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韓國史)에서 그리고 동양의 역사에서 가장 크나큰 쟁점 중에 하나가 "요동(遼東)"이라고 생각 합니다. 역사상에서 말하는 "요동(遼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요동(遼東)"의 위치를 안다는것은 다시말해서 고대사(古代史)와 근세사에서의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신라와 고려,조선의 위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됩니다. 역사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요동(遼東)"!
그 "요동(遼東)"의 진정한 위치가 어디에 존재했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요동의 위치를 알려면 요동과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북경(北京)의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일전에 제가 "청(淸)나라의 북경(北京)은 어디에 있었나?"
라는 글을 쓴적이 있었는데 그 글에 내용을 좀 더 보충해 보았습니다. 북경(北京)의 위치를 알려면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 나타난 북경의 특색을 알아야 합니다.
"계산기정(薊山紀程),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를 보면,청나라로 가기위해서는 사막(沙漠)을 지나가야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압록강을 건넌 뒤부터 비로소 서남쪽으로 향해 가고, 구련성을 지나가서는 서쪽 혹은 북쪽으로 갔다. 요동에서 심양까지는 축방(丑方)으로, 심양에서는 술방(戌方)으로, 고가자(孤家子) 이후부터는 모두 미방(未方)으로 향해 갔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요동 벌판을 들어선 뒤부터 오가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고 모래가 먼지처럼 가늘어, 바람이 살짝 불어도 곧 휘날려 흡사 연기나 안개 같고, 이따금 눈앞에 있는 사람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산해관 안은 더욱 심하여, 수레바퀴가 닿는 곳에는 마치 잿가루를 키로 부친 듯 자욱하고, 사람의 의복ㆍ모자ㆍ얼굴에 붙으면 털어도 떨어지지 않으며, 입안에서 와삭와삭 소리가 났다. 그래서 비록 열 벌 바른 상자일지라도 모두 스며든다. 또 시장 점포나 인가에 둔 기물과 수레 안의 자리는 닭꼬리비[鷄尾箒]로 끊임없이 털어 버려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잠깐 사이에 한 치 남짓 쌓인다. 도성의 큰 거리는 매양 물을 뿌려 적셔 주고 있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5권 부록(附錄) 도리(道里))
영평부(永平府)-서쪽으로 연경이 500리 떨어져 있다.(중략)
사하역(沙河驛)-이곳에서는 길이 모래돌 가운데로 나 있는데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힌다. 만약에 바람을 만나게 되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사람은 길을 가지 못한다. 연(燕) 땅의 길 중에서 가장 괴로운 곳인데, 모래 길이 수십 리나 된다. 역 마을에는 역시 무너진 성이 있다.
찬바람 눈을 불고 들판 길 평평한데 / 寒風吹雪野途平
바다 넓어 하늘 같고 해는 멀리에 가로놓여 있다 / 海闊如天日遠橫
말을 묻어 버리는 황사 삼십 리 / 沒馬黃沙三十里
넓은 수레바퀴 느려서 소리 없이 구른다 / 廣輪遲轉不成聲
-(계산기정(薊山紀程) 제2권)
압록강을 건너서 북경에 이르기까지는 땅이 모두 모래이고, 요동 들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왕래하는 거마가 더욱 많고 모래는 더욱 미세해서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다. 관내(關內)로 들어가면서 더욱 심해서 비록 바람이 없는 날이라도 수레바퀴, 말발굽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것이 마치 횟가루가 날듯 해서 사람의 옷과 모자에 붙는다. 교자(轎子) 안에서는 사(紗)를 내려서 막지만 워낙 미세하기 때문에 새어 들어오기가 더욱 쉬워서 잠깐 사이에도 언덕처럼 쌓인다.-(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계산기정(1804년),경자연행잡지(1720년)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이고, 책의 저자도 서로 다른 사람 입니다. 그런데 거의 동일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북경까지의 땅은 모두 모래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의 대륙의 상황과는 전적으로 다른 기록입니다. 현재의 대륙은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지금의 북경까지는 모래땅이 아닌 거의 초원지대가 주를 이룹니다.
