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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토하고 또 마시며… 연애·시국 토론으로 지새운 밤들 「대성리 MT촌」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옛날에 엠티(MT) 가던 생각 나니?” “어, 대성리, 일영 꾀꼬리 산장, 용문캠프?” 한참 위 선배와도 엠티 문의차 통화를 했다. “허어, 대성리 마이 다녔제….”
2000년대 학번인 친구 제자에게도 엠티를 물었다. “저희야 늘 대성리….” 대성리, 대성리가 돌림노래 첫 마디처럼 계속 나온다. 남들과 전혀 다른 청년기를 보낸 사람의 입에서도 대성리, 교회생활에 빠져 지냈던 분에게서도 대성리, 웬 대성리가 이렇게나 북적이나요?
‘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의 소재로 엠티를 떠올렸는데 단연 대성리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곧장 ‘대성리 엠티촌’이 뜨는 걸 보니 경기 가평군 청평면 대성리가 놀랍게도 지금까지 현역이라는 의미다. 우리나라에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니! 물론 숙소 시설이 달라졌을 것이고 먹는 음식도 나누는 대화도 다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세대를 달리한 여러 통의 취재통화 과정에서 세월에도 변치 않는 공통점을 또 하나 발견했다. 퀴즈를 내고 싶다. 수십 년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학생 엠티문화에서 변치 않고 지속되는 것은 뭘까요? 싱겁게 답부터 내놓는다.
그것은 술, 술, 술이다! 술에 취해 미친 듯이 노래 부르는 일, 싸우는 일, 빈대떡이라고 부르는 토사물을 숙소 주위에 빙 둘러 싸질러 놓는 일, 새벽녘에는 꼭 담배가 떨어져 흙 묻은 꽁초를 주워 코펠에 볶아 피우는 일, 간혹 격정이 넘쳐 강물에 빠져 죽겠다며 뛰어드는 놈을 몇 대 패서 끌어내오는 일. 이 모든 것이 엠티 현장의 술판이 초래하는 우리들의 공통 기억들이다.
어느 날 대성리역 부근에서 친구 동일이와 나는 꼼짝 못하고 얻어맞았다. 정신이 얼얼한데 그 중년 아저씨는 욕설과 함께 우리 둘의 귀싸대기를 계속 갈겼다. 향미 때문이었다. 여대 철학과에 다니는 그 애가 역 근처 밭이랑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고 그걸 본 동네사람이 분을 참지 못했다. 여자가 대낮에 담배를 꼬나물다니! 그런다고 때리는 아저씨나 맞기만 하는 우리나 참 고풍스럽기는….
그날 밤 엠티 세미나에서는 아마도 총자본(국가)의 국면전환을 위해 지역 미조직 노동자들의 연대를 강화하는 ‘아지프로’(선전선동)를 담은 ‘피’(유인물)의 강령들을 토론하고 그랬을 것이다. 으하하하!
대학생 동아리를 과거에는 서클이라 불렀다. 학과에서도 많이 갔지만 특히 서클에서 엠티를 선호했다.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감시망을 피해 안전하게 세미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념서적을 읽고 강독과 토론회를 하는 것을 스터디라고 불렀고 세미나는 정세분석이 많았다. 국가의 운명과 수백 년 된 역사 체험이 마구 왔다갔다 했다. 세미나 후에는 ‘야자타임’이라고 부르는 상호비판 시간을 가졌다. 주로 후배가 선배를 공격하는 내용이었다. 지독한 말이 나와도 꼼짝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서클은 언더(비합법 조직)와 오픈으로 갈렸는데 특히 강성인 언더서클 멤버가 엠티를 갔다가 보쌈을 당하듯 몽땅 잡혀가는 일도 많았다. 대학생들이 야외에 모여서 나라 걱정을 하는데 왜 기관원들이 잡아가느냐, 라고 묻는 대학생 아들에게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학과공부만 빼놓고 별것 다 했다는 과거의 대학생활에서 엠티는 숨통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나무와 풀과 강물이 펼쳐진 자연이 있었고 마냥 시시덕거리는 농담과 말장난이 있었고 여학생 남학생이 조를 짜서 꽁치통조림과 감자로 찌개를 끓이는 즐거움이 있었다. 미리 현장답사를 다녀오거나 부식거리를 사오는 과정에서 커플로 발전한 ‘못된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무겁고 비장한 분위기였다. ‘노을 지는 저녁 강가에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조차 죄의식을 가져야 했던 시절’이라고 어떤 작가가 회고했던 군사통치 시대였다. ‘이 세상 어딘가에 삶의 고통으로 흐느껴 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내 탓이다’라는 외국 혁명가의 말을 좌우명처럼 새기는 학생들도 많았다. 대학생은 혜택받는 엘리트였고 그래서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런 노래들을 불렀다.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허위와 기만에 지친 형제여/ 가자가자 이 어둠을 뚫고/ 우리 것 우리가 찾으러/ 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
수도권 대학생들에게 엠티 공간으로 대성리가 왜 특별한 각광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일영, 강촌, 마석, 가평, 청평, 남이섬, 국수리, 헌인릉, 장흥, 새터 등등 장소가 참 많았는데도 대성리가 유난히 사랑을 받았다. 시외버스를 타기도 했지만 주로 청량리역 시계탑 앞에서 만나 경춘선을 타고 달려갔다.
