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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요한계시록 1:17-20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 1:17-20 / 계 1:17-18) 그분을 뵙는 순간 나는 죽은 사람처럼 몸이 굳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과 나중이요, 살아있는 자다. 내가 죽었으나 부활하여 지금은 영원히 살아 있는 자요, 죽음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자다. 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록하라. 20) 내 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의 비밀을 일러주겠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지도자들이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요한이 계시록을 순서대로 기록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17-18) 요한은 거룩하신 예수님의 발 앞에 죽은 자 같이 엎드러졌습니다. 이는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느끼는 당연한 두려움입니다(창 32:30; 출 33:20; 삿 6:22-23). 지상에 계셨을 때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본 요한이었지만, 계시를 받는 중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자신의 거룩하고 찬란한 영광을 숨기셨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한 순간 예수님은 놀랍게도 오른손을 얹으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근거를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 살아 있는 자, 곧 영원한 하나님이지만 자신이 죽었었노라고 강조하며 말씀하십니다. 이 죽음은 바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또한 부활하심으로써 이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한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마귀가 가졌다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지만 사실은 우리 예수님께서 그 열쇠를 갖고 계시며, 결코 마귀에게 잠시라도 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기록하라(19-20) 기록하라는 두 번째 명령과 함께 요한계시록의 전체 구성이 펼쳐집니다. “네가 본 것”은 요한이 본 예수님에 대한 환상이며, “지금 있는 일”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의 일이며, “장차 될 일”은 이후에 될 일, 곧 말세에 이루어질 일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순서대로 기록합니다. 1장은 그가 본 일이며, 2-3장은 지금 있는 일, 곧 일곱 교회들의 일이며, 4-22장은 장차 될 일, 곧 말세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친절하게도 환상 속에 나타난 상징들, 곧 일곱 별은 교회의 오늘날의 목사로 이해될 수 있는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요한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일곱 교회의 사자들과 교회들이 있는 곳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곳은 승리하신 예수님의 강한 오른 손입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된 상태였습니다. 고난과 시험은 예수님을 가장 잘 볼 수 있게 하는 현미경과 같습니다.
적용: 고통스러운 유배지가 황홀한 계시와 기록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고난당하는 그 자리에도 예수님이 임하셔서 영광의 모습을 보여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상황에 따라 각기 구해야할 것이 다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다윗이 항상 지니고 다니던 물맷돌을 사용했습니다. 이 물맷돌로 골리앗의 미간을 정확하게 맞춘 것은 다윗이 연습을 잘 해서도 아니고 그만큼 평소에 실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 큰 거구가 미간에 돌을 맞아 죽는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돌이 미간에 맞고 죽었다는 것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기적의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이 가지고 있는 재주를 사용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기와 믿음을 다윗에게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것입니다.
< 설 교 >
유배지에서 쓴 편지
계 1장 9~20절 / 김흥규목사
<유배지에서 핀 꽃>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최근에 제가 아주 즐겁게 읽은 책 중에 유홍준 선생이 쓴 「완당평전」(阮堂評傳, An Annotated Biography of Wan-Dang, Kim Chung-Hee)이 있습니다.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필체로 유명한 조선시대의 대(大) 문장가(文章家)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 대한 전기입니다. 추사체는 기존의 붓글씨 체와는 전혀 다른 기괴하면서도 아름답고 장중하면서도 섬세한 독특한 조선식 서체입니다. 바로 이 추사체 때문에 김정희 선생은 단군이래 최고의 명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지 명필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낸 서예가라고 해서 '신필'(神筆)이라고도 합니다.
제가 「완당평전」을 읽으면서 감명을 가장 깊이 받은 것은 김정희 선생이 추사체를 개발하게 된 것이 제주도에 내려가 유배생활을 할 때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벼슬자리를 할 때에는 그저 그 당시 중국 청나라 문장가들의 글씨체를 흉내내기 바빴었는데, 가장 힘들고 고달팠을 때 오히려 가장 창조적이고 위대한 예술혼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조선후기의 고질적인 당파 싸움에 휘말려 무려 9년 동안이나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제주 대정리로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가시 울타리에 갇힌 채,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온갖 풍토병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예술 세계는 바로 이와 같이 가장 비참한 굴욕의 시기였던 제주 유배 시절에 화려하게 꽃이 피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 역사를 읽어보면 비단 김정희 선생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이 쓴 불후불멸의 책들이 모두 전라도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얼마나 위대한 책이었던지 월맹 혁명의 아버지 호지명이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기 위해서 필독해야 할 책이 「목민심서」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혼의 밝음과 가리움 내지 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이다"라고 설파했습니다. 제가 이 시간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와 같이 위대한 추사 선생이나 다산 선생의 연구들이 대부분 귀양살이하는 동안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 밧모 섬에 유배당한 요한이 쓴 편지>
저는 김정희와 정약용 선생의 유배 생활에 얽힌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밧모 섬에 유배 가서 요한 계시록을 쓴 요한을 생각합니다. 만일 추사나 다산이 오랜 세월 동안 유배를 가지 않고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했더라면 그토록 위대한 예술과 대학문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귀양살이했던 두 분에게는 뼈를 깎는 아픔이요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이었겠지만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배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찬란한 예술, 그토록 위대한 학문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당하여 고난을 겪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요한 계시록이라는 위대한 책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유배당한 것은 참 잘된 일이며,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요한 계시록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세상 끝 날에 되어질 엄청난 비밀들을 상징이나 암호로 적어 놓았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책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처했던 암울한 상황, 즉 유배당했던 현장을 생각해보면 요한 계시록은 얼마든지 이해 가능한 책이기도 합니다.
계시록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 정부의 박해가 절정을 치달리던 도미치안(Domitian, A.D. 81-96) 황제 때 기록된 책입니다. 도미치안 황제는 자기 스스로를 신으로 선포하고 자기 이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복수를 했습니다. 이와 같은 황제 숭배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었기 때문에 도미치안 황제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박해를 가했습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었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순교의 피가 온 땅에 흘러 적실 때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롬(Jerome)이라는 초대 교회 교부는 요한이 네로(Nero)가 세상을 떠난 지 14년 째 되던 해에 유배를 가서 도미치안 황제가 세상을 떠나던 해에 풀려났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요한이 주후 94년경 밧모 섬에 귀양 가서 96년경에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밧모 섬은 '스포레데스'(Sporades) 라고 불리는 군도(群島, a group of islands) 중에 하나로서 온통 자갈과 바윗돌로 되어 있던 아주 황폐하기 짝이 없는 섬이었습니다. 넓이가 한 5마일 정도 되고, 길이가 한 10마일 정도 되는 작은 섬이었습니다. 밧모 섬은 소아시아 해변에서 약 40 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로마에서 에베소로 항해할 때 꼭 들려야만 하는 마지막 항구였기 때문에 제법 중요한 섬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 유배는 주로 정치범들에게 주었던 가혹한 형벌이었습니다. 유배당하는 죄수들은 공민권을 박탈당했고 일체의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더욱이 요한과 같이 로마의 황제숭배를 거부해서 유배형을 받는 사람들은 절해고도(絶海孤島)와 같이 인적이 끊긴 오지로 쫓겨나서 혹독한 강제노동까지 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지도자였던 요한이 곧바로 처형을 당하지 않고 유배형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요한은 밧모 섬에 있는 채석장(quarries)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려만 했습니다. 그래서 윌리엄 렘세이 경(Sir William Ramsay)은 요한이 유배 생활을 했을 때 계속해서 족쇄에 묶여 있어야만 했고, 부족한 옷가지, 부족한 음식으로 고생해야만 했고, 맨 땅위에서 잠을 청해야만 했고, 항시 채찍을 든 감시자의 눈초리를 받으며 감옥 안에 갇혀서 살아야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바로 이와 같이 처절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계시록을 썼던 것입니다. 요한은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절벽 꼭대기에 있던 동굴에서 계시록을 썼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점은 유배생활과 같은 고난의 세월이 결코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나, 이웃에게나, 자신에게나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세가 젊었을 때에 혈기를 참지 못하고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바로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모세를 찾아 죽이려고 하자 모세는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자그마치 40년 동안 자의반 타의반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난의 세월은 하나님께나, 이스라엘 동족들에게나, 모세 자신에게 결코 손해보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바로 이 망명 생활, 유배지 미디안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고,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해낼 결심을 하게 되었고, 모나고 혈기로 가득 찬 자신의 인격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서 이 땅으로 유배 오신 분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와 달리 이 땅위에는 많은 시련과 핍박,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위에 망명 오셨기 때문에 오히려 인류를 구속하는 위대한 일을 해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유배 생활은 오히려 하나님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서 영광이 되었고, 온 세상을 위해서는 인류 전체를 구원할 수 있었으며,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만왕의 왕, 만유의 주가 되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많은 점에 있어서 우리 이민자들은 유배 온 것과 같고 망명 온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미국 땅에서 엄청난 자유를 누리고 살지만 우리는 여전히 문화적인 장벽, 언어장벽, 인종간의 장벽을 깊이 절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고달픈 이민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와 있는 유배자들과 조금 전에 말씀드린 김정희나 정약용 선생 등과 같이 유배생활을 통해서 찬란한 업적을 남긴 분들을 생각하면 고난과 아픔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하나님과 이웃과 나 자신을 위해서 큰 축복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유배지에서 발견한 세 가지 보배>
밧모 섬에 귀양 갔다가 계시록을 쓴 요한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유배를 통하여 세 가지의 보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① 요한은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요한이 만일 편안하고 자유롭게 신앙 생활했더라면 계시록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듣고 계시록을 쓰게 된 것은 요한이 밧모 섬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9절 전반부에서 요한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여기서 '환난'(persecution, thlipsis)과 '나라'(Kingdom, basileia)와 '참음'(patient endurance, hypomone)이라는 세 글자를 주목해 보십시오. 요한은 먼저 그 당시 도미치안 황제 하에서 엄청난 핍박과 순교를 당하고 있던 형제 기독교인들의 환난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그들과 똑같은 환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은 단순한 환난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Basileia,' 즉 천국의 소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죽음도 눈물도 고통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천국에 대한 비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비전과 소망 때문에 온갖 환난과 핍박을 다 이기고 꾸준히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요한은 밧모 섬에서 귀양살이 할 때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서 인류를 대속해 주셨던 예수님만 본 것이 아니라, 현재 부활의 주로 고통 당하는 성도들을 한없이 위로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장차 구름을 타고 심판주로 오실 미래의 예수님을 다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와 같이 평소에 편안히 신앙 생활할 때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세 시제(tenses)의 모습을 다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민 생활이라는 유배지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이 어떻게 이민 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있냐고 반문하신 적이 있는데, 여러분 모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고생과 눈물과 아픔이 오히려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② 요한은 이웃을 발견했습니다. 본문 11절을 한번 보세요.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계시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주시는 예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함께 고난 당하는 여러 교회의 형제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계시록은 그 기록 동기가 순전히 도미치안 황제로부터 부당한 핍박을 받는 형제들을 위로하고 용기와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는 고난을 받고 있지만 장차 심판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적-그리스도(anti-Christian)의 세력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비전을 주기 위해서 쓰여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고생을 해야지만 인간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민 생활이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겸손해지십시오! 여러분과 똑같은 고통을 당하는 이웃을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유배 생활은 이웃에 눈을 돌리게 해서 그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려는 자비의 마음을 만들어 줍니다!