지금의 대륙이 사막화가 많이 진행되었다고 하지만,이는 산업이 발달되면서 환경공해로 인한 환경재앙의 결과입니다. 이 책들이 기록된 시기가 약 250년 전후인데,250 여년 전에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이고,
지금처럼 환경공해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지금처럼 사막화가 진척되기 훨씬 이전의 상황입니다. 어느 혹자는 제가 위의 기록을 토대로 청나라의 북경까지 가는 길은 사막의 길이었다.라고 말하자,
구체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단순 모래일수 있으므로 근거로서 빈약하므로 사막일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럼 일반 평지의 단순모래라고 가정 합시다.그런데 어찌해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의 기록처럼,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일반 평지의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지역이 사막 말고 그 어느 지역에서 가능하냐?고 묻자,
어느 혹자는 아무 답변을 하지도 못했습니다.사막이 아닌 지역에서 계산기정,경자연행잡지와 같은 상황이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압록강 건너서 부터 모래지역 즉 사막지역인데,북경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사막의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그 여정중에 요동,산해관이 아주 심하며 더더욱 심한 지역은 영평부의 사하역으로 말의 배까지 모래가 묻히는 지역이 30여리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상의 북경(北京)이 사막에 있었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2편 오화연필(五花沿筆) ○ 을묘년(1855, 철종 6) 11월[17일-27일] 25일(갑신)
길에서 낙타에 물건을 싣고 가고, 또 사람을 태우고 가는 것을 보았다. 낙타는 머리는 작으면서 위로 쳐들었고 목은 길고 굽었으며 등에는 두 봉우리가 마치 안장을 얹은 듯하며, 다리는 세 마디가 있다. 먼데서 바라보면 거북과 같고 가까이서 보면 학과 같다. 700근을 실을 수 있고 하루 300리를 간다고 하는데, 실은 것은 거의가 석탄이다. 북경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쓰는데 한 번 불을 붙여 놓으면 며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하며, 수삼십 필씩 줄을 이어간다.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촉에는 죽탄(竹炭)이 많고 남방에는 목탄이 많고 북방에는 석탄이 많다.” 하더니, 그 말이 과연 그렇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1권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1일-6일] 4일
해가 뜰 무렵에 길을 떠나 양장하(羊腸河)에 이르니, 물이 그다지 넓지는 않으나 여러 가닥이 있어 여름에 물이 지면 큰 들이 다 잠기며 배로 10여 리를 지난 후에 비로소 뭍에 오를 수 있다 하더라. 중안보(中安堡)에 이르러 하가(何哥)의 집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떠나려 할 때 하가가 밥값이 적다 하여 종이와 부채를 달라 하고 온돌방 앞에 들어와 간청하니, 사람됨이 극히 불량하여 보기에 매우 불쾌하더라. 온돌방 아래 흙 화로를 놓았으니 부리가 좁아 겨우 다관을 놓을 정도였으며, 석탄(石炭)을 피웠으니 석탄이라 하는 것은 멀지 않은 산에서 나는데, 처음 땅에서 파내면 검은 흙 같다가 땅 밖에 나오면, 굳어 돌과 같으니, 불을 피우면 오래 사그러지지 아니하고, 물을 뿌리면 더욱 잘 피니, 음식 만들 때나 온돌에 불 넣을 때 이것을 쓰는 곳이 많으니 매우 중요하고, 타고 남은 것을 물에 축여 나무로 틀을 만들어 벽돌 모양같이 박아 내어 도로 피우면 나무 숯보다 화기가 좋으니, 심양부터는 이것이 아니면 불 때기 어렵더라.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 밭에 또한 조 짚으로 우마(牛馬)의 양식을 삼으니, 지나는 밭 길가에 조와 수수밖에 다른 것이 없고 간혹 밭벼를 심은 밭이 있으니, 밭벼의 쌀은 노미라 하며, 면화(綿花) 밭이 아주 드물게 있으니, 이는 중원(中原) 사람이 아주 춥더라도 옷을 두껍게 입는 일이 없고, 짐승의 가죽으로만 여러 겹을 입으며, 바지는 다 겹으로 하였으며, 가난한 백성(百姓)들은 웃옷이 변변치 않아서 우리나라 엷은 차렵 바지만 하게 만들어 입었더라.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의 기록을 보면,북경(北京)에는 나무가 귀하므로 불은 모두 석탄을 쓴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리고 사막을 대표하는 동물인 낙타가 나오는데 석탄이 매우 무거우므로 꼭 낙타를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가축중에 하필이면 왜? 낙타를 이용했을까요? 사막지대에서 사막에 적응된 동물인 낙타가 물자수송에 가장 적격이었다는 그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므로,즉 북경은 사막을 접해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의 기록을 보면,북경(北京) 부근에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위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북경과 그 부근이 사막지역임을