강을 경계로 엠티장은 두 구역으로 나뉜다. 대성리역에서 내려 왼편으로 꽤 오래 걸어 내려가면 민박집들이 있다. 하지만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면 더 물색 좋고 넓은 방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 건너 언덕을 넘어가는 과정에 미국배우 찰스 브론슨을 페인트로 조악하게 그려놓은 가게를 통과했다. 그 터프가이 얼굴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행군하듯 걸어가노라면 자연스레 노래가 나왔다. 노래는 노래집이라고 부르는 운동가요 모음집이 따로 있었는데 대부분의 노래가 한돌, 한동헌 그리고 김민기의 곡이었다. 독창은 불가능했다. 누군가 노래를 시작하면 언제나 다 따라 불렀다.
그리고 펌프! 엠티장 어디에도 수도가 없었다. ‘뽐뿌’로 물을 길어올리면 쌀을 씻고 수저로 감자껍질을 벗기는 일이 첫 순서였다. 물론 베짱이처럼 일은 전혀 안 하고 농담 따먹기만 여기저기 하면서 돌아다니는 녀석이 꼭 있는데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봐주는 분위기였다.
나의 엠티 체험은 30년도 넘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반의 기억이다. 여러 대학이 모여 강학이라 부르던 야학 교사생활을 했던 터라 공장 노동자들과 대부분의 저녁시간을 함께 보냈다. 낮에는 학교 캠퍼스, 밤에는 공장지대 그리고 꽤 자주 불려갔던 경찰서가 대학생활을 채웠다.
아무 대책이 없었는데도 졸업할 때까지 이상할 정도로 장래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연애와 시국문제 이 두 가지만 고민하고 살았던 것 같다. 그 공통분모가 집중적으로 펼쳐지던 곳이 바로 엠티장이었다. 화려한 식견을 자랑하거나 목청 높여 울분을 토하며 꺼이꺼이 울거나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엠티의 밤시간이었다.
다들 누군가를 사랑했지만 표현하지 못해 안타까워했고 민족모순이 중요한지 계급모순이 중요한지 아리송한 담론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던가.
경숙이를 사모했던 광철이는 정치권 언저리에서 일하고 있다. 눈물 많던 그 경숙이는 공무원이 된 바로 위 선배의 아내가 되었다. 징역 살고 나와 현장(공장)에 들어간 환기는 가르치던 야학학생과 결혼하고서 영원히 노동자로 남았고 남달리 급진적이었던 상옥이는 수의사가 되었다. 비분강개형 순정파 영수는 정치학자의 길을 걷다가 청와대로 들어가 버렸고, 늘 연애가 풀리지 않아 끙끙 앓기만 했던 진수는 신문사에서 일한다. 사업가, 교수가 있는가 하면 평생 백수도 있다.
3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때 뜻을 같이했던 엠티장의 동지들은 이제 동질감을 찾을 길 없이 다 달라졌다. 상가 같은 곳에서 마주쳐도 싱겁게 웃을 뿐 함께 나눌 이야기가 별로 없다. 그렇게 모래알로 흩어지는 것이 생애라는 것인가 보다.
생각해 보니 ‘불의 시대’라 불린 당시의 정치현실 탓이 컸다. 어제까지 까까머리 고교생으로 철모르던 소년이 대학 엠티 토론장의 분위기 몇 차례를 겪고 나면 갑자기 조국의 현실이 나의 중대사가 되어 버리는 변화를 겪는다. 마냥 어린애 같던 소년이 불쑥 심각한 지성인을 자처하는 것도, 멋스럽게 가꾼 긴 생머리를 쌍동 쇼트커트로 자르고 청바지에 무시무시한 이념서적을 품고 다니는 여학생의 변모 역시 엠티의 영향이 컸다.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설사 유치한 정세판단과 비틀린 역사관이 있었어도 엄청나게 진지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다들 부쩍부쩍 어른이 되어 버렸다. 지난날 대학생 엠티장은 소년소녀를 성인으로 변모시키는 살아 있는 현장 학교였다.
