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
(마17 :20)
사실 현실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해도 특별히 달라질 아무런 방법이 없는것이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정체되어 있는듯한 불편한 나의 환경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출구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었다.
믿음은 곧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증거가 된다고 하셨으니 심중깊이에 자리한
믿음은 이미 응답받을 확신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더욱이 그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하여 더욱
굳건한 믿음의 반열에 서기를 원하고 계시기에,
받드시 응답하여 주신다는것을 수없이 확인 시키셨고
보여주셨기에 망설일것도, 두려워 지팡이를 내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아니,
어떠한 타당한 이유를 들어
나의 사고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인식시킨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환경적 한계성이 그 나름의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마음을 자극한다 할지라도
굳이 하늘을 향해 소망의 간절한 손을 들어 올려야 했다.
주 안에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다.
하나님께선 우리 마음에 소망을 두고 행하신다고 하셨으니,
어떤 문제이든 믿음의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어린 신앙은 굳게 믿었다.
인생 살아오는 동안 장애의 내 모습에 대해 크게 비관한 적은 없었다.
소아마비로 인해 원하지 않게 발 뒤굼치가 들려서 뒤틀린 채로 굳어진 상태였고
발가락 부분으로만 땅을 딛고 활동해야 하는데,
그러한 부분을 내심 남에게 들어내 보이기 싫어서 언제나 긴치마를 입었었다.
남편은 가끔 못마땅한 어조로.." 땅에 끌려서 흙이 묻으니 조금 짧게 입으라!" 고 말했다.
하지만 선 듯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름 감추고 싶었던 부분으로써
마음 아픈 속 사정을 변명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음...아파트환경에서 살면 좋겠는데...”
궁여지책으로 변명처럼 하던 말이었는데..,
어느날 부터 본격적인 기도 제목으로 바뀌게 되는 계기가 주어진다.
둘째 언니가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굴을 보고도 싶고 궁굼해서 방문을 했었다.
현관 입구에 들어서니,
바로 눈에 들어오는 액자 속 성경구절이
집안 전체적인 분위기를 말없이 대변하고 있는 듯 했다.
넓고, 훈훈하고, 아늑하고,
조화롭게 잘 정돈된 인테리어,
전체적으로 깔끔한 언니의 성품이 였보이는 차분하고 안정된 분위기 였는데,
그러한 환경에 바로 매료 되어 버렸다.
특별히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가득 부러움으로 부분 부분 주목해 보는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방환경이 큰 부러움을 갖게 했다.
원터치의 온수, 냉수..,
따스한 실내에서 적절한 행동반경 안에서 식사를 준비를 할 수 있는 여건들..,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실내 화장실, 언제고 샤워도 쉽게 할 수 있고..,
저녁 때 가 되니
원탁에 둘러앉아 편안하고 행복스레 식사를 하는 가족들,
그 위로 차분한 빛을 자아내고 있는 아이보리색 조명등,
넓고 산뜻한 안방엔
하얂 시트로 덮혀있는, 누우면 참 편할것 같은 침대가 놓여있고,
침대 옆 창가엔 레이스의 멋진 새하얀 커텐이 드리워져 있고,
거실 베란다로 통하는 통유리엔 하얀레이스의 부드러운 질감의 커텐이
안방과 통일감을 가지고 멋스러움을 자아내며 햇볕을 가리우듯, 멋스럽게 드리워져 있고..
넓고 푹신한 쇼파에 편하게 여유롭게 기대 앉아 tv를 시청하는 조카들..,
잘 꾸며진 세칸의 큰 방들, 등..
모든 환경이 살기에 참 편하겠고 마냥 풍요롭고 여유롭게 좋아 보이기만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부러움으로 가득한 심정이 점차적으로 우울함속에 잠기게 된다.
감히 비교조차 하지 못할 나의 생활 환경이 괜시리 더욱 초라하게만 여겨 진다.
우리 가족이 거처하게 되는 가옥은 늘 돈 액수에 비례되었다.
네식구 겨우 누울수 있는 작은 방,
창문도 지극히 작은, 때론 농에 가려져 버리고..,
주방일이나 세탁하는 일,
씻는 일 등은 추우나 더우나 마당에서 해결해야하고..,
영하권 추운 겨울이면, 물 끓여서 수돗 꼭지를 녹이는 일로 하루가 시작되고..,
행여 마당이 얼어 있으면 옮겨 걷기 불편한 다리 상태로 힘들고 거북스럽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고..,
화장실은, 밤이나 낮이나 몸이 아프나 급할 때나 풀어 놓았던 보조기를 착용하고
몆 십 미터를 돌아서 가야하는 곳에 있고..,
여러 가구가 같이 살았기에
여름 더위에 샤워칸막이를 사용 하려면 서로 눈치 살피기 등등..,
언니 집에 비해 모든것이 불편한 칙칙한 환경이 아닐수 없는 노릇이다.
깊은 상념속에서
처해진 각종 모난 환경이 하나하나 그 실체를 드러내며 마음 가득 자리한다.
