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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이가 장로회 신학 대학교를 입학했기 때문에 서울 가까운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 갈현교회로 이사를 갔다. 짐 보따리는 화물로 붙이고 첫째(대성), 셋째(미옥), 넷째(미정)는 고향 어머니께 맡기고, 둘째(계성)와 2개월 된 막내(철성)를 데리고 차를 타고 가는데 둘째는 차안에서 이마에 홍역 꽃이 돋아나고 있었다. 갈현교회에 도착하고 보니 교회는 선교사가 말 타고 들어와 세운 교회라고 하는데, 벽은 수수깡에 흙을 버무려 붙여 만든 옛날 집이고 그것이 구멍이 나니 판자때기로 막아 검은 골탕 칠을 해 놓은 허술한 예배당이었다. 사택은 흙담집으로 두텁게 지은 방 한 칸에 부엌 하나였는데, 나는 연탄을 처음 때 보는 일이라, 날마다 꺼트리고 역시 부엌 고생은 내 팔자구나 생각되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축축한 화덕 밑바닥이 너무 얕아서 그랬던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미련하게 고생을 사서 한 것 같았다.
여기는 또 임진강 둑을 철조망으로 경계한 서부 전선이라 밤낮 없이 악을 쓰고 떠들어 대는 대남 방송이며, 대포 소리며, 총소리가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자고 나면 옆집 아줌마의 이야기가 ‘어젯밤에는 이북에서 쏜 총알이 벽을 뚫고 들어와 자고 있던 가족이 부상을 당했대.’
"왜 대포 소리, 총소리가 계속 나요?"
"여기는 연습도 하고 진짜 그쪽에서 쏘기도 하고 항상 그러니까 우리는 예사로 들려요."
했다. 전기 불은 정미소에서 자가 발전해서 밤 11시까지만 들어오는데, 밤 예배만 마치면 찾아오는 모임 패들, 그들은 모였다면 빙 둘러앉아 성경 읽기를 했다. 읽고 은혜 받는 일이라면 좋은데, 이들의 목적은 전도사 테스트가 목적이었다. 이튿날이면 학교를 가야 할 피곤한 전도사를 붙잡고 성경을 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이는 책을 펴지 않고
"말씀해 보세요."
하면 전도사가 교만하다고 질책이 쏟아졌다. 낮이면 개인적으로 나를 찾아와 괴롭혔다.
"사모님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시작하여 성경을 펴 가며 질문을 해 댔다. 나는 적절한 대답의 요절이 어디에 있는지 당황할 뿐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모태 신앙인 나는 습관적으로 예배 시간만은 빠지지 않고 주로 맨 앞자리에 가 앉아서 예배를 드렸을 뿐, 성경을 정독해 읽어보지 않았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성경을 읽으라는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들에게 창피 당한 것을 생각하면 자존심도 상하고, 그래서 나는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성경책은 줄줄이 빨강, 파랑, 노랑 줄을 처 놓고, 또 은혜 받으면 또 처 놓고, 그러다 보니 그들의 성경책은 완전 칼라 판이 돼 버렸다. 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보니, 직전 전도사님이 10년을 시무 해 오다가 하루는 ‘세미나’를 갖다 오더니 ‘내가 지금까지 예수를 잘못 믿었다. 이제부터는 이렇게 믿어야 한다.’며 가르친 것이 바로 구원파 본산지가 된 것이다. 그들은 그때 극동 방송국에 권신찬 목사 설교만 나오면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 그것이 예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교회의 직분도 다 배제하고 성만 따서, 예를 들면 김 자매, 이 자매, 박 자매로 남녀가 다 자매로 호칭이 붙여진다. 마치 이북에서 성만 붙여 동무로 통하는 것과 같았다.
그들의 예배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가운데 앉혀 놓고 빙 둘러앉아 돌아가며 성경을 읽다가 가운데 앉은 사람이 듣고 감동이 되는 구절이 들려지면 손을 번쩍 들고
"나 구원받았습니다."
했다. 그러면 그 시간을 구원받은 년. 월. 일. 시로 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성 교인들을 만나면 첫 마디가
“구원받았습니까?”