알수 있는 기록입니다. 사막이 아니고서는 "수백 리 안에 나무가 있는 곳이 없고 농사로 수수를 많이 심어 나무를 대신하며"라는 기록이 성립될수 없으며,또한 "아주 가볍게 부는 미풍에서도 모래가 앞을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연기나 안개가 낀것 처럼 되고 사람의 피복,모자,얼굴에 모래가 달라 붙어 잘 떨어지지 않고,옛적의 가마(=교자)안에서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언덕처럼 수북히 쌓이고 북경과 500리의 거리에 있는 사하역의 상황은 모래가 말 배까지 묻히고,말 배까지 묻히는 모래지역이 시문에 언급된것 처럼 30리에 달한다."는 기록이 성립될수 없습니다. 또한 낙타는 혹한의 지역에서 살수 없는 동물 입니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北京)은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위의 사실 그 어느 하나라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즉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의 허구의 북경(北京)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겁니다. 위의 기록들에서 역사상의 북경(北京)은 사막을 접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럼 역사상의 북경은 사막을 접해있는 사실과 더불어
어떠한 특색이 있었을까요? 이 특색을 알면 확증적으로 역사상의 북경(北京)이 어디에 존재해 있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북경(北京)은 아무리 추워도 땅이 몇 치[寸] 밖에 얼지 않는다. 하루 종일 큰 눈이 와도 밤이 지나고 나면 눈 덩어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남쪽 지방 기후와 비슷하다.
인구가 조밀하여 내뿜는 입김이 따뜻한 기운을 퍼뜨려서 그런 것이 아닐까?(중략)
무릇 이 지방 토질은 요동에서 북경까지가 모두 곱고 부드러우면서도 찰져서 해동(解凍) 때나 장마 때는 바퀴에 붙어 지나가기 어렵고, 또 집 벽에다 바르면 빗물이 스며들 걱정이 없다. 그런데 곱고 부드러운 이 흙은 다 모래여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마치 연무(煙霧)처럼 먼지가 인다. 그래서 아무리 큰 눈이 쏟아져도 이 먼지와 뒤범벅이 되어 버리면 이내 눈발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는데 그중에도 사하역(沙河驛)이 제일 심하다. 산해관 안쪽은 왕래하는 거마(車馬)가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먼지를 일으키어 아주 바람이 없는 때라도 꼭 잿가루가 날리는 것같이 분분하다. 이것이 사람의 의복이나 모자에 붙으면 잠깐 사이에 모습을 변화시켜서 동행자끼리도 언뜻 보면 누가 누군지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붙으면 닦아도 떨어지지 않고, 입속으로 들어간 것을 씹으면 사각사각 소리가 나기도 한다.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 먼지가 종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이불 위에 쌓여 있다. 심지어는 겹겹으로 된 장롱이나, 두세 겹씩 봉해 놓은 병 속에까지 뚫고 들어가니 참으로 괴상한 일이다. 저자 가게나 인가에 벌여 놓은 기물들은 닭털로 된 털이개를 가지고 끊임없이 털어 내는데, 잠시라도 멈추면 또다시 쌓이곤 한다. 바람이 불면 길 가는 사람은 눈을 뜨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북경이 가장 심한데, 이곳은 석탄(石炭) 앙금으로 된 지방으로서 가루가 쌓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옛날 문자의 ‘치진(緇塵 세상 풍진 속에 분주하여 의복이 더럽혀짐)’이란 것이 곧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연원직지(燕轅直指:1832년) 제6권)
"북경의 토질은 검고 부푼 데다 수레와 말이 갈고 다니는 통에, 바람이 불 때면 먼지가 하늘을 덮어 바로 앞에 있는 사람마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의 점포들이 모두 닭털 총채를 들고 손 놀릴 새 없이 물건에 쌓인 먼지를 턴다.