③ 요한은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 귀양 와서 신세 한탄을 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그와 같은 고난의 시기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자각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환난과 핍박의 시기에 해야 할 사명은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다가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주로 오셔서 모든 불의한 세력들을 멸하시고 공의를 실현하실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성도의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시고 상처를 아물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힘써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와 같이 검열이 심하고 로마 정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이와 같은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전할 수 없으니까 요한은 로마 당국이 도저히 알아보지 못하도록 부득불 여러 가지 상징과 암호를 사용해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로 귀양 가기 전에는 아주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조선은 물론이고 동아시아에서 제일 가는 학자요 문필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제주도로 귀양살이 가는 도중에 전주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전주 지역에는 명 서예가로 이름을 크게 떨치던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조선 전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천하의 명필 추사 선생이 전주에 들린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자기 집에 추사 선생을 초대했습니다. 자기가 쓴 붓글씨를 보여 주어서 평을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천하의 대가였던 김정희 선생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소박한 마음씨 하나로 모셨던 것이지요. 그러나 추사 선생은 마치 무슨 큰 모욕이나 당한 것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딱 한 마디를 던졌다고 합니다. "노인장께서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무례하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안하무인격이었던 추사 선생을 창암의 제자들이 몰매를 줄 작정으로 쫓아나갈 때 창암이 이들을 가로막아서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추사 선생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모난 성격이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뼈를 깎는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 옛날의 도도하고 교만했던 추사의 모습은 사라지고 겸손하고 어진 선비의 모습으로 낮아지고 부서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9년 동안의 제주 유배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던 추사 선생이 전주에 들렸을 때, 옛날에 이삼만 선생의 붓글씨를 모질게 비판했던 것을 충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사는 이미 고인이 된 이삼만 선생의 묘소를 직접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칭송하는 묘비명까지도 썼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어려운 일에 처하고 고난을 겪게 되면 겸손하게 됩니다. 피조물로서 형편없이 연약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잘 나갈 때에는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 사람은 자기에게 정직해지고 진실해지게 됩니다. 우리의 이민 생활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은 장애물이 있고 많은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는 이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사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민이라는 유배 생활 속에서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맺는 말>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에 유배 가지 않았더라면 추사체를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약용 선생이 귀양살이하지 않았더라면 「목민심서」를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쫓겨가지 않았더라면 출애굽의 영웅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서 이 땅위로 망명 오지 않으셨더라면 인류 구원의 대업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가지 않았더라면 계시록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뜻이 계셔서 우리를 미국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들을 하필이면 미국 땅에 보내 주셨는가를 겸손하고 진지하게 물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대답이 어떠하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고난이 사람을 만듭니다! 고난이 인생을 깊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하나님과 이웃과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키 큰 나무숲을 지나니 내 키가 커졌다 깊은 강물을 건너니 내 혼이 깊어졌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 71).두려워하지 말라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
계 1장 20절 / 마경훈목사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성령에 감동된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비밀스러운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성령의 감동 없이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문자만 알뿐 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성령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성경이 이해되고 믿어집니다.
성령에 감동되면 영적인 비밀들이 알아지고 깨달아집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는 사람은 육체와 물질을 보지만 성령의 감동이 있는 사람은 비물질인 영계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는 사람은 현실적인 문제만 보게됩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는 첫 번째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16절까지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성령에 감동된 사도 요한에게 하나님께서 첫 번째 비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 것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비밀입니다. 골1:27은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 6:44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가지 비밀을 밝히는 계시록에서 첫 번째 나오는 것은 모든 비밀의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풀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도 예수 그리스도로 풀리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비밀의 첫 번째 문입니다. 첫 번째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다음 문을 통과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도 영적인 축복도 없습니다. 영생과 천국의 문도 첫 번째 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골2:3에서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치 집문서를 가진 사람이 집의 주인이고 통장과 도장을 소유한 사람이 통장 속에 있는 돈을 소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분속에 있는 생명, 능력, 축복 등을 가진 것입니다.
첫 번째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두 번째 가르쳐주는 비밀이 일곱별의 비밀이며 세 번째 비밀은 일곱 교회의 비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기 원하는 내용이 두 번째와 세 번째 비밀입니다.
1. 일곱 별의 비밀을 살펴봅니다.
여기 나오는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말합니다. 11절에 보면 일곱 교회의 이름이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일곱 교회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고 보면 됩니다. 7이라는 숫자가 완전수입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상의 모든 교회를 말합니다.
일곱 별인 교회의 사자는 당시의 교회의 지도자를 말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주님의 교회를 맡아서 목양 하는 목회자를 말합니다.
2:1에서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능력을 상징하는 오른 손으로 붙잡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저는 지난 금요일 저녁에 설교할 본문을 위하여 기도하다가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받고 나니 얼마나 용기가 생기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저의 능력이 부족해서 괴로울 때도 있었고 또 저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때문에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교회 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지혜로운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고 나니 얼마나 용기가 생겼는지 모릅니다. 주님이 저를 붙잡고 움직이시면 당해내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으며 저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이 저를 붙잡으시면 저의 능력이 약해도 상관없습니다. 복싱글러브는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글러브를 끼고 있는 사람의 손에 능력이 있기 때문에 글러브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 있던 모세도 홍해 앞에서는 무능했지만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시는 주님이 모세를 붙잡으시니 홍해도 갈라졌습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만 용기를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의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은 너무나 강하고 교회는 너무나 약했습니다. 세상은 강력한 힘으로 교회를 핍박했으며 교회의 지도자들의 생명은 정말 바람 앞에 등불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붙잡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주시는 용기를 모든 성도들이 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교회의 별인 목회자만을 붙잡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붙잡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41:10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41:14-15을 보십시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여기서 야곱이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연약한지 지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지렁이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처럼 만들어서 산 같은 문제도 쳐서 부수게 하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사43:1-2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지명하여 부르신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불 시험도 물 시험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르지도 침몰하지도 못한다는 약속입니다.
롬8:35-39을 보면 좀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세상살이 힘드십니까? 두렵습니까? 염려가 됩니까? 용기를 가지십시오. 일곱 교회의 별을 붙잡고 계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붙잡고 계십니다.
2.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을 살펴봅니다.
여기서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를 일곱 금 촛대로 보여주시는 주님의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촛대는 빛을 발하여 세상을 밝히는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해야 세상은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유지되는 것은 세상의 등불인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길에가로등이 필요한 것처럼 어두운 세상에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신앙은 투명하게 세상에 비춰지는 것이 좋습니다. 마치 선팅한 자동차처럼 세상의 잡다한 것들로 교회를 포장해서는 빛이 막혀서 세상을 밝힐 수 없습니다.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무식하리만큼 기도하고 무식하리만큼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볼 때 고상해 보이는 방법을 선택해서 교회가 세상사람들이 보기에 무식해 보이지 않게 포장하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의 생명을 세상에 나누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전략입니다. 씨앗을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씨앗은 순수한 씨앗의 상태에서 심겨져야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맺는 것입니다. 씨앗을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서 코팅을 해보십시오. 어떤 씨앗은 노란색 코팅지로 코팅하고 어떤 씨앗은 빨간색 코팅지로 코팅을 합니다. 어떻게 될까요? 코팅된 씨앗은 절대 싹이 나지 않습니다. 자랄 수도 없고 열매 맺을 수도 없습니다. 씨앗은 순수한 씨앗이어야 합니다.
일곱 촛대가 나오는데 그 일곱 촛대가 금 촛대입니다. 은이나 놋 촛대라고 말하지 않고 금 촛대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세워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벧전1:7에 보면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을 금으로 비유하며 믿음의 시련을 금을 단련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래 교회가 세워질 때 믿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마16장에 보면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서 '이 반석'이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믿음에 있습니다. 교회는 보이는 유형교회와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가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믿음이 없이도 가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교인으로 등록하고 믿음이 없어도 믿는척하여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어도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믿음이 없이도 목사고시 봐서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는 믿음이 없어도 가입하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믿음 없이 가입이 불가능합니다. 그가 목사라 할지라도 그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으면 가입이 안 되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 무형교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유형교회는 가입이 되지만 무형교회는 가입이 안 됩니다. 믿음으로 무형교회에 가입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에 가게 됩니다.
교회는 선동 잘하는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져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돈으로 움직여져서도 안됩니다. 돈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움직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그 말씀을 이루는데 얼마나 되는 돈이 필요한지 계산해서 계산이 되면 일하고 계산이 안되면 일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돈으로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드릴 만한 돈이 없어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하다가 손해를 봐도 말씀대로 하는 것이 믿음으로 움직이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지난 몇 년 동안 믿음으로 움직였습니다. 교회를 이전할 때 그리고 교회의 행사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움직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좋은 결과를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농촌교회 건축이라는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교회 세 인상과 맞물려 있는 상황이라 다소 당황스럽지만 이번에도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모든 성도들이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촛대는 초를 꼽는 촛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이 공급되어 불을 밝히는 등대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시대 성막에는 살구꽃 모양을 한 등대가 있었습니다. 가운데 한 줄기가 있고 좌우로 세 줄기씩 총 일곱 줄기가 있었습니다. 그 등대에는 아침저녁으로 감람유를 공급해서 빛을 발하도록 했습니다. 등대에 공급했던 감람유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금촛대가 교회라면 기름이 공급되어야 촛대가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을 때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다는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교회는 성령의 강림으로 세워졌습니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고 불의 혀 같은 것이 갈라져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였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세워진 것처럼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도 성령의 역사로 됩니다. 고전12:3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사람들 속에 믿음을 일으키실 때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며 예수를 믿어야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이겨나가는 것도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구약시대의 비유를 통해서 현대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광야 횡단 사건입니다. 광야 교회가 광야에서 40년간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와 보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구름기둥은 성령의 생명사역을 보여주는 것, 불기둥은 성령의 능력사역을 보여준다고 봐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존재합니다. 오순절 전에 120문도는 힘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시자 담대하게 설교하며 예루살렘을 뒤집어 놓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능력은 제자들에게 있던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공급해 주신 능력이었습니다.
지금 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교회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독특하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 교회들의 특징을 오순절 계통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고 열렬히 성령의 능력을 힘입기를 원하는 교회들입니다.