머뭇거려도 지옥 자식으로 간주하고,
“구원받았습니다.”
하면 구원받은 년. 월. 일. 시를 대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기들 외에는 다 지옥 자식인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 속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단 번에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에겐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정죄 하지 않고 다 도말 해 주시고 의인이라 칭하셨다. 그러므로 한 번 회개와 믿음으로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율법을 폐하러 오신 주님이라고 말하며 세상 지식, 학문, 철학은 마지막 때에 다 불살라 버리겠다고 하셨는데 바로 지금이 그때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초등학교 다니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현상들이 발생했다. 사택에 들어오면 전도사님 신학 서적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게 다 세상 철학, 율법이라는 것이다. 주보도 없는 시골 약한 교회에서 예배 순서를 전도사님이 종이에다 써서 예배 인도를 했는데, 바람에 날렸는지 그들이 주워 가지고 나에게 와서 또 항의를 했다.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바로 순서, 즉 율법에 매이는 거예요.”
어느 주일 날 아기를 업고 서성이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주일 학생을 가르치는 남자교사-그들이 말하는 임 자매-의 설교 소리가 너무도 거슬리게 들려 왔다.
임 선생 : “목사, 신학생은 다 지옥 자식들이에요. 그리고 학생들! 성전이 어디에 있어요?”
학생들 : “내 맘속예요.”
임 선생 : “그렇지요! 이 집은 집‘당’자 예배하는 집이에요.
그런데 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여 치장을 하는 잘못된 사람들이 있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장하는 그들은 지나치게 마음의 성전만을 주장하여 교회 벽이 허물어져 구멍이 나도 수리도 하지 않고 청소도 하지 않았다. 나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교회로 들어가 ‘내가 설교를 하겠다.’ 고 했다. 그랬더니 임 선생은
“학생들! 사모님이 가르치는 것이 좋아요?, 내가 가르치는 것이 좋아요?”
하며 물었다. 학생들은 물론 늘 가르치고 정든 임 선생을 택하지 이사 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생소한 나를 택할 리가 없었다. 사건은 발생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예배 시간, 설교 도중에 이북이 고향인 남자 박 집사가 혈기 등등하여 칠판을 끌고 앞자리로 나가더니 십자가를 그려 놓고 설명을 해댔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서 이쪽은 사망, 저쪽은 생명, 생명으로 옮겨진 우리가 왜 또 회개해야 하나요? 부흥 강사들한테 귀에 젖도록 들었는데,"
하면서 너무 혈기가 나서 분필이 딱딱 부러져 떨어진다. 이 말을 다 듣고 난 전도사님(남편)은
“이렇게 다투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면서 예배를 마쳤다. 60년 된 교회가 서울 서 노회에서 약간의 보조를 받고 있다가 그 꼴이 되니까 보조도 끊기고 교역자도 자매가 되었으니 생활 대책이 없어 떠나 버리고 예배드리는 날이면 그냥 빙 둘러앉아 그 짓들만 하고 있었다.
장로님은 걱정이 돼서 교역자를 모시자고 누차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계획은 ‘그러면 장로님 원대로 교역자를 모시는데 교역자를 모시면 우리 모임 패로 흡수하자’는 계획을 세웠단다. 그러나 흡수되지 않고 묵비권만 행하니까 그들은 답답해 죽을 지경인 것 같았다.
‘그러면 우리가 성미를 뜨지 말자. 굶어 죽게 되면 보따리를 쌀게 아닌가?’ 이 말을 전해 듣고는 우리도 오기가 생겼다. 이사 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어느 수요일 밤 전도사님은 시험기간이라 학교에서 오지 않았고 장로님이 예배 인도를 하시는데 기도 시간에 웅성웅성 하더니 눈을 떠보니 다 나가 버렸다. 남는 이는 장로님 부부, 그 동서(여 박집사), 길수 할머니, 나 네 사람뿐이었다. 그 다음 주일날이 되어 주일 학교 시간이 되었다. 처녀 교사 하나가 흐느껴 울면서 대표 기도를 하더니
“우리 학생들! 다 일어나서 저기 인조 대왕 능으로 가요.”
