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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저 '과학의 종말' 에서 존 호건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후 과학과 기술의 발전의 속도는 인류의 흥분과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그 상승각은 점차 완만해지고 있다. |
물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21세기가 된다고 어떤 식으로든 하루 아침에 세상이 바뀔 리 없고, 세계는 언제나 천국과 지옥의 중간쯤 되는 상태에서 어딘지 모르는 미래를 향해 흘러 갈 거라는 사실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고, 단지 인간이 부여한 숫자에 불과한 햇수와 세기의 변화 때마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본다. 소위 럭키 세븐의 해로 불리던 1977년,조지 오웰의 소설로 상징화 되었던 1984년, 인류가 멸망하는 해라던 1999년, 그리고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접어든 2000년... 이 공허한 숫자들에 어떻게든 문명의 질적 전환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학자에서부터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애를 쓴다. 왜일까.
그것은 인간은 누구든지 어떤 형태로든 미래에 대해 막연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본인이 인식하던 하지 않던 종국에는 고통과 슬픔이 없는 세상, 즉 유토피아로 귀착되게 마련인 것이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자. 모든 인간이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이것이 실제로, 특히 우리들 자신의 당대에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 대부분의 내부에 모든 고통과 증오와 슬픔, 분노, 차별 등이 사라지는 그 어떤 지점을 갈망하는 속성이 마치 문신처럼 강하게 깃들어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속성은 현실의 삶에서처럼 단지 나와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는 그 성질이 좀 다른데, 그 이유는 이런 지점, 즉 유토피아는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 이 그 혜택을 누릴 때 만이 달성 가능하다는 것 - 단지 도덕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위험,불안정,갈등 요인을 항구적으로 제거한다는 구체적 의미에서도 - 을 우리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류의 생각을 전혀 하지 않거나 그 달성 가능성에 전적으로 회의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복잡한 현실적인 고려 없이 궁극적이고 바람직한 미래 인류 문명의 상을 그려 보라고 했을 때는 거의 누구나 흐릿하게나마 이런 식의 전형적인 유토피아를 상상하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무척 흥미로운 현상이며, 사실은 인류의 문명을 여기까지 끌어온 동력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오늘보다 나은 각자의 미래를 꿈꾸는 것은 인간의, 어쩌면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그러나 그 본능을 보다 더 높고 보편적인 지상 낙원으로서의 유토피아의 꿈, 혹은 더 나아가 그 실제적이고 단계적인 성취를 추구하는 지향점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은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 지성의 힘이다.
그리고 일단 처음에는 소수에 불과한 개별적 지성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성숙하고 나면 그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조적으로 포괄하는 시스템으로서의 문명으로 전환되게 된다. 이런 문명의 힘은 개별 인간의 사고방식을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발전적인 바꾸어 가고, 이는 또한 고통 없는 미래, 혹은 유토피아를 향한 막연하지만 폭넓게 공유되는 보편적 기대감으로 승화되어 자리잡는 것이다.
이런 우리의 잠재된, 그러나 너무 깊이 숨어있지도 않은 속성을 통해 봤을 때, 최소한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인류 역사상 일어났던 주요 거시적 흐름들의 대부분이 이 유토피아의 추구와 관련이 있음은 놀랄 일도 아니다(실은 프랑스 혁명 등 근대와 그 이전의 많은 주요 사건들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심지어 현대적 악의 상징으로 일컬어지는 나치즘이나 파시즘 조차도 특정 집단에 한정되긴 하지만 ?내부의 총체적이고도 완벽주의적 성취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이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19세기까지의 제국주의는 힘을 행사하는 주체의 - 예를 들어 영국 - 정체성이나 지향점이 비교적 확실하지 않다. 좀 과장해 말한다면 이들은 그저 그들의 군사력이나 기술력, 경제력이 허용했기 때문에 주로 만만한 아시아 등 유럽 외부를 상대로 그 세력을 넓혀 갔을 뿐이다. 영국이 전성기 시절 인도와 동남아 일원,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를 포함하는 그 거대한 영토와 인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왕에게 '황제'(emperor) 의 칭호를 대놓고 붙이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유럽 내의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한편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를 칭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반대 이유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등장한 파시즘이나 나치즘은 다르다. 이들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 등의 이념으로 철저히 무장한 채 만만한 제 3 세계만이 아닌 유럽 내 주변 국가와 민족을 복속시키기 위해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빅토리아 시대 제국주의 영국의 '정신적' 동력원이 자긍심이나 명예에 가까운 것 - 물론 이런 동기만 있다는 뜻은 아니다 - 이라면 20세기 파시즘과 나치즘의 동력원은 공격적일 만큼 강한 배타적 우월감과 이를 근거로 한 야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야심은 자신들이 주인공이자 최대 수혜자가 되는, 로마 제국 이후 누구도 실현하지 못했던 강하고도 새로운 유럽의 건설을 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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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가능케 한 일본의 '대동아 공영론' 은 전형적인 침략 논리이며 그 결과 우리는 물론 여타 아시아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으나, 그 이론 자체는 나치즘 등과 마찬가지로 특정 민족(물론 일본)의 주도에 의한 '영광스러운 아시아 대제국의 건설' 이라는 자기들 나름의 사이비 유토피아적 명분을 갖고 있었다. 