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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길지만 끝까지 읽어보세요! 잘 기억해 두시면 먼 훗날 내가 어떤 불치의 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 의사들 처럼 쉽게 죽음을 마지하므로 자식들 한테 물질적 심적 부담을 주지 않을 것이며, 특히 이글을 읽는 참된 성도님들은 죽고 사는 권세를 쥐고 계신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성도로서 정해진 죽음 앞에 담대히 "사망아 ! 네가 이기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 자식들 보는 앞에서 미소를 띄우며 숨을 거둘 수 있는 이지상에서의 가장 출세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퍼다가 올립니다. 글쓴이 벤허가..
Ken Murray, MD, is Clinical Assistant Professor of Family Medicine at USC. This piece originally appeared at Zocalo Public Square.
BSIP—UIG via Getty Images
몇 년 전 평판이 상당히 좋은 정형외과 의사면서 나의 친구이기도 한 찰리가 위에서 종양을 발견했다. 그는 그 부분을 외과 진찰하였다. 진단은 췌장암이었다.
외과의는 우리나라 최고 명의 중의 한 분이었다. 외과의는 바로 이런 암 환자의 5년 생존 가능성을 5%에서 15%로 3배나 늘릴 수 있는 -비록 삶의 질은 나쁘지만–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찰리는 심드렁했다. 그는 다음날 병원 문을 닫고는 집으로 가서 다시는 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 주력하면서 가능한 기분 좋게 지내려 하였다. 몇 개월 후 그는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학요법도 방사선요법도 외과 치료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병원 치료에 많은 돈을 쓰지 않았다.
자주 다루는 주제는 아니지만, 의사들 역시 죽는다. 그리고 의사들은 우리들처럼 죽지 않는다.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비교해볼 때 특이한 것은 의사들이 얼마나 치료를 많이 받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적게 받는가 하는 점이다.
의사들은 평생을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살아왔지만 자신들의 죽음에 직면해서는 꽤 평온한 경향이 있다.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어떤 선택들이 있는지 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의료 치료는 일반적으로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점잖게 떠난다.
물 론 의사들도 죽고 싶지 않아 하고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 의학을 잘 알고 있고 그 한계도 알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고통 속에서 홀로 죽어가는 것임을 알 정도로 죽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점을 두고 의사들은 가족들과도 함께 얘기를 해왔다. 그들은 때가 되면, 어떤 영웅적인 조치도 취해지지 않기를 분명히 해두고 싶어한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가 자신을 심폐소생술(CPR)로 살리기 위해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일(심폐소생술을 제대로 하면 일어나는 일)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길 원한다.
거의 모든 의료전문가들이 사람들에게 행해지는 소위 “헛된 치료”를 목격해 왔다. 의사들이 임종에 이른 중환자들에게 첨단기술을 사용하면서 하는 치료가 그것이다. 환자는 수술을 받고 튜브를 삽입하고 기계에 매달려 약물 세례를 받는다.
이 모든 것이 하루에도 수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중환자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돈으로 산 것은 테러리스트에게 물을 수도 없는 비참함이다.
동료 의사들이, 말은 조금씩 다르지만, 얼마나 자주 내게 이런 얘기를 했는지 모른다. “내가 만약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면 차라리 나를 죽여주겠다고 약속해 줘.” 어떤 의료인은 자신에게 심폐소생술(CPR)을 하지 말라는 뜻을 새긴 메달을 갖고 다닌다. 나는 심지어 문신으로 새긴 사람도 보았다.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의료처치를 한다는 것은 고민스런 일이다. 의사들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정보를 모으도록 훈련을 받아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있으면 “가족들이라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토로할 것이다.
나는 의사들이 다른 분야 전문가들보다 과음하고 우울증 비율이 높은 이유 중의 하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환자들을 돌본 지난10년 동안, 내가 병원 처치에는 참여하지 않은 데에는 그러한 이유도 있었다.
어떻게 의사들은 스스로에게는 원하지 않은 치료를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이 행할 수 있는가? 단순하지만, 또는 그리 단순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해답은 이것이다. 환자, 의사 그리고 시스템에 있다.
환자들이 하는 역할을 알기 위해서 누군가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온 장면을 떠올려보라.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누구도 이러한 상황을 계획한 것이 아니다. 충격을 받고 놀란 가족은 미궁과도 같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주눅들어 있다. 의사가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좋다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악몽이 시작된다.
