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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해빗
이 분의 기록을 보며 놀란것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많은 비밀들의 출처가
바로 한국에서 정치 망명을 한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문명자씨였다는 것.
또한 수구들의 박정희.육영수 여사,박근혜에 관한 보편적인 인식 역시
이분의 기록으로 인해 세워졌다는것.
읽다보면 어느 다큐보다 현장감이 높아서 생생한 인물들을 통해 당시 상황이 보입니다
아직 반도 읽지못한 방대한 양인데.
놀라운것은 조선일보등이 바그헤롱의 명칭을 PP라고 하자는 글을 썼는데
그것이 옛 박정희의 미국 약칭이였다는것
너무 노골적이라서 흐지부지된건가
공산주의적 통치를 하는 독재 시대에 대한 향수에 미친 자들이 한국을 적화시키고있는중?
황태성 사건에 관해 당시에 문제제기했던 사람으로 장도영계의 '조웅'이 등장하는데
이분이 조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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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사 사무엘 D 버거는 '군사정부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김종필이 군사위원회 내의 반대파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수많은 조처를 취했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습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대규모의 증권파동을 대담하게 일으키고
박정희가 행한 화폐개혁의 진정한 의도가 밝혀지자
버거 대사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화폐 개혁은 사회주의로 가는 장기계획의 첫 조처임이 명백했습니다.
침략적인 공산국과 인접하고 있는 한국에서 그런 조처는 한국을 급속히 공산화 시키는
수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하튼 박정희와 김종필이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군사위원회로부터 축출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 대사가 다 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경향에 반대했을 때는
이미 시기가 늦었던 것입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득세한 후 한국에는 수많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한국 국민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를 다시 맺으려고 2년 전에 북한에서 장관급
공산주의자가 남하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중략)----------
내가 알기로는 정전 이후 북한이 각료급 공산주의자를 남파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61년 9월 얼마 전까지 이북에서 차관으로 일했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사람이
서울에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황태성입니다.
그가 온 다음 두 달 동안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세 번 만났습니다.
602호실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 방 바로 건너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24시간 감시하는 장소였습니다.
본인은 이 세 번 모임에서 그들이 무엇을 논의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박정희는 다른 '애국적인 한국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황을 투옥시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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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박 의장의 궁극적 목적을 완전무결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46년에서 48년 사이의
공산당과의 연관, 황태성 사건을 다룬 방식, 그리고 공산당식 통제 방법을 쓰고 있는 것
등은 그에 대한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다.
그가 이번 대선에서 이긴다면 한국의 장래가 대단히 우려스럽다.
오레건 주에서 래리 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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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래리 베이커의 증언을 즉시 기사화해서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특종성 기사가 보도되지 않았다. 실망이 컸지만 그 무렵 내가 보낸 기사 중 상당수가
휴지통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군사정권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됐겠거니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문봉 장군이 다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자유당 때 육군 정보국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 분야에 매우 밝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순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는데
그 사건 재판장 최석 장군이 지금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시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정일권과 백선엽, 이용문 장군등이 박정희를 구출 하느라 힘썼는데
결국 박정희는 3천여 명에 달하는 군내 남로당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주고
자신은 구제받아 문관으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곧바로 나는 최석 장군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그는 강문봉 장군의 말대로 "박정희는 남로당 군책으로 있었다"라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곧 국회도서관에 가서 당시의 신문들과 미군 정보자료 등을 찾아냈다.
자료 내용은 강문봉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었다. 수집한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나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 본사에 보냈다.
필자는 그 기사의 첫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박정희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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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71년 나는 뜻밖에도 김형욱의 입에서 내가 보낸
래리 베이커 서면 인터뷰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리지 못하게 된 이유를 듣게 되었다.
당시,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나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위협과 견제로
전전긍긍하던 처지였다.
그는 멕시코를 방문하고 오다가 뉴욕에 들렀는데 역시 유엔 취재를 위해 뉴욕에 있던 나와
'우리하우스'라는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는 [동아일보] 기자로서 당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 연수 과정을 밟고 있던 이웅희도 함께 있었다.
김형욱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 놓았는데 '멧돼지'라는 별명과는 달리
상당히 두뇌회전이 빠르고 교활한 인간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박 정권 최고의 충신은 나이며 이후락과 김종필은 썩었고 나는 깨끗하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JP 가지고는 안 된다고 내가 각하에게 이야기해서 그를 두 번이나 쫓아냈다"고 열을 내기에 나는 물었다.
"JP하고는 왜 그렇게 원수가 됐습니까?"
