 할 짓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들을 강남으로 돌려보내서 우리의 관대한 도량을 보여주는 것이 옳겠습니다."
사마(司馬昭)소는 종회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오군의 포로들을 모두 석방시켜서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그러나 오(吳)의 장수(將帥) 당자(唐咨)는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는 것을 망설였다. 손침의 보복이 두려워서였다. 사마소(司馬昭)는 당자(唐咨)와 같은 자들을 모두 중용(重用)하여 삼하(三河 : 하동·하내·하남) 지역에 고루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회남(懷南) 땅의 반란(叛亂)은 진정)되었다.
사마소(司馬昭)가 낙양(洛陽)으로 개선(凱旋)할 준비(準備)를 할 때였다. 사마소(司馬昭)에게 서쪽 변방(邊方)으로부터 급보(急報)가 한 장 날아들어왔다.
삼국지 - 409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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