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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ets go Libera 원문보기 글쓴이: 광복이
- 항일 독립군의 피맺힌 역사 -
‘한국 광복군’ 탄생이 있기까지
광복군 사열식 모습.
독립군은 민족주체성을 견지함은 물론 한국의 독립을 앞세웠으며, 민폐를 끼치는 행위를 일체하지 않았다. 애국계몽운동도, 3.1운동도, 6.10만세운동도, 청산리대첩도, 봉오동 전투도, 상해 임시정부의 정강정책도, 한결같이 대한민국의 독립이었다. 광복군 외에 북로군정서 김좌진부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이범윤, 김성륜 등의 대한광복단도 모두 민족주의(우익) 진영의 독립군이었다.
항일 독립군의 이루지 못한 꿈 – ‘조국’을 되찾는 일
항일 독립군은 전투와 행군과 가난으로 점철된 삶을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내었다. 중일전쟁을 이후 임시정부는 이청천(李靑天) 총사령관으로 하는 광복군을 결성하였다. 광복군은 연합군 일원으로 인도-미얀마전선에도 투입되었다. 또한 미군의 지원을 받아 국내진공을 통한 조국광복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길 날을 목전에 두고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한반도는 또 다른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광복군’의 탄생이 있기까지 쉼 없이 갔던 길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비밀결사 ‘의열단’을 만들다
독립군 의열단. 길림성에서 13명으로 시작한 의열단 단원들이 출감 후 기념촬영을 했다. 항일독립운동을 하기위해 비밀결사 조직인 ‘의열단’을 만들었다. 이 사진은 독립군 의열단 단원들이 감옥에 갔다가 출감한 후 기념촬영 한 것이다. 길림성에서 13명으로 시작한 독립군 의열단은 고문으로는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圭)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鐘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俊)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공약 10조는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상하이[上海]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항일 독립군이 품었던 태극기 항일독립운동 태극기 1900년 무렵의 태극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를 단호히 저항하면서 굳건히 항일운동을 펴자는 글을 태극기 양쪽에 새겨진 항일독립운동태극기. 일본은 이 태극기를 빼앗아갔다가 1967년에 반환하였다. (독립기념관 소장)
1920년대 독립군이 시용하던 독립진군기 독립군들은 이 태극기를 앞세우며 우렁찬 나팔을 불면서 독립의 그날을 위해 너나 가리지 않고 굶주림마저 잊은채 피나는 훈련을 받았다. 광복군 서명태극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대한민국이 해방되었다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지역에서 활동을 했던 광복군들은 함성을 높이 외치며 그동안 항일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던 태극기 위에다 헤아릴 수 없는 기쁨들을 서명하거나 글귀를 남겼다.
한국광복군의 탄생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에 <군사조직법>을 제정하였고, 1931년에는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난징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 등 중국군 사관학교에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1937년에는 광복군 창설계획을 세웠으나, 중일전쟁의 발발로 지연되어 1940년에 비로소 광복군총사령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는 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그 취지를 천명하였다.
이청천과 김구선생.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의 임시수도 충칭의 가룽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후 임시정부 김구 주석(우)과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이 기념 촬영한 모습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능빈관'에서 개최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 단상에 임정 김구 국무령과 김학규 총사령부 참모. 백범의 주례사, 선언문 낭독, 조소앙의 경과보고, 홍진.조완구의 축사, 중국요인의 격려사.축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광복군은 이미 1938년에 조직되어 독립전쟁을 벌이던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여 3개 지대로 전력을 강화하였는데 광복군의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었고, 참모장은 이범석 이었다.
①광복군은 중국군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 임시정부는 단지 명의상으로만 통수권을 갖는다(제1·2항). ②광복군은 한국이나 한국변경에 근접한 지역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되, 반드시 중국군과 연합해서 행동하여야 하며, 이를 위하여 광복군의 중국 내 군사훈련은 해당지역의 중국군사령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제3·9항). ③중일전쟁 종결·이전에는 설혹 광복군이 한국 내로 진격하여 들어가더라도 별도의 협정이 체결되기까지는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한다(제8항). ④중일전쟁이 끝난 뒤 광복군이 한국국내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국 안에 있을 것 같으면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여전히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등이었다.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 (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 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 살(處殺)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