했다. 모두 양떼들처럼 다 따라나서는데 충남에서 이사 온 ‘부용’이라는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도 그들 속에 있었다. 부용이 부모는 고향이 우리와 같은 충청도라고 남다른 우의를 보이는 교우였다.
"얘, 부용아! 너도 갈래? 가지마! 너는"
하며 데리고 오니 주일 학생은 우리 집 둘 째, 역시 초등학교 2학년(이계성)을 합해서 두 명 뿐. 장년은 80명중 세 가정 7명뿐이었다. 자기들의 계획이 빗나가니 스스로 다 나가 버렸다. 이 소문이 온 동네에 퍼지자 안 믿는 이방 사람들이 채소며 먹을 것을 가져왔다. 마치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준 것처럼…….
교회 건물은 지대가 높아서 우물물이 나지 않는다고 아예 파지를 않고 식수는 계단을 15미터쯤 내려가서 그 집(황 집사 집)에 있는 우물을 두레박으로 들어올려야 되는데 그 우물도 너무 깊어서 물이 보이지를 않았다. 두레박을 들어올려 보면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2/3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런데다 물맛은 신장병 환자의 국 맛으로 적당할 만큼 염기가 있는 물이다. 빨래는 멀리 물을 채워 놓은 논에 가서 빨아 와야 했다. 거기에는 임진강 둑을 경계로 이편에는 모두 논인데 겨울이면 물을 채워 넣기 때문에 논둑 경계도 다 묻혀 버리고 필요할 땐 배를 타고 다니는. 완전 만경창파 바다를 연상케 했다. 그 모임 패들은 바로 교회 밑에 있는 황 집사 집에 모여 지붕 꼭대기에 확성기를 예배당 쪽으로 치켜 달아 놓고 예배 시간이면 복음 송과 찬송가를 신나게 불러 댔다. 이것은 우리 예배를 방해하려는 수작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물물, 지금까지 황 집사 네 우물물을 먹고 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못마땅할까 생각하면서도 설마 그래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는 크리스천들인데 우물물만은 이해하겠지! 생각하고 물을 길으러 갔는데 갑자기 가시철망이 가로막고 있었다. 다시 되돌아와 믿지 않는 젊은 아기 엄마(우제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 집 우물물을 먹으라고 했다. 그 우물도 몇 집지나 그 집 부엌을 통과해서 뒤꼍에 있는 펌프 샘물이었다. 그래서 전도사님은 그러면 교회도 철조망으로 뒤쪽 울타리를 해야겠다고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예배 시간에 혈기 부리던 박 집사가 자기 처갓집(황 집사 집)을 가려다가 철조망이 처 있는 것을 보고 생트집을 잡고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차분히 설명을 했다.
“집사님! 철조망을 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박 집사님 처갓집에서 우물물 때문인지 먼저 쳐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이어서 치는 것입니다. 황 집사님 댁에서는 더 좋아할 거예요.”
했더니 그 혈기가 차츰 가라 안기 시작을 했다. 29년 전 일이기 때문에 마을에 슈퍼마켓이 없었고 항상 계란을 사러 가는 집은 닭을 기르는 주일학교 처녀 선생 집이었다. 그도 모임 패로 가더니 계란을 사러 가면 성경책을 펴놓고 질문을 하며 계란은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우리 집 둘째가 하루는 울면서 ‘학교를 안가겠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지네 반 아이들이 ‘너는 지옥 자식’이라며 돌을 던지고 놀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일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담임선생님을 점심시간에 우리 집으로 초대하고 라면을 끓여서 대접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 여 선생님은 정중하게 앉아 이야기를 다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경을 쓰겠다.’고 대답을 했다.
여름 방학이 되어 전도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벽돌을 한 차 실어다 부려 놓고 혼자서 예배당 창틀 밑으로 구멍 난 흙벽을 다 허물고 벽돌을 쌓기 시작했다. 배고프고 힘들지만 새참 해 오는 사람도 없었고 장로님 부인이 옥수수를 한 번 쪄 오셨다. 장로님은 못 하나 박을 줄도 모르는 분이라 너무도 굉장한 일을 보는 듯 감탄만 할 뿐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우제 네 집 우물을 먹으면서 우제 엄마와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 분은 자기 큰집에 가서 이야기해 조카딸이 초등학교 6학년인 경애라고 하는 여학생인데 영리하고 통솔력도 있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 학생이었다. 이 학생이 우리 집에 놀러 오기 시작했고 나는 이때 배우지도 않은 개인 전도를 시작했다. 우리 아기가 보고 싶어서도 오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으러 날마다 왔는데 친구들을 하나 둘 데리고 오기 시작해 나중에는 오륙 명이 되었다.