우리 소망교회는 특별히 기도에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역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없는 교회, 성령 없는 신자는 기름 없는 등불과 같습니다.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습니다. 모양은 있으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2:1에서 우리 주님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교회 가운데 주님께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6:1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라가 걱정돼서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던 이사야의 영안이 열렸습니다. 그가 보니 높이 들린 보좌가 보였습니다. 그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옷자락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님의 몸인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광야 교회에 함께 하셨던 것처럼 지금은 성령으로 교회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
우리는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마16:18에서 주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망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소망교회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강건함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옥권세 세상권세 마귀권세가 이길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로마도 공산주의도 교회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일원이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믿음으로 무형교회의 일원이 되면 영원한 천상교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허무와 죽음의 정복자 예수
계 1장 17~20절 / 옥한흠목사
사람은 원래 의심하기를 잘합니다. 그래서 바른말을 해도 잘 안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더구나 황당한 소리를 하면 안 믿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황당한 말이 무엇일까요?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만큼 황당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가장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제자들을 통해 성경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로 작정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노상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자주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인자가 예루살렘에 가면 사람들에게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후에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람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 무슨 말씀인가?' 이처럼 못 알아 들으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 지낸 지 사흘째 되던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달려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제자들에게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 소리가 너무 허탄하게 들려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같아서 안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자들이 여인들을 보면서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을 보면 더 그랬을 것입니다. 너무 예수님을 그리워 하다가 정신이 약간 이상해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무엇에 씌워서 정신이 약간 이상해지니 보아서는 안 될 허깨비를 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열 제자가 있는 방에 나타나셨습니다. 손을 내미시고 "내가 부활했다."고 하시면서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주님을 만나고는 제자들이 더 이상 의심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는 도마라는 제자가 빠져있었습니다. 나중에 도마가 돌아와서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자 안 믿었습니다. '이 형제들이 며칠 동안 방에 갇혀 있더니 정신이 좀 이상해져서 유령을 보았구나. 유령을 본거야.'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손바닥에 있는 못 자국을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밀어 넣어서 그 창에 찔린 자국을 실제로 확인한 다음에라야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당신들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당신은 유령을 봤어. 진짜 부활했다면 몸이 있어야 되지 않는가? 따라서 몸을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 수가 없다."
도마의 이런 마음을 주님이 아시고 나중에 찾으신 다음에 도마에게 손을 만지게 하시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게 하셨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도마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며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 우리가 이와 같은 제자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고, 더욱이 죽은 지 사흘 만에 어떤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은-비록 그 사람이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는 믿기가 어려운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부활은 확실히 우주를 진동 시키는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그 일이 너무나 신비스럽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들의 구성이 이상했기 때문에 부활을 믿는 것을 영원히 어려운 문제로 만들어 버렸다." 저는 이 말에 수긍합니다. 예수님이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굴러 나가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시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병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신비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믿기가 어렵죠? 게다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증인들이 여자들인 것입니다. 그 당시 여자들은 재판석에서 증인으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인식을 했습니다. 여자들의 입에서 무슨 옳고 그른 말을 분별할 수 있겠느냐며 증인으로 채택도 안 하던 시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자는 한동안 일곱 귀신에 들려서 횡설수설하고 동네를 쏘다니던 사람이 아닙니까? 학자들의 말을 들으면 창녀였을 지도 모른다고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가 살았다고 떠드니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꼭 증거 하시려고 한다면 차라리 빌라도 앞에 나타나셔서 "내가 살아났느니라. 봐라." 하시면 간단할 것 같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나가서 예수님이 산 것을 자신이 보았다고 몇 마디만 하면, 그 소문이 유대나라로 와서 로마 전국으로 좍 퍼져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다 믿었을 것입니다. "아 빌라도가 보았다는데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이럴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나 그 외 하찮은 여자들 입에서 예수가 살았다고 했으니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따라서 성경에 나와있는 증인들을 보아도 그렇고, 여러 가지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도 그렇고, 믿고 싶어도 도무지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증거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수긍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겠다고 마음에 작정하고 성경을 보는 사람에게는 안 믿을 수 있는 이유와 근거가 얼마든지 찾아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보면 또 믿을 수 있는 이유와 근거가 충분히 있습니다. 성경은 양극을 달립니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사람을 끝까지 믿지 못하게 막아버립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믿을 수 있도록 열어줍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부활한 몸을 보여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은 사람은 그 누구에게도 자기 몸을 보여주시지 않으신 것처럼, 믿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끝까지 믿지 않을 수 있는 많은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내도록 성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안 믿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시실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빠가 죽어서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르다야,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느니라.' 그 다음에 '네가 이것을 믿느냐?' 하고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 직접적인 관계가 있게 되려면 꼭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런 백성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면서 얼마나 흡족해 하실까요?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보니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로마 군인들로부터 시작해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수 백 명에 이릅니다. 한두 명이 보았다고 해도 믿어야 될 일인데 수백 명이 그 예수님을 목격했다는 것을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놀라운 것은 제자들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며칠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비겁하게 틀어박혀 있던 제자들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방문을 박차고 나와서 예수 살아나셨다고 외치는 사람으로 바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 근거도 없이 그렇게 미친 짓을 한다면 진짜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근거가 있으니 제자들의 태도가 표변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습니까? 더 놀라운 증거가 있습니다. 왜 대제사장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까?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자고 소리치던 폭도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면 얼마든지 뒤집고 다니면서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거해서 예수께서 살았다는 자들을 핍박하고 감옥에다 집어 넣을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진실 앞에서는 침묵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경의 외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더 큰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적 증거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성경을 볼 때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안 믿을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성령이 믿게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의심합니까? 이처럼 성령의 내적증거가 있습니다. 외적 증거, 내적 증거가 서로 일치하면서 나도 모르게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게 되는데, 누가 여러분에게서 이 믿음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이 놀라운 믿음이 있음을 하나님 앞에 감사합시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도록 해 주신 우리 주님을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그는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손에 쥐신 가장 존귀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은 이미 90이 넘은 고령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던 그 장면을 본지가 60년이 넘었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을 본 것도 60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때가 벌써 6,70년이 넘었습니다. 긴 세월이 지나고 나서 그가 밧모섬에 귀향을 갔습니다. 거기서 기도하다가 환상 가운데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60여년 전에 보던 예수님이 아니셨습니다. 60여년 전에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만 해도 뚫어져라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밧모섬에서 요한을 찾아오신 주님은 너무 거룩하시고 너무 영광스러워서 도대체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앞에 죽은 사람처럼 엎드러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그의 몸에 손을 얹으시고 어루만지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두려워 말라 요한아,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곧 산자라." 영원히 살아있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전에는 너도 알다시피 죽었지만 이제는 살아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은 주님께서 이 죽음, 이 사망을 지옥에 던져놓고 다시는 열고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철저히 잠가 버리고, 그 열쇠를 손에 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 손에서 열쇠를 다시 빼앗아 음부의 문을 열고 사망을 풀어 놓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요한이 보았던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죄가 이 세상에 가져다 준 허무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여러분, 죄로 인해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되었는지를 우리는 실존적으로 자주 느끼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독백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이가 스무살만 넘어가도 대충 압니다. 실존적으로 느낍니다. 어떤 시편 저자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주께서 모든 인생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나이까.' 허무가 무엇입니까?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야 될 어떤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인생이 너무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의미하고 비참하고 무상한 것이 결국 인생의 허무를 결정하는 요인들입니다. 우리 이것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인생의 허무를 절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명직씨라는 분이 오래 전에 찬송가를 지었는데 그 제목이 허사가입니다. 오래된 찬양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는 조그만 애였을 때입니다. 당시는 8.15 해방이후 나라가 너무나 시끄럽고 어려웠으며, 얼마나 비가 오지 않았는지 보릿고개에 거의 굶다시피 하면서 하루하루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도대체 인생을 살 맛이 없던 때였습니다. 그러니 많은 분들이 교회에 모여서 이 허사가를 잘 불렀습니다. 저도 어른들 틈에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따라 불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처량한지요.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도 바람잡이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땀 흘리고 애를 써 모아 논 재물 안고 갈까 지고 갈까 헛수고로다 적신으로 왔으니 또한 그 같이 빈손 들고 갈 것이 명백잖은가
12절까지 있습니다. 이런 찬송을 부르면 자살하기 딱 좋습니다. 살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인생사의 본질입니다. 미우라 아야꼬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를 아시죠? 그분은 인생허무와 0이라고 하는 숫자를 비교하면서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0이라는 숫자는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0에다가 1억을 곱해도 0이 되고, 0에다가 1조를 곱해도 여전히 0이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 소중히 다루는 우리의 생명, 우리의 명예, 우리의 행복도 0과 곱하면 전부다 0에게 다 삼킴을 당하고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데, 그래서 0이라는 숫자는 기분 나쁜 숫자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서 이 무서운 허무를 몰아내셨습니다. 인생허무의 주범인 죄를 우리에게서 씻어주시고 이 죄의 손아귀에서 자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허무가 의미로 바뀌고 무가치가 가치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전 것은 다 지나갔습니다. 허무를 끌어안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짓던 이전의 내 자아는 완전히 지나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나는 새로운 자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았습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허무를 먹고 살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부활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움직이는 내 몸을 가지고 영광의 주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 거룩한 예배가 되도록 주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었는데 여기에 무슨 허무가 따라다닐 수 있습니까? 아무리 세상적으로 볼 때 실패한 사람일지 모르지만, 머리가 둔해서 경쟁에서 탈락된 볼 품 없는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나를 어떻게 보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거룩한 존재로 보십니다.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화려환 영화를 누리고 많은 사람에게 존귀와 칭찬을 받는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이 자체가 중요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피조물이 모든 피조물을 다 가지고도 메울 수 없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 공허를 부활하신 주님이 메워 주시고 만족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허무가 우리를 더 이상 쫓아 다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주 듣는 예화가 될 지 모르겠지만 유익하기 때문에 한번 더 들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 상원의 원목이었던 비숍 감독이 만든 아름다운 우화입니다. 팔레스틴 어느 산 위에 쭉 뻗은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가지를 흔들면서 자기의 아름다운 모습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세 그루의 나무 중에 하나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이 세상에 쓰여지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들보가 되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 싶어.' 어느날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면서 올라오더니 도끼로 자기를 찍어 끌고 내려가서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한 후에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십자가 형틀을 만들어버렸습니다.
또 한 나무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에서 쓰임을 받는 날이 온다면 나는 예루살렘 왕궁에 있는 큰 기둥이 되어 왕의 영화를 자랑하는 몸이 되고 싶다.' 어느날 사람들이 오더니 역시 도끼로 자기를 찍었습니다. 그리고는 끌고 내려갔습니다. 그러더니 마구간 옆에서 톱으로 켜고 대패질을 한 후에 짐승에게 여물을 담아주는, 볼품 없는 조그마한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남아있는 한 나무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젠가 쓰임을 받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오대양을 누비고 다니는 크고 화려한 배가 되고 싶다.' 어느날 사람들이 오더니 도끼로 찍어서 갈릴리 바다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톱으로 자르고 대패질을 해 가지고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를 만들었습니다. 세 그루의 나무 모두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지났을까요. 마구간의 구유에 와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린 아기가 되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어린 아기를 받아 누이는 침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또 갈릴리에 있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를 어느날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바닷가에 나오셔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위로 올라오시더니 바닷가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천국복음, 영광스런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 신세가 하루아침에 그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강단이 된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의 형틀이 된 그 나무가 어떤 청년이 와서 자기 위에 눕힘을 당하고 못질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전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면서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쏟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위에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양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를 올려드리는 제단이 바로 자기가 된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는 그 제단으로 쓰임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우화입니다.