보증금이 적으니, 겨우 얼굴만 내다 볼 수 있는 아주 작은 창문이거나
때론 농에 감추어져 창문이 없는 환경에서 살 수 밖에 없었다.
투병 후 늘 간절하게 원했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새로운 공기로 환기를 할 수 있는 여건속에서 살았으면 하고..
가끔 커피라도 들고 서서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큰 창문이 있는 방에서 살았으면 하고..,
"아버지~~!! 얼마나.. 큰 창문있는 방을 주시려고 이렇게 조그만 창문에서 살게 하시나요?? " ..
라고 하나님께서 들어 보시라는 듯이 소리내어 믿음의 고백도 가끔 해봤었다.
그럴때마다
<보증금이 적으니 어쩔 수 없잖아... >답답한 마음에서 차라리 탈하려는 위로이겠다.
하나 하나 떠올라 영사기 처럼 지나가는
나의 부족한 환경에서
다시
언니의 환경이 환하게 클로즈업되어졌다.
모든것이 바람직한 구조로 짜여져 있는 환경은 신천지가 아닐 수 가 없었다.
아파트는 두말할것도 없이 내게 꼭 필요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봐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도 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청약부금을 넣고 있는것도 아니었다.
물려받을 재산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모아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얻어진 결론은,
언니의 환경을 포기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부탁해서 해결을 보는 일 이었다.
그래서 뜻 밖의 새로운 기도 제목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선것이다.
“아버지, 아파트를 허락해 주옵소서.
저를 부르시면 놓고 가야하니까 사는 동안만 빌려주세요.
네?, 아버지!!,
아버지!
저는 아파트 살면 안되나요?
저도 언니처럼 아파트에 살게 해주세요.
치마도 땅에 끌리고,
저의 신체의 조건으로는 아파트에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 아파트를 빌려주세요. 네? 아버지!!.. 하나님!!”
가진돈이 없으니, 양심상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아니, 어차피 사는 날 동안만 필요한 거처이니 빌려달라고 간구한다.
떼를 쓰기도하고, 사정 사정을 하기도 하고, 감히 하나님을 이해시키기도 하면서
아파트를 빌려달라는 기도는 포기되지 않았다.
정녕 현실이 어떻든,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었다.
굳은 믿음으로 어차피 지팡이를 잡고 내민 이상
홍해의 갈라짐의 역사를 기대하며
응답해 주실 그날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을 결단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파트를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고
지속된지 1년이 지난 어느날 밤,
드디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전해주신다.
어린 신앙은 그렇게 믿었다.
9시 뉴스 시간의 아나운서는,
정부에서 영구임대 ⓐ를 건설해서 영세민들에게 보급한다는 것이었다.
전혀 뜻밖의 빅 뉴스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에서 아파트를 건설해서 보급 한다면, 두말할것도 없이 입주는 따논 당상인것이다.
“오! 할렐루야!! 아버지 감사합니다.!!!!”
순간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내겐 응답으로 들렸다.
아니 분명 응답인것이었다.
부부가 장애인이었기에 영세민으로서 당연지사 1순위 해당 자격자가 될 수 있다고 쾌재로 흥분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나의 환경을 모르실리 없으셨다.
멋진 하나님께서는 정부라는 거대한 물질의 체계를 열어 당신의 응답의 수단으로 삼으셨다고 믿는다.
불가능할지라도, 불가능하다고 여겨 질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판단과 개념일 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사실을 확고히 학습 하는 또 한번의 계기가 된다.
그 밤 아버지께서는 자상하시게도,
너무 신경쓰지 말고 오직 감사로써 믿고 기다리면 된다고,
tv 화면 속 아나운서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들려 주시고 계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4:13-14)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7:7-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
아멘~!! 할렐루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응답으로 확신하니 기대함으로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니 좋은 위치, 좋은 ⓐ의 환경을 과연 허락하여 주셨다.
큰 창문을 원함하던 어린 딸에게 한쪽 벽면의 2/1이 창으로써 하늘이 훤하게 올려다 보인다.
밤이되면 방에 누워서 창 넘어 별도 달도 보고,
낮에는 뭉개구름 새털구름, 황혼에 물든구름 등이 한폭의 그림으로 전개되어진다.
겨울엔 눈송이가
송이 송이 바람따라 흩날이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앉는 가히 환상적인 장면도 볼 수 있고,
동화같은 빗방울이 방울 방울 작은 물방울이 되어 질서 정연하게 쏟아져 내려가는 것도 볼 수 있고,
가을엔 수를 헬 수 없는 빨간 고추 잠자리떼가 바로 눈 앞이나 눈 아래에서 날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변 산은 사철마다
그 색을 달리하는 살아 움직이는 풍경화가 되어주고..,
주변 생활 환경권 역시 좋고,
또 교통편도 아주 좋은,
바로 단지 정문 앞에 버스정거장이 있고..,
십분 내 거리에 전철역이 있는 곳에서 살 수 있게 하셨다.
