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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침없는 사마소(司馬昭)와 강유(姜維)의 얻은 것 없는 승리(勝利) -
중상시(中常侍) 황호(黃皓)를 매수(買收)하여 결국엔 강유(姜維)를 기산(祁山)에서 성도(成都)로 돌아가게 만들었던 당균(黨均)은 기산에 머물고 있는 등애(鄧艾)를 찾아가 그 사실(事實)을 보고(報告)했다.
등애는 흡족(洽足)한 미소를(微笑) 지으며 사마망(司馬望)에게 말한다.
"군신(君臣)이 화목(和睦)하지 못하니 조만간(早晩間) 촉(蜀)에는 내분(內紛)이 일어날 거요."
그리고 당균(黨均)을 낙양(洛陽)으로 보내 사마소(司馬昭)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사마소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촉나라에서 내분의 조짐이 보인다는 것은 위(魏)나라에게는 기회(機會)가 될 터였다.
그때부터 사마소는 촉을 칠 마음을 먹고 중호군(中護軍) 가충(賈充)에게 묻는다.
"촉(蜀)을 정벌(征伐)할까 하는데 시기적(時期的)으로 어떻겠나?"
가충이 대답한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지금의 황제(皇帝)가 주공(主公)에게 의심(疑心)을 잔뜩 품고 있는데 이럴 때 원정(遠征)을 나가시면 반드시 변란(變亂)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마소(司馬昭)가 가충(賈充)에게 또 묻는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황제(皇帝)가 변란이라도 일으킬 것이라는 말인가?"
"그런 조짐이 보였습니다. 지난해에 영릉(寧陵) 우물에서 황룡(黃龍)이 두 차례나 나타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신하들은 모두들 상서(祥瑞)로운 일이라며 황제께 하례(賀禮)의 표문(表文)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황제는 기뻐하기는 커녕, '상서(祥瑞)롭기는 무엇이 상서롭단 말이냐? 용(龍)은 임금을 상징(象徵)하는데 그 용이 위로는 하늘에 있지 않고, 아래로는 밭에 있지 않고, 우물 속에 웅크리고 있다니, 그것은 유폐(幽閉)된 죄수(罪囚)의 신세(身世)와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라고 하더니 잠룡시(潛龍詩)를 한 수 지었다 합니다."
"잠룡시?(潛龍詩) 그게 무슨 내용이길래?"
가충(賈充)은 사마소(司馬昭)에게 바로 시(詩)를 읊어보였다.
傷哉龍受困(상재용수곤) 슬프도다! 공경에 빠진 용이여!
不能躍深淵(불능약심연) 깊은 못에서 뛰쳐나오지 못하네.
上不飛天漢(상불비천한) 위로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不不見於田(불부현어전) 아래로는 밭에서 보이지를 않네.
蟠居於井底(반거어정저) 우물 속에 그저 웅크리고 있으니,
鰍鱓舞其前(추선무기전) 그 앞에서 미꾸라지와 뱀장어가 춤을 추노나.
藏牙伏爪甲(장아복조갑) 이빨을 감추고 발톱을 숨기고 있으니,
嗟我亦同然(차아역동연) 아, 어쩌면 내 신세와 그리도 닮을 수 있을까!
잠룡시(潛龍詩)를 다 들은 사마소(司馬昭)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말한다.
"그 자가 조방(曹房)의 뒤를 따르려 하는 모양이다. 일찌감치 도모(圖謀)하지 않으면 내가 화를 당하겠구나!"
가충(賈充)이 사마소(司馬昭)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주공(主公) 위해 제가 조만간(早晩間) 도모(圖謀)해보겠습니다." 이때가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서기 260년) 4월이었다.
사마소(司馬昭)가 칼을 찬 채로 대전(大殿)에 올랐다.
위주(魏主) 조모(曹髦)는 얼른 일어서서 사마소(司馬昭)를 맞이했다.