여기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잘 모를 때 젊은 기분에 한참 자신 만만할 때 '나는 예루살렘의 대들보가 되리라. 나는 예루살렘 왕궁의 기둥처럼 살 것이다. 나는 오대양을 누비는 화려한 배가 되리라.' 하며 아름다운 꿈들을 나름대로 다 가지고 인생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을 이루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옥 목사를 위시해서 우리 모두가 대부분 자기 꿈보다는 좀 못하게 인생을 살다가 갑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10년, 20년 살다가 보면은 갈릴리에 있는 비린내 나는 고깃배처럼 살 수도 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는 마구간의 구유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지지리 불행하고, 고통하고, 눈물 흘리고, 끔찍한 역경의 길을 걷는 십자가와 같은 인생을 살다가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허무를 극복하시고 나서는 우리 모두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말구유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을 눕히는 침대로, 비린내 나는 고깃배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전하는 강단으로, 십자가 형틀과 같은 끔찍한 존재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단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변화된 존재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숨이 막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아직도 철이 덜 든 젊은이들이 열이면 여덟이 이민을 가고 싶다고 하는 충동을 느낄 정도겠습니까? 눈 앞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지 다들 마음이 불안합니다. 처자를 거느린 가장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내들은 불안해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다가 교회에 오면은 그냥 울음을 터뜨리고 기도하는 소리를 가끔 듣습니다.
이렇게 어둡고 암담한 현실이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비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절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존귀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존귀한 존재를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고 못 본 체 하시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내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로 비관하지 마십시오. 허무를 가지고 한숨 쉬면서 눈물을 짓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마세요.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할렐루야.
죄는 이 세상에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죽음보다 이 세상에 강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음이 왕 노릇 한다고 말했습니다. 폭군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계곡에 서 본일이 있습니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선에 서 본 일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한밤중에 당신의 허파 속으로 공기를 불어 넣으며 펌프질을 하는 기계 소리를 누워서 들어 본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뼈만 앙상하게 남아 나중에는 그 눈빛에 있던 생기의 빛마저 서서히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본 일이 있습니까? 만약 그런 경험이 있다면 이 죽음의 계곡은 당신에게 낯선 곳이 아닐 것입니다.
그곳은 황량한 계곡입니다. 그 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계곡 밑을 내려다 보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 계곡 끝에 서게 되면 모든 삶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못한 것이 금방 구별이 됩니다. 그 자리에서는 내가 무슨 차를 타고 왔느냐, 내가 어떤 집에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 관심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했고, 내가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지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안중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인생의 성패, 승자와 패자, 성공자와 실패자라고 하는 어떤 구별도 그 자리에서는 하등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만큼 죽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새파랗게 질리게 만들고 완전히 기를 꺾어 버립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이 무서운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이 예수님을 무덤에다 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돌을 굴려 가지고 그 어구를 막았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되어 가장 세도가 당당하다는 빌라도의 어인을 가지고 봉인까지 했습니다.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군사들을 동원해 밤낮없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 순간을 보면 죽음이 이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흘만에 그 무덤에 갇혀있던 예수그리스도가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이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죽음이 손을 쓸 수 있습니까? 다시 살아나는 자 앞에 죽음이 힘을 쓸 수 있습니까? 지키는 것도 헛수고요, 인봉해 놓은 것도 쓸데없는 짓이요, 아무리 군사를 동원해도 다시 상황을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찬송가 150장에 보면 이런 사실을 잘 묘사한 곡이 나옵니다.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주/ 할렐루야/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 어두움을 이기시고 나와서 성도 함께 길이 다스리시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님 앞에 죽음이 무슨 힘을 쓸 수 있습니까? 죽음은 예수님 앞에 정복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이상 우리에게는 진정한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죽음이 죽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놓고는 죽음을 잔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시인들은 죽음을 일컬어 요단강을 건너가는 수영이라고 했습니다. 534장에 보면 그 가사가 나오지 않습니까? '요단 강 가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가네.' 이것이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 요단 강 가에 서 있습니다. 건너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친구들 중에 먼저 건너가는 자가 있지 않습니까? 물을 가르면서 신나게 건너가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내 친구 건너가네 저 건너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환하도다.' 수영입니다. 바울은 더 멋진 말을 했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썩을 것을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15:42) 다시 사는 과정이요, 약한 것을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과정이요,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사는 과정이요, 육의 몸을 심고 영의 몸으로 다시 사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로는 우리 모두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는 부활하신 주님과 영원히 살 그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모 신문에 연재하는 부산대 길원평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고 다시 한번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유물론 사상에 젖어 허무 주의에 빠져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유학을 가서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교수가 되어서 부산대학으로 돌아왔는데 지금도 자기가 예수님 때문에 죽지않고 영생을 할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면 가슴에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기쁨하고도 비교를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쾌락과 기쁨은 겨드랑이를 간지럽혀 나오는 웃음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 주는 기쁨이야말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스며 나오는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가끔 새벽에 일찍 잠이 깰 때가 있다고 합니다. 침대에 누워서 '나는 이제 영원히 사시는 주님, 그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그 나라에서 보낼 존재로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몰라서 자기 몸을 꼬집어 본다고 합니다. 얼마나 흥분되는지, 얼마나 황홀한지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는 것 같다는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런 존재가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생명의 보좌가 되었습니다. 이 말을 하니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였던 메넬리크 2세가 약 100년 전에 자기 나라에 흉악범들이 너무 많아서 사형을 시키는 일이 자주 있었나 봅니다. 고민을 했습니다. '목을 매달아 죽이자니 매달려 있는 꼴을 보기가 싫고, 총으로 쏴 죽이자니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모습이 너무 참혹하고, 이것을 그렇다고 살려 놓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간단하게 죽이는 방법이 없을까?' 이 때 좋은 소스가 들어왔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면 단추 하나만 누르면 몇 초 사이에 의자에 앉아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사람이 깨끗이 죽는 그런 멋진 기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를 시켜서 그게 무엇인지 알아봤더니 전기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참 좋은 거다.' 하고는 빨리 주문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드디어 그 물건이 배달되었습니다. 그런데 단추를 눌러도 작동을 안 합니다. 왜 작동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더랍니다. '우리나라에는 전기가 없습니다. 폐하.' 이름이 전기의자라고 하니 그저 의자 이름인 줄 알았지 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고 그래서 말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놓긴 했는데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황제가 고민고민 하다가 너무나 의자가 멋있게 생긴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사람 죽이는데 쓰지 못하면 나라도 앉자.'고 하고 자기가 앉는 보좌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는 의자가 왕이 앉는 보좌가 된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십자가, 그것은 사형틀이고 사형의 도구였지만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 하심으로 그 십자가는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보좌가 된 것 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우리 안에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 생명을 누리면서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를 우리가 가슴에 담고 살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으면 허무가 날라 갑니다. 믿으십시오. 죽음의 불안에서 여러분이 해방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해서 허무에 끌려 다니고 죽음의 공포 아래서 떨고 있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방치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치던 제자들이나 초라한 여인들처럼 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여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존귀한 존재가 되도록 합시다. 이것만이 이 나라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 입니다. 우리 모두 이 메시지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계 1:17-20 / 김성수목사
오른손에, 예수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의 비밀! 그리고 금 촛대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인제 우리가 공부했구요. 19절에,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이라는 것은, 전체 교회사, 구속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은 17절, 18절을 여러분께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고, 1장을 드디어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한 구절들을 공부하면서, 능력과 권세와 위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교회를 오른손에 꼭 붙들어, 보호하고 계시며, 주석 같은 두 발로,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기억나시죠? 여러분!
자, 오늘 본문을 보시면,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도 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려져서, 죽은 자 같이 됩니다. 여러분!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어떤 느낌이 드세요? 3년 반 동안, 함께 숙식을 같이 하던 스승이에요. 그 중에서, 유독 사랑을 많이 받았던 ‘주의 사랑하는 자!’ 요한이에요.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보자, 그 발 앞에 엎드려져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 죽은 자 같이 되었다! 그런 모습은,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가 있죠?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동일하게 나타났던 현상이죠? 사사기 13장 22절로 가겠습니다.
(사사기 13:22)
22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이게 삼손의 아비가 한 이야기예요. 삼손의 아비 마노아와 그 아내가. 하나님을 보고 지른 비명이라고요. ‘아!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을 거야!’ 다니엘서 10장 5절로 가겠습니다.
(다니엘 10:5-6)
5 그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6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을 번개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쇠의 소리와 같더라 (우리가 계시록 공부한 부분하고 아주 흡사하죠?)
7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 하였고 나에 힘이 다 없어졌으나
9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리라 (그러죠?)
다니엘은 하나님을 보자마자 온 몸에 힘이 빠졌고,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었다고 그럽니다. 여기 개역성경에서, ‘깊이 잠들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담’은 마치 죽은 것처럼 정신을 잃은 모습을 묘사할 때, 쓰는 단어예요. 라담! 이사야서 6장 5절로 가겠습니다. 이사야는 어떻게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한 번 보세요.
(이사야 6:5)
5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도 하나님을 뵈었는데, 그 하나님을 보자마자, ‘다마키오이’ 그랬다고요. 다마키오이! ‘다마’는 ‘파멸하다, 파괴하다’ 이런 뜻이에요. ‘나는 이제 파멸하게 되었구나!’ 이런 말이에요. 이 말은, 지옥 앞에서 심판을 인제 받을 자가, 두려워서 지르는 비명이에요. 다마키오이! 이런 뜻은! ‘와! 나는 인제 큰일났구나!’ 이런 뜻이에요.
이사야가 누구예요?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종이잖아요? 그런데 그도,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도, 그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직접 딱 보니까, 다마키오이! ‘난 인제 죽었구나!’ 그 앞에 서니까, 자기의 죄와 추악함과 초라함이, 완전히 드러나게 돼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다마키오이! ‘나는 인제 죽었구나! 화로다!’ 지옥 앞에 선 사람이, 지르는 비명을 이사야가 지르는 거예요. ‘나는 도저히 저 빛을 감당할 수 없는 자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거죠. 에스겔도 마찬가지예요. 1장 28절 보세요.
(에스겔 1:28)
28 그 사면 광체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그래요.)
여기서도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엎드렸다.’ 그러죠? 여기서 ‘엎드리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나팔’도 ‘죽은 것 같이 되다’라는 뜻이에요. 개역성경으로만 보면, 여러분들이 조금, 그 감동이 덜 하실 거예요.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광의 빛을 보고 어떻게 됐습니까? 눈이 멀었죠? 출애굽기 33장 18절 보세요.
(출애굽기 33:18-20)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자가 없음이니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모세가 누구냐고요? 모세가? 그런데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그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인지! 어떠세요? 여러분! 하나님은 그토록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수요 성경공부 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우리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면, ‘다마키오이’하고 ‘난 이제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소리 지를 수밖에 없는 그런 자들이에요.