단지내 베란다 화단 곳곳에는 여러 종류의 수목이 있는데,
초봄이면 백목련, 자목련을 시작으로 이어 라일락, 벚꽃, 하얀 꽃사과 꽃,
빨간 복숭아꽃, 살구꽃, 매실꽃, 감꽃, 철쭉꽃, 대추꽃등 여러 과실수 꽃들이
순서적으로 피어 봄바람에 꽃 보라를 자아내며 봄의 향취를 한껏 자랑하고 나면,
눈길 닿는 곳마다 연두빛 파릇파릇한 잎새들이 풍성한 생명력을 자아내고
한 여름 초록의 잎새사이로 나름의 빛깔을 자랑하는 열매들이 탐스럽게 자라가며 익어가며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표현해 내므로 보는 이의 마음을 풍요롭게하고,
깊은 가을이면, 단지 내 가로수 등 주변 온 나무가 단계적으로 색색들이 단풍들어
각자 개성 있는 빛깔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오묘함을 찬양하고 있는 듯이 가을 바람에 흔들리며
감탄으로 지켜보는 마음을 詩라도 읊고 싶은 깊은 감성으로 매료 시키고,
이내 분위기에 사로잡혀 내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베란다에는 하나 둘 사 모은 화초로 가득 채워져 화원이되었다.
남향이라선지, 겨울에도 따뜻한 햇살의 온기로 인해 더러는 겨우내 꽃을 피우기도한다.
4계절 내내 꽃을 달고 있는 선인장과 화초도 있다.
늘 나를 믿어주고 나만 의지하고 바라며 세상과 맞서고 있는
멋진 자태들이 때론 대견하고, 씩씩한 푸르름은 마음을 흠뻑 빠지게 한다.
때론 새싹 틔우기 깜짝 이벤트로 끝없는 생명력과 굳은 의지의 힘을 보여주며 감탄케 하고,
봄에는 투기하듯 다투어 피어내는 꽃망울은 지켜보는 즐거움을 한층 더하게 해준다.
화초 중 여왕은 단연 주황색의 우아하고 단아한 자태의 아름다운 군자란 이겠다.
향기를 말한다면 레몬 쟈스민이고,
인삼 벤자민도 꼬인 뿌리의 멋스러움으로 보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게발 선인장은 봄만되면 화분 가득 수북하게 마디 마디 아름다운 꽃을 활짝 피워낸다.
이태리 봉선화 역시 화분 가득 주황 꽃을 계속 피워내는 꽃 밥이 참으로 많은 화초이다.
알로에는 올라오는 새싹을 뜯어내어 옮겨 심어서는 분양도 하고 옮겨져서도 잘도 자라주고 있다.
고무 나무는 가지치기를 해서 땅에 묻어두면 뿌리를 내린다
뿌리가 내리면 화초를 좋아 하시는 분께 분양도 해준다.
가끔 딸아이는, '엄마는, 화원을 해도 되겠다고..'.칭찬하듯 넌지시 건넨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까지 다시 이삿짐을 꾸리지 않아도 되고..,
지난날 처럼 주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참으로 편안한,
언니아파트 처럼의 넓은 공간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에겐 최상의 환경과 여건의 편하고 감사한 안식처이다.
무언들 하나님앞에 불가능 일 수 있으랴~
빈손 쥔 어린딸의 믿음의 그릇 속에 아버지께선 상상을 초월한 만족스러운 실상으로 채우셨다.
기도하게 하신것은 응답해 주시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기도를 하나도 땅에 버리시지 않으심을 알 수 있겠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선 끝임없이 하늘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고 싶어 하신다.
응답은 하늘의 열매이다.
맛보는 자에게 마음가득 사랑과 신뢰와 기쁨, 희열로 가득 채워지게 한다.
그러하신 멋진 울 아버지 하나님앞에
사랑받는 자녀로 존재 되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복된지
생각하면 할 수록 감사만 고백되어진다.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
그분의 사랑과 은혜안에 존재 되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천만 다행인가?!!
불신이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활용하지 안는 것도 포함된다고 말한다면, 할말이 무언가?
인생사 걷다보면 본의 아니게 그 귀하고 귀한 믿음이라는 선물을
스스로의 사고뒤로 밀어 두는 경우가 있어진다.
하나님께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동일하신 전지 전능하신 분임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늘 생산적이고 더 구체적인 자세가 될것이리라. 여겨진다.
우리의 확신적이고 더 진보적인 믿음의 자세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계시고
원하시는 만큼 반드시 응답은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응답을 받는다는것이 꼭이 내가 원하는것을 받을 수 있어 유익하다는 것을 전함이 아니다.
기도를 통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친교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다.
그분을 인정해 드리고 그분과의 인격적 친교를 하기 원하고
주어진 삶속의 모든 문제를 붙들고 의뢰하는것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이겠다.
친교를 통한 기도가 현실속에서 결제되어지는 실상으로의 나타남등은,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꿀 맛이라고 말하고싶다.
눈앞에 놓인 환경적 한계성에 치우쳐
믿음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로써
믿음에 의한 무한한 약속의 실상들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방관으로 방치 하고 있다면 오직 스스로에게 손해일 뿐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어쩌면 불신의 자리에 서 있는것인줄도 모른다.
|
첫댓글 귀한 신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