-"우리는 철저한 반공이지만 그는 과거에 좌익 운동을 했기 때문이오."
"그렇게 치면 박 대통령은 여순 사건 때 남로당 군책 아닙니까?"
-"각하야 모든 걸 다 불고 전향했지만 JP는 다릅니다. 그는 한 번도 잡혀들어 가지 않았고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갔소. 그는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놈이오."
그러다가 김형욱은 갑자기 내가 옛날에 썼던 황태성 기사 얘기를 꺼냈다.
-"문 기자가 보낸 황태성 관련 기사 말이요. 그거 보고 나는 사실 문 기자가 굉장히 무섭게 생긴 여성인 줄 알았소."
"래리 베이커가 증언한 기사 말이죠? 그런데 황태성이를 진짜 죽이기는 죽였습니까?"
-"63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에서는 계속 황태성이를 넘기라는데 박 의장은 계속 미루지,
참 혼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래가지고는 선거 못 한다고 밀어 붙여서 CIA에다 넘겼지요.
사형 판결 뒤에도 박 의장이 굉장히 아쉬워 하면서 사형 집행 결재를 계속 지연시키는 거요.
결국 내가 다시 밀어붙여 받아냈지요. 그런데 문 기자가 보낸 기사 말이요.
그거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었지."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왜 김부장한테 갔습니까?"
-"방일영씨가 그 기사 가지고 나한테 왔습디다. 받아서 읽어 보니 등에 식은땀이 나더구먼.
얼른 비서실장 불러 금고에 넣으라고 하고 '뭘 도와드릴까요' 했지요."
"그래서요?"
-"방일영 씨가 '융자 좀 해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결국 한 2~3억 해줬지 아마."
"뭐라구요?"
나는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박정희의 집권과 함께 한국 언론도 권력의 시녀꼴로 전락해 버렸지만 그래도 60년대 초반까지는 언론으로서
기백이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미 자사 기자의 기사를 중앙정보부장에게 갖다 바치고 돈을 얻어 쓴 언론사 사주가 있었다니,
나는 분노를 삭일 수가 없었다.
"조선일보 이놈들, 나 참을 수 없습니다. 김부장, 지금 하신 얘기 당장 폭로하겠습니다.
여기 이웅희 기자가 증인이에요."
김형욱은 몹시 당황해하며 신신당부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잠시만 참아 주시오. 꼭 기회가 있을거요."
그의 기색으로 봐서는 내가 그의 얘기를 기사화할 경우 완전히 오리발을 내밀 것만 같았다.
다음 기회에 그의 말을 비밀리에 녹음하든지 해야 겠다고 마음 먹고 기사를 보류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김형욱은 그 때 이미 자신의 미국 도피를 염두에 두고 '나중 기회' 운운 했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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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10월 9일 대통령 선거를 불과 한 주일 앞둔 상황에서 야당 후보 윤보선은
황태성 사건의 의문점을 강력히 제기하고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선거 쟁점화 시켰다.
그러자 다급해진 박정희는 10월 10일 안동행 열차 안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황태성 사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박정희는 "장도영계의 조웅과 모 외국기관에 근무하는 베이커가
황태성과 나에 대한 허위 사실을 조작해 유포했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10월 11일 래리 베이커는 미국에서 다음과 같은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 반박문의 내용은 래리 베이커가 필자에게 보내온 답변서와 상당부분 일치하므로 중복되는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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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박정희와 정일권의 친일 전력에 대한 이야기 한토막을 덧붙인다.
지난 72년 나는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동창생 두명이
도쿄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그들을 만난 일이 있다.
만주 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키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편입 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같이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
어렵사리 만난 박정희의 두 동창생은 만군 시절의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박정희가 '벚꽃처럼 활짝 폈다가 한 순간에 떨어지겠다'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는 증언도 했다.
나는 그들로 부터 박정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어렵사리 입수했다.
정일권의 친일행적 역시 박정희에 견주어 만만치 않다.
나는 지난 80년 당시 등소평 중국 부수상의 배려로 중국을 방문했다.
내가 등소평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9년 최초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였다.
등소평은 백악관에서 취재에 열중하고 있는 기자단들 중에서 유일한 동양 여성인 나를 발견하고
중국계가 아닌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는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 출신입니까? 혹시 중국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일본계 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디서 왔습니까?"
"지도상에서 당신 나라와 동쪽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왔습니다."
-"아 초센(조선)?"
"아니오 다이한민궈(대한민국) 입니다."
-"아, 다이한민궈."