지금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 하나님 앞에 서면, 죽은 듯이,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종들이 보고도 두려워서 벌벌 떨었던 그 천지의 주재! 만유의 주! 그 하나님이, 새 언약! 우리에게 하신 새 언약을 성취하시고, 이제 그 약속대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세요. 여러분 이게 믿겨 지시냐? 말이에요? 그게 그리스도인이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지금 살펴본 것처럼,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도. 그 빛을 보고서는. 완전히 두려워서 벌벌 떨었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들어와 계신다 말이에요. 그게 믿겨지시냐고요? 제가 보기에는. 아무도 안 믿는 거 같아요. 아무도 안 믿는 거 같아! 그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다는데, 아무도 안 믿는 거 같아요. 사실이에요. 우리 안에, 이 무서운, 이 두려운, 이 크신, 이 엄위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다고요. 요한복음 14장 16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16)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또 다른 보혜사가 누굽니까? 성령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 이제 영원히 함께 계세요. 영원히! 마태복음 28장 20절이요.
(마태복음 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내가 성령으로 너희와 영원히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래요.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으시다면, 지금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함께 계십니다. 바라만 봐도 눈이 멀고, 죄인은 그 앞에 서면 그냥 죽어버리게 되는, 그 천지의 주재이시며,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여러분은, 이렇게 눈도 안 멀고, 죽지도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게 여러분의 신분이에요. 그게 교회의 신분이에요.
여러분들은 이제 눈도 안 멀어요. 여러분들은 인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하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여러분은 끝도 없어요. 더더군다나 우리 하나님이 여러분을 ‘친구’라고 불러주신다니깐요. 여러분! 이게 감격스럽지 않으세요? 여러분을 ‘친구’라고 불러주세요. 이사야가 보고, 에스겔이 보고, 다니엘이 보고도, 죽은 듯이 기절할 수밖에 없었던 그 하나님이, 여러분보고 ‘친구다!’ 그런다고요. 그리고 ‘너희들은 내 딸이다!’ 그래요 그리고 ‘너희들은 내 아들이다!’ 그래요.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가리켜서, ‘너희들은 내 형제다!’라고 이야기해준다고요. 그게 기독교예요. 여러분!
여러분! 박쥐나 올빼미는, 빛에 노출이 되면 죽습니다. 쥐나 바퀴벌레도, 빛을 비추면, 감당을 못하고, 어디로 숨기 바쁘죠? 그렇게 죄인들에게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두려움과, 경악의, 심판의 빛입니다. 똑같은 죄인들이었던 우리에게, 그 빛이 비추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빛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평안하고, 기쁘고, 안도하게 되어 있어요. 햇빛이 식물을 키워요. 따뜻하게 보호해줘요. 그런데 그 빛이 어떤 어둠 속에 있는 존재들에게는. 두려움과 경악의 빛이 된다고요. 여러분들에게는, 그 빛이 따뜻한 보호의, 안도의, 평안의 빛이 되어 달라 그래요 그 사실이 여러분 복음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께서 죽은 것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요한에게, 뭐라고 그러십니까? ‘두려워 말라!’ 그러시죠? 두려워 말라! 우리는 그 하나님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해야 될 존재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교회에게 손을 얹고, 뭐라 그럽니까?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여러분은 이제 그 심판의 주로 오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십니다. 안 좋으세요? 이사야서 41장 10절 보세요.
(이사야 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예수님이 지금 그 얘기하고 계시는 거예요. ‘두려워 말라! 이젠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내가 보호할 거야! 두려워 말라!’ 여러분! 그 사실이 정말 믿게 지신다면, 그 사실보다 뭐 다 거의 여러분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이, 물건이, 사건이 있겠습니까? 정말 그 복음을 알고, 예수를 안다면, 무엇이 여러분을 더 만족하고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겠어요? 그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신데! 도저히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감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야 하는, 그런 자들인데, 지금 이 시대는 그 하나님을 마치 자기 종 부리듯 부리고 있다고요. 그 엄위하신 하나님을 마음대로 불러내어서 복 줘! 부자 되게 해줘! 병 낫게 해줘! 소원 들어줘! 그 하나님을 이렇게 부리고 있다니깐요. 기도하는 거 보면, 전부 그런 내용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경호가 아까 기도하는데, 제가 아주 감동 먹었어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 뭐 요구할게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게 진짜 그리스도인이에요. 뭘 요구하겠어요? 그 하나님이 이미 내 안에 게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라는데! 천지를 소유하신 하나님이 그 분이 나의 기업이면, 그 천지가 다 내거라는 거 아닙니까? 거기에 감동하셔야죠?
마치 지금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문지르면서, ‘지니야! 나와라!’ 이거예요. 오늘날의 기독교는!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니에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크신 분이에요. 18절에 보시면요,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에 열쇠를 가졌노니
그래요. 여기서 ‘산자’라고 번역이 된 ‘호 존’은, 관사가 붙은 현재분사능동태예요.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시점으로부터, 계속 살아계신 분’이란 뜻이에요. 헬라어 현재분사 능동태는요! 이 단어는 구약과 신약에서, 공히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그런 단어였어요. 그런데 그런 단어를, 예수님이 지금 자기를 가리켜서, 쓰고 계시는 거예요. 여호수아 3장 10절 보세요.
(여호수아 3:10)
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 (그러죠?)
지금 여기서는 예수님이 ‘산자다’라고 한 그 단어예요. 사시는 하나님! 리빙 갓(living God)! 그런다 말이에요. 하나님을 표기할 때, 이렇게 ‘사시는 하나님’이라고, 그 속성을 표기한다 말이에요. 시편 42편 2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42:2)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사시는 하나님! 리빙 갓(living God)이에요.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그런다고요.)
제가 신약도 많이 찾아봤는데, 그건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에 제가 알려드릴게요. 히브리어로는 ‘하이 엘’이라는 거예요. ‘엘’이 하나님이죠? ‘하이’가 ‘살아있는’ 하이 엘! 오늘 본문에서 쓰인 헬라어 ‘자오’와 같은 단어에요. 이렇게 산자라는 용어는, 공히 적용된 신적 칭호예요. 그런데 바로 그 단어로, 자신을 묘사하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전에 죽었었다.’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고 계시죠? 죽었었다! 이 ‘죽었었다’라는 단어, ‘에게노맨 네크로스’는 부정과거시제예요. 부정과거! 이 부정과거는 뭐라 그랬어요? 과거에 한 번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 계속 영향력을 미치는 것! 그걸 부정과거시제로, 헬라어는 표현을 한다 말이에요.
그 분에 죽음은 영단번! 한 번에 딱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 영향력은, 이제 세세토록 미치게 된다는 그런 뜻이 있어요. 그 단어의 시제는요! 그래서 지금 이 구절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그 죽음의 영향력이, 오늘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거예요. ‘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오늘날 나에게도 미치고 있구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정말 이 땅에 죽을 수 있는, 그러한 인간으로 오셔서, 실제로 죽으셨고, 이제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다시는 죽을 수 없는 자리로 복귀를 하신 거예요.
여러분! 정확하게 알아두셔야 돼요. 우리는, 죽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자꾸 헷갈려요. 예수님의 죽음! 그 죽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완전한 완제품이 아니에요.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세세토록 살아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죽었었지만, 이제 산자의 자리에 복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예요. 로마서 4장 25절 한번 보세요.
(로마서 4:25)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말이에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어요. 그걸로 끝나면 안 돼요.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돼요.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그분은 살아나셔야만 된다 말이에요. 우리가 죄만 없다고 천국가요?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천국 갔어야죠? 아담과 하와는 뭔가를 지켜야지만, 천국을 갈 수 있었어요. 그죠? 뭐예요? ‘선악과 먹지 말아라!’ 그건 뭡니까? 율법(律法)! 그것을 지켜야만 의롭게 되는 거예요. 죄가 없다고 여러분! 천국 못 가요. 죄가 없는 것 플러스 하나님의 의를 입어야 돼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요구하시는 그 삶을, 그대로 살아내야지 천국 가는 거예요. 이 ‘의롭다 하심’은, 예수님이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전가(轉嫁)된 거예요. 임퓨테이션(imputation)! 우리의 구원은, 전가된 의(義)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거예요.
여러분이 잘 들으세요. ‘전가된 의(義)’라는 것은, 임퓨테이션(imputation)! 우리에게 완전히 인제 덧입혀진 의(義)예요 뭔가 다른 게 더 필요 없는, 덧 입혀진 의(義)! 예수님이 살아나시므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거예요. 의롭다 여겨짐을 받게 된 거예요. 완전한 의가, 완제품이 되어서, 우리에게 이렇게 전가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이 구별하셔야 될 게,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의(義)! 그것도 비슷한 거 같지만, 완전히 달라요. 가톨릭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교리대로 하면, 예수님이 굳이 살아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가톨릭은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원죄(原罪)가 해결되어서, 그들에게 의(義)가 주입되었다고 주장해요. 주사기로 뭘 이렇게 쭉 넣는 거처럼, 의(義)가 주입이 되어서, 이제 우리가 의로운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이야기한다고요.
천만에요. 여러분! 만약에 그 교리대로 따른다면, 여러분 요즘도 맨날 죄 짓잖아요? 그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능력만 주어지면 뭐 해요? 행할 수가 없는데…. 가톨릭은 그 의(義)가 영세를 받을 때, 주입이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들은 영세를 안 받으면 절대 천국 못가요. 우리 세례 안 받으면, 천국 갑니까? 못갑니까?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나 가톨릭은, 그 영세를 받을 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서, 만들어 놓으신 의(義)가, 우리에게 주입된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는 의로운 일을,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고 믿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짓는 죄는? 고해성사로 없앨 수 있다고 믿어요. 고해 성사를 하면, 신부가 벌을 내려요. ‘너 기도문 몇 번 외워!’ 뭐 이렇게! 그러면은 그 죄가 용서된다고 해요. 신부들이 아주 그 사람들한테는 신적 존재예요. 그러니까 교황 어저께 죽으니까, 난리가 나잖아요? 아니에요. 여러분! 목사나 교회 리더들은, 하나님이 세운 가정교사예요. 소모품이에요. 자기를 막 태워서, 열심히 공부해서,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주는 거예요.
목사가 무슨 성직자예요? 아니에요. 여러분! 목사 존경하지 마세요. 나중에 혹시 제가 먼저 죽으면, 태워버리세요. 고해성사도 못하고 죽은 그 죄는? 그들은 성직자들이 죄를 용서해줘요. 그런데 고해성사 못하고 간 사람은 어떡해요? 연옥에 가서, 대충 때우면 돼요. 가서!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가 포함이 되는 거예요. 보태져야 돼요. 그 구원에!
그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 의(義)는 완제품으로 우리에게 전가된 의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로 원죄(原罪)가 해결된 것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열심히 이루어야 한다.’라고 그들은 믿어요. 그래서 그들의 십자가에는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달려있는 거예요.