때때로 가족이 “모든 것을 해달라”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종종 “합리적인 모든 것을 해달라”라는 의미이다. 문제는 무엇이 합리적인 것인가를 그들이 모를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들은 혼돈스럽고 슬픈 나머지 그런 것을 묻지도 못하고 의사가 해줄 수 있는 말을 듣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한 의사들로서는 그게 합리적이든 아니든 간에 그렇게 할 것이다.
Resuscitate (소생하다)
이상의 시나리오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이 문제를 심화시키는 것은, 의사들이 해낼 수 있는 것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폐소생술을 의지할만한 구명조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대개 그 결과가 좋지 않다.
응급실에 있을 때 나는 심폐소생술을 거친 후 내게 데려온 수백 명의 환자를 보았다. 딱 한 사람, 전혀 심장 문제가 없었던 건장한 남자(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긴장성 기흉”이었다)만 병원을 걸어서 나갔다. 만약 중병이면서 나이가 많거나 말기환자라면 심폐소생술로 좋은 결과가 나오기가 극히 어렵다. 오히려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지식의 부족과 잘못 방향 잡은 기대가 많은 그릇된 결심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것은 환자만이 아니다. 의사들도 권한 있는 역할을 한다. 어려운 점은, 헛된 치료를 행하기 싫어하는 의사조차도 환자와 가족들의 소원을 들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응급실은 히스테리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슬픔에 젖은 가족들로 차 있다. 이들은 의사를 모른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뢰와 믿음을 구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의사가 시간이나 돈이나 노력을 절감하는, 기본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리라고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다. 특히 의사가 더 이상의 치료에 반대하는 입장을 권하고 있다면. 어떤 의사들은 다른 의사들보다 커뮤니케이션에 능하다. 또 어떤 의사들은 매우 단호하다. 그러나 의사들이 직면하는 압박감은 비슷하다.
나는 임종 시 선택을 해야 하는 환경에 처했을 때, 내 생각에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만 가능한 치료 초기에 제시하는 방법을 취했다. 환자나 가족들이 비합리적인 선택을 제기했을 때 나는 일반인들이 알기 쉬운 용어로 그 이면을 분명히 설명해주곤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의미 없거나 해로운 처치를 환자나 가족이 계속 고집한다면 다른 의사를 소개하거나 병원을 옮기도록 제안하곤 했다. 때때로 내가 더 강한 입장을 취했어야 했을까?
내가 이전(移轉) 조치를 내린 결정 중 몇몇이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환자 중의 한 분은 명문 가정의 변호사였다. 그녀는 당뇨가 심했고 순환계가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땐가 발에 고통스런 상처가 심해지게 되었다. 병원의 위험에 대해 알고 있던 나는 그녀가 수술을 피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문가들을 찾고 있었다.
그 녀에 대해 나만큼 알지 못하는 전문가들은 만성 폐색을 일으키는 두 다리에 바이패스(우회)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수술은 혈액순환을 회복시키지도 않았거니와 수술한 상처도 치유되지 않았다. 그녀의 발은 썩어 들어갔다. 그녀는 두 다리 절단 수술을 해야만 했다. 2주 후,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그 유명한 병원에서 그녀는 사망했다.
이러한 얘기 속에서 의사나 환자의 과실을 찾기란 쉽다. 그러나 많은 경우, 모든 당사자가 과잉 진료를 권장하고 있는 더 큰 시스템의 희생자일 뿐이다. 어떤 불행한 경우에는, 의사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 위해 “진료행위별 지불” 모델을 이용한다. 그것이 아무리 의미가 없다 할지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러나 더욱 일반적인 것은, 의사들은 소송이 두려워 요청되는 것은 뭐든지 한다는 것이다. 거의 피드백도 주지 않으면서 곤경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절차를 제대로 했다 하더라도 시스템은 여전히 사람들을 삼킬 수 있다.