누구나 제국주의를 비난하지만 실제로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어째서 그토록 맹위를 떨칠 수 있었던지 아는 사람은 상당히 드물다. 제국주의나 이를 뒷받침하는 사고방식은 그것이 실제적인 힘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 강력한 흡인력을 지니며, 이런 속성이 이성적이기로 이름 높던 독일 민족은 물론, 일부 피침략 당사국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동조마저 얻어내는 (예컨대 우리나라의 자발적 고위 친일파) 설득력으로도 작용했다는 사실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히틀러의 나치 행사에 참석한 영국이나 프랑스 외교관들의 상당수가 '하일 히틀러' 를 외치며 감동의 눈물까지 흘렸다는 점은 이 부분이 인간 심리의 기저와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간단치 않은 문제임을 보여준다. |
물론 이들의 이런 사고 방식이나 행동은 문제에 대한 미숙하고 전근대적인 접근의 결과이고, 결코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없다는 점에서 실용적이지 조차 않다. 지배와 피지배 구조를 통해 얻어낸 질서는 심각한 사회적 갈등 요인을 낳고, 이런 갈등 요인이 상존하는 한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는 - 유토피아는 물론 - 건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로 인해 이들은 인류 전체에 막대한 피해와 고통을 끼치게 되는데, 제국주의의 비뚤어진 자부심과 이상주의의 기저에는 그들의, 아니 실은 유한한 존재로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조급함과 현실에의 숨겨진 절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20세기에는 종교를 제외하고 그 어떤 사고 시스템보다도 훨씬 더 직접적으로 유토피아를 목표로 하는 사상, 마르크스 주의에 기초하는 공산주의 체제가 총체적으로 실험되었다.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역시 종교를 제외하고, 한 사람의 생각이 세계의 지형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거의 유일한 사상이다. 물론 소련의 붕괴 등 결과적으로 그 현실에서의 적용은 일단 실패한 듯 하나, 마르크스 주의의 기본 전제와 사고 체계, 접근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며 많은 자본주의 계열 국가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들의 체제 속에 이를 채택하여 일부 실현하고 있기도 하다. 영국은 물론 심지어 미국적 자본주의를 지향해 온 한국조차도 실은 이 나라들에 포함된다.
이처럼 수많은 노력과 실수들이 근대 이후 계속되어 왔다. 이로 인해 우리는 직접적으로,혹은 타산지석의 교훈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결과 2005년 현재 한국을 포함한 꽤 많은 사회들이 절대 빈곤과 기아, 무차별적 폭력이나 독재 등 인류 역사상 끝없이 반복된 고통의 질곡에서 어느 정도나마 해방되어 있다. 한편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동형복수나 대중이 범죄자를 재판 없이 현장에서 처형하는 등시살사 등 유사이래 계속되어 오던 각종 야만적 관습도 많은 지역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세상살이의 질은 과거에 비해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 나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꿈꾸는 미래의 유토피아는 과연 실제로 실현 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을 내기 어려운 것은 대부분의 우리 의식 속에서 유토피아는 항상 결과물로만 상정될 뿐, 이를 실제로 수립하는 과정에 대한 고려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이를 고려하는 것이 너무 크고 복잡한 일이기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려운 과정을 신이 모두 대신해 주는 '천국' 과 같은 식의 개념이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유효하게 된다.
그럼에도 지상에서의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접근한다면, 일단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유토피아의 일차적이고도 핵심적인 요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다른 중요한 것들을 희생해야만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일차적인 요소들이란 전지구적 관점에서의 의식주의 해결, 빈부 격차의 제거, 인종 및 기타 각종 차별의 해소, 노동 시간의 축소와 여가의 확대 등 가장 기본적인 요건들을 말한다. 거기에 더해 스트레스와 각종 질병의 정복, 수명 연장, 심지어 심적 고통이나 슬픔, 외로움 같은 인간의 삶에 부담을 주는 감정적인 마이너스 요소들 등등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세상을 추구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위의 유토피아적 요소들을 얻어내기 위해 버려야 하는 '다른 것들' 이 그렇게 설립된 세상 자체보다 어쩌면 더 소중할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는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양새와 과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갖고 있거나 추구하는 부분에 대한 일정한 형태의 희생과 포기가 없이는 결코, 최소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지상에서 구축한다는 의미의 '낙원' 에 가까운 세상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해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차별 없이 완전히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면 남들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 의지는 억압, 혹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며 심지어는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Brave New World' 에서 보듯 태어나기 전부터 유전자 조작이 행해져야 할 수도 있다(물론 소설에서는 반대로 계급을 태생적으로 결정하기 위해 이런 류의 방법을 쓰고 있지만). 또 슬픔이나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영화 '이퀄리브리엄' 처럼 상상력이나 감정의 일부 영역을 교육이나 약물 등으로 억압, 제어하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르고 이는 예술이나 기타 관련 영역의 소멸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런 딜레마들은 사실상 끝이 없이 이어진다.
