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중국 침략과 임시정부의 재정비 : 한국독립당(중경)의 결성>
세계 경제 공황과 파시즘의 대두, 일제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됨에 따라 임시정부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면서 우리 독립운동 진영도 항일 투쟁 의지를 새로 가다듬게 되었습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일 항전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특히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원래 장개석 정부는 일본의 만주 침략에도 소위 ‘무저항 정책’을 취했습니다. 보다 급한 것은 공산당 소탕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1927년 상해에서의 국공합작을 깬 장개석은 소위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 정책으로 공산당 제거에 주력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하여도 장개석은 무저항 정책을 취하였고, 오히려 동북 군벌을 화북으로 불러 들여 내전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중국인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은 고조되었습니다. 북경, 상해 등 대도시의 청년 학생들 중심으로 장개석 정부에 대한 항의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마침내 1936년 만주의 친 장개석 군벌 장학량이 반란을 일으켜 장개석을 감금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소위 ‘서안(시안)사변’). 자기들의 고향인 만주가 일제에 유린당하는데, 그것을 뒤로 하고 같은 민족인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명분도 또 승산도 없었던 것입니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통일전선을 요구합니다. 장개석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제2의 ‘국공합작’이 성사되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1937년 만주를 넘어 중국 전체의 점령을 목표로 확전을 개시하면서, 중국에서 형식적이나마 통일된 항일전선이 구축되었습니다. 중국 공산군은 국민당 휘하의 ‘8로군’ 그리고 ‘신4군’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중일 전쟁의 발발과 장개석 정부의 대일 투쟁으로의 선회는 한국 독립 투쟁에 중요한 기회가 왔음을 의미합니다. 일본은 세계 대전에 발을 디뎠고, 중국은 물론이고 연합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단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일제는 마침내 패망의 길로 들어 선 것입니다. 물론 일본 군대의 연전연승은 놀라운 것이었고, 많은 항일 민족지사들이 일본의 위세에 눌려 친일로 전향한 것도 사실입니다. 만주와 중국 관내의 교민들도 친일로 돌아선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기세가 맹렬하다고 한들, 연합국 세력을 능가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장개석 정부가 본격적인 대일 전쟁에 나섰으니 커다란 우군이 생긴 것입니다. 중국 등 연합국과 공동 작전을 수행하여 독립을 쟁취할 가능성이 가시화된 것입니다.
민족주의 계열은 재차 대일 항전 연합전선을 모색하였습니다. 임시정부는 군무부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유동열, 이청천, 이복원, 현익철, 김학규, 안공근 등 6명을 위원으로 선임하였습니다. 안공근을 제외한 5명은 모두 위의 조선혁명당(관내) 인사들이었습니다. 이어서 1937년 한국국민당은 한국독립당(재건), 조선혁명당(관내) 및 미주 지역 단체들까지 포함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을 결성하였습니다. 그에 맞서 민족혁명당은 다른 좌익계열 단체들과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을 결성하였습니다.
민족주의 계열 3 정당은 1938년 장사에서 통합 논의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런데 불상사가 발생합니다. 조선혁명당 당원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습니다. 그 동기는 뚜렷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3당 통합과 관련한 자금 배분 문제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혁명당의 지도자 현익철이 즉사하고, 이청천, 유동열이 부상을 입었으며, 김구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의사는 김구도 가망이 없다고 보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의식을 회복하였습니다.
3당 통합 논의는 중단되었고, 또한 일제의 공격도 가속화되어 장사마저 점령되었습니다. 임시정부와 민족주의 진영은 더 남쪽의 광주(광저우)로 이동하였으나, 그곳도 일제의 공격이 시작되어, 다시 광서(광시)성 유주(류저우)를 거쳐 내륙 사천(쓰촨)성 기강(치장) 그리고 중경(충칭)까지 이동하였습니다. 그 이동에서 중국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장개석 정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독립운동가들과 그 식솔들 그리고 우리 교포들은 이동의 교통편은 물론 생계조차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중일 전쟁이 격화되면서 좌우를 망라한 항일 공동전선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습니다. 중국 장개석 정부도 한중 협동전선을 위해 한인들의 단일 대오를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은 모두 장개석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39년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 명의로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 신(信)>을 발표합니다.. 주의와 당파를 초월한 최고기관에 전민족의 역량을 집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광복진선 3당과 민족전선 4개 단체의 통합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습니다(7당회의, 5당회의). 그러나 최고기관 등의 문제, 즉 임시정부의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았다. 광복진선은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유지하면서 의정원을 양원제로 구성함으로써 합작 정부를 이루고자 하였다. 반면에 민족전선 측은 통일 신당을 최고기관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조범래, 한국독립당연구, 181면).