내 환자 중의 한 분은 잭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78세인데 몇 년 동안 병을 앓았고 15차례나 큰 수술을 받았다. 그는 나에게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다시는 생명 연장 장치에 맡기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느 토요일 잭은 심한 뇌졸중으로 의식을 상실한 채 아내도 없이 응급실에 실려갔다. 의사들은 그를 소생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했고 그를 중환자실에 입원시켜 생명 연장을 하였다. 이는 잭에게는 너무나 나쁜 악몽이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하여 잭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의 당부가 적힌 내 사무실 노트를 가지고 와서 그의 아내와 병원 스태프에게 말했다. 그리고 생명 연장 장치 가동을 멈추고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두 시간 후 사망했다. 잭은 자신의 소원을 문서화했지만 희망한 대로 죽지 못했다. 시스템이 관여했던 것이다.
간호원 중의 한 분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잭의 장치를 뽑아 살인 가능성이 있다며 당국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 이후 아무런 일이 없었다. 잭의 소원은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잭은 그것을 증명하는 서류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예상되는 경찰 조사는 어떤 의사에게도 공포스럽다. 내가 쉬우려면 잭의 소원에 반하여 그를 생명 연장 장치에 맡겨두어 그가 몇 주 더 고통을 받게 할 수도 있었다. 아마 나는 돈도 더 벌었을 것이고 의료비로 50만 달러 정도가 청구되었을 것이다. 많은 의사들이 과잉치료의 측면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래도 자신들을 과잉치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결과들을 끊임없이 보고 있다.
거의 누구나 집에서 평화로이 죽는 방법을 찾을 수 있고, 통증도 이전보다 더 잘 다스릴 수 있다. 헛된 치료를 하기보다 임종 환자들에게 편안함과 존엄성을 제공하려고 애쓰는 호스피스 간호는 대부분 더 나은 임종을 맞게 한다.
연구에 의하면 놀랍게도 호스피스 간호를 받는 환자는 적극적인 간호를 찾는 같은 질병의 환자에 비해 더 오래 산다는 것이 밝혀졌다.
나는 최근에 라디오에서 유명한 리포터 탐 위커가 “집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다. 감사하게도 그러한 얘기들은 점점 흔하게 들리고 있다.
몇 년 전 나의 사촌형 토치(집에서 횃불 아래서 태어나서 붙인 이름이다)가 발작이 왔는데 폐암이 뇌로 번진 것임이 판명되었다. 나는 그에게 여러 전문의를 주선해 주었다. 우리는 화학요법을 위해 일주일에 3-5회 병원 방문을 하는 등 공격적으로 치료하더라도 4개월 정도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토치는 어떤 치료도 거부하고 뇌부종 약만 복용하였다.
그는 이사하여 나와 함께 지냈다. 우리는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8개월을 지냈다. 수십 년 동안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을 함께 누리면서. 우리는 디즈니랜드에 갔는데 그는 처음이었다. 우리는 집에서 놀았다. 그는 스포츠 팬이었다. 내가 해준 요리를 먹으며 스포츠 보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는 심한 통증이 전혀 없었고 늘 활기가 넘쳤다.
어느 날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삼 일 동안 뇌사상태 환자처럼 잠을 자더니 세상을 떠났다. 8개월 동안 그의 의료비용은 복용하고 있던 약값뿐이었는데 20달러에 불과했다.
토치는 의사가 아니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은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임을 알았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아니한가?
만약 최첨단 임종 간호가 있다면 그건 바로 존엄사이다. 나로서는 내 의사가 나의 선택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의사들에게 하듯이 쉽게 해줄 것이다. 어떤 영웅적인 것도 없이 그저 굿나잇의 세계로 나는 점잖게 떠날 것이다. 찰리처럼. 나의 사촌 토치처럼. 그리고 나의 동료 의사들처럼. ----- “타임” 誌 2014. 9. 2일호에 게재된 이 글의 저자 켄 머레이(Ken Murray)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 (UCLA)가정의학과 임상 조교수이다.
원제 : Why Dying Is Easier for Doctors 번역 : 고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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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하~ 동감입니다. 시아버님 돌아가실 때 주변의 환자가족들이 몇년씩 호흡장치달고 집한채 날렸다고 한탄하는 걸 보면서 절대 목에 구멍뚫지 말아야겠다 싶었습니다. 아버님은 뇌부종으로 보름간 의식불명으로 있다 돌아가셨지요. 저도 자연스럽게 죽기를 언젠가부터 강하게 소망하게 됩니다.