때가 되면 다들 대성리를 떠난다. 그곳의 나무들은 풀들은 하염없는 강물은 기억할 수 있을까. 그 숱한 말, 말, 말의 흔적을. 눈물과 고함과 구토와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의 자취를 대성리는 여전히 품고 있을까.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옛 시인은 썼다.
‘일출의 장엄함이 아침 내내 계속되진 않으며 비가 영원히 내리지 않는다’라고. 그러니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라’라고.
그렇게 오늘도 대성리 엠티는 계속된다.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 강촌 자전거 하이킹族 몰려 백마 신도시 아파트숲 변신..MT 명소들, 어떻게 변했나
1957년부터 50년간이나 엠티(MT·수련회)를 가던 장소인 과거의 경기 가평군 대성리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통기타와 배낭을 멘 대학생들이 수도 없이 타고 내리던 추억의 대성리역이 2009년 헐렸기 때문이다. 이후 서울 지하철 7호선 상봉역에서 춘천역을 잇는 복선전철이 개통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대학생들은 단층건물인 청량리역사와 청량리 시계탑 앞에 모여 정겨운 경춘선 열차를 탔다. 가수 김현철의 데뷔곡 ‘춘천가는 기차’로도 유명한 경춘선 열차는 ‘청춘의 낭만 열차’ 그 자체였다.
1988년 차표의 전산발매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입석 표를 무제한으로 팔았기 때문에 콩나물 시루가 되기 일쑤였다. 학생들은 비싼 무궁화호와 너무 느린 비둘기호의 중간 가격대와 편의성을 갖춘 통일호를 선호했다.
대성리는 강바람을 맞으며 통기타 연주에 맞춰 ‘긴머리 소녀’ ‘모닥불’ 등을 부르면서 일탈의 해방감을 만끽하던 엠티명소였다. 아름다운 강의 풍경을 배경으로 깔고 구혼해서 결혼에 골인한 커플도 있었지만,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사랑고백을 하다 퇴짜를 맞고 술주정을 하던 학생들이 더 많았다.
1980년대 초반부터 대성리 역 건너편 구운천 마을에 민박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민박집, 구멍가게 등 업소 110여 개가 몰린 대성리 MT촌이 만들어졌다. 2000년대 이후 대학생 엠티촌으로서의 대성리의 명성은 퇴락했고, 대성리역 민박들도 하나둘씩 펜션으로 바뀌어갔다. 100여 명이 들어가던 대형 민박집은 없어졌고 대학생들은 이제 조촐한 펜션으로 옹기종기 모인다.
대성리와 엠티 장소로 자웅을 겨뤘던 곳이 구곡폭포가 있는 강촌과 경의선으로 떠나던 백마·장흥이었다. 강촌 역시 통기타를 메고 모닥불 주위에 모여 노래를 부르던 풍경이 낯익은 엠티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전거 하이킹을 하거나, 사륜오토바이를 탈 수 있는 장소로 더 유명하다. 경의선 열차로 백마 등으로 떠나던 구 신촌역도 2006년 허물어졌다. 소박한 시골역과도 같았던 구 신촌역에선 겨울에 난로를 피우고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했다.
옛 백마역은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아파트숲으로 바뀌었고, 옛날의 정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백마의 통기타 카페 화사랑은 통나무로 지은 보기 드문 생음악 카페였다. 당일치기로 간 대학생들도 이곳 동동주와 파전과 라이브 음악에 취해 막차시간을 놓치기 일쑤였다. 화사랑은 지금은 백마 애니골로 옮겼다.
직장인 김모(52) 씨는 “1980년대 초 대학 시절에 즐겨 찾던 화사랑은 허허벌판 가운데 있었다. 카페 바깥으로 나오면 어두컴컴한 나무 밑에서 데이트 상대와 분위기 있게 키스할 수 있는 장소였다”며 “중간고사가 끝나거나 새로운 파트너가 생기면 무조건 화사랑으로 달려갔다”고 돌아봤다.
첫댓글 젊은날 청량리에서 경춘열차타고
대성리 많이 갔었지요
추억이 새록새록
직장 다니고 연애할땐
대성리보다 청평유원지를
더 자주 갔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