몹시 추운 계절에도 땅이 한 치 남짓 얼 뿐, 하루 종일 눈이 와도 밤만 지나면 흰 점 하나 없어, 남방의 기후와 같아진다.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불때고 숨쉬는 훈훈한 기운이 따뜻한 기운을 펼치는 것인가 보다."
---(담헌서(湛軒書:1731~83) 외집 8권(外集 卷八) 연기(燕記) 경성기략(京城記略)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6권 기미년(1799, 정조 23) 2월[7일-30일] 15일
"대개 산해관 안팎이 다 너른 들이요, 검은 흙이라. 여기에 이르러 지기(地氣)가 명랑(明朗)하여 갑자기 별계(別界)를 이루었으니, 먼 산이 푸른빛을 띠어 출몰(出沒)하여 고움을 드리우며, 일대 난하 물이 둘러 반월형(半月形)이 되었는지라."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1720년) [잡지(雜識)]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상
"통군정(統軍亭)에 올랐다. 이 정자는 북경 지방과 요동(遼東) 지방을 바로 누르고 있어 넓고 기이하고 웅장함이 다른 누각(樓閣)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마이산(馬耳山)이 가장 가까워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 같고, 먼 산이 어렴풋이 보이는 가운데 있는데, 이것이 바로 송골산(松鶻山)이라고 했다. 호인(胡人)들이 사신 일행을 구련성(九連城)에서 기다리고 있어 밥 짓는 연기가 하늘에 떠 있다. 세속(世俗)에서는, 북경에 가는 사람이 이 정자에 오르는 것을 꺼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모두 오르지 말라고 권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그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올라가 보았다. 거기서 계속하여 취승정(聚勝亭)에 올라가 보았다. 이 정자는 전배(前輩)들의 시에 여러 번 들어 있어 가장 유명한 곳인데, 지금은 이미 퇴락했으니 애석한 일이다.
중강(中江)에서부터는 길을 따라 갈대가 있는데, 그 길이가 사람의 키보다 더 크고 노목(老木)들이 많은데 그 가지에 의관이 걸린다. 어떤 것은 길가에 가로누워 있고 그 사이에 조그만 길이 열려 있기도 하다. 땅은 모두 검은 모래이고, 더러 습한 곳도 있다. 대개 하루 종일 가는 길이 모두 거친 벌판과 황량한 들판뿐이어서 보이는 것마다 모두 쓸쓸하다. 구련현(九連峴)을 넘어서 신시(申時)에 구련성에 도착했다. 이곳은 비록 성(城)이라고는 하나 어느 해에 허물어졌는지 알 수가 없고, 거친 빈터에 사람 하나 살고 있지 않았다."
연행일기(燕行日記) 제4권 계사년(1713, 숙종 39) 1월 5일(계미)
"이곳은 비록 엄동이라도 매우 춥지는 않고, 금년은 앞서와 같이 온화하지는 않으나 오늘처럼 바람이 세었는데도 일기가 따뜻함이 우리나라의 2월과 거의 같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의 공통된 기록은 북경(北京)과 북경 인근의 토질이 검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위의 기록들처럼 북경은 사막을 접하고 있습니다. 즉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북경은 사막을 접하고 있는데 그 모래의 특징은 검은빛의 토양=회색빛의 토양을 지닌 지역 입니다.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지질적으로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 아주 독특한 특질의 토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북경은 검은 모래 사막(회색빛 모래 사막)의 토양 입니다.