심지어 이렇게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유토피아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라고 할 전지구적 의식주 문제의 해결과 빈부 격차 제거 부분만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분배 구조를 포함한 사회 시스템 전체를 재편해야 하며, 이는 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 층의 격렬한 반발을 낳을 것이 명약관화하다. 게다가 그 반발의 주체가 현실에서 힘과 리더십을 가진 강자인 마당에 이를 실현할 평화적이면서도 신속한 방법은 지금 현재로서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폭력이 동반되는 혁명의 시대는 끝났고 프랑스 자코뱅 당이나 볼셰비키는 더 이상 출현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실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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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상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정 반대의 뜻을 갖지만 실제 현실에서의 구현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했을 경우 자칫 그 결과물은 서로 큰 차이가 없을 수도 있는데, 그 이유는 두 경우 다 강력한 전체주의 사회의 수립을 전제로 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이다. |
물론 이런 온갖 문제를 극복하고기 위해 기발한, 때로는 기괴하기까지 한 다른 방법들 -이런 것들의 예는 앞으로 연재 중간중간에 수시로 등장할 것이다 - 이 시도될 수 있지만 이 역시 이런 저런 방면에서 어느 정도의 희생과 포기가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혼란스러워 진다. 이렇게 많은 장애들을 극복하고 각종 희생을 치러 가며 설령 우리가 목적하는 바에 가까운 세상을 만들었다 한들, 우리는 이를 정녕 유토피아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고통과 갈등을 없애기 위해 우리가 믿는 온갖 가치와 다양성을 분쇄해 버린 세상이라면, 이는 어쩌면 인류 문명이라기 보다는 개미나 꿀벌의 사회에 더 가까운 무엇일 수도 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최소한 우리가 흐릿하게나마 꿈꾸던 유토피아는 분명 그런 모양새는 아닌 것 같고 우리들 중 이런 유토피아에 살고 싶은 사람도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되는 '지루한 천국' 의 개념이 말해 주듯 인간은 설사 단점 투성이더라도 인간적인 그 무엇을 원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 우리가 그러하듯 미래의 그들도 위에 열거된 것들을 희생이나 포기로 볼 것인지, 아니면 마치 빨간 신호에서 차를 멈추는 것처럼 고등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시민의 의무 같은 것으로 생각할 것인지는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인간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의 잣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유용한 도구이긴 하지만 때로는 결정적인 한계로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과 몇 백 년 전 까지만 해도 강한 육체의 힘이나 뛰어난 개인 전투 능력을 가진 자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 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런 능력은 운동 경기나 조직 폭력 등 외에는 거의 사용할 일이 없고, 다른 온갖 상위 가치들에 비해 질적으로 훨씬 낮은 수준의 무엇으로 격하되어 있다. 이처럼 사고 방식과 윤리적 가치는 사회 구조에 따라 변한다. 지금 뉴욕이나 서울은 성서시대를 기준으로 본다면 소돔과 고모라 못지 않은 타락한 도시겠지만 다들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유토피아가 정녕 가능한지, 그리고 그보다 먼저, 과연 무엇이 유토피아인지 그 판단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고 정답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이런 문제와 관련되어 피 튀기는 논쟁을 벌이거나 모종의 희생과 포기의 결단을 내려야 할 일은 없지 싶으니 너무 걱정 할 필요는 없다.그런 일은 실현된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 후손들의 짐이다. 우리는 잘 해야 다만 거기까지 가는 - 정말로 간다면 - 징검다리 역할을 할 뿐인 것이다.
첫댓글 제목을 보고 순간 알럽 프리스탈 최강자 유토파이님을 언급하시는줄...ㅎㅎ;;
개인적으로 우리가 20세기에 21세기를 상상했던 그것,아마도 21세기말에 사는 사람들이 22세기를 상상하는 그것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누군가 해주길 기다리는마음만..... 에헤헤헤헤
유토피아 얘긴 아니다만 "정치에서 예술을 보면 파시즘이고 예술에서 정치를 보면 사회주의다"라는 말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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