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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게시판 스크랩 중국의 고도(古都) 서안(西 安 -Xian) 여행기
지호지조 추천 0 조회 167 09.07.13 18:42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이번 국경절 연휴를 이용하여 역사의 도시로 이름난  西安(Xian)과 인근에 있는 화산

(華山)을 다녀왔다. 중국의 국경절은 10 1일이다. 이번 국경절 휴무는 9 27()

28()을 정상 근무하고, 9 29일부터 10 5일까지 휴일을 포함하여 1주일간이다.


西安 (중국어 발음은 시안이다)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성도이며 지리적으로는 중국대륙의 중앙 부분에 위치해 있는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에 하나다    

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현재 서안시의 인구는 약 720만 명 정도인데 천 년 전의 인구가 이미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도시다. 당나라 때 이미 한반도에서 온 우리나라 사람이 약 700명 정도 거주하였고 지금은 대략1,000여 명 정도의 조선족이 소수민족으로 서안에 살고 있다고 한다.

 

중국 여행에서

500년 역사를 보려면 상해로 가고, 1,000년 역사는 북경으로,
3,000
년 역사는 낙양을 , 그리고 5,000년 역사를 다 보려면 서안으로 가라고 한다.
 

이렇듯 서안은 서주 때부터 시작하여 진, 서한, 북진, 요진, 수나라, 당나라 등

중국 역사상에서 13왕조의 1,000년 도읍지로써

중국의 6대 고도(서안, 북경, 낙양, 개봉, 남경, 항주) 중의 하나이며

세계 4대 문명도시(이스탄불, 로마, 아테네, 서안) 중의 하나도 손꼽이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도 관련이 깊은 서안은 우리에게는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년간 강우량이 600mm 정도로 물이 부족하여 집집마다 우물이 많고

날씨는 1월이 -10 ℃ 정도이고  7-8월은 40℃ 를 오르내리며 상해보다도 더 무덥고

북방에서는 제일 무더운 도시라고 한다.

(5, 6)과 가을(9, 10)은 대체로 선선하여 관광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데 가보니

요즘 날씨는 반 팔 옷을 입을까? 긴 팔 옷을 입으까? 헷갈리는 정도였다. 

특산물은 석류와 곶감인데 가격도 싸고 맛도 좋다. 진시황릉 앞 노상에서는 중국돈으로

20원만 주면 잘 익은 석류를 한바구니 가득 담아 준다.

 

서안에는 진시황릉을 비롯하여 측천무후, 당태종 이세민 등 황릉만 72개가 산재하고

2천년 전의 한나라 무덤만도 18개가 넘는다고 한다.

대체로 유물은 진나라와 당나라의 역사가 많고 건축물은 명나라 때 것이 많다고 한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는 서안을 충분히 다 볼 수가 없어 좀 아쉬운 느낌이었다.

 

 

 

 

서안비림박물관(西安碑林博物館)에 들어가는 입구다.

원래 3000여 개의 비석이 있었으나 청조 때 파손되어1,095개의 비석(碑石)이 있다는데 당 현종이 직접 쓴 직필비석과 왕희지의 삼장성교서비의 행서(行書)등 당대(唐代)

유명 서예가의 필체가 총 망라되어 돌에 새겨져 제1실부터 제7실까지 보관돼 있다. 

 

 

 

 

2실 입구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이다.

여기서 대진은 동로마를 나타내고 경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를 말한다.

이 비석은 기독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인데 경교는 당나라 태종 때

처음으로 페르시아 선교사에 의해 중국에 전래되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이 조조에게 붙잡혀서 조조 휘하로 오도록 회유를

받는 과정에서 대나무 그림에 오언절귀 시로써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不東君意"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절대 유비를 배신할 수 없다는 강한 지조를 표현했고 조조는 관우의 굳은 뜻을 알고 죽이지 않고 무사히 유비에게 보내준다.