세계적으로 검은 모래 사막은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이 유일 합니다.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위의 기록상에서 전하는 어떠한 조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또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에서 나타난 북경은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기록처럼 겨울에도 춥지 않다고 합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연행일기(燕行日記)의 저자는
각기 다른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서로 공통된 기록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담헌서(湛軒書)의 저자는 북경의 겨울이 마치 남방지역의 기후와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막지방의 아주 전형적인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지역 사막의 겨울 날씨가 보기 보다 온난한 날씨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조선의 사신들의 기록을 근거해서 보면,
현재의 역사에서의 북경은 가짜이며,역사에서 말하는 진정한 북경이 있었던 지역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의 카라쿰 사막 일대 입니다. 여기서의 카라쿰 사막의 카라쿰 이라는 뜻은 터키어로 "검은 모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카라쿰 사막의 주변을 경유하며 흐르는 강은 역사상의 난하이며 열하 입니다. 연원직지(燕轅直指)를 기록한 연대가 서기 1832년 이므로 1830년대 그 당시까지만 해도 청(淸)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서 러시아와 관련된 영토분쟁에 관한 모든 사건은 주로 흑해와 카스피해 방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늘날의 동북삼성 지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건들 입니다.
다산시문집 제12권 논(論) 요동론(遼東論)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에는 명(明) 나라가 이미 북경(北京)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사람들이 기내(畿內)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진실로 차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산시문집의 기록을 보면 "명(明) 나라가 이미 북경(北京)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사람들이 기내(畿內)의 백성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북경의 근방 지역에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지역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순암선생문집 제19권 설(說) 우리 나라의 지계에 대한 설[東國地界說] 무인년
"근본을 따져서 논하자면 요동(遼東)의 절반 땅인 오랄(烏喇) 이남은 모두가 우리 땅이다."
"동사강목"의 저자이며,순암선생문집의 저자인 안정복의 기록을 보면,요동(遼東)지역에 오랄(烏喇) 지역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럼 역사에서 말하는 오랄(烏喇)지역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天地門) 동삼성(東三城)
영고탑(寧古塔)ㆍ오랄(烏喇)ㆍ애호(艾滸)를 합하여 동삼성(東三城)이라고 합하여 부른다.
오랄은 심양(瀋陽) 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8백 리 지점에 있고 영고탑은 오랄 동북 7백여 리의 지점에 있고, 애호는 심양에서 정북으로 2천 8백여 리의 지점에 있으며 영고탑과는 동서의 거리가 2천여 리에 달한다. 두 성은 또 영고탑의 근기(根基)가 된다. 애호는 몽고와 접경이 되었고 오랄은 면적이 넓고 인구가 적기 때문에 귀천을 물론하고 범죄자는 모두 여기에 옮겨 넣었으며, 부정사범에 걸린 자들은 주호(珠戶)로 정하여 해마다 동주(東珠)를 채취하여 바치게 한다. 동주라는 것은 백산(白山)의 북강(北江)에서 산출되는데 크기가 탄환만하며 광채가 밤에 환하게 비치어 값이 천만 냥에 달한다고 한다.
오랄은 곧 강의 명칭인데 서쪽은 오랄, 동쪽은 선창(船廠)이라고 한다. 서로의 거리는 30여 리다. 그 지역은 동쪽은 큰 산에 붙어 있고 3면은 평야가 트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곳이다. 근년에 영고탑 장군이 오랄에 옮겨 주둔하고 영고탑에는 부도통(副都統)이 남아서 지키게 했다. 오랄은 금(金)시대의 오국성(五國城)인 듯하다.
성호사설의 기록을 보면,오랄은 강(江)의 명칭이라고 합니다. 그 강을 기점으로 강의 서쪽은 오랄(烏喇)이며 강의 동쪽은 선창(船廠)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이 역사에서 말하는 청(淸)나라의 발흥지 입니다.