모임 패들은 예배당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지나치게 방치 해 둔 것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학교에 가다 들리고 오다 들리고 하루에도 두세 번씩 와서 물도 들어다 놓고 아기도 봐주고 교회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잘 닦아 놓는지 마루 바닥이 반들반들 윤이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것이 나갔던 주일 학생들이 돌아오기 시작, 육체적으로는 의식주며 고생이 됐지만 이 아이들의 즐거움으로 마음은 행복했다.
하루는 전도사님이 인부를 사서 부엌 옆 화단에다 우물을 판다고 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다. 20여 미터 밑에 마을에서도 우물 밑이 안 보이도록 파야 되는데 이렇게 높은 지대에 물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조부 밑에서 풍수지리를 좀 익힌 그이는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깨끗한 석별 흙이 나오더니 3미터 정도 팠을 때 축축한 흙이 나오고 드디어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 핳렐루야! 물맛도 그렇게 좋을 수가......!
그런데 물은 잘 나오지만 쇠파이프와 펌프를 살 돈이 없는 것이었다. 금촌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오셔서 자기네 교회는 돈을 마련해 놓고 우물을 파자고 해도 말들을 안 들으니 이 돈은 갈현교회 몫이라면서 주고 가셨다.
이사 갔던 집사님도 다시 오시고 교회는 점점 성장해 가고 있었다. 갈라져 나간 모임 패들은 황 집사 네 집에서 모이더니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장기간 불편스러우니까 ‘괜히 교회를 버리고 나왔다’고 후회들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한번은 권신찬 목사님과 친분이 있는 우리 교단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부흥회를 하게 되었다. 강사 목사님이 권신찬 목사님께 미리 부탁을 드려서 모임 패들을 참석하게 했다. 부흥회는 시작되어 그들이 다 참석했는데 기도 시간에 눈을 뜨고 시계도 보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못 마땅해 하더니 모두 다 나가 버렸다. 저들은 예배 순서부터가 싫은 것이다. 자기들은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주일날 밭에 가서 호미를 들고 일을 해도 기도하는 마음만 있으면 되고, 앞으로의 죄도 도말 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았으면 무슨 짓을 해도 회개할 필요도 없고 영원한 의인이라는 것이었다. 머리를 숙여 기도하면 그 외모에서부터 그것이 형식이며 율법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자유 함을 얻었는데 왜 다시 율법에 얽매여 예배 순서에 따라 꼬박꼬박 머리 숙여 기도하며 진행하느냐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기와 인내를 주셔서 귀한 종의 사역을 잘 감당케 하시고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진리 되신 주님 편에 있는 것을 체험케 하셨다.
먼저 있던 교회에서는 여호와 증인으로 나간 집사 하나가 예배만 마치면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함께 겨드랑에다 책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와 질문을 하며 시간을 뺏더니 여기에서는 구원파 때문에 이렇게 어려움을 겪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의 훈련 과정은 더 확실한 체험으로 우리를 성숙케 하셨다.
그때 초등학교 6학년생이던 경애는 지금은 어엿한 숙녀로 자라나 모 고등학교에 근무하며 금촌 교회의 집사로 충성을 다하며 가끔 연락도 주고 진천을 몇 번 다녀가기도 했고 정재는 선교사 사모가 되어 선교단과 함께 다녀갔다. 지금은 갈현교회가 많이 성장해서 2층으로 건축하고 헌당식 때 역대 교역자를 초청해서, 거기에 참석하고 돌아온 목사님(남편)은 자기가 파 놓은 펌프 샘물은 수도가 들어온 지금도 기념으로 두고 사용하고 있더라고 했다.
(
1997. 1. 21. 화)
29년 전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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