결국 민족주의 진영만의 합당으로 귀결됩니다. 1939년 10월 먼저 의정원이 확대되면서 (재건)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이 의정원에 진출합니다. 의정원 의장도 홍진이 맡게 됩니다. 이어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도 확대되어, 3당의 안배가 이루어집니다. 국무위원은 임시 약헌에 최대 11명까지 둘 수 있도록 되어 있었으나 당시에는 7명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명은 한국독립당(재건)의 조소앙과 홍진 그리고 조선혁명당의 이청천, 유동열로 채워졌습니다. 마침내 1940년 3월 3당은 다시 ‘한국독립당’의 이름으로 통합하였습니다. 이를 ‘중경 한국독립당’이라고 부릅니다. 당 대표인 중앙집행위원장은 김구가 되었고, 중앙집행위원은 3당의 주요 인사들을 안배하였습니다. 이 한국독립당(중경)은 이후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의 근간으로 지속됩니다.
그 당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국토와 주권을 완전 광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할 것
우리 민족 생존 발전의 기초 조건인 국토, 국권, 국리를 보위하며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발양할 것.
보선(普選)제를 실시하여 국민의 참정권을 평등히 하고 성별, 교파, 계급 등의 차별이 없이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리를 균등화할 것.
토지 및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여 국민의 생활권을 균등화할 것.
국민의 생활상 기본지식과 필수기능을 보급함에 충족한 의무교육을 국비로 실시하여 국민의 수학권을 귱등화할 것.
국방군을 평성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의무병역을 실시할 것.
평등호조의 우의로써 우리 국가 민족을 대우하는 국가 및 민족으로 더불어 인류의 화평과 행복을 공동촉진할 것.
(이상,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 III : 중경시기, 13-14쪽)
이러한 당의와 당강은 1930년 최초에 결성된 상해의 한국독립당, 이어서 한국 국민당, 심지어, 그와 대립관계에 있던 민족혁명당의 강령과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즉 안창호의 ‘대공주의’,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기초한 사회민주주의 민주공화국을 추구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1940년 9월 광복군사령부도 창설됩니다. 광복군 창립식은 임시정부 요인은 물론 중국 국민당의 오철성(우티에청) 그리고 공산당의 주은래(저우언라이), 동필무(동비우) 등 거물급 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가 광복군 창설을 선포하고, 임시정부 외무장인 조소앙이 경과보고를 하였으며, 내무장인 홍진이 단상에 올라 훈시를 하였습니다.
“본 정부가 인민의 중탁을 받고, 광복의 큰 짐을 진지라. 피가 아니면 왜적을 구축할 수 없으며, 무력이 아니면 해방을 꾀할 수 없는지라. ... 여러 장령들은 이로써 스스로 명심하여 나라에 진충하여 애로라지 공무사하여라. 용맹스럽게 나가거라. 그리하여 왜놈을 무찌르고 우리의 옛 나라를 광복하여라.”(한시준, 홍진, 236쪽; 현대 맞춤법으로의 수정은 필자)
참으로 감동적인 훈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족의 혼백의 쟁쟁한 울림이 느껴집니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공식 군대를 갖추었습니다. 한국 독립당(중경)-임시정부-광복군, 즉 당-정-군의 체계가 완성된 것입니다. 다만,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광복군을 완전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복군은 여전히 중국 국민당의 지휘 하에 있었습니다. 광복군의 관할권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로 가져 오는 것은 이후 임시정부의 주요 과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