맨 위의 기록들을 근거로 해서 청나라의 북경은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산시문집의 기록을 근거로 하면 북경의 인근의 지역에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지역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민족인 여진족의 발흥지역이 동북방 지역이므로 북경지역(투르크메니스탄)의 동북지역에 카스피해로 흐르는 큰 강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강의 명칭은 우랄(오랄)강 입니다. 즉 역사에서 말하는 오랄,선창의 그 기준이 되는
강은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의 동북지역에 있는 우랄강(오랄강) 이었던 겁니다. 다시말해서 이 우랄강 서쪽은 오랄(烏喇)지역이므로 이 지역이 역사상의 진정한 요동(遼東)지역 입니다. 이 요동지역에 역사에서 말하는 영고탑 지역이 있었습니다.
위의 기록과 관련하여 역사상에서 전하는 요동(遼東)지역과 관련된 고대사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5권 지리고(地理考) 5 읍루(挹婁)
○ 읍루(挹婁)는 옛 숙신씨(肅愼氏)이다. 지금의 백두산(白頭山) 북쪽의 오라(烏喇), 영고탑(寧古塔) 등지이다.《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의 나라가 그곳에 있다. 《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渤海)의 왕성(王城)은 홀한해(忽汗海) 가에 있으며,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옛 숙신성(肅愼城)이 있다. (중략)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라, 영고탑은 주(周)나라 때 숙신씨의 나라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불함산(不咸山)은 지금의 백두산이다. 홀한해는 지금의 호아합하(虎兒哈河)이다. 지금 영고탑의 동남쪽이 이 강가에 닿아 있는데, 이곳은 옛 숙신씨의 나라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을 보면 옛 숙신씨(肅愼氏)인 읍루(挹婁)가 있던 지역이 지금의 백두산(白頭山) 북쪽의 오라(烏喇), 영고탑(寧古塔) 등지이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백두산은 지리적으로 카프카스(코카사스)산맥을 의미하며,
그 북쪽에 옛 숙신씨(肅愼氏)인 읍루(挹婁)가 있었으며,그들이 살았던 지역은 오라(烏喇), 영고탑(寧古塔) 등지 입니다. 그리고 위의 기록을 보면 역사상에서,산해경에서 말하는 대황(大荒)의 의미가 깃든 지역은 카프카스(코카사스)산맥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기록을 보면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渤海)가 있던 지역이 홀한해(忽汗海)가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홀한해(忽汗海)가에 있었던 발해의 왕성은 홀한성(忽汗城)이며 홀한성이 있었던 지역은 홀한해(忽汗海)이므로
현재의 흑해 연안으로 봅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홀한해(忽汗海)는 흑해를 의미하며 홀한해(忽汗海)로 들어가는 강 줄기는 호아합하(虎兒哈河)이므로 발해가 있던 지역의 명칭이 바다도 되며,강이 되기도 하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위의 기록에서 영고탑지역은 홀한해(忽汗海)가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즉 영고탑은 흑해연안에 있었다고 봅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9권 지리고(地理考) 9 발해(渤海)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르며, 땅은 사방 2000리이고, 호구는 10여 만 호이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발해는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차지하였는바,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로써 경계를 삼았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땅은 사방 5000리이고, 호구는 10여 만 호이며,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모두 차지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변한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해동역사(海東繹史)가 인용한 "구당서","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발해의 서쪽 2000리 거리에 키타이로 불렸던 거란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즉 거란이 있었던 지역이 역사상의 영주(營州)지역 입니다.