이윽고 모든 신하들이 입을 모아 아뢴다.
"사마 대장군(司馬 大將軍)은 공덕(功德)이 높고 커서 진공(晉公)의 자리에 오를만 하오니, 구석(九錫 :황제가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 내리는 아홉가지 물품)의 영예(榮譽)를 내리소서." 위주(魏主)는 신하(臣下)들의 청(請)에도 고개를 숙이고 답(答)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마소(司馬昭)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내 아버지와 우리 형제까지 세 사람이 나라를 위해 큰 공적(功績)을 세워왔는데 저에게 진공(晉公)의 작위(爵位)쯤 내려서 안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위주 조모(魏主 曹髦)는 흠칫하더니 대답한다.
"어찌 감히 경(卿)의 말씀을 따르지 않겠소?"
조심스럽게 답하는 위주(魏主) 조모(曹髦)에게 사마소가 따진다.
"폐하(陛下)께서 잠룡시(潛龍詩)라는 시를 지으셨다기에 읽어 보았더니, 폐하께서는 우리를 미꾸라지나 뱀장어 쯤으로 여기시던데, 천하에 이런 예법(禮法)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조모(曹髦)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
사마소(司馬昭)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대전(大殿)에서 물러갔다. 그 광경(光景)을 지켜본 모든 신하들은 그 서슬에 몸서리를 쳤다.
위주 조모(魏主 曹髦)는 조회(照會)를 마치고 후궁으로 들어가서 시중(侍中) 왕침(王沈), 상서(尙書) 왕경(王經), 산기상시 (散騎常侍) 왕업(王業)을 불러들였다.
세 신하가 들어오자 조모(曹髦)는 울먹이며 말한다.
"사마소(司馬昭)가 찬역(簒逆)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천하가 모두 알고 있소. 짐(朕)은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폐위(廢位)의 수모(受侮)를 당(當)하지는 않을 작정(作定)이오. 짐이 사마소를 치도록 경(卿)들이 도와주시오."
왕경(王經)이 아뢴다.
"아니 되옵니다. 옛날 노(魯)나라 소공(昭公)은 계손씨(季孫氏)의 횡포(橫暴)를 참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패(敗)하여 나라를 잃고 망명(亡命)까지 했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권세(權勢)가 온통 사마소(司馬昭)에게 가있는 까닭에 안팎의 공경대부(公卿大夫)들 중 순역(順逆)의 이치를 따르지 않고 간적(奸賊)에게 붙어 아부(阿附)하는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더구나 폐하(陛下)의 숙위군(宿衛軍)은 숫자도 적고 병력도 약하여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거니와, 설령(設令) 어명(御命)이 떨어져도 그것을 받을 사람이 없사옵니다. 폐하께서 잠깐의 화를 참지 못하시면 그에 따른 재앙(災殃)이 오히려 폐하께 닥칠 것이오니, 천천히 기회를 보아 일을 도모(圖謀)하셔야지, 서두르시면 아니 되옵니다."
"이 지경에도 참으라 하면 대체 언제 참지 않아도 되는 것이오! 짐(朕)은 이미 결심(決心)을 단단히 했으니, 죽는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소."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난 조모(曹髦)는 곧장 태후전(太后殿)으로 가서 자신(自身)의 결심을 알렸다.
왕침(王沈)과 왕업(王業)이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 왕경(王經)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일이 급하게 되었소. 우리가 이대로 천자(天子)의 명을 따랐다가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이 뻔한데, 차라리 사마 공(司馬公)에게 가서 이 사실(事實)을 알려고 목숨을 건지는 것이 낫겠소."
왕경(王經)은 크게 노(怒)하여 소리친다.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臣下)는 욕(辱)을 당(當)하고, 임금이 욕(辱)을 당(當)하면 그 신하(臣下)는 죽어야 마땅하거늘 우리가 어찌 감(敢)히 딴뜻을 품겠소?"