가톨릭은요! 자기들의 그 원죄 해결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아직도 예수님을 죽은 채로 매달아 놓는 거예요. 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만이, 의미가 있어요. 그거 이상 더 필요가 없으니까, 나머지는 자기들이 다 하니깐요. 행위로 보태고, 선한일 하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니깐요. 우리의 십자가에는 부활하신, 죽으신 예수는 없어요. 이제 우리는 살아나신 그 예수를 믿는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선행을 하고, 종교행위를 해서, 우리의 구원에 뭔가 보태자!’ 굉장히 기특한 발상인 거 같지만, 그것은 큰 죄입니다. 죄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죄예요.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예요. 여러분이 이걸 잘 구별하고 계셔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복음이 정확히 이해되지 않으신 분은,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헌금도 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하는 헌금으로, 여러분이 지옥에 가는 티켓을 사고 있는 거예요. 그분들은요!
복음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여러분들이 뭔가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뭔가를 행하면서, 뭔가 여러분들이 만족을 얻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극악한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헌금도 하지 마세요! 여러분! 선교지에 가서, 죽을 때까지 선교하고, 지옥 가는 사람 있어요. 자기 의(義) 쌓다가! 거기가면 사람들이 나 존경해주거든요. 여기 있으면 아무도 안 알아줘! 가면은? 나 존경해줘요. 선교사다! 고생했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일하고, 지옥가요.
예수를 먼저 아세요. 하나님을 먼저 공부하세요. 구원은 완전한 항복(降伏)입니다. 구원은, 살아나셔서 지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 받은 그 의(義)의 옷!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텔 것 없어요. 그게 은혜요. 믿음이에요.
그렇게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이야기하세요. 바로 이 열쇠입니다. 메시아에게 주어진 그 열쇠! 이사야서 22장 22절 보겠습니다.
(이사야 22:22)
22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바로 이 열쇠예요. 계시록 3장 7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3:7)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바로 이 열쇠예요. 이 열쇠! 이 열쇠를, 지금 예수께서 가지셨다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열쇠는, 고대시대를 비롯해서, 예수께서 사시던 시대에도, 통치권! 권세! 같은 것을 상징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당시 왕이나 황제들이 어떤 도시를 방문하면, 그 도시의 분봉왕이나 성주들이, 상징적인 금 열쇠나, 은 열쇠를 만들어서, 그 입구에서, 왕에게 이렇게 드렸다 그래요. 그 열쇠는 그런 것을 상징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런 배경을 좀 아셔야, 성경을 읽으실 때, 좀 이해가 쉽겠죠? 그것은 ‘여기는 당신의 통치 아래에 있는, 당신의 땅입니다.’라는 그런 고백이었다, 그래요.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어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건, 뭐예요? 사망과 음부를, 예수님이 지금 통치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이건 아주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사망과 음부를 예수님이 통치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과 마귀가 싸우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선과 악이 지금 대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역사 속에서! 천만에요. 이미 얘는 죽었어요. 묶었어요. 음부에 묶였다고 그러잖아요? 성경에서! 디스암드(disarmed)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무장해제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지금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뭔가 필요하기 때문에, 쓰고 있는 거예요. 사탄은요! 여러분들을 절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단 말이에요. 열쇠! 통치권을 가지셨다고요.
여기서 ‘음부(陰府)’라고 번역된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라어로 ‘하데스’라는 말이에요. 하데스! 하데스는 부정 접두사인 ‘알파’와 ‘보다’는 뜻을 가진, ‘에이도’의 합성어예요. 그 끝을 볼 수 없는, 아득히 멀고 깊은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데스는, ‘저주 받은 자들이 가는 곳’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만, 그냥 막연히, 죽은 영들이 가는 곳! 천국과 지옥 다 포함한, 죽은 영들이 가는 곳! 이런 의미로도 쓰여요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저주 받을 자들이 가는 ‘지옥(地獄)’의 의미로 쓰인 거 같아요. 중요한 건 아니니까, 두 구절만 제가 확인하고 갈게요. 계시록 6장 절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6:8)
8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사망과 음부를 의인화해서, 마귀의 세력을 표현하고 있죠? 계시록 20장 14절을 보세요.
(요한계시록 20:14)
14 사망과 음부도 (역시 하데스예요.)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죠?)
자, 바로 그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께서 쥐고 계시단 말이에요. 통치하고 계시단 말이에요. 천국뿐만이 아니라, 음부도 예수께서 다스리시는 거예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뭐예요? 지난주에 제가 죽음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죽음이에요! 그렇죠?
그런데 그 사망의 열쇠를 누가 쥐고 계세요? 예수님이 쥐고 계세요. 음부의 열쇠는 누가 쥐고 계세요? 예수님이 쥐고 계세요. 음부에는 누가 갇혀 있어요. 사탄과 마귀의 세력이 갇혀 있어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 드렸죠? 왜 갇혀 있다고 표현을 하는지! 그러면 그 음부도, 예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고 계시다면은, 여러분이 뭘 두려워 하셔야 되는 거예요? 사탄이 여러분을 어떻게 할 수 있을거 같아요? 천만에요.
제가 다다음주 쯤에, 귀신론에 대해서 할 거예요. 수요회 청년공부 때! 여러분은 그만큼 귀한 존재예요. 음부에 묶여 있는 사탄과, 마귀의 세력도 예수께서 다스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안전하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절대 실패하실 수 없어요. 사탄은 지금도 예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어떤 필요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 쓰고 계시는 거예요.
욥기를 읽어 보셨으면 알잖아요? 하나님이 산울로 두르고 계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걸 치워주지 않으면, 사단이 범접을 못해요. 하나님께서 욥을 시험하는 사탄에게, 넘어가지 못할 금을 그어주시죠? 욥기 38장 11절 보시겠습니까?
(욥기 38:11)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하나님이 결정해 주세요.)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
저주를 상징하는 바다에 경계를 그으시고, 넘어가지 말아라! 그렇게 명령하시는,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사탄도 절대 복종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안전하신 거예요.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거룩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지금 사탄을, 예수님은 이용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에 있는 어느 곳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벗어난, 무정부상태의 공간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망의 열쇠를 쥐고 계세요. 사망에 잡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굳게 잠긴, 사망의 자물통을 여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열쇠를 갖고 계시잖아요? 사망은 지금 오해하고 있어요. 자기가 포로로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니깐요. 사망이!
그런데 그 열쇠를 정작 누가 갖고 계시냐면? 예수님이 갖고 계시다고요. 예수님이 그 자물통을 여실 거예요. 사망을 상징하는 애굽에, 이스라엘 백성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었나요? 전부 나왔어요. 전부 나왔어요. 다 끌어내실 거예요. 예수님이 다 끌어내실 거예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하시기로 한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다 그 사망의 나라에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열쇠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이사야서 26장 19절 보세요.
(이사야 26:19) (새번역)
19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 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 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어 놓을 것입니다.
예, 사망의 자물통은 열릴 거예요. 그분이 열쇠를 갖고 계시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열쇠로, 하나님 백성들의 천국 문을 여시죠. 그 열쇠예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면, 예수님은 천국문을 그 열쇠로 잠궈 버리실 거예요.
왜 이스라엘이라는 무리를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설명한 줄 아세요? 거기에는 울타리가 있다는 거예요. 아무나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 문을 잠궈 버리실 거예요. 아무도 못 들어가요.
자, 마치 노아의 방주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여덟 명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집어넣고, 어떻게 합니까? 밖에서, 하나님이 문을 닫아 주시죠? 그것처럼 천국의 문은 하나님에 의해서 닫히고 잠길 거예요. 아무도 못 들어가요. 그런데 거기에 여러분이 들어가실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게, 그게 감격스럽지 않으면, 그게 뭐가 그리스도인이에요? 말만해도 좋네요. 그냥! 창세기 7장 15절 보세요.
(창세기 7:15-16) (새번역)
15 살과 피를 지닌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이 둘 씩 노아에게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16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살과 피를 지닌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의 수컷과 암컷이 짝을 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노아가 들어가니 주께서 몸소 문을 닫으셨다.
닫아 주실 거예요. 눈물도, 슬픔도, 죄도, 못 들어가요. 딱 닫고. 자물쇠로 채워 버리실 거예요. 아무리 두들겨도 열리지 않습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그 전가된 의(義)! 그 은혜(恩惠)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면, 아무리 문을 두들기면서, ‘주님! 내가 선지자 노릇했고, 주의 이름으로 기적 일으켰고, 주의 이름으로 헌금을 그렇게 많이 했고, 내가 평생 한 번도 교회를 안 빠졌는데, 왜 문을 안 열어주세요?’ 안 열어주세요! 절대 안 열어주세요! 여러분! ‘네가 아무리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리 종교행위 열심히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한 번도 교회를 안 빠졌다.’ 할지라도, 너는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얼마나 두려워 하셔야 되는 줄 아세요? 여러분 딴 거 갖고 고민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고민하세요. 무섭지 않으십니까? 내가 진짜 잘 믿고 있는지, 아닌지, 그걸 왜 안 두려워하시냐 말이에요. 그러니 제가 속이 터지는 거예요. 그걸 왜 안 두려워하세요? 내가 진짜 바로 믿는지, 안 믿는지! 루터도 켈빈도 죽기 3개월 전까지, 내가 진짠가 아닌가? 고민했다는데! 그래서 잠도 못자고, 불면증 걸리고, 우울증까지 걸렸다는데, 여러분이 뭘, 얼마나 아신다고, 이렇게 궁금해 하시지 않냐 말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당연히 천국 갈 줄 알아요. 천만에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내가 이 땅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그랬다고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너무 길이 협착하고, 좁아서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전부 천국 갈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못 들어가요. 정확히 이해하고 계셔야 돼요. 구원이 뭔지! 두려워 하셔야 돼요. 난 정말 바로 가고 있는가? 난 정말 바로 가고 있는가?
오직 그 예수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고, 예수를 통해서만,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분이 양의 문이세요. 그 분이 양의 문이세요!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못 들어가요. 거기에 뭘 보태신다는 거예요? 무슨 행위를 보태요? 거기다가? 요한복음 10장 1절 보세요.