또한 발해의 남쪽에 신라가 있었으며,발해의 동북쪽에 흑수말갈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알수 있는 사실은 발해의 동북쪽에 흑룡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역사상의 진정한 흑룡강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를 의미하므로
당연히 발해의 건국지는 오늘날의 흑해연안 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에서도 같은 맥락의 기록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1권 무오년(1798, 정조 22) 12월[1일-6일]
"흑룡강(黑龍江)은 영고탑(寧古塔) 지방이라, 또한 요해처(要害處)라 하더라." 그리고 위의 기록으로 알수 있는 또하나의 사실은 발해가 건국한 지역을 근간으로 그 지역의 주변에 한국의 고대사에 등장하는 나라인 부여(扶餘), 옥저(沃沮)등의
나라가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불가리아를 한국 고대사의 고대국가인 부여(夫餘)의 후예라는 주장과 학설은 결코 황당한 학설은 아니라고 봅니다. 상당한 개연성있는 학설이라고 봅니다. 다만 이러한 학설을 주장하는 사람의 글을
보면 어떠한 경로로 해서 오늘날의 동유럽 국가인 불가리아의 시원이 되었는지를 모를뿐 입니다. 모를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현재의 한반도 사관으로는 이해불가의 미스테리 입니다. 대륙조선사적인 관점에서만 풀수 있는 주장과,학설입니다.
대륙조선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동유럽 국가인 불가리아의 시원이 부여였다는 학설은 어쩌면 학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2권 순일편(旬一編) 영고탑(寧古塔)
영고탑은 토문강(土門江) 북쪽 600리 호이합하(虎爾哈河) 북안(北岸)에 있는데,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닿고, 서로는 오라(鳥喇)와 접하고, 남으로는 토문과 인접하고, 북으로는 흑수(黑水)를 통과한다. 토지가 광원(曠遠)하고 산천이 둘러싸고 있다. 백성들의 풍속이 근검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수렵을 업으로 삼는다. 이 지역에는 도회지가 없다. 청(淸)나라 원조(遠祖)가 삼성(三姓)의 난리를 평정한 것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만주(滿州)라는 국호를 사용했던 사람이다. 동쪽에는 혼춘(渾春)이 있는데, 강희제(康煕帝)가 좌령(佐領)을 두었고, 서남쪽의 길림(吉林)에는 장군(將軍)과 부도통(副都統)을 두었다. 선성(鄯城)과 후춘(厚春)은 들이 넓고 토양이 비옥하여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 요동(遼東)이나 심양(瀋陽)과 다름이 없다.
임하필기의 기록을 보면 영고탑 지역은 호이합하(虎爾哈河) 북안(北岸)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즉 영고탑 지역은 발해의 건국지와 관련이 있음을 알수 있으며, 그리고 동으로 대해(大海)는 카스피해를 의미하며,서로는 영고탑 지역을
포함한 옛날의 요동지역인 오라(鳥喇)를 접하며 북으로는 흑룡강을 통과한다고 기록한 이 지역에서 만주(滿州)라는 국호를 사용한 사람이 청(淸)나라 원조(遠祖)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여타 고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만주(李滿住)라는 사람으로 건주위(建州衛) 야인(野人)의 추장(酋長)이었습니다. 즉 임하필기에서 기록한 지역은 역사에서 전하는 건주위(建州衛)지역이며 건주위(建州衛)지역이 북으로 흑수(黑水)를 통과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건주위(建州衛)지역은 요동지역의 북방에 위치해 있던것으로 보며,기록상에서 건주위(建州衛)와 해서위(海西衛)와 모련위(毛憐衛)가 서로 통하는 것으로 보아 이와 관련된 해서위(海西衛)와 모련위(毛憐衛)는 건주위(建州衛) 주변에
있었다고 보면,해서위(海西衛)와 모련위(毛憐衛)는 모두 바다와 관련된 지명으로서 흑해연안의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언급한 해서위(海西衛)의 해서(海西)지역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물론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마다 다를수 있지만),제가 고증한 사실과 상당히 부합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연암집 제 2 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순찰사에게 답함
내가 보기에, 지금 중국에 있는 천주당(天主堂)의 서양 사람들은 비록 역법(曆法)에는 정통하지만 모두 요술쟁이이다. 서남이전(西南夷傳)에 “요술쟁이가 능히 변화하여, 불을 뱉어 내고, 스스로 사지를 묶었다가 풀어 버리며, 소와 말의 머리를 옮겨다 바꾸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해서인(海西人)이다.’라 하였다. 해서는 바로 대진(大秦)이다.” 했고, 주(註)에는 “지금 살펴보면 대진은 바로 무제(武帝) 때 이간국(犂靬國)으로 지금은 불림(拂菻)이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연암집의 기록을 보면,서남이전(西南夷傳)의 기록에서 (서양의)요술쟁이가 스스로를 해서인(海西人)이라고 말했으며, 또한 기록에서 해서(海西)는 바로 대진(大秦)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대진(大秦)은 한(漢)나라 무제때의 이간국(犂靬國),
불림(拂菻)을 의미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역사에서 대진(大秦)은 로마제국이라고 합니다. 저는 건주위(建州衛)를 기준으로 해서위(海西衛)가 지역적으로 지명적으로 바다를 의미하므로 흑해의 서쪽 지경이라 고증했습니다.