친정아버지도 칠개월간 집에서 누워계시다 어머니 옆에서 기도가운데 가셨구요. 요양원에서 십여년간 누워있다 가는 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에이미님은 나이완 상관 없이 정신연령이 높아서 죽음에 대해서도 앞서 생각함이 남다릅니다.ㅎ
저는 만일에 이상이 있어 의사를 찾았다가 암이라 한다면 두어군데 더 다녀 확인한후 아무 치료도 받지
않을것입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긴데 암이란 죽을 준비를 하게 해주는 착한 병 이라는말을 머리속에 기억해두고 있습니다.
제가 소개한 위 책의 저자는 오랜세월 임상경험에 의하면 진짜암 일경우 오히려 방치하는것이 수명을 연장
하며 실제로 죽기 얼마전까지도 가벼운 운동과 산책도 가능 남들과 똑같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지막때는 고통을 줄이는 몰핀 투여와 하스피스 신세를 지며 평안한 죽음을
@토기그릇 맞을수 있다고 합니다.
제약회사와 병원,의사, 들의 삼각관계를 폭로하면서 조기 검진,그리고 수술과 독한 항암제로 수명을 단축
시키지 말라 경고 합니다.
저도 '필요 이상의 (결국 불필요한) 생명 연장 의료행위'는 반대하여 '존엄사'를 지지하는 편입니다마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인즉슨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결코 '영웅적'이지는 못해도 (비교적?) 의연하게 죽음을 맞고 싶습니다.
998834는 한국 사람들이 바라는 죽음의 유행어라고 합니다.
제가 세번씩 읽은 매우 유익한 정보들이 담긴 책을 소개 합니다.
[의사에게 살해 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 "암 검진과 수술 함부로 받지마라!"
저자 : 곤도 마코토 제 60회 기쿠치간상 수상, 더난 출판사 발행.
[환자를 상품으로만 취급하는 현실에서 자신보다 환자를 더 사랑한 의사의 진심어린 고백을 담고 있다.
과잉 진료로 이어지는 조기암 진단이나 건겅 검진에 현혹되지 않도록 의학 상식을 넓혀줄뿐만 아니라
병원과 약을 멀리 함으로서 건강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항암제는 효과가 없다"
"건강 검진은 백해 무익하다"
"암은 원칙적으로 방치하는 편이 좋다"]
저자는 일본 유수의 병원에서 암을 치료해온 전문의로 대표적인 주장을 꼽자면
"항암제는 독이고 암 치료는 고통만을 가중 시킬뿐이다" 합니다.
흔히 암을 조기에 발견해 나았다던가 수술과 치료로 나았다는 사례들을 보는데 그것은 유사 암 이었을뿐
진짜 암은 현대의 어떤 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한다 입니다.
기존의 생각을 바꾸게한 eye opening 책이었습니다.
@토기그릇 9988234에 2를 빠뜨리셨군요. 그런데 9988234에도 버젼이 여럿있습니다. 이삼일 앓다가 죽는 것 부터 이삼주는 물론이고 두세달, 아니 이삼년 앓다가 죽는 것까지... 그런데 (끝 글자 죽는다는 4대신) 9933231은 이삼일 앓다가 일어나 100세를 마저 채우고 죽는다는 것이라네요. 그리고 9988234에도 죽을사(死) 대신 23세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나 어쩐다는 것 까지요. 그나저나 저는 9988은 커녕 8899할까봐 요즘 헬스 클럽데 다니고 있습니다. 88세일 망정 구질구질하게(99의 뜻임) 살게될까봐서요.
@토기그릇 저는 '병원'이라는 말을 '병이 모여사는 집'으로 읽은지가 이십여 년입니다. 달리 해석할 아무런 문자적 근거가 없습니다. 우리 후세들은 '병원에서 나서 병원에서 죽는' 삶을 이미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일은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고전15 : 55 기록은,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그물에 걸려 떨어질 때 그 그물을 찢고 하나님께로 날아 올라가는 장쾌한 순간을 증언하는 것임을 2005년11월26일 오후4~5시쯤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그 기이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감사합니다.
@느디님 느디님님의 해설 재밋습니다.