그는 죽국인은 아니지만 동양계 여성이 백악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흐뭇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백악관에서 카터와 정상회담을 가진 뒤 등소평은 워싱턴에서 시애틀까지 미국 전역을 순회 방문했는데
나는 그의 모든 일정을 수행했다. 등소평은 아침에 나를 보면 꼭 "식사 했습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내 경험상 이 지구상에서 아침에 만나서 "밥 먹었어요?"라고 인사하는 나라는 우리와 중국밖에 없는것 같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 인사가 나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일본 유학시절 왕 선생에게 배웠던 중국어도 큰 도움이 되었다
.
미국 순회방문 일정이 끝난 후 나는 등소평에게 단독 인터뷰를 신청했는데 그는 이를 선뜻 받아 주었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다 끝냈을 때 그는 "사정이 바뀌었다"면서 "인터뷰를 기사화 하는 것을 좀 미루어 달라"고 했다.
나는 바로 취재수첩을 덮으며 아무런 이의없이 그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사정이 허락하는 날까지 오늘의 인터뷰는 기사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조속한 시일내에 우리 미국 기자들이 중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그 부탁을 선선히 받아 들였고 약속을 지켰다. 그래서 80년 4월 나는 미국의 저명한 여기자 17명으로 구성된
취재단의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등소평 부수상의 배려로 서방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연변 지방을 취재할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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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후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61년 11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일본에 들러 이케다 수상과 회담했다.
일본측은 수상 관저에서 박의장을 위한 칵테일 파티를 열어 주면서
박정희의 일본 육사 시절 교장을 불러다 놓았다.
이 일본인 교장은 반말 비슷한 어조로 박정희에게 "너 성공했구나"라고 해 박정희가
숙소로 돌아와 몹시 투덜댔다고 한다.
이 얼마나 교활한 일본인들인가.
미래의 한국 대통령 박정희에게 "어차피 너는 우리가 키워 낸 용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앞으로 일본 대사만큼은 민족교육을 받은
새 세대가 부임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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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총칼로 합헌 정부를 무너뜨린 후 민정 이양 약속을 휴짓조각으로 만들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엄청난 좌익전력을 철저히 숨기면서 오히려 정적과
민주인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처럼 거짓으로 쌓은 바벨탑 위에 군림한 박정희의 행태로 인해 그의 전력 문제는
박 정권 18년 내내 '확실한 유언비어'로 떠돌면서 대한민국의 가치체계를 혼란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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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 여사에게 돈봉투를 돌려주고 방을 나왔다.
이 작은 사건이 나에 대한 강한 인상을 육 여사에게 남긴 듯했다.
나중에 한국에서 실크가 대량 생산되기 시작 했을 때 육 여사는 실크 한 감을 상자에 넣어 내게 보내왔다.
"촌지를 안 받으시는 문 기자님의 원칙은 존경합니다만,
이것은 전세계에 한국 실크를 선전하고자 하는 의미이니 받으셔야 합니다." 하는 말을 전해 왔기에
나도 감사하게 받았다.
실제로 나는 69년 닉슨. 박정희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후의 만찬장에 그 실크로 지은 옷을 입고 나갔다.
그걸 본 육여사는 크게 기뻐했다. 미국 장관 부인들도 내 옷이 좋아 보였던지
내가 한국에 갈 일이 있으면 실크좀 사다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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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도착한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영접사절로 나간 것은 부통령 존슨이었다.
존슨이 공항에 나가게 되기까지 과정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박정희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이 바로 그 때였다.
박정희는 바지선도 세우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울 온 촌놈처럼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
박정희가 백악관에서 케네디를 만난 후 주미 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박정희와 악수를 나눴다. 나는 말했다.
"박의장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정일권 주미대사의 눈이 둥그래졌다. 문명자 입에서 무슨 독설이 나오는가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했다.
"색안경을 쓰고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난 것은 큰 실례인데요. 자신감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정일권 대사가 아연실색해서 도중에 내 말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박정희가 되물었다.
-"문명자 기자님이라고 그러셨죠? 고맙습니다. 제가 깜빡 했습니다. 그렇게 실례가 됩니까?"
"미국에서는 그렇습니다. 내일부터는 벗으십시오."
박정희는 정일권 대사에게 물었다.
-"문 기자는 경상도 분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네 대굽니다."
내가 박정희를 두 번째 만난 것은 63년 케네디가 암살된 후 박정희가 대통령 당선자로서
장례식 참석차 미국에 왔을 때였다.
외국 원수로의 제일 먼저 워싱턴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것은 프랑스의 드골이었다.
그 무렵은 미.불 관계가 좋지 않을 때여서 공항에 나와 있던 기자들은 드골에게 미.불 관계에 대한 질문을
퍼부었다. 그런데 드골의 대답은 간단하고도 무게가 있었다.