왕경(王經)이 자신(自身)들의 뜻에 따르지 않자 왕침(王沈)과 왕업(王業)은 둘만 사마소(司馬昭)를 찾아가서 그대로 고(告)해 바쳤다.
위주(魏主) 조모(曹髦)가 내전(內殿)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로 호위장(護衛將) 초백(焦伯)으로 하여금 궁중(宮中) 숙위병(宿衛兵)과 창두(蒼頭), 하인 삼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을 울리며 나아가게 했다. 조모(曹髦) 자신(自)身은 칼을 잡고 수레에 올라 좌우(左右)를 호령(號令)하며 궁궐(宮闕) 남문(南門)으로 향했다.
왕경(王經)이 수레 앞에 갑자기 뛰어들더니, 엎드려 대성통곡(大聲痛哭)을 하며 간(諫)한다.
"겨우 수백 명을 거느리고 사마소(司馬昭)를 치려하시는 것은 호랑이 입으로 양떼를 몰고 가는 것과 다르지 않사옵니다. 헛되이 목숨만 버릴 뿐, 아무런 이익도 구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조모(曹髦)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경(卿)은 죽기가 두려운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은 제 목숨이 아까워서 이러는 것이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하시려는 일이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이러는 것이옵니다."
"짐(朕)이 이미 군사를 일으켰다. 돕지 않을 것이라면 앞길을 막지 말라."
조모(曹髦)는 왕경(王經)의 거듭되는 만류(挽留)에도 불구하고, 얼마되지 않는 군사들을 이끌고 운룡문(雲龍門)을 바라보며 궁궐을 나섰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대장군(大將軍) 사마소(司馬昭)가 보낸 군사들이 쳐들어왔다. 사마소의 모사(謀士) 가충(賈充)이 왼쪽에는 성쉬(成倅), 오른쪽에는 성제(成濟)를 두고 수천 명의 금위군(禁衛軍)을 거느린채 황제(皇帝)의 수레를 향해 들이닥쳤다.
조모(曹髦)가 칼을 짚고 버티고 서서 호통친다.
"내가 바로 천자(天子)다! 너희들이 궁정(宮廷)에 들어오는 기세(氣勢)를 보아하니 감(敢)히 군주(君主)를 시해(弑害)하려는 것이냐!"
금위군(禁衛軍)들은 조모(曹髦)의 기세(氣勢)에 놀라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다.
그 모습을 본 가충(賈充)이 성제(成濟)에게 호령한다.
"사마 공(司馬公)이 너를 어디에 쓰려고 길렀겠는가? 바로 지금 같은 일을 위해서다!"
성제(成濟)가 창(槍)을 고쳐 잡더니 가충(賈充)을 보며 묻는다.
"죽일까요, 아니면 산채로 잡을까요?"
가충(賈充)과 성제(成濟)의 대화(對話)를 듣고 있자니 기가 막혀서 조모(曹髦)가 탄식(歎息)을 하는데,
가충(賈充)이 바로 명(命)한다.
"죽여라! 사마 공(司馬公)의 분부(分付다!" 성제(成濟)는 창(槍)을 세워서 곧장 수레 앞으로 달려나간다.
조모(曹髦)가 우뢰와 같은 소리로 호통 친다.
"네 이놈! 감(敢)히 어가(御駕 : 수레)를 범(犯)하다니, 무례(無禮)하구나!"
조모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성제(成濟)의 창(槍)이 조모(曹髦)의 가슴을 향해 날아든다.
조모(曹髦)는 창(槍)을 맞고 수레 밖으로 굴러 떨어진다.
성제(成濟)가 창을 다시 들어 내려 찍자 창(槍)이 조모의 가슴을 꿰뚫는다. 조모(曹髦)는 비명(悲鳴)조차 지르지 못하고 수레 옆에서 그대로 죽고 말았다.
