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 꼭대기에서 / 최 종
일흔여섯 살 노인도 아침에 눈을 뜨면 거울 앞에 선다. 견딜 만하냐고, 한번 뛰어볼 수 있겠냐고 얼굴을 보며 표정을 묻는다. 거울 속 내 얼굴 옆에 탤런트 최불암이 나타나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특유의 미소를 흉내 내며 한번 활짝 웃어본다. 그는 1941년생 나와 동갑내기다. 내 얼굴은 그보다 훨씬 늙어 뵈지만 거울 속 그를 보면서 나도 아직은 달릴 만하다는 신호를 얽는다. 내 딴에는 비로소 장중한 하루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크게 신경 쓸 일 없어도 하루를 여는 마음에는 습관처럼 어떤 각오가 함께한다.
노인의 아침은 땀이 나도록 운동을 한다. 누런 화장지처럼 들뜬 얼굴에 대한 엄중한 의식(儀式)이다. 가벼운 체조 정도로는 땀이 날 리 없어 조심스럽게 자건거 타기부터 시작한다. 맨몸으로 하는 하체 운동 스쾃(squat)을 끝내고 뱃살 빼는 윗몸 일으키기를 한다. 생수를 한 잔 마시며 이마에 난 땀을 닦는다. 무거운 바벨을 드는 힘든 운동은 삼간다. 이틀에 하루는 용산 가족공원을 산책한다. 아주 천천히 걷는다. 언젠가 달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불편한 허벅지를 토닥거려준다. 가만히 놔두면 좋지 않게 변하고 만다는 “엔트로피 법칙”을 되새겨본다. 운동을 하면 아침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노인의 낮은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행복하다. 긴 글은 읽기 힘들다. 한 시간만 읽어도 눈이 아프다. 간단한 수필이나 짧은 시집을 쉬엄쉬엄 읽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며 습작을 해본다.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너무 오래 앉아 있지 않으려고 한다. 오래 앉아 있으면 골반과 허리에 무리가 온다고 했다. 최근에는 서서도 일할 수 있도록 컴퓨터 모니터를 눈높이에 맞게 올려놓는 설비를 구입했다. 서서 하는 작업도 꽤 괜찮다. 서 있어도 무릎을 다치지 않도록 자꾸 몸을 움찔움찔해줘야 한다. 멍청해지는 연습도 한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곳에도 눈의 초점을 맞추지 않는 그냥 멍한 자세로 있어 본다. 멍청해지면 머리가 시원해진다. 머리 회로(回路)에 받은 열이 식혀진다고 생각한다.
노인의 저녁 무렵은 종일 무엇인가 기다리다 지친 듯 나른하다. 특별히 기다리는 것이 없다. 누구와 꼭 통화를 해봤으면 하는 사람도 있는 게 아니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연락처를 찾아봐도 이야깃거리가 생각나는 꼭 이 사람이 없다. 가끔 어디서 감격할 소식이라도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노려볼 때가 있다. 금세 눈살을 풀고, 오늘도 어제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물어간다는 사실에 무덤덤한 얼굴이다. 이 시간, 비슷하게 늙어가는 친구들은 무엇을 할까. 전화를 걸어봤자 길게 할 말이 없다. 직장인들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어린애처럼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 세상”이나 노래한다. TV 채널만 이리저리 돌리면서.
노인의 일상은 불만을 가질 게 없어 불만이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워 불만이 없는 게 아니다. 꼭 집어 무엇을 탓하며 불만을 토로할 게 없는 것이 더 싱겁고 재미없다. 만일 누가 무엇이 부족한지 묻는다 해도 대답할 말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불만이 없는 일상이란 허황된 욕망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직 세상 욕심을 모두 내려놓은 것은 아니다.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으련다. 포기할 것 시원하게 포기해버리련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내게 남은 세월이 준 선물이리라. 불만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삶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꾸역꾸역 불만을 찾아 심술을 부려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노인의 정신 건강에는 소맥폭탄주 두 잔이 처방되어 있다. 너무 자주 마시면 건강에 좋지 않고 한꺼번에 양이 많으면 감정선이 마비될 수 있다. 아주 가끔 마셔야 한다. 이 두 잔은 밋밋한 일상에서도 눈에 비친 모든 사물을 경이롭고 신나는 것으로만 변모시켜주는 신통한 묘약이다. 바람 부는 날에는 집에 있어야 한다. 비 오는 오후에도 집에 있는 게 좋다.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는 운치가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바람 부는 언덕을 오르기 보다는 거실 창문을 열고 그 바람을 맞아보는 것도 괜찮다. 바로 이 때 소맥폭탄주 두 잔은 삶과 사랑, 인생과 행복, 이런 추상어들을 한데 모아 아름다운 축제를 벌여준다.
노인이 사는 집은 미루나무 꼭대기 까치집만큼 높은 곳에 있다. 16층 아프트 베란다에 의자를 놓고 앉아 먼 곳 아래를 내려다본다. 차도를 달리는 자동차도 보이고 인도에서 붕어빵을 파는 손수레도 보인다. 멀리 남부교회 종탑도 보인다. 전철이 방금 도착했는지 이촌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사람도 물건도 보이는 그 무엇도 나와는 언뜻 보아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다. 비켜서야 할 때 비켜섰다. 다가서지 않아야 할 때 다가서지 않았다. 관심과 배려가 젊은이들에게는 간섭으로 보일까 봐 무던히 애를 썼다. 미루나무 까치집은 그런 결과인지 모른다. 세상일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사물의 한 복판에 있다. 적적할 시간이 없다. 내 가슴속 미루나무 꼭대기 까치집은 언제나 잔칫집처럼 시끌벅적하다.
노인의 가슴에는 바람이 분다. 언제인들 바람이 불지 않았으리오마는 노인은 얼굴보다 가슴으로 먼저 바람을 맞는다. 육신의 영욕을 위해 끝내 붙잡고 있던 욕심쟁이 바람은 한없이 불어왔고, 이제 사랑하는 것들을 모두 다 내려놓아야 하는 초탈(超脫)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밝고 현란했던 바람이 스쳐 지나간 자국에는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지 않겠는가. 또 바람은 무엇이든 사랑하지 않고는 지금을 버텨낼 수 없음을 알게 해준다. 마지막까지 찰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노인의 가슴에도 사랑은 바람처럼 왔다가 잠시 머룸며 다시 소리 없이 사라져 갈까. 그 사랑 꽉 붙잡고 모든 것을 더더욱 사랑해야 한다. 지금 나는 사랑할 것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