-"장례식에 참석하러 온 사람에게 미.불 관계가 다 뭐냐? 노코멘트"
이것이 선례가 돼서 이후 속속 댈러스 공항에 도착한 세계 각국의 국가원수들은 애도의 표시로
아무도 코멘트 없이 조용히 미국땅을 밟았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서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은 물론 교민들까지 공항에 동원해 태극기를 흔들며
자기 나라 국가원수를 열렬히 환영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다.
이 추태를 보며 나는 박정희의 미국 도착 기사를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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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도 선거정국의 '단골메뉴'인 색깔론 시비가 등장했다.
대통령이 되고자 국민 앞에 나서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국민 앞에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앞서서 지적돼야 할 것은 박정희 시대와 그 연장인 5~6공 시대에 박정희의 전력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면서 그 밑에서 영화를 누렸던 자들, 그리고 현재까지도 박정희의 망령을 미화하고 있는 자들은
색깔론 시비를 벌일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63년과 64년 연년생으로 딸과 아들을 낳는 바람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게다가 내가 보낸 기사는 번번이 조선일보사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래저래 지친 나는 아이들을 좀더 키워놓고 일을 계속해야 겠다는 생각으로
64년 귀국해 [조선일보]측에 사의를 밝혔다.
나는 알지 못했지만 당시 조선일보측은 김형욱으로부터 문명자 특파원을 해임하라는 압력을 계속 받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내가 자진해서 그만둔다니 회사측에서는 내심 잘됐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년 쉬고 나서 다시 일하려던 나의 계획은 난관에 부닥쳤다.
내가 [조선일보]에 사표 냈다는 얘기를 들은 [동아일보]의 천관우 편집국장이 대뜸 부르더니
무교동 해장국 집에서 선짓국 한 그릇을 사주며 같이 일하자고 했다.
평소부터 존경하던 분과 오랜만에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 열을 올리며 의기투합하다 보니
그분의 청을 거절 못할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나는 결국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서울에 왔다가 [동아일보] 특파원이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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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박정희가 뉴욕으로 떠난 후였다.
백악관 기자실에 있는데 존슨 행정부의 백악관 대변인 빌 모이아스가 "헤이 쥬리"하며 손짓을 했다.
따라가 보니 AP 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 로이터 통신의 해리 등 몇몇 기자들이 있었다.
빌 모이아스는 나를 포함한 기자들을 백악관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2층은 '리빙쿼터'라고 해서 대통령 일가의 살림집으로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올라가 보니 시크릿 서비스(비밀경찰) 요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대변인이 "나 빌 모이아스다"라고 해도 "신분증을 내라"고 했다.
까다로운 확인을 거쳐 거실로 들어가니 존슨이 앉아 있었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박정희와의 회담이 뜻대로 잘 돼 신바람이 난 것 같았다.
그는 한국군의 월남 파병 문제에 대해 무언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 듯 했다.
AP통신의 스펜서 데이비스가 먼저 물었다.
"월남에 한국군 전투부대가 가게 됩니까?"존슨이 신이나서 답했다.-"그렇소."
내가 물었다."간다면 병력 규모는? 그리고 한국군을 누가 지휘합니까?"
존슨이 답했다.-"우리는 1개 사단을 원합니다.
한국군은 웨스트 모어렌드 장군(월남전 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갈 것이오."
내가 다시 물었다.
"박 대통령이 사단 병력 파병에 동의 했습니까?"-"그렇소."
"그러면 기사 내보내도 됩니까?"
빌모아스 대변인이 막아섰다.
-"피피(PP - 박정희의 약칭)가 아직 미국에 있습니다.
그 기간 중에 이 건이 터지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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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PP'는 지난 대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의 참모들이 작성한 내부 전략보고서 같은 데서 박 대통령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다만 이런 보고서들은 '대외비'여서 외부로 알려지진 않았다. 한 친박은 "PP가 부르기도 쉬워 박 대통령의 호칭으로 자리 잡을 것 같다"고 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2/28/20130228002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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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라고 부르고싶어서 저러나 했는데...
그들의 또 다른, 적나라한 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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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 국회의원 중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은 미시가 출신의 매코믹 의원이었다.
61년 1월 케네디 취임식이 끝나고 열린 무도회에서 처음 알게 됐는데 그는 나중에 하원의장을 거쳐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직을 역임한다.
미국인들과 교우 관계를 갖는다고 해도 생일 파티에 초대될 정도가 아니면 친구라고 하기 힘들다.
