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죄(罪)
죄(罪)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양심이나 도의(道義)에 벗어난 행위라고 한다. 순우리말은 ‘허물’이다. 허물은 잘못이나 실수를 포함하는 아주 넓은 의미의 포괄적인 개념이다. 죄의 종류는 법적인 죄를 범죄(犯罪)라고 하고 도덕적인 죄는 양심적 죄이며, 종교적인 죄는 종교적 규율이나 종교적 믿음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죄로 간주한다. 아담과 이브에서 유래된 원죄(原罪)가 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연설 때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에게 율법에 따라 돌로 칠까? 묻자, 허리를 굽혀 모래 위에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쓴 글씨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 하자 처벌을 주장한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고 여자가 혼자 남자 예수님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8장 3절~11절). 예수님의 직관이 신의 논리였고 인간은 원죄가 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범죄는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법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한다. 법적 적용에 따라 응보주의 관점이 있다. 죄를 짖은 만큼 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다. 반면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의 관점에서 법 집행을 한다. 사회적 이익을 기준으로 처벌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일반 흉악 범죄는 응보주의로 처벌하고 경제사범은 공리주의 입장을 선호한다. 그런데 어느 한쪽을 선호하는 것보다 두 가지 장점을 복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에 강00 소녀 아동 범죄자가 법의 심판에 따라 실형을 살고 풀려나자, 주변 사람의 공포로 법무부나 경찰에서 보호하는 비용이 어마어마하다고 신문에 보도 되었다. 공리주의 입장처럼 감옥에 있는 것이 사회적 이익임을 볼 수 있다. 공리주의 적용은 경제사범이 많다. 특히 그룹 회장들이 많은 돈을 횡령하고도 ’일자리 창출‘ ’경제 회복‘이란 명목으로 사면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법의 형평성 적용에 부당함을 많이 지적되는 경우이다.
도덕적, 양심적인 죄는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죄책감이 발생하는 경우는 첫째 개인의 도덕적 가치관을 어길 때 발생한다. 거짓말, 부정행위를 할 경우 양심적 가책을 느낀다. 둘째는 자기의 부주의로 타인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는 경우이다. 고의성이 없는 행위가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 죄책감에 휩싸이게 된다. 셋째는 자신이 세운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 죄책감을 느낀다. 학생들은 성적 향상이 안 되는 경우, 성인은 승급이나 경쟁에서 탈락하는 경우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은 우울, 불안, 수치심, 자기 비하로 이어져 대인관계나 자신감에 치명적일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용서하고 주변 상황을 폭넓게 수용하고 더 심각하면 전문가의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종교적 죄는 굉장히 광범위하다. 모든 행위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독교는 죄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르게 매우 폭넓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굳건한 믿음에 서지 않고 한 모든 행위는 엄밀히 말해서 숨 쉬는 것까지 죄라고 할 수 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행위는 모두 다 죄가 됩니다. (로마서 14장 23절). 고해성사(告解聖事)에서는 양심보다 더한 생각의 죄까지 뉘우치도록 한다. 불교에서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법(法:dharma)에 어긋나는 일이 죄이다. 해탈을 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일반 스님들이 지켜야 할 사미계가 있다. 사미계를 어기지 않는 것은 신의 경지에 도달해야 지킬 수 있는 행위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일반 사람들은 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볼 수 있다. 그 언저리에는 교만, 탐욕, 질투, 음탕, 나태, 분노 같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된다,
’이혼 숙려 캠프‘라는 방송을 잠시 본 적 있다. 여러 가지 사유로 좋은 만남이 이루어져 결혼하였지만, 배우자들 가치관의 이해 충돌과 관습이 고쳐지지 않아 남편, 아내 상관없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이다. 숙려기간을 거쳐 다시 좋은 가정을 만들어 화목하게 살게 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방영 목적인 모양이다. 편향적인 가치관이나 못된 습관을 짧은 숙려기간으로 고쳐지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행동 변화는 외부의 충격과 본인의 성찰로 생각이나 가치관의 변화와 본인의 지속적인 실천적 행동이 가미되었을 경우 바꿀 수 있다. 개인의 탐욕으로 만남이 이루어지면 만남의 죄가 무거워진다. 탐욕의 강도에 따라 만남의 죄는 다양하게 형성된다. 만남의 죄가 무섭다는 생각이다. 서로 다른 생각, 가치관, 생활 습관으로 상대의 배려 없이 한 행위가 죄가 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물론 방송이기에 기획과 연출이 있다고 가정해도 만남의 죄가 심각하다는 생각이다.
만남의 죄에서 부부가 가장 크게 적용된다. 그 이유는 가장 많은 시간과 화목한 가정을 만들려는 기대감이 크기 때문에 작은 부분도 그냥 넘어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공통된 가치관을 공유하기 위해 부부 싸움을 한다. 기실 공통된 가치관을 새로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氣)의 강도에 따라 굴복하거나 상대의 변화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독 부부간 윤리에 사랑과 배려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사랑과 배려가 잘 이행되는 가정은 시간이 갈수록 가정이 평온해지고 부부간의 행복도가 높아지며 자식들도 성격이 원만하여 다음 세대에도 사회적 적응이 좋아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지혜로운 부모가 필요한 이유다. 형제자매도 경쟁과 협동의 윤리에서 살아가기에 경쟁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면 관계가 소원해지는 가정이 많다. 앞으로는 형제자매가 거의 없어 만남의 죄도 거의 없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선택권이 자유롭지 못한 만남에서 만남의 죄가 커진다. 나의 선택이지만 선택의 폭이 크지 않는 경우이다. 학교와 직장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기관이 대표적이다. 학교에서 원치 않은 친구의 만남이다. 같은 학교에 있다는 자체도 괴롭지만 같은 반이면 더 심각하다. 최근 학교 폭력이란 규칙으로 만남의 죄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과거의 작은 상처가 동반한 심정적인 측면은 어떤 규제나 규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도 상사와는 종속과 지배의 윤리가 적용되고 동료는 경쟁의 윤리가 적용된다. 그래서 만남 자체가 유쾌하기는 어렵다. 20세기와 21세기를 깃 점으로 직장 문화가 확 바뀐다. 20세기 직장문화는 군대 문화가 적용되었고 21세기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 자리 잡는 시기이다. 그래서 ’갑질‘문화의 퇴치와 여성들의 성(性)적 문화 개선이 이루어진다. 정부, 대기업, 중소기업, 소상공인, 자영업은 위계질서가 엄격하여 평등한 인간관계는 원천적으로 어렵다. 이해관계가 있으면 좋은 관계 유지하다가 끝이 나면 원수가 된다. 법적 소송도 가끔 일어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이 있다. 긴 시간을 적용하면 만남의 죄가 있다 치더라도 죄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은 만남의 죄를 한순간도 같이 하기 싫다. 과거 농업 사회에서는 만남 자체가 협동이 전제되어 있고 설령 못마땅한 일이 있어도 후세를 위해 배려하고 참았다. 그것이 덕이고 의리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은덕이 참 크게 적용된 사회이다. 만남의 죄가 가장 적게 적용되는 사회이다. 산업사회가 형성되고 직장에 따라 유목민이 되는 현대인은 양보라는 개념은 없다. 농업 사회는 ’이웃사촌‘이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이웃 원수‘가 많다. 만남 자체를 지혜롭게 적용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2024. 12. 5 憲
첫댓글 죄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폭넓고 깊은 고찰과 지식 감명 깊게 감상했습니다. 다시 들어와 재독(再讀 )할 요량 입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