호위장(護衛將) 초백(焦伯)이 성제(成濟)를 향(向)해 창(槍)을 겨누고 달려들었지만 그 또한 성제의 창끝에 희생(犧牲)되었다. 조모(曹髦)를 호위(護衛)하던 군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고 말았다.
왕경(王經)이 급(急)히 달려와서 가충(賈充)에게 삿대질하며 욕설(辱說)을 퍼붓는다.
"이 역적(逆賊)놈아! 어찌 감히 임금을 죽인 것이냐!"
가충(賈充)은 화가 나서 측근(側近)들에게 소리친다.
"저놈을 결박(結縛)해라!"
가충은 부하를 시켜 작전 결과를 사마소에게 보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소(司馬昭)는 궁궐로 급히 들어와 조모의 시체를 보고 크게 놀란 척을 하더니, 수레에 머리를 찧으며 통곡(痛哭을 했다. 사마소가 통곡을 하는 동안 가충은 사람들을 풀어 문무대신들에게 천자의 죽음을 알렸다.
태부 사마부(太傅 司馬孚)가 조모의 시체를 보더니 조모의 머리를 자기의 무릎 위에 눕히며 통곡을 한다.
"폐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폐하께서 이렇게 되신 것은 모두 신의 죄이옵니다."
조모의 시신은 관에 넣어져 편전 서쪽에 안치되었다. 대전에 신하들이 모두 모여 곡을 했다. 사마소 (司馬昭)또한 마음에도 없는 곡을 하다가 상서복야 진태(尙書僕射 陳泰)에게 슬쩍 묻는다.
"오늘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는가?"
"가충(賈充)의 목을 베십시오. 이것으로도 민심이 용서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마소는 갈등하다가 되묻는다.
"다른 방법은 없겠나?"
"차선책은 없습니다. 천자를 시해한 자에게 용서는 없습니다."
사마소는 생각 끝에 결심을 하고 명령을 내린다.
"성제(成濟)가 대역무도한 죄를 저질렀다. 성제를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하고 삼족을 멸하라!"
성제는 화를 이기지 못해 이를 갈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마소(司馬昭)에게 악담을 한다.
"이것이 나의 죄더냐! 네 놈이 가충의 입으로 전한 너의 명령 아니었더냐!"
사마소(司馬昭)는 당장에 성제(成濟)의 혀를 잘라 말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성제는 죽을 때까지 몸부림을 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성제의 외침이 사마소를 향한 저주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다. 성제(成濟)의 동생 성쉬 역시 저잣거리에 끌려나가 참수형에 처해지고, 이어서 성씨 일족은 삼족이 몰살당하고 말았다.
사마소(司馬昭)는 이어서 왕경(王經)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왕경(王經)은 어머니가 줄에 묶여 끌려오는 것을 보고 통곡하며 엎드려 절한다.
"이 불효자 때문에 어머니까지 곤경에 처하셨습니다. 어머니......!"
왕경(王經)의 어머니는 꼿꼿한 자세로 크게 웃으며 말한다.
"아들아, 이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이 몸이 늙었는데 그동안 죽을 자리를 찾지 못해 오히려 걱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을 자리를 찾게 되었으니 나에게 무슨 한이 있겠느냐?"
이튿날 왕경(王經)의 가족도 저잣거리에 끌려나가 형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왕경(王經)과 그 어머니가 웃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니, 성안의 선비와 백성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위주(魏州) 조모(曹髦)의 장례가 끝나고, 모사(謀士) 가충(賈充)과 그 일당들이 사마소(司馬昭)에게 대위(大位)에 오를 것을 권했다.
사마소(司馬昭)가 말한다.
"옛날에 주나라 문왕은 천하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서도 은나라를 계속 섬겼다. 그리하여 옛 성인들은 문왕을 지극한 덕을 갖추었노라고 칭송하였다. 위 무제(魏 武帝, 조조)가 한나라의 제위를 직접 이어받지 않았듯이 나 또한 위나라의 황제 자리를 계승하고 싶지 않다."