(요한복음 10:1-5, 9)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를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에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 이야기는 각기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야 하는 구절이에요. 예수님 당시에, 양의 우리는 두 종류가 있었어요. 여러분! 산의 목초지에 올라가서, 목동들이 양을 먹이다가 미처 아래로 못 내려오면, 그 위에서 양들을 모아 놓는 그런 간이 우리들이 있었어요. 돌로 얼기설기 쌓아 놓은 거! 거기에는 문이 없어요. 그래서 목자가 서서, ‘들어가라!’ 그러면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 뚫어진 곳에 목자가 이렇게 누워 있었다고요. 이리나 늑대는 못 들어간다고요. 그래서 ‘내가 양의 문이다!’ 그러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리고 또 한 가지 양의 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에 있었던 양 우리예요. 큰 우리! 유대인들은 양의 우리를 각자 집에다 만들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동네에다가 큰 우리를 만들어 놓고, 김씨네 양! 이씨네 양! 박씨네 양! 다 집어넣었어요. 거기다가! 그러면 섞이면 어떡합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양들은요,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를 정확히 구별해요. 그래서 아침에, 주인이 가서, ‘이씨네 양 다 나와라!’ 그러면 쭉 따라 나오는 거예요. 양들의 특징이에요. 그게!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들이 있어야 되니까, 문지기가 항상 있었어요. 여기에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그 문지기는, 바로 ‘성령’이에요. 성령이 문을 열어주니까, 예수님이 들어가서, ‘빌립아! 삭게오야! 나사로야! 나와라!’ 그러니까 쭉 따라 나오더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양들은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 우리에서 나온다고요. ‘삭게오야! 내려와라!’ 했더니, 삭게오가 내려와요. 재산의 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나눠줘요. ‘빌립아! 따라와라!’ 했더니, 빌립이 알아듣고, 따라가요. ‘베드로야! 가자!’ 했더니, 따라와요. 심지어 죽은 나사로더러, ‘나사로야! 나와라!’ 하니까, 그 목소리를 듣고 나와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인 거예요. ‘마태야! 가자!’ 했더니, 그 돈 많이 버는, 세리 직을 두고 나오더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기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도 안 되는 복음을 듣고, 여러분이 이 예배당에, 어떻게 나와 계시냐고요? 그리고 예수를 믿겠다고, 눈물 철철 흘리면서, 이렇게 열심을 내는 분들이 되셨냐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양이에요. 그분이 불러내신 거예요. 우리는 그 분을 통해서만, 양의 우리로 들어갈 수 있어요.
또 한 가지 관점으로는, 여러분! 이 이야기가, 요한복음 9장하고 이어진 거예요. 원래 성경은 장절이 없었다. 그랬죠? 9장에 무슨 얘기가 나옵니까? 소경 이야기 나오죠? 요한복음 9장에! 소경이 눈을 떴어요. 안식일 날 예수님이 진흙을 눈에 이겨 붙여서, 눈을 뜨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난리가 났어요. 안식일 날 고쳤다고! 결국은 이 소경이 출교를 당해요. 산헤드린 공회원들한테! ‘넌 이제 유대교에 못 들어온다!’ 출교 당하고 나서,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만나요.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여러분들이 지금 어느 곳에 있다 할지라도, 어떠한 위험한 곳에, 아니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여기는 그런 곳에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부르시면, 그들은 나온다는 거예요. 유대교에서 봤을 때는 출교였지만, 이 소경은,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유대교에서 빠져 나온 거예요. 우리에서! 예수님이 부르시니까, 그 양들만, 빠져 나오더라는 거예요. 유대교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문이라는 거예요. 다른 것으로는 빠져 나올 수가 없어요. 다른 문을 통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어요.
이렇게 양쪽 관점에서 보는 거예요. 여러분! 그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 예수를 믿으세요? 그 예수로만,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기독교예요. 시편 2편 12절 보세요.
(시편 2:12)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예수에게 입맞추라’라는 뜻이에요. ‘예수를 믿어라!’라는 뜻이에요.)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그 예수님이,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라고 이야기하세요. 그죠? 이 단어는 우리가, 전에 8절 공부할 때 배웠어요.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거기서 우리가 배웠죠? 알파, 오메가 할 때, 하나님을 묘사하는 이 동일한 단어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묘사하는 데 지금 쓰고 계세요.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나시고, 촌구석 나사렛에서 똥 싸고 오줌 싸는 애기로, 거기서부터 출발하신 거예요. 말을 배우셔야 했어요. 그분은 글을 배우셨어야 했어요. 자신을 낮추시는 거예요. 그분은 가구 고치는 법을 배웠어요. 그리고 등짐을 지고, 가구를 고치러 다녔어요. 그때 당시에는 이렇게 목공소 이런 게 번듯하게 없었어요. 다 봇짐장수였단 말이에요. 그리고 침 뱉음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결국은 수난을 받고 죽으셨어요. 그분이 바로 ‘처음이요 나중이신,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신 그분! 죄인들이 보면, 그냥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분이, 똥 싸고 오줌 싸고, 시간 안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분이,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잠언 8장 23절 보세요.
(잠언 8:23-26)
23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예수님이에요. 이때부터 계셨단 말이에요. 요한복음 1장 1절.
(요한복음 1:1-3, 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셨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절.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에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8장 58절
(요한복음 8:58)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
‘내가 있느니라’는, ‘아이 엠(I am)’이라는 말이에요. 내가 하나님이었느니라! 그게 예수를 믿는 거예요. 우리는요! 고린도전서 10장 9절을 보세요.
(고린도전서 10:9)
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뱀에게 멸망하였다,’ 이 이야기는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막 원망하다가, 하나님이 불뱀을 팍 풀어서, 많이 죽여 버리죠?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했다,’ 그런다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여기서! ‘주를 시험하다가’ 이 말은, ‘엑크 페리아조 멘 톤 크리스톤’ 이런 뜻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다가’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그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한 게,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한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을 지금 광야에서 끌고 간 건, 누구라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의 구원의 시작과 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끌고 가시고,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끌고 가신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 예수께서 여러분을 가리켜, ,‘내 형제요 내 자매다.’라고 말씀을 하세요. 그런데 왜 여러분이 두렵고, 무엇을 염려하신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과거의 여러분의 상처가, 그렇게 여러분을 괴롭게 하세요? 그 분은 처음이라니깐요. 여러분에게 아직 닥치지 않은, 여러분의 미래가 여러분을 염려하게 만드느냐? 말이에요. 예수님은 나중이시라면서요? 그 예수님 안에, 여러분이 들어있다면서요? 여러분이 지금 두렵고 염려하고 계시다는 것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아니라는 거예요.
아직까지 여러분이 갓 일루젼(God illusion)!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환상에 빠져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직도 선악과를 꽉 깨물고 있는 거예요. 그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놓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가 선악과란 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두려워하고, 염려한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뭔가 해보겠다는 거예요. 내 인생을! 그게 죄(罪)예요.
저는 오늘날 교회가 정말, 그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전 모르겠어요. 전부 그렇게 두려움과 염려 속에서, 자기들 소원만 빌고 있어요. 그건 기독교 아니에요. 무당 종교도 똑같은 거예요. 단지 자기를 도와줄 어떤 절대자를, ‘하나님’이라, ‘예수님’이라 그냥 부르고 있는 거뿐이지,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아니에요.
여러분! 정말 두려워 하셔야 할 것은, 여러분에게 아직 닥치지 않은 일! 여러분이 과거에 겪었던 그 일! 그것 때문에 혹시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까? 이게 아니에요, 진짜 여러분이 두려워 하셔야 할 것은,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 맞나?’ 이걸 두려워 하셔야죠. 혹시 내 앞에서 천국 문이 철커덕 잠기고, 아무리 두들겨도 안 열리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걸 두려워 하셔야지, 왜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을 갖고, 두려워하시냐 말이에요?
정말 여러분이 두려워 하셔야 할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 맞나?’만 확인하시면 돼요. 맞으면 걱정할 거 없어요. 그분이 알아서 끌고 가실 거니까! 처음이며 끝인 그분이, 전부이신 그분이, 여러분을 끌고 가실 것이니까!
여러분이 엉뚱한 거 지금 바라고 계시기 때문에, 두려운 거예요. 엉뚱한 거 가지고 지금, 여러분들이 소원하고 계시기 때문에, 염려스러운 거예요. 여러분들의 인생이! 그 예수님이, 처음이요 나중이신 예수님이, 여러분이 지금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어떤 소원이, 여러분의 인생에,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이면, 들어줄 것이고, ‘아니다. 아직 그거 들어주면 안 된다. 그러면, 너희들이 또 자고하고, 교만할 거야! 그래서 안 들어주시면, 그만이에요. 인정하고 좇아가고 순종하는 거예요. 우리는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지금 자꾸 그 하나님을 동원해서, 얻어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과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거 아닙니까? 그거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두려움을 떨쳐버리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승리자예요.
자,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십시오. 두려움을 떨쳐버리세요. 예수께서 교회의 몸에 손을 얹고,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라고 이야기하시잖아요? 두려워 말라! 예수님이 ‘두려워 말라!’라고, 그 예수님이 하신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양이에요. 그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자들은, 양이 아니에요. 거기서 그냥 머물러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알아듣고 나왔다고 하는 분들이, ‘두려워 말라!’라고 하는데, 왜 계속 두려워하고 계시냐 말이에요? 그걸 두려워하세요! 그 사실을 두려워하세요! ‘나, 혹시 가짜인가벼!’ 그걸 두려워하세요! 여러분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걸, 두려워하시지 마시고, 내가 혹시 가짜면 어떡하는가? 그걸 두려워하세요! 예수님이 언젠가 자물통으로 문을 잠궈 버렸을 때, 나 거기 못 들어가는 자면 어떡하는가? 그걸 두려워 하셔야죠? 두려워 마세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그곳이 어떤 곳인지, 매일 매일 묵상하세요. 매일 매일 묵상하세요. 황홀해 질 거예요. 감사할 거예요. 기뻐질 거예요.
자, 오늘 본문을 한 번 다시 읽고, 잘 이해가 가셨는지, 이제 확인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계시록 1장 17절, 18절 읽어볼게요.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해가 가십니까? 클리어(clear)하세요?
기도하겠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아득한 나의 갈길 다 가고, 저 동산에서 편히 쉴 때, 내 고생하던 모든 일들을 주께서 아시리. 빈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 내 주 예수 날 사랑하사, 늘 지켜 주시리.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안녕 친구여, 곰곰이 생각해봐! 그대는 지금 자유로운지, 안녕 친구여, 감추지 않아도 돼. 애써 웃는 모습 안보여도 돼! 구원받은 몸이라 안심하고 있었나? 끊임없이 생기는 어둔 죄 감춰둔 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는데, 친구 넌 그 뜻을 진정으로 아는가?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안녕 친구여! 생각해 보았는가? 정말 넌 천국갈 수 있는지? 안녕 친구여! 세상 떠나갈 때에, 칭찬하는 하나님 볼 수 있는지?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신가? 희미한 예감으론 평안을 얻지 못해. 예수님 알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나? 아직도 이 세상을 그렇게 기대하나?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이런 눈물 흘리지 않는 곳 ~!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내 아버지 기다리시는 그곳에! 아멘!