내부에서 직접 비석의 탁본을 떠서 판매하는데 가격도 좀 비싸고 굳이 살 필요는 없다.

 

 

 

 

대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大雁塔)이다.

당나라때 현장법사가 실크로드를 따라 그 험준한 차마고도를 넘고 히말라야 산맥을

돌고 돌아서 인도에 도착하여 구도를 한 후에 불경을 구해 17년 만에 다시 당나라로

삼장법사란 이름으로 돌아 왔다. 현장법사와 서유기의 삼장법사는 동일인이다.
이 불경을 보관 했던 탑이 바로 대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인데 기러기 안(雁) 자를 쓰는 이유는 삼장법사가 인도에서 기거했던 절에 있는 탑 이름이 대안탑(大雁塔)인데

그 이름을 그대로 따 왔기 때문이란다.

 

 

 

명성벽(또는 서안성벽)의 동쪽문 입구다.

이 성벽은 명나라 홍무제 3년에서 11년까지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그 역사가 이미 600년을 넘는다. 성벽은 동서남북의 4개 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성 밖에는 폭이 제법

넓고 깊이도 깊은 해자(垓子)에 물이 흐르고 주변도 공원처럼 잘 조성해 놓았다.

 

 

 

 

명성벽 위의 모습인데 이 성벽은 현존하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완전한 고성 중의 하나로 전체 길이가 13.6km, 높이는 12m, 폭이 15m로 높고 두터운  특징이라 한다.

성벽은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야 하며 다 둘러보는데는 관광용 전동차로 약 40여 분이 소요된다. 성 위에서는 관관용 자전거도 대여해 준다.


 

 

진시황릉의 모습이다. 아니, 능이라기 보다는 그냥 하나의 야산이다.

최초로 중국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묻혀 있는 이 곳은  37년에 걸려 능묘가 완공

되었다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0m라고 한다.  석류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고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야산이다.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었다.

내부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많지만 이미 레이저 스캔으로 많이 파악되었고 세계 고고학 협회에서 발굴을 영원히 금지시켰다고 한다.

 

 

 

 

진시황 병마용(兵馬俑) 박물관의 모습이다.

밖에서 보니 마치 체육관 건물 같았는데 발굴된 고분 위에 이런 체육관 형태의 건물을 만들어 놓았다. 병마용은 총 3 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호 전시관은 완전히

발굴된 상태이고, 3호 전시관은 일부만 미발굴 상태이고, 2호 전시관은 거의가 미발굴

상태인데 그냥 그대로 놔 두기로 했단다.

진시황 병마용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히는데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황릉에서는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호 전시관 내부 모습이다.

병마용은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사진 앞쪽 푯말이 있는 부분이 우물을 파 내려오던 바로 그 자리라고 한다.

1호 전시관은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

있는데 한 쪽에서는 부서진 것을 보수하고 있었다. 

많은 병마용이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이 놀랍다.

 

   

 

 

3호 전시관의 일부 모습이다.

3호 전시관은 주로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이는 것처럼 부러져서 머리나 팔 등이 없는 병마용이 많다. 갑옷과 신발 모양에서 신분과 계급을 알 수 있다고 한다.

 

 

 

 

 

2호 전시관 내부인데 거의 발굴이 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사진에 보이는 윗 부분의 굴곡은 당시 갱의 천정을 덮은 나무라고 하는데

세월의 무게에 눌려서 내려 앉아 내부에 있는 병마용이 거의가 파손되었기에 더 이상

발굴의 가치가 없어 중단했다고 한다.

사진에 보면 내부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뚫은 구멍이 몇 개가 보인다.

 

 

 

 

 

화청지(華淸)) 정원이다.

화청지는 양귀비 별장(別莊)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사실은 이곳은 이미 서주 때

궁(宮)이 지어졌고 진시황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으며 당나라 현종 때에

"화청궁(華淸宮)"으로 화려하게 재건하여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생활했다 한다.