지리적으로 흑해의 서쪽지경은 대진국과 가깝습니다. 즉 옛날부터 흑해의 서쪽지역은 해서지역이며 그래서 대진국 사람들을 해서인이라 칭했다고 봅니다.
또한 제가 고증한 청(淸)나라의 건주위(建州衛) 지역은 조선과 상당히 연관된 지역인데 다음의 기록을 보면,
기축록 하(己丑錄下) 우득록 서(愚得錄序)
슬프도다. 기축년의 옥사여! 유림 학사의 원통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의 호)ㆍ곤재 두 어진 사람이 화를 면치 못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기축록》을 지어 원통한 옥사를 상세히 말하였더니 저희들이 꺼려하여서 진주본(晉州本)의 《백사 문집》을 개간하여 《기축록》을 빼고 위작(僞作)으로 보충하여 그 자취를 없애버렸다. 그들의 마음은 귀신이라도 속일 수 있고 백세(百世)를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이치가 없으니 인심도 속이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귀신이겠으며 필부도 못 속일 것인데 더구나 백대(百代)의 공론을 속일 수 있으랴. 선생을 이미 고문하였으나 사실이 없어 임금께서 깨닫게 되니 정철이 또 〈배절의설(排節義說)〉로 변경하여 임금의 마음을 노하게 하여 북쪽 끝 경원으로 귀양을 보내니 경원은 옛 옥저(沃沮)의 땅으로, 숙신(肅愼)의 동쪽 발해 위에 있으며 그 밖은 국경이니 풍토가 다른 이역의 땅이다.
사가시집 제 21 권 시류(詩類) 또 길성 김 태수의 시에 답하다 2수
북으로 변방을 바라보니 길은 멀기도 한데 / 北望關河道路賖 가을바람에 기러기만 남으로 날아오누나 / 秋風獨有鴈南多
청삼의 관리 된 것을 그대는 괴이타 마소 / 靑衫作吏君休怪 백발로 어사된 나는 스스로 탄식한다오 / 白首爲臺我自嗟
철령은 머나멀리 흑룡강과 연접해 있고 / 鐵嶺迢迢連黑水 옥문관은 아스라이 사막과 닿아 있기에 / 玉關渺渺接黃沙
고을 다스리면서 변방 계책도 세워야거니 / 爲州亦復籌邊策 젊은 때에 힘쓰지 않으면 늙어서 어찌하랴 / 少壯非勤奈老何
기축록 하(己丑錄下)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신하를 귀양보낸 곳은 경원지역이었는데 그 경원지역은 옛날의 옥저의 땅이며,숙신(肅愼)의 동쪽 발해 위에 있으며 그 밖은 국경이니 풍토가 다른 이역의 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가시집 제 21 권의 기록을 보면,조선의 철령(鐵嶺)이 흑룡강과 연접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고증한 사실들을 대입하여 보면 조선의 경원지역이나 철령은 역사상의 흑룡강이 있었던 지역인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일대와 흑룡강과 연관이 있는 지역인 역사상의 총령산이며 백두산이 있는 지역인 카프카스(코카사스)산맥등에 조선의 경원과 철령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 많은 자료 수집과 연구를 하여야 겠지만, 지금까지 고증한 사실들을 토대로 보면 아시아가 조선이며 조선이 아시아 였다는 사실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참고문헌은 한국고전 번역원의 글을 참조,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