매코믹 의원은 자기 집에 우리 가족들을 초대해 놓고는 자기가 만든 아이스크림을 들고 와 먼저 한 숟가락 떠먹고
그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서 내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숟가락 씻지도 않고 그냥 주나" 하면 "씻어야 하나?" 하며 웃곤 했다.
미국인들은 이를 '바디 바디(body body)라고 하는데 친밀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를 통해서 나는 많은 국회의원들을 알게 되었다.
먼저 소탈하면서 리버럴해 좋은 할아버지 같은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험프리 부부를 우리 집에 초대 했을 때 험프리 부인이 우리나라 전통 자수를 수놓은 쿠션을 보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쿠션의 스펀지를 빼 버리고 그녀에게 선물했다.
내집에 있는 것보다 험프리 의원 집에 있는 편이 한국을 알리는 데 훨씬 효과적일 것 아닌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일했던 미네소타 출신의 돈 프레이저 의원을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프레이저 의원의 아버지는 미네소타 대학 법학과 학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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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선배, 한국서 수행온 우리 기자들은 대표를 선정해서 그를 통해 일괄해서 보내기로 되었습니다만,
이것만은 내가 별도로 특종기사를 보내야 겠는데 영역하는 걸 좀 도와 주십시오."
"무슨 특종 기사인데요?"
그가 내미는 기사 내용을 보니 기가 막현다.-
"하늘도 박대통령을 알아보는지 박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착륙 하자마자
소나기가 멈추고 햇빛이 비치면서 그를 환영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것 봐요. 요즘 하와이 날씨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비가 왔다 해가 났다 한대요."
선우 기자의 대답이 더 걸작이었다.-
"한국 독자들이 하와이 일기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는 '이 기사는 저 혼자 보내는 것이나 딴 기자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 고 당부했다.
그런데 이렇게나마 기사를 보낸 사람은 40여 명의 수행기자 가운데 선우 기자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한국에 발송된 기사는 청와대 수행 기자단 중에서 당번을 맡은 기자가 국제 전화로
청와대 기자실에 대기중인 서울 당번에게 불러주면 그가 그것을 받아써서 각 사에 배부하고,
각 사에서는 그 기사를 각 사 스타일로 다시 써서 수행기자의 이름을 달아 싣는 식이었다.
박정희가 65년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각 신문사 기자들은 제각기 기사를 보냈었다.
이런 전례가 있었고, 또 세계 어느나라 언론이라도 기자라면
각자 자기가 취재한 기사를 보내는 것이 상식이었기 때문에 RCA와 ITT 두 회사에서는 그런 거창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어쨌든 68년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두 전신회사는 내내 헛탕만 치고 말았다.
4월 18일 미국 대재벌의 하나인 로렌스 록펠러 씨의 하와이 별장에서 박정희. 존슨 회담이 열렸다.
회담장 주변에는 존슨 대통령 경호원들과 1백여 명의 주정부 경찰관들이 동원되어
철저한 보안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백악관측은 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별장 입구에 특별 전화를 가설했다.
회담이 한창 진행중일 때 당시 미국의 소리 방송에 파견 근무 중이던 한 KBS 아나운서가
이 전화에 대고 방송하는 보도 내용을 듣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4월 18일 오전 10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앞선 4월17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 일행이 하와이에 도착 했을 때 30만 시민이 손에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을 환영했습니다..."
하도 기가 차서 그에게 쏘아 붙였다
."이거 봐요. 어쩌면 그렇게 거짓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지?"
그는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떡합니까? 그렇게라도 해야지. 기사 보낼 것이 뭐 있어야지요."
이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은 KBS 중계 전파를 타고 한국 국내 청취자들에게 전달되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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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필자가 이리가이 호텔 프레스 룸에 있는데 박정희의 경호실장 박종규가 쪽지를 보내 왔다.-
"PP(박정희)가 꼭 만나고 싶어하니 오늘밤 8시까지 카하라 힐튼 호텔로 와 주시기 바람."
이참에 월남 추가 파병 여부를 확실히 캐야겠다 싶었다.
그 시간에 힐튼에 갔더니 박종규가 마중 나왔다.-"아, 문 기자님, 이리 오십시오."
박종규는 나를 박정희에게 데리고 갔다.
나는 돌아나가는 박종규를 불러세웠다.
"이거 보세요. 기념이니 사진 하나 찍어 주세요."
박정희와 함께 찍은 그 사진을 나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 박박 찢어 버렸다.
내가 자리에 앉자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뵙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문 기자는 존슨이 진짜 추가 병력을 원하고 있다고 봅니까.