가충(賈充) 등은 사마소의 말을 듣고, 사마소(司馬昭)가 아들 사마염(司馬炎)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짐작(斟酌)하고 더이상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지 않았다.
그해 유월, 사마소는 상도향공(常道鄕公 조황(曹璜)을 데려다 황제(皇帝)로 세웠다. 그리고 연호를 감로(甘露)에서 경원(景元)으로 고쳐 원년(260)으로 삼았다. 조황(曹璜)은 무제 조조(曹操)의 손자로, 연왕 조우(燕王 曹宇)의 아들이었다. 조황은 이름에 쓴 '황(璜)'이라는 글자가 백성들이 널리 쓰는 글자였기 때문에 피휘(避諱)의 번거로움을 줄이고자 이름을 조환(曹奐)이라고 개명(改名)하였다.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른 조환(曹奐)은 사마소(司馬昭)를 승상(丞相) 겸 진공에 책봉(冊封)하고, 돈 십만 냥과 비단 일만 필을 하사했다.
낙양(洛陽)에 있던 촉(蜀)나라 첩자(諜者)가 위(魏)나라의 상황(狀況)을 탐지(探知)하여 촉나라에 보고했다. 강유(姜維)는 사마소가 제 군주를 시해하고 새로운 임금을 세웠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말한다.
"내가 위나라를 칠 명분이 생겼다."
강유(姜維)는 곧장 동오(東吳)에 사신을 보내어 함께 군사를 일으켜 사마소(司馬昭)의 죄를 묻자고 청했다. 그리고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출정(出征을 유허(允許) 받았다. 강유는 군사 십오만을 소집하고 수레 수천 대를 동원하여 군수품을 가득 실었다. 요화와 장익을 선봉으로 삼아 요화는 자오곡(子午谷)으로, 장익은 낙곡(駱谷)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리고 강유 자신은 야곡(斜谷)으로 향했다. 세 방면으로 나뉜 군은 모두 기산 앞에서 모이기로 하고 일제히 기산(祁山)을 향해 떠났다. 강유의 일곱 번째 정벌 도전이었다.
그 무렵 등애는 기산 영채에서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촉군이 기산으로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모든 장수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참군 왕관(參軍 王瓘)이 문서 하나를 등애에게 내밀며 말한다.
"저에게 계책이 있으나 말로 올리기가 어려워 글로 적어왔습니다. 장군께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등애 는 왕관이 건넨 글을 바로 읽어본다.
그리고 웃으며 왕관에게 말한다.
"좋은 계책이다. 허나 이 정도로는 강유(姜維)를 속아 넘길 수 없을 것이다."
등애의 거절에도 왕관(王瓘)은 포기하지 않는다.
"제 목숨을 걸고 해보이겠습니다."
등애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한다.
"그대의 뜻이 이렇게까지 굳으니 계책대로 해보아라.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리라 믿겠다."
등애는 정예군 오천을 뽑아 왕관에게 내주었다. 왕관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밤을 지새워가며 야곡으로 달려나갔다. 마침 맞은 편에서 오던 촉군의 전군 기병대와 마주쳤다.
왕관(王瓘)은 얼른 촉군을 향해 외친다.
"나는 위군 진영에서 도망나온 장수요. 촉에 투항하고자 하니 어서 대장에게 가서 전해주시오."
정탐병이 얼른 강유에게 가서 보고하자, 강유(姜維)는 장수가 이끌고 온 오천의 군사들은 그대로 밖에 두고 장수만 데리고 오라고 명했다.
왕관(王瓘)은 혼자 강유(姜維)앞으로 와서 땅에 엎드려 흐느끼며 말한다.