화청지는 역대 왈들이 온천욕을 즐기던 왕궁으로 뒤에는 려산(麗山)있어 산세(山勢)가 좋고 항상 43도의 수온을 유지하는 온천수가 지금도 솟아나고 있다.

온천이 나오는 온천샘과 양귀비 목욕탕, 현종 목욕탕, 세자 목욕탕, 주방장 목욕탕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양귀비 (楊貴妃)가 목욕했다는 부용탕(芙蓉湯)이다.

현종은 양귀비가 목욕하는 부용탕(芙蓉湯) 안을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들여다 보고

양귀비의 몸매에 늘 감탄했다고 하는데, 현종과 양귀비는 54세의 시아버지와 21세의

며느리 관계이지만 18번째 아들의 궁녀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한다. 

 

 

 

 

귀비의 동상이다.

역사의 그림으로 보면 양귀비의 모습은 풍만한 여자로 묘사되는데 이 동상은 그 보다는 좀 날씬하게 만들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양귀비 가슴을 만져 가슴 색깔이 변해 있다.

역사에서는 양귀비로 인해서 안녹산의 난이 유발되고 양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왕을 더 이상 보호 할 수 없다고 하여 결국 현종은 양귀비가 스스로 목매어 자결 하도록 한다.

 

 

 

 

화청궁 안의 오간청(五間廳)이란 건물에 있는 장개석 집무실 내부 모습이다. 

생각보다는 방의 크기도 작고 집기류도 소박하다. 

오간청은 장개석 별장이라고도 하는데 1936년 12월 남경에 있는 국민당 정부 장개석

이 공산당과의 내전을 독려하기 위해 서안에 와서 여기에 머물다가 의형제를 맺었던

동북군 군벌 장학량에게 전격적으로 체포된다. 이것이 서안사변(西安事變)이다.

서안사변으로 국공합작이 성립되고 나중에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쫓겨가고 중국은

공산당이 장악하게 된다.

 

 

 

뒤에 보이는 산이 려산(麗山)이다. 화청지는 이 산자락 밑에 있다.

려산(麗山)은 높이가 1,484m 이고 자연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이 난 곳이라고 한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있었지만 관광 일정에 없어 올라가지는 못했다. 

 

 

 

 

서안 시내 중심에 있는 종루의 밤 모습이다.

저녁의 종루거리는 사람도 넘치고 차도 많아서 서울의 종로보다 더 복잡하고 활기차다.

서안 시내는 지하철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고 거리에는 서안의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넘쳐나는데 참으로 역동적인 모습이다.

 

 

 

상해를 비롯한 대도시의 중국의 모습은 이미 시장 자본주의 사회로 깊숙히 들어와 있어

서울이나 서구의 여느 도시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요즘 멜라민 파동으로 중국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고 중국은 아직도 낙후되었다고

생각할런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성장통일 뿐이고 

또다른 한편에서는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거나 오히려 더 발전된 모습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중국에 추월 당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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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07.13 18:46

    첫댓글 산삼회장 덕촌님의 명을 받고 다른 분의 여행기를 스크랩해왔습니다. 우리가 갈려고 하는 곳과 겹치는 곳이 많아 여행지를 사전공부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의 여행기도 며칠씩의 간격으로 연속해 올려드리겠습니다.

  • 09.07.14 10:48

    미리 가 보는 서안으로 우리 여행에 많은 도움이되겠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 09.07.14 21:57

    깜짝 놀랐네요. 주인공이 사진속에 없어서-- 미리 보는 여행기, 사전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작성자 09.07.14 23:52

    지난 가을인가 아니면 지난 봄이던가 화산여행을 계획하던 초기에 이런 자료를 올려달란 회원들의 요청이 있어 이런 자료를 두어건 올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땐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 같아 그만 두었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도 산삼회장님의 요청이 있어 올려봤습니다. 올리는 것이 한 번 더 읽어 보는 기회가 되니 좋은 공부의 기회도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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