우리가 병력을 보내 주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요?"
나는 답했다."존슨이 추가 병력 파견을 원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는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와 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전망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나는 이야기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회담 마치시고 하와이 교포들을 만날 때 닥터 윌바 최를 꼭 만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평안도 출신으로 이 곳 유지인데 4.19이후 승만 리가 하와이로 도망올 때 전용기를 보내 데리고 와서
끝까지 돌봐 준 사람입니다."
나는 특파원 생활 초기인 60년대 초반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교포 곽 노인으로부터 구한말 영국인 노예 상인들에 의해 하와이로 팔려왔던 교포들의 애환에 대해
들은 일이 있었다.
영국인들은 교포들을 사탕수수 농장에 팔았고,
그들은 한 달에 여자는 10달러, 남자는 15달러 정도의 월급을 받고 일했다.
그러다 총각 귀신이 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일제하에서 이승만이 독립운동을 한다며 하와이에서 활동했을 때 사탕수수밭에서 고생해서 번 돈으로
그를 지원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승만은 그들에게 공채를 팔기도 했다.
100달러 짜리와 10달러 짜리가 있었다.
곽노인은 나에게 문제의 공채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조선이 독립되면 이 국채를 금화로 바꾸어 준다.
이승만, 김규식" 이라고 한글과 영어, 한자로 씌어 있었다. 나는 물었다.
"그래서 해방 후에 승만 리가 이 공채를 바꾸어 줬나요?"곽 노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사람 봐서 바꾸어 주었어요.
이승만을 지지한 국민회 사람들에게는 하와이 총영사가 공채를 모두 달러로 바꿔 줬는데
나 같은 안창호 선생 계열 사람들은 달러는 커녕 FBI에다 공산당이라고 찌르는 바람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곽 노인은 금고를 열더니 100달러 짜리 공채들은 자손에게 줘야 한다며
10달러짜리 공채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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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 장소는 샌프란시스코의 '샌클라멘테 백악관'이라 불리는 닉슨의 저택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이 열리고 보니 회담 장소는 샌클라멘테 백악관도 아닌 세인트 프랜시스라는 호텔이었다.
정상회담이 호텔에서 열린 것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미국측은 한.미 정상회담 장소를 '백악관' 이란 지명이 전혀 붙지 않은 일반 호텔로 격하시킴으로써
미국이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전폭 지지하지는 않는다는 인상을 한.미 양국 국민에게 애써 남겨 놓으려 했던 것이다.
박정희측은 일단 한.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만 하면 언론을 이용해 미국이 3선개헌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식으로 전 국민에게 선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호텔 정상회담'을 이의없이 수용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69년 8월 21일~23일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이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에서 열렸다.
필자를 비롯한 워싱턴 주재 각사 특파원 5명은 회담 시작 전날 현지에 도착,
서울서 수행한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 합류해 취재하게 되었다.
박정희.닉슨 정상회담에서도 "수십만 시민들이 손에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박 대통령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거짓 보도는 KBS 기자에 의해 재연되었다.
회담 기간중 샌프란 시스코 하늘에 나부낀 태극기는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 건물 정문 입구에 하나,
거기서 좀 떨어진 한 호텔 국기 게양대에 하나 해서 총 두개였을 뿐이었다.
이 호텔에는 로스앤젤레스 한국 총영사관 측에서 전세버스로 동원한 30여 명의 교포들이 묵고 있었다.
세인트 프랜시스 호텔 앞 공원은 수백 명의 월남전 반대 데모 군중들의 고함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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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회에서는 먼저 초청국측 대통령이 인사말과 토스트(축배의 말)를 한다.
그 후 초청된 나라 대통령이 답사를 겸한 인사말을 한다.
식사가 끝나면 다른 방으로 이동해 '애프터 디너 드링크' 혹은 커피잔을 들고 담소한다.
이야말로 기자들이 양측 대통령 부처 및 각료들과 어울려 담소할 수 있는 시간이므로 특별 취재 경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 날 밤 만찬회에서는 육여사가 기자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육여사는 패트리셔 닉슨 여사를 비롯해서 만찬회에 참석한 미국측 손님들 그리고 백악관 출입 미국 기자들의 질문에
재치 있게 답변했다. 육여사가 자신의 의상에 대해 설명한 말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곳 샌프란시스코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오렌지 산지로 유명한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장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바탕에다 오렌지 무늬를 수놓은 옷을 지어 입고 왔습니다."
과연 육여사가 입은 한복은 연한 오렌지색 바탕에 오렌지 무늬를 수놓은 것이었다.