"저는 위나라 왕경(王經)의 조카 왕관입니다. 근자에 사마소가 임금을 시해하고 제 숙부 가문을 멸족시켜 소장은 그 원한이 뼈에 사무쳐 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장군께서 직접 사마소의 죄를 묻고자 출병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께 투항하고자 군사 오천을 데리고 가던 길이었습니다. 장군께서 저를 어디 사지(死地)에 넣으실지언정, 저를 간적을 없애고 숙부의 원수를 갚는 일에만 써주신다면 제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강유(姜維)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듯 크게 기뻐하더니 왕관에게 말한다.
"네가 진심으로 투항해 왔으니 응당 나 또한 진심으로 대해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 우리 군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것은 군량이 부족한 것이다. 서천 어귀에 군량과 마초가 있으니 너는 그곳으로 가서 군량과 마초를 운반해 오너라. 나는 오늘 중으로 기산에 있는 적을 치러 갈 것이다." 왕관은 자기가 생각해낸 계책이 잘 맞아 떨어지자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쁜 마음을 감추고 강유(姜維)에게 말한다.
"장군, 감사합니다. 분부를 받들어 서천으로 가겠습니다."
강유(姜維)가 말한다.
"군량을 옮기는데 네가 데려온 군사 오천이 모두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기산에 있는 위군의 사정을 잘 아는 자들이 필요했으니 그대는 삼천 명만 데려가고 나머지 이천 명은 이곳에 남겨 두어라. 남은 이천은 내가 길잡이로 쓰겠다."
왕관(王瓘)은 강유(姜維)의 명을 거절했다가는 괜히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삼천의 군사만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강유(姜維)는 왕관이 떠나고 부첨을 불러다가 왕관이 데리고 온 위군 이천 명을 내주었다.
그때 갑자기 하후패(夏侯覇)가 정신 없이 허겁지겁 들어와서 강유(姜維)에게 말한다.
"도독께서는 어째서 왕관의 말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비록 자세한 내막까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위(魏)나라에 있을 때 왕관이 왕경(王經)의 조카라는 사실(事實)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속임수가 있는 것이 분명하니 장군께서는 깊이 살피고 군사를 움직이십시오."
다급해보이는 하후패(夏侯覇)의 표정과는 달리 강유는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말한다.
"설마 내가 왕관(王瓘)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오? 나는 진작에 왕관의 투항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왕관의 군사를 둘로 나누어 분산시켰소. 저쪽에서 간계를 부리니 나도 계략을 써서 대응할 수밖에 없지 않겠소? 장계취계(將計就計)라는 말이 있잖소."
하후패(夏侯覇)는 얼굴에서 긴장이 풀어진다. 그리고 강유에게 묻는다.
"공께서는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사마소(司馬昭)는 조조(曹操)에게 뒤지지 않는 간웅(奸雄)이오. 사마소가 이미 왕경(王經)을 죽이고 그 삼족까지 멸했는데 왕경(王經)의 친조카를 죽이지 않고 더군다나 변방의 요충지(要衝地)에 그대로 둘 리가 있겠소? 그래서 왕관(王瓘)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이 일로 강유(姜維)는 야곡으로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왕관의 첩자들이 드나들 만한 길을 찾아서 군사들을 매복시켜 두었다. 열흘도 지나기 전에 매복 중인 병사들이 누군가를 붙잡아왔다.
붙잡혀 온 자는 왕관(王瓘)이 등애에게 보내는 서신을 배달하는 자였다.