근데 늙으면서 목욕 자주하고 가꾸는걸 멀리하면 구질구질이 배나 더할것으니
요 부분을 저는 더 신경쓸겁니다.ㅎ
@세힘 저의 시아버지가 별것 아닌것으로 병원에 들어가셨다가 병원균 전염으로 인해 다리를 두번씩 자르시게 되고
그로인한 고통이 가중되 6개월만애 돌아가셨습니다.
미국사람들도 의사를 멀리하는게 오래사는 방법중에 하나라 합니다.
툭하면 의사 찾아다니는 사람들보면 딱히 문제가 있는것도 아닌데 그리 건강해보이지도 않고
젊은날 벌어 모아둔 돈들을 노후엔 의사에게 갖다 바치는 생활로 남은 여생을 저당 잡힌듯 합니다.
@토기그릇 생각해보면, '사람은 왜 죽는가?'라는 존재론적 의문에 대해 진리 자체이신 '기록된 말씀'이 가르치시는 바를 충분히 그리고 바르게 전하지 못하는 것도 한 원인이지 싶습니다. 단순히 '죄 때문에 죽는다'는 대답은 그야말로 원론적인 것이고 '사람은 죽지 않는다'데까지 이르러야 '산 자의 하나님'과 '영원한 속죄'도 아우를 수 있게 될 것이고, 그쯤가면 고전15장55절의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대목에서 괄목상대刮目相對 경험이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병원病院'이라는 어휘는 '병집' 말고는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습니다. '병고치는집' 이런 의미를 갖는 다른 어휘를 찾거나 만들어야 합니다.
@세힘 병원.. 병집..듣고보니 그렇군요.
토기그릇님이 올리신 이 글은 평소 병원에서 일하시는 하토브님이 주장하시는것과 같습니다.
전에 위내용같은 글을 하토브님이 올리셔서 저도 가끔 제마음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집에서 죽게 해 달라고.
제 죽은모습이 넘 아름다워서 자녀들이 남편님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다시한번 뵙게 해 달라구..ㅎ.ㅎ.
좋은글 감사합니다.
예, 저도 병원이 아닌 집에서 평안하고 아름다운 마지막을 맞게됬음 좋겠습니다. 할말 다하고..ㅎ
임종을 앞둔 호스피스 병동은 가장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이자 영, 혼, 육의 터미널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인어른(병동전도), 아내(전 호스피스병동 간호사), 이모(호스피스), 어머니(호스피스 자원봉사) 4명이 하나 같이 이야기 하는 바는 마지막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분초를 다투는 복음전파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호스피스이신 이모님도 림프계열의 암에 걸려 3년을 치료받고 거의 완치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앙대 의료원 교수로 있는 이종사촌 누이가 조기 발견을 해주어 치료가 가능했는데 병문안차 가면 누나왈, 의사도 말기에 발견되면 별 조치 방법이 없고 동료 교수들도 큰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임종으로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외할머님의 임종이었습니다. 제가 초등4년때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는 당일날 가장 기뻐하셨던 것은 가족의 눈에는 안보이는 흰옷입은 3명이 찾아와 유언을 마칠 수 있도록 기다렸고, 한명은 머리맡에, 두명은 이어서 온 다른 3명(?)을 엄히 꾸짖고 돌려보낸 것, 할머니는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와 만주에 사실때 5세된 아들을 잘 돌보지 못해 죽은 아들을 집에 놓아두고 도망쳐 나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신후에도 이것이 평생의 한이었는데 외할머님의 머리맡에 있던 분왈, 아들은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한 말에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보았더랬습니다. 마지막까지 유언하신 것은
일곱 사위들의 거듭남, 이모들간의 형제사랑, 손주들에 대한 믿음의 당부였습니다. 어머님이 몸이 약해서 제가 태어난 후 5세 삼촌을 먼저 보낸 아픔으로 정말 저를 딸의 아들이자 당신의 아들처럼 키워주셔서 아직까지 외할머님의 임종은 가족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린 외삼촌, 어머니 태중에서 하늘로 다시 돌아간 형을 나중에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익투스 할머니와 어머니 속에 있는 믿음이 디모데 속에도 있게된것처럼 익투스님의 신앙도 조모님으로부터
먼저 시작된 복인가 합니다. 저도 제 임종이 다른 남은이들에게 특별히 기억되는 사람이길 간구 해야겠습니다.
정말 공감이가는 글이네요.....
저도 가끔씩 예배 드리는 가운데 부름을 받았으면 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