닉슨 여사는 "당신의 훌륭한 아이디어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감탄했다.
다음 날 아침 필자는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는 것 같아 호텔 지하의 드럭스토어 (약과 화장품 등을 파는 상점)로
내려갔다. 그런데 여점원이 나를 보자마자 손을 저으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팬티호스(여자용 스타킹)와 두바리 콜드 크림은 이제 없습니다.
(노 모어 팬티호스, 노 모어 두바리 콜드 크림)"
"무슨 소리 하는거요? 팬티 호스는 뭐고, 콜드 크림은 또 뭐예요?"-
"당신은 한국서 온 손님 아닌가요? 어제 한국 분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우리 상점에 있는 팬티호스와 콜드 크림들을 모두 사 갔는데 그 후에도 다른 분들이 와서 계속 달라고 해서요. 손님도 그걸 구하러 온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기자단이 와서 모두 쓸어 간 것이었다.
그들은 호텔 상점만이 아니라 그 주변 상점까지 싹 쓸어 버렸다고 했다.
나중에 팬암 항공 직원에게 들으니 이후락 비서실장이 팬암 항공에 몇만 달러를 주고 빌린 박 대통령 전세기가
중량 초과로 예정보다 3시간이 지나도록 뜨지 못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수행기자, 경호원 할 것 없이 텔레비젼.냉장고까지 사서 전세기에다 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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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순 LA 총영사 부인이 호텔 주방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도록 교섭해서 현지의 한국 요리사들을 동원해
박정희가 좋아하는 비빔밥을 준비한다고 야단 법석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노발대발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때는 푹푹 찌는 삼복인데 호텔에 에어컨이 없어서 박정희는 펄펄 뛰고 이후락은 쩔쩔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비행기 타고 다른 호텔로 옮겨 가자" 고 했던 모양인데,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었다.
전세기라 해도 스케줄에 따른 이동 시간에만 제공되는 것이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행기는
다른 비행에 투입 됐다가 전세 승객이 움직일 때 돌아온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박정희로서는 타고 옮길 비행기가 없다니 더욱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궁금해서 호텔 매니저에게 물었다.
"이런 일류 호텔에 왜 에어컨이 없습니까?"-"우리 호텔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자연을 즐기러 오시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저희 호텔은 일체의 인공적이 시설은 하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지역은 한여름이라 해도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합니다. 손님들은 낮에는 모두 등산이나 삼림욕을 즐기시고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시기 때문에 에어컨의 필요성을 거의 못느끼십니다."
그러고보니 호텔 뒤쪽은 산으로 절경을 이루고 있었고, 손님들도 대부분 등산객 차림을 하고 있었다.
산에서 다치는 사람도 많은지 호텔 주위에는 접골원도 여러 곳 눈에 띄었다.
그런 중에도 박종규 경호실장은 김동조 주미대사와 포커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동조가 박종규에게 일부러 잃어주고 있는 눈치였다.
그 때 나은실이 와서 육여사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육여사 방에 갔더니 박정희도 앉아 있었다.
나는 두사람에게 인사하고 "오다가 고속도로에서 경찰에 걸려 늦었다"고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박정희가 말했다.
-"순사도 문 기자에게 걸렸으니 혼났겠구먼."
나는 세이트 프랜시스 호텔 드럭 스토아에 팬티호스와 콜드 크림 동난 얘기를 하고 나서 따졌다.
"왜 출입기자들에게 돈을 줘서 나라 망신을 시키십니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이 박정희가 말했다.-
"문 기자, 내일 모레 전세기 타고 같이 서울 갑시다. 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너무 모르는데 이번에 가서 좀 둘러 보시오."
뜻밖의 얘기에 순간 당황스러웠다
."저는 공짜는 싫습니다."-"그러면 비행기 반값만 받을까?"
나는 내심 '비행기 같이 타고 가면서 특종 한 번 해보자' 싶어 동행하기로 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에 대해 무엇이라고든 얘기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변인 좀 만나야겠습니다" 하고 방을 나왔다.
강상욱 청와대 대변인의 방을 노크했다. 그는 잠온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옆에 앉은 서울신문 이양 기자에게
기사를 불러주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가니 급히 옷을 걸쳐입고 기사를 계속 부르는데 내용이 완전히 소설이었다.
-"휴식차 요세미티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은 휴식할 새도 없이 오늘 오후 한.미 고위경제각료회담을 가졌다. 미측에서는 맥나마라 세계은행 총재도 참석했다.."
어이가 없없다 나는 강 대변인에게 물었다.