강유(姜維)가 서신을 펼쳐보았다. 서신은 8월 20일에 샛길을 이용하여 촉군의 군량을 기산에 있는 대체로 보낼 터이니, 등애는 담산(壜山) 골짜기로 군사들을 은밀히 보내어 맞이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강유(姜維)는 첩자를 죽이고 서신 내용의 일부를 고쳤다. 강유(姜維)는 총명한 아군 병사 하나를 위군으로 위장시켜서 등애에게 위조한 서신을 전달하도록 했다. 또 한편으로는 군량을 실어왔던 수레 수백 대에서 군량을 모두 내리고 그 자리에 마른 장작, 마른 풀, 인화물질 등을 잔뜩 싣고는 푸른 천으로 덮은 후 군량 수송대 깃발을 꽂았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수레를 보면 여지없이 군량처럼 보였다. 그리고 부첨으로 하여금 투항한 위군 이천 명과 군량 수송대 깃발을 꽂은 수레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장서에게는 야곡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오곡과 낙곡에서 오고 있는 요화와 장익의 군대에는 기산의 위군 영채를 기습하도록 명했다. 강유(姜維) 자신은 하후패(夏侯覇)와 함께 산골짜기에 매복하여 등애군(鄧艾軍)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
등애(鄧艾)는 왕관(王瓘)이 보낸 밀서를 받아보았다. 서신을 읽고 기뻐하며 등애가 장수들에게 말한다.
"8월 15일, 담산 골짜기로 대군을 이끌고 가서 먼저 가 있는 왕관과 협력하여 촉군을 칠 것이다!"
등애(鄧艾)가 받은 서신은 물론 강유가 제 입맛에 맞게 고친 것이었다.
8월 15일, 등애는 오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담산 골짜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찰병을 산마루에 올려보내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돌아온 정찰병이 등애에게 보고한다.
"군량을 실은 수레가 끝없이 많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꼴자기의 후미진 사잇길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등애(鄧艾)는 직접 말을 타고 산을 올라 군량 수송대의 모습을 살펴봤다. 과연 정찰병의 말대로 군량을 수송하는 수레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리고 그 수레들을 운반하는 자들은 모두 위군이었다.
그것을 함께 본 좌우에 있던 장수들이 말한다.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얼른 가서 왕관과 협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등애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말한다.
"앞쪽의 산세가 험하니 혹시라도 복병이 있으면 급하게 후퇴하기 어렵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기로 하자."
등애(鄧艾)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사 둘이 말을 달려와서 급보를 전했다.
"왕관 장군의 수송대가 막 경계를 넘고 있는데, 배후에서 촉군(蜀軍)이 뒤쫓고 있습니다. 속히 구원해 주십시오."
등애 크게 놀랐다. 계략이 뒤늦게 탄로나서 쫓기고 있는 것이라면 빨리 손써야만 했다. 그리하여 담산 골짜기에서 기다리려던 생각은 버리고 급히 군사를 재촉하여 달려나갔다.
때는 사방에 어둠이 깔릴 시간, 초경이었으나 보름달이 마치 낮에 뜬 해처럼 밝았다. 갑자기 산 뒤에서 함성이 일고 병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등애는 왕관이 산 뒤쪽에서 격전을 버리고 있는 줄 알고 급히 말을 휘몰아 달려가는데, 문득 숲속으로부터 한무리의 군사가 뛰쳐나왔다. 뛰쳐나온 무리의 선봉에 있는 것은 촉장 부첨이었다.
부첨이 등애(鄧艾)를 보고 외치며 달려온다.
"등애(鄧艾) 이놈! 너는 이미 우리 대장군의 계책에 걸려 들었다! 그만 포기하고 말에서 내려 죽음을 받아라!" 등애가 깜짝 놀라 말을 돌려 달아나는데, 군량 수송대의 수레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일제히 불길이 치솟았다.
그것을 신호로 양쪽 산에서 촉군이 물밀듯 쏟아져 내려와서는 위군을 마구 쳐죽였다. 등애조차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으니 위군의 일개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때 곳곳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등애(鄧艾)를 사로잡는 자에게는 상으로 천금을 주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하겠다!"
등애는 혼비백산을 해서 갑옷과 투구를 벗어버리고 말도 내버린채 보병 틈에 섞여 산을 기어올라 달아났다.
