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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필, 지금 어디 쯤에 있는가.
이동민
어느 시대이건, 어느 분야이건 그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가 있다. 어느 가치이든 변하지 않고 고정 되어 있는 것은 없다. 시대가 바뀌면 가치도 바뀐다. 그렇다면 오늘을 지배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명작으로 알려진 작품은 그 시대를 잘 반영하였다는 평을 듣는다. 우리 수필은 오늘의 가치를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우리 수필이 옛날에 갇혀 있어 오늘을 표현하는 데는 미흡하다는 생각이다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새로움을 추구한다. 움직임이 없으면 변화가 올 수 없고, 변화가 없는 것이라면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즉 죽음이란 뜻이다. 우리 수필이 이런 상태가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
주변의 수필가를 만나보면 하나 같이 우리 수필도 변화가 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목소리를 내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로 독자가 없는 글이라는 자책이 있다.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어떻게 글을 써야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지의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들고 나오는 수필이론가는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의 여러 문화 교실에서 수필을 가르치는 사람을 수필문단의 지도자라고 한다면, 이들은 캐캐묵은 지난 이론을 작년에도, 금년에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한다. 되풀이, 되풀이 하다 보면 글쓰기의 법칙으로 고정되어 버린다. 법칙이라면 매뉴얼이다. 매뉴얼이 되면 지키지 않는 그 자체가 잘못이다. 수필쓰기도 매뉴얼 화 되어버리면 수필평에서 글의 내용이나, 형식이 아닌, 매뉴얼에 충실하였는가의 여부가 좋은 글과 나쁜 글로 나누는 잣대가 된다. 매뉴얼에 갇힌 수필은 움직임이 없으므로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 살아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없다.
문학은 예술이고, 예술의 특성은 상상력이다. 메뉴얼에 갇혀 버리면 상상력이 활동할 영역이 없어져 버린다. 미술은 손재주를 필요로 하는 예술 분야이다. 손재주를 익히는 훈련을 하는 것이 미술 공부의 기본이었다. 미술 지망생은 아주 일찍부터 댓생을 한다. 그러나 댓생이 손에 익어버리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다 하여, 댓생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추세이다. 미술대학 입학시험에 실기(댓생)를 하지 않는 곳도 있다. 수필 교실에서 문장 배치법까지 따지면서 가르치는 것은 미술의 댓생을 실습시키는거나 다르지 않다. 작가의 상상력을 뻬앗아 가는 수업법이다.
또 하나는 수필 교실 운영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문학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국어를 가르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수필은 문학이다. 언어라는 방법을 통하여 표현되는 예술이다. 국어는 언어를 언어이게 하는 것으로 수필을 실어나르는 수레이지 수필이 아니다, 문학강의에서는 수레인 국어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문학이 더 우선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수필 지도 선생님 중에 문학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문학이 국어에 봉사하도록 하는 분도 계시는 것 같아서 노파심에 질문해 보았다. 내 생각으로는 국어는 부수적인 것으로 주인인 문학에 봉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수필가가 변화된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가. 그런 수필가를 만나는 일도 어렵다. 변화를 시도해보려면 수필가는 우선 많이 알아야 한다. 다른 작가의 글을 많이 읽고, 문학이론도 많이 공부해야 한다. 문학이론만이 아닌 국어도 물론 알아야 하고, 다른 분야의 예술이론도 공부해야 오늘의 우리 수필이 어느 위치에 머무는지 알 수 있다. 많이 알아야 우리 수필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할지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 수필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다. 수필 평에 작가의 마음에 들지 않는 평을 하였다고 하여 쌍말로 욕질을 하였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작가와 비평가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예전부터 있어 온 역사적 사실이다. 재미 있는 사실은 악평을 받은 작품은 예술사에서 살아 남았고, 악평을 한 비평가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경우는 작가가 새로운 시도를 하였고, 비평가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평하였다. 즉 매뉴얼에 얽메여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수필이 최근에 겪은 현주소는 작가가 매뉴얼(수필이론)에 맞추어 글을 썼다고 거칠게 항의하였다니, 이제는 비평가가 함부로 새로운 방향의 제시라면서 입을 떼려면 용기가 있어야 하겠다. 작가는 비평가의 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꽁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비평가의 생각일 뿐이다. 비평가의 글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자기의 길을 찾아나서는 일은 더더욱 어려워 진다. 악평에 화를 내지 말고, 작가가 변화를 추구한다면 내 방식대로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수필 평을 하는 분들이 오히려 우리 수필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적어도 수필평자라면 수필이론은 물론이고, 타 장르 예술의 많은 이론도 섭렵하여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공부를 많이 하여 안목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만이 전통적인 수필이론에서 벗어나는 글도, 즉 메뉴얼에 의거하여 쓰지 않은 글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수필평을 한다면서도 타인의 수필을 읽지 않을뿐더러 예술론에 관한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내 경험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수필 평자가 이런 사람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하다. 공부하지 않는 평자가 어떻게 좋은 평을 할 수 있을까. 이런 분일수록 자기가 아는 짧은 이론을 금과옥조로 과신하면서, 그 이론에 조금 어긋났다고 하여 지나친 악평을 하는 것을 더러 보았다.
