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975년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있을때쯤 언론사는 굴복했습니다. 그러나 양심적인 기자들은 자유언론수호를 외치며 투쟁을 합니다. 이 투쟁에 가장 적극적이던 신문이 동아일보였습니다. 또한 워싱턴 포스트가 박정희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인물 이라고 했눈데 이를 동아일보만 실었기때문에 결국 희대의 광고탄압이 발생합니다. 당시 광고중 98%가 떨어져 나갑니다. 결국 동아일보 광고란은 백지로 나갑니다. 그때 국민들은 동아일보 광고란에 격려광고를 싣습니다. "해마다 1년간 모든 돼지저굼통을 깨서 불우한 이에게 전해 왔으나 이번에는 광고 해약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아일보]를 돕는 데 쓰기로 했습니다."ㅡ이우인(6세),지인(5세).1월10일 "긴급조치로 구속된 동료 학생에게 사식비로 전하려 하였으나 이 길마저 당국이 차단해서 광고없는 [동아일보]에 성금으로 바칩니다."ㅡ이대 사회학과 일동. 1월10일 "[동아일보]를 보는 재미로 세상을 산다."ㅡ익명 서점 1월11일 "배운 대로 실행하지 못한 부끄러움을 이렇게 광고하나이다."ㅡ서울법대 23회 동기 15인 일동. 1월11일 "빛은 어두울수록 더욱 빛난다"(금반지 반돈 중을 놓고 가면서...)-[동아일보]를 아끼는 한 소녀. 1월13일 "나사 빠진 배움 무엇에 쓰랴."ㅡ대일고 2학년2명. 1월15일 "[동아일보] 배달원임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ㅡ신동지국 배달원 15명 일동. 1월15일 "시장길서 만난 우리들 반바구니로 돌아서며 조그마한 뜻 巨木동아에 보냅니다."ㅡ주부 일동. 1월16일 "동아! 너마저 무릎 꿇는다면 진짜로 이민갈 거야"ㅡ이대 s생. 1월18일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ㅡ밥집 아줌마. 1월18일 "약혼했습나다. 우리의 2세가 태어날 때 아들이면 '동아'로,딸이면 성아(여성동아)로 이름을 짓기로 했습니다."ㅡ이묵•오희. 1월20일 "오늘도 [동아일보]를 읽으시는 하느님"ㅡ서울 제일교회 학생회. 1월20일 "저희 부친은 돌아가실 때까지 앞날의 동아와 저희 형재들을 몹시 걱정하셨습니다."ㅡ장례를 마치고 부산자녀. 1월25일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ㅡ어느 경북대 교수. 1월 27일 "국민 여러분 우리 손자에게 아빠를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ㅡ박경리. 2월17일(사위 김지하 씨 석방후) "직필은 사람이 죽이고 곡필은 하늘이 죽인다"ㅡ부산 어느 기자. 2월19일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 탄환임을 알라."ㅡ○○출판사 편집부. 2월22일 동아야 정신 차려라!
첫댓글 그랬던 동아일보가 오늘날 왜 이렇게 됐을까요?
저항정신을 갖고 있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저때 다 짤렸거든요.
ㄴ그러고 2001년 세무조사 이후로 완전히 조선일보 2중대가 되었죠 좀만 정신 차리면 금뱡 조선일보 누르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