요한계시록 1장 17-20절
17-20 이를 본 나는 죽은 듯 그분 발 앞에 쓰러졌습니다. 그분의 오른손이 나를 잡아 일으켜 세우셨고, 그분의 음성이 나를 안심시키셨습니다.“두려워 마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죽었으나 살아났고, 이제 나의 생명은 영원하다. 내 손에 있는 이 열쇠들이 보이느냐? 이것은 죽음의 문들을 열고 잠그며, 지옥의 문들을 열고 잠그는 열쇠들이다. 이제 네가 보는 것을 모두 기록하여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곧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네가 내 오른편에서 본 그 일곱 별과, 그 일곱 가지 달린 금촛대, 너는 그 이면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원하느냐? 일곱 별은 바로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며, 촛대의 일곱 가지는 바로 그 일곱 교회다.” ***** 증요한 것은 어떤 의미를 부여했느냐1917년 뉴욕의 한 미술 전시장에 뒤집어진 남성용 소변기가 놓여있었습니다. 잘못 놓인 물건이 아니라 소변기 왼편에 R. MUTT 1917이라고 사인을 표기하고 작품명을 [샘]이라고 표기한 미술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르셀 뒤샹이라는 작가의 자품이었는데, 결국 전시를 주관한 미술협회의 반대로 철거되었습니다. 이 사건 후 뒤샹은 협회를 탈퇴하며 성명서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예술은 그 물건을 그가 직접 만들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했느냐가 중요하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이 아닌 억지처럼 들렸는데, 오늘날 미술계의 평가에서 뒤샹은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미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샹이 남긴 이 말은 현대 미술을 이전 미술과 구분하여 나누는 경계가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큰 일들도 시작될 때는 이렇게 작고 소소한 것들로 부터 시작됩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요한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평범한 주일, 주일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역사 속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환상은 교회 가운데, 예배 가운데, 평범한 일상 가운데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평범한 일상 가운데 찾아 오셨다는 것이 예수님이 평범하시다거나 평범하게 오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평범한 중에 찾아 오셨지만, 그 예수님을 마주한 순간 사도 요한은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그 영광과 위엄 앞에서,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말하던 사도 요한조차 감당이 되지 않아서 쓰러진 것입니다. 평범한 자리에 찾아 오셨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또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존귀와 영광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 쓰러져 죽은 자 같이 된 요한에게 오른 손을 얹고 두려워 하지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하던 시절에 많이 듣고 많이 보았던 모습입니다. 두려워 하지말라… 딸의 죽음으로 슬퍼하던 야이로의 집에서 주셨던 말씀입니다. 두려워 하지말라… 전도여행을 떠나던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두려워 하지말라… 풍랑가운데서 배를 젓던 제지들에게 주님이 물위를 걸어오시며 주셨던 말씀입니다. 주님은 지금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 앞에서, 그 놀라운 위엄에 눌려서 죽은 자처럼 된 요한에게 그 말씀으로 요한을 붙들고 계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말씀하십니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요한이 앞에서 고백했었던 그 내용 그대로입니다. 즉 요한이 죽은 자처럼 될 만큼 놀라운 영광과 위엄으로 다가오신 주님이 지금껏 요한이 알고 있었던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분이 아닙니다. 다른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뵙게 될 영광의 주님이 우리가 이 아침 엎드려 그 이름을 부르며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그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게 될 그 영광의 음성이 기도의 자리에서 들리지는 그 음성이라는 것입니다. 장차 일어날 일은 현재의 결과물그 주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1장 19절입니다. 이제 네가 보는 것을 모두 기록하여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곧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사람들은 19절 말씀 중에서도 [장차 될 일]을 알기 원합니다. 물론 나 자신도 장차 될 일에 관심이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지금 있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장차 있을 일을 알고 싶고 관심을 갖지만, 예수님의 우선순위는 지금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장차있는 일들은 지금 있는 일들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지금 있는 일들의 가장 처음에는 당시 실존하던 일곱교회들을 향한 메세지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은혜가, 믿음의 특별한 경험이 현실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살기 위해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음성을 향해 열려야 되고 내 눈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열려야 되지만, 내가 서 있어야 하는 곳은 현실 - 나의 실제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현실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2장에서는 일곱교회 중에서 먼저 에베소교회에게 주신 메세지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묘사하시기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일곱별은 일곱교회의 목회자들, 일곱촛대는 교회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교회가운데 계시며 그 사역자들을 붙들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님이 아신다]입니다. 예수님이 현실 속의 에베소 교회가 지금 가지고 있는 문제들과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일곱교회에 대해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실에 관심이 있으시고, 현실 속에 계시며, 현실의 상황과 문제들과 나의 동기까지 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현실의 문제때문에 책망하시고, 현실에서 진행한 일들을 칭찬하십니다. 나는 종종 탁월한 신앙을 위해 무엇인가 특별하고 전혀 다른 -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벗어나는 무엇인가를 바라고 기대하는데, 예수님이 주시는 메세지는 너무 분명하게 현실 중심입니다. 현실을 통해 믿음을 드러내고 현실을 통해 은혜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은 현실이고, 현재입니다. 믿음은 나에게 내일을 보여주고 미래를 꿈꾸게 하지만, 그 믿음이 보여지는 자리는 오늘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지금입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듣고 머리를 끄덕이더라도, 내가 블로그에 좋은 글을 오리더라도, 나의 오늘의 삶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의미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을 들으면 은혜롭고, 성경을 펼치기만 해도 눈물이 흐르더라도 오늘 내가 그 말씀붙들고 살지 못하면 그것은 주님께 보여드릴 것이 없는 믿음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기회이고 은혜의 기회입니다. 나는 어제는 하지 못한 그 일을 오늘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고, 어제는 누리지 못했던 그 은혜를 오늘 믿음의 걸음을 내딛음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장차 일어날 일이 아무리 궁금해도, 그 장차 일어날 일은 오늘의 나의 삶을 통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오늘의 능력을 기억하며, 오늘도 말씀을 붙들고 몸부림 치는 은혜가,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누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살아 있는 자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 요한계시록 1:17-20
영생이란 단순히 내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어서 천국 간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졌다는 뜻이고 그분의 십자가에 내가 함께 죽고 새 생명으로 살아나 그분과 연합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머리였던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머리로 바뀌어 그분의 몸, 즉 교회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내 안에 일어나는 일이다. 요한계시록의 표현대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도들과 함께 지금도 늘 오고 계신 상태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2,000여년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만 이해하여 십자가를 세워놓고 그 앞에 모여보라고 요구하시는 표시가 아니다. 완전한 새 생명으로의 창조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난 자들이 말씀을 좇아서 움직이게 된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마음에 새김으로 인간의 행위는 날마다 죽음으로 발견되고 어린 양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은혜로 확인하는 모임이다.
우리는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내 공로, 내 노력이 신앙생활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믿음조차도 행위가 된다. 이렇게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고 자기를 나타내는 이유는 한마디로 죄의 권세에 매여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은 자는 자기 행위를 내세울 수 없고, 오직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되고 나타낼 뿐이다.
예수님께서 요한 사도를 묵시에 참여시켜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셨다. 그때 요한이 본 예수님은 과거에 갈릴리에서 본 주님과 달랐다. 과거에 본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기 위하여 오신 분이셨다. 즉 인자로서 고난받으시는 메시아였다. 그러나 묵시 안에서 고난받는 인자가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한 인자 같은 이로 만났다. 그 모습은 왕권을 가지신 대제사장적 모습으로 정결하고 흠이 없으신 분이며,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셔서 친히 심판하시는 모습이었다.
심판주로서의 위엄과 영광 앞에 요한 사도는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17절)라고 하였다. 우선 구약 다니엘서를 배경으로 말씀하는 내용을 먼저 확인함으로 요한 사도가 왜 죽은 자 같이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자.
8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환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9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8-9)
“썩은 듯하였고”라는 말은 ‘멸망, 패망’이라는 뜻이고, “잠들었느니라”라는 표현은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참고 시 76:6). “음성”은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완전히 망하여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한 것을 본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하였다.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가 본 것은 많은 물고기가 아니라 말씀의 말씀 되심이었기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죄인이 하나님과의 만남은 죽음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가 묵시에 참여하는 것은 죽은 자로서 참여한다. 죽은 자이기에 진짜 생명 앞에서 죽음만 드러날 뿐이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17절). “얹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티데미’인데 ‘놓다, 잘 배열한다’라는 뜻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고 인간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결코 없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이다. 오른손이란 능력, 영광과 심판의 상징이다(출 15:6). 즉 예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것은 어디서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있다. 이는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구약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 참고 41:4, 48:12)
하나님에 대한 표현으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1:8)라는 말씀을 이후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21:6), 또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22:13)라고 같은 말씀을 한다. 이는 ‘나는 ~이다’라고 하신 말씀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인데 구약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밝히신 ‘예흐예 아쉘 예흐예’라는 말의 번역이다.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것이다. 즉 십자가에서 언약으로 온전히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죽은 자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가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18절)라고 말씀하셨다. “살아 있는 자”라는 말씀으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는 말씀을 강조한다. 그래서 “세세토록 살아 있어”라고 말씀한다. 단순히 지금 죽은 존재가 아닌 살아 있음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살아 있는 자와 맺으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를 살려서 맺는 언약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지금 살아 있는 상태에서 맺는 언약임을 나타내셨다.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신 5:2-3)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라는 말씀은 십자가 죽음을 전제한 표현이고 그 죽음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에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라는 말씀을 덧붙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에 근거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선언하셨다. “사망과 음부”란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6:8, 20:13-14). “열쇠”(헬, 클레이스)란 ‘닫는다’(헬, 클레이오)에서 유래한 말로 ‘여닫을 수 있는 권세’를 의미한다. 이는 이미 마태복음에서도 밝히신 내용이다.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
요한 사도는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하였다. 죄인으로 있을 때 두려운 상태에서 이제 다시 산 자에 의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그 말씀 안에 있게 되었다.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전능하신 분에 의해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명에 거하게 되었다. 생명 안에 있는 자만이 생명 안에 있는 자에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9-20절). 여기서도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장차 될 일”란 묵시의 관점에서 표현하자면 미래의 일이 아니 이미 이루어진 일을 말한다. 요한 사도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라고 하였고 그다음 말씀에서 바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말씀한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하니까 오늘날 교회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창세기를 통해 ‘별’에 대한 의미를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 언약에서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창 22:17)라고 한 말씀이나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창 26:4)라는 말씀들을 통해 볼 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상징으로 표현된다. 그 언약의 핵심은 “씨”(후손)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수기의 말씀은 언약의 실체를 지향하고 있는 말씀이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 야곱의 후손으로 오시는 “한 별”이란 진정한 언약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에서 “씨”가 번성하여 “별”과 같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 것이다(갈 3:16, 계 2: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갈 3:7-9). 이렇게 본다면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언약이 완성된 “일곱 교회”요 “일곱 금 촛대”이며, “일곱 교회의 사자”란(헬, 앙겔로스)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를 지칭한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손에 붙잡혀 있기에 그 어떤 권세나 훼방, 심판에서도 견뎌내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주신 말씀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 6:9-10)라는 것이었고 그 예언의 성취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너희”와 “그들”을 갈라 내시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다(마 13:11-15). 바울 사도 역시 로마의 감옥에서 쓸쓸히 죽어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거침없이 선포할 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목사는 목회를 한다는 것이고,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목회를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고,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통해 영생을 쟁취하려고 한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목사와 교인들이 천국 대기소를 공동 운영하는 사업에 부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부르심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주성교회에 소속된다는 것이 아니다. 요한 사도와 함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9절)로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처음이요 마지막”(17절)이신 “살아 있는 자”(18절)에 의해 생명을 누리는 언약이 완성된 일곱 교회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주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된 그 모습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