또 하나는,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문학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문학모임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모임 자리에서 서로의 글을 평하는 일을 한다. 내 경험으로는 이런 자리에서는 모임의 원로 문인이 평을 주도하였다. 그 분의 평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반대의 의견을 내지 못한다. 일반론적인 말을 하자면 원로라는 말은 보수성이 강하다는 뜻이다. 이분들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부적절한 평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자리일수록 새로운 주장이 나와야 하고, 새로운 주장을 두고 토론이 있어야 하지만, 내가 수필문학 단체에 참여하였을 때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다를까? 어느 분이 내게 말했다. 우리 모임에서는 한 분만 떠들고 다른 분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합니다. 이런 분위기를 벗어나서 달라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데도, 들리는 말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고 하였다.
이 정도는 그래도 좋은 모임이다. 아예 문학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 모임도 있다. 모여서 밥이나 먹고,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나 나눈다. 심지어는 모임이 활성화되려면(활성화의 의미가 모임에 참여도가 높다는 뜻) 문학 이야기 같은 골치 아픈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고 하는 말도 들은 일이 있다. 이런 문학 모임이라면 문학 모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만들 필요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진다.
수필가 분들 중에 간혹 글쓰기보다는 자신의 명예욕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수필가라는 명분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이라면 지나치리만큼 감투에 집착한다. 감투라는 것은 명예만을 따먹는 자리가 아니고, 봉사를 전제하는 일꾼의 자리이다. 그런 분들의 글을 찾아보기는 아주 어렵다. 명함에는 화려한 감투들이 장식을 많이 하여 눈이 부시다. 이런 분들이 어떻게 수필의 미래를 이끌어 간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수필 전문지이다. 1980년 대에는 우리나라에 수필 전문지가 4 종류(?=수필문학, 한국수필, 수필공원, 수필?.) 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때는 잡지를 발행하시는 분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등단제도를 통해서 작가를 발굴한다는 책임 의식이 있었다. 그래서 등단을 했다면 주변에서 수필작가로 인정해주었다. 그만큼 잡지를 발행하시는 분이 수필문단에 끼친 공로가 있었다. 반대 급부로 이분들의 횡포도 있었다. 횡포 중의 하나가 자기의 잡지를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꼽자면 문학상을 만들어서 작품의 질이 아닌 다른 잣대로 상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릴 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내가 수필 전문지를 좋지 않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의 잡지 발행인이 예전의 발행인들의 좋은 점은 배우지 않고, 나쁜점은 그대로 뻬 닮았기 때문이다.
수필잡지는 나름대로 수필론과 평을 싣는다. 수필론과 평을 담당하시는 분에 대해서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 수필전문지가 하나씩, 하나씩 태어나기 시작했고, 2000년 대가 지나면 수필전문지는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수필전문지가 많아진 만큼, 잡지 경영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수필잡지 발행인은 등단제도를 수필가의 발굴보다는 잡지 경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운영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직 수필 교실에서 공부 중인 수필가 지망생에게 등단이라는 과일로 유혹하는 일도 있어서, ‘입도선매’라는 말도 떠돌았다. 결과로 수필가의 수필이 수준미달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말해진다. 이런 이유로 대구문학지도 예전보다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말도 들린다. 오늘의 우리 수필이 문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책임 소재를 따진다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수필잡지 발행인도 꽤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필지가 너무 많이 발행되어서 숲을 이룬다. 수필지는 수필가에게 더 넓은 발표의 지면을 제공함으로 수필인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지면의 제공도 발행인이 자기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시혜를 베풀 듯이 제공함으로 대부분의 수필가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발표 공간이 많으니------, 이라고 하겠지만 수필지마다 쏟아내는 수필가의 숫자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 잡지는 그 잡지 출신의 수필가의 글도 수용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다. 수필가의 입장에서 잡지 수가 많다고 발표 지면이 넓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수필잡지를 통해서 수필이론이나 평을 담당하는 사람이라도 자기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수필이론을 담당하시는 분은 한국 수필의 미래를 이끌어 갈 책임을 짊어지신 분이다.
수필가에게 질문을 해보자. 당신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수필이론가는 누구입니까. 대부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 누구 라면서 이름을 대는 수필가도 있다. 대부분이 그 분의 수필론보다는 교수로서 이름이 알려진 분이고, 자기와 관련이 있는 잡지에 글을 싣는 분들이다. 그 분들이 어떤 주장을 하였는지를 질문해 보면 대답을 머뭇거린다. 사람은 떠오르는데 그 사람이 내 세운 주장이 생각나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글을 썼다는 것이다.