강유(姜維)와 하후패(夏侯覇)는 등애(鄧艾)가 맨몸으로 도망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말을 타고 앞장 서 있는 자 중에 등애가 없는지 찾으러 다녔다.
강유는 승리에 들떠있는 군사들을 모아서 왕관이 수송하고 있는 군량과 마초를 받기 위해 길을 나섰다.
왕관(王瓘)은 등애와의 약속에 따라 8월 20일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도록 군량과 마초를 수레에 실어놓고 거사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심복 한 명이 달려오더니 급하게 보고를 올린다.
"계획했던 일이 누설되었습
니다. 등애(鄧艾) 장군은 보름날 담산에 도착했다가 대패하시어 지금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왕관은 황급히 여러 부하들을 보내 더 자세한 사실을 알아오도록 했다.
곧 여러 곳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오는데, 하나같이 기가 막힌 소식들 뿐이었다.
"지금 촉군이 세 갈래로 포위하여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배후에서 흙먼지가 일고 있는 것을 보면 도망갈 길이 모두 막힌 것 같습니다."
왕관(王瓘)은 좌우에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군량 수레에 불을 놓아라! 싹 다 불태워 없애 버려라!"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다. 하늘까지 닿을 기세로 화염이 솟구치는 가운데, 왕관이 절규하듯이 외친다.
"사세가 급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
왕관(王瓘)은 군사들을 휘몰아 서쪽으로 돌진했다. 그 뒤를 강유군이 세 갈래로 나뉘어 추격했다.
강유(姜維)는 왕관(王瓘)이 살기 위해 당연히 위나라로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관이 향하는 곳은 한중이었다. 게다가 왕관(王瓘)은 촉군의 유일한 통로인 잔도(棧道)에 불을 질러 길을 끊어 놓고, 관문(關門)마다 불을 지르며 가는 것이 아닌가? 강유는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등애(鄧艾)와 왕관(王瓘)에게 또다른 계책이 있는 것은 아닌지, 기산을 얻으려다가 기산은 얻지도 못하고 한중 땅을 빼앗기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결국 강유는 일단 등애를 추격하는 것은 포기하고 왕관(王瓘)부터 잡기로 했다. 추격대를 밤낮 가리지 않고 좁은 샛길로 휘몰아간 끝에, 마침내 왕관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왕관(王瓘)은 사면에서 밀려드는 촉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흑룡강(黑龍江)에 몸을 던져 죽었다. 왕관의 나머지 군사들은 촉군에 붙잡혔으나, 극심한 분노에 차 있는 강유(姜維)로 인해 투항(投降)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모두 생매장(生埋葬) 당하고 말았다.
강유(姜維)는 등애(鄧艾)에게 승리(勝利)를 거두었으나 왕관(王瓘)이 지른 불로 인하여 숱한 군량(軍糧)과 마초(馬草)를 잃고 잔도(棧道)마저 파괴된 터라, 하는 수 없이 군사들을 한중(漢中)으로 물리고 말았다.
등애(鄧艾)는 패잔병(敗殘兵)을 수습(收拾)하여 초라한 몰골로 기산(祁山) 영채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황제(皇帝)에게 포문(表文)을 올려 죄(罪)를 청(請)하고 스스로 벼슬을 깎았다. 조정(朝廷)의 모든 결정권은 사마소(司馬昭)에게 있었기에 사마소는 등애가 지금껏 큰 공로를 세운 것을 고려하여 벌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많은 상을 하사하여 노고를 위로했다.
등애(鄧艾)는 상(賞)으로 받은 재물(財物)들을 모두 이번 싸움에 희생(犧牲)된 장수(將帥)와 병사(兵史)들의 가족(家族)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마소(司馬昭)는 촉군(蜀軍)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우려하여 등애(鄧艾)에게 오만의 군사를 더 내어주며 요충지(要衝地)를 굳게 지킬 것을 명하였다.
삼국지 - 412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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