"강 대변인, 지금 미국 경제 각료들이 회담하러 여기 와 있습니까?"-
"문 기자, 원래 이렇게 하는것 아뇨? 잘 아시면서.."
나는 당장 밖으로 나와 서울의 [경향신문] 편집국 정재호 정치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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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메뉴판에다 '문명자 여사를 위하여, 박정희' 라고 쓰더니 나에게 주었다.
박정희는 식사를 하며 일제 때 가 본 금강산 구룡폭포에 대한 기억등 여러가지 한가로운
얘기들을 했다. 대구 사범 시절얘기도 나왔다.
내가 물었다.
"그 때 수학 여행을 만주로 가셨지요?"-
"아, 그랬지요. 어떻게 압니까?"
"우리 친척 오빠가 대구 사범에 다녔는데 만주로 수학여행 갔다가 선물을 사다 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 그 오빠 이름이 뭐냐, 나이가 몇살이냐 하다 보니 오빠와 박정희가 동기 동창이었다.
박정희도 그 오빠를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좁은 것이다.
여러가지 얘기중에 주미대사 김동조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나는 "세상에 별 웃기는 일도 많습니다." 하고는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
그 말을 들은 육 여사는 한숨 섞인 소리로 "아휴"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박정희가 담배를 피워 무는데 역시 신탄진이었다.
칠이 벗겨진 지포 라이터를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 지포 라이터는 주로 GI(미군 병사나 하사관)들이나 쓰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왜 하필 사병들이나 쓰는 지포 라이터를 쓰십니까?"-
"옛날에 미국놈에게 선물 받은 것인데 바람이 불어도 불도 안꺼지고 참 좋아요."
박정희는 꼭 '미국놈'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다 박정희가 갑자기 물었다.-
"문 기자는 3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드디어 본론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안됩니다. 오로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안됩니다. 이승만 박사를 보십시오."
그러자 육여사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제 생각도 그래요."
박정희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리더니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문 기자는 한국 실정을 모른다는 말이오. 이번에 가서 한국 실정을 잘 좀 둘러보시오."
"한국 실정이 어떻든 저는 3선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샌프란시스코-서울 간의 14시간 비행 동안 박정희는 비서실장 이후락을 단 한 번 불렀다.
박정희가 물었다.-"이실장 이번 정상회담 성과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보고 있소?"
나는 이후락이 박정희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나 유심히 보았다.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그러나 급한 성질은 어쩔 수가 없는지 이후락은 말을 더듬으며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가, 가, 각하,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모두들 대, 대성공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성공이라니, 박정희는 주한 미군 철수 정책을 변경시키러 닉슨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닉슨은 전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군 철수 정책에 변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 뿐 아니라 닉슨은 박정희를 지지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기 위해 극히 말조심을 했다.
결국, 박정희가 얻어낸 것은 정상회담 공동 성명속의 "박 대통령의 영도하에 한국이 거둔 주목할 만한 발전" 이라는
한 문장뿐이었다.
그것은 어떤 공동성명에든 으레 끼어들어가는 외교적 수사일 뿐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도대체 누가 그렇게 평가 합디까?" 하고 소리를 칠 뻔 했다.
그러나 박정희를 힐끗 보니 그 역시 이후락의 보고가 듣기 좋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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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피격으로 사망한 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청와대는 영원한 우리 집이 아니다"라던 그 조신한 음성이 귀에 쟁쟁했다.
그녀의 사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언론들은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육여사가 맞은 총탄의 방향이었다.
문세광이 쏜 총탄이 어째서 육여사의 머리 뒤에서 옆쪽으로 관통했느냐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유신체제를 지탱하기 위한 조작극이라는 기사를 송고한 주한 일본 특파원들이 추방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의문에도 한마디 답도 없이 박정희는 자기 아내의 죽음에 대한 국민적 애도 분위기를 이용해 그가 처해 있던 절박한 정치적 위기를 넘기고 유신체제를 더욱 강화하려 획책하고 있었다.
나는 그 가엾은 여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박정희의 독재를 다시 한 번 경고하는 뜻에서 박정희에게 영문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애도 전보를 보냈다.
"육여사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육여사에 대한 나의 애도를 받아 주십시오.
생전에 육여사가 나에게 이야기한 '청와대는 영원한 우리집이 아닙니다'라는 말이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귀하는 대한민국의 국민을 위해 사임할 때입니다. 문."
나중에 들으니 김성진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은 내 전보에 대해
"첫 구절은 괜찮았는데...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사임할 때'라는 구절만 안 썼으면 괜찮았을 텐데"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에게 애도 전보가 왔다고만 하고 내용은 보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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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의 3분지1 中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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