수필론이라며 고정된 어떤 논지의 글로서, 이 평자나 저 평자가 같은 논리의 글이라서 구별되지 않는다면, 수필이론가라는 단어가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 수필론을 읽을 때도 외부적인 여러 요인들을 없애고, 수필론 자체만으로 읽고, 수필론의 내용이 떠올라야 한다. 외부적인 요인이란 교수라는 직책, 사회적인 명성, 내가 읽는 수필지의 앞 부분에 거창한 논지의 글을 자주 올리는 사람 등등의 요인을 모두 없애고 글만 읽고, 글의 내용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론이라고 하여 법전의 법률처럼 반드시 지키기를 강요하는 논지인 것은 아니다. 같은 사항을 두고 얼마든지 다른 이론으로 쓰여질 수 있다. 수필이론가마다 다른 논지의 글을 발표하였다면, 그 논지는 이론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그 분만의 주장을 펼친 글이 생각나지 않는 수필이론가라면 이 또한 개성 없는 글을 쓰는 평자이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수필문단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 보았다.
평론이 왜 문학의 장르인가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예전에 읽은 글인데, 소설에서도 신경숙의 ‘외딴방,과 박완서의 ’그 많던 싱가를 누가 모두 먹었는가.‘를 비교하면서, 소설에서도 자기의 경험을 얼마나 솔직하게 표현하느냐가 독자의 관심을 끄는 관건이 된다는 이론 글을 읽고, 깨우친 점이 많았다. 나는 수필을 쓰면서도 나의 경험을 솔직하게 쓰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를 생각해 보았다.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열등감, 수치심 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극복할 수 있을까. 심층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무의식에 잠재 되어 있는 것들은 극복하기 어렵다고 배웠다. 수필론의 첫째가 사실을 글을 쓰자는 것이다. 수필 이론을 지키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몸으로도 느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대신하여 ’진실‘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진실론‘은 나의 수필이론에서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솔직하게 쓰도록 노력은 하자. 그래도 미흡한 부분은 진실론으로 메꾸자가. 지금까지 내가 지켜온 수필론이다.
수필가는 ’누구‘라고 이름을 대면, ’아, 그 작가는 표현을 지나치리만큼 감성적으로 미화하여 글을 쓴다.‘라든지, ’서정성이 강하다든지,‘ ’또는 소설처럼 써서 재미가 있더라.“ ‘단수필을 맛깔나게 쓰는 작가’ 등등의 형용사가 붙는 작가가 더러 있다. 글이 좋으냐, 그렇지 않느냐를 떠나서 개성이 드러나는 글을 쓰는 작가이다. 내가 몇 작가를 소개하였지만 수필문단의 반향을 느끼지 못했다.
수필이론가의 개성 있는 주장은 생각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나는 이 이론가나, 저 이론가나 천편일률적으로 수필이론서에 나오는 내용을 베껴와서 앵무새처럼 반복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기의 목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유형을 보여주는 이론가도 있다. 자신의 평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 이론가의 주장을 소개하는 글이다. 지식을 넓히는 데는 도움이 되는 내용이지만 수필가의 글쓰기에는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까. 유명한 문학인의 이론서에 실려 있는 개념어를 그대로 가져와서 자기가 평하는 작품에 적용하여 글을 쓰는 경우는, 자기 지식의 과시는 되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개념어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글을 올바르게 읽을 수 없다. 글을 쓴 저자만이 이해하는 용어로 글을 평하는 사람도 바람직한 수필평론가는 아니다. 의미의 전달은 이해하였을 때라야 가능하다. 수필작가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평글을 써주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독자의 이해는 도외시하고,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여 글을 쓰는 사람이 이외로 많다.
작품 평에 기존의 문학이론을 가져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평글을 읽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쓰자는 것이다. 철학을 발표하는 형식의 글이 에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평자들은 평글을 너무 어려운 말로 표현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수필을 비난하는 위치의 사람은 수필 평론가들이다. 백보 양보를 하더라도 우리 수필에 비난만 퍼붓고, 비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은 제시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수필 평론가도 우리가 ‘누구’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 떠올라야 한다. 일반적으로 수필에서 작가의 개성을 주장하듯이, 수필 평론가도 교과서적인 내용만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례사적인 평글을 쓰기도 한다. 이런 평글은 대체로 수필집에 많이 실려 있다. 수필집의 글을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주례사적인 평글이더라도 평한 글을 읽은 독자가 수필집을 읽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는 내용이라면, 본래의 취지를 이루었으므로 좋은 글이 아니냐는 논설을 읽은 일도 있다. (원글은 미술도록에 실린 미술평을 논하는 논문이었다.) 그 논설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수필의 미래를 이끌어 가는 일차 책임은 수필가에게 있지만 수필 평론가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다. 수필 평론가는 우위의 위치에서 내려다보면서 비난하고 꾸지람만 할 것이 아니라 활로를 열어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수필가는 수필이론가들이 제시한 방향으로 글쓰기를 시도함으로 침체된 우리 수필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평을 할 때 수필읽기에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해 왔다. 재미를 일으키는 여러 요소들을 나름대로 찾아보고, 또 글로 발표도 했다.
내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잘 쓴 글이라고 평한 작가의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내 주장이 수용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