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우스가 아테나의 지시에 따라 메두사의 목을 벤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메두사의 목을 벨 때, 그 눈을 보지 않고 방패를 거울처럼 사용해 비친 형상을 보고 공격했다. 그러면 잘린 목은 이미 생명을 다했는데 과연 죽어서도 효력이 있을까?
죽어서도 유효했던 메두사의 능력
결론부터 말하자면 포세이돈을 사랑한 대가로 받은 놀라운 능력, 즉 ‘눈을 마주친 자는 누구나 돌로 변하게 만드는 신기(神技)’는 죽어서도 유효했다.
그래서 페르세우스는 한 번도 그 얼굴을 쳐다보지 않은 채 메두사의 머리를 적들을 향해 들이대는 것만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아테나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위상과 이 사실을 함께 생각해보면 왜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이 메두사를 상징으로 그토록 애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그리스에서는 방패에 메두사의 머리를 새기는 행위는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방패에 새긴 메두사의 저주는 오로지 적에게만 효력을 발휘함으로써 아군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액막이처럼 진화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꼭 메두사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수호하는 신이나 괴물의 상징을 방패에 새겨 넣었다는 사실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메두사 얼굴을 들어 적을 물리치는 페르세우스."
정면을 응시한 고르고네이온
역사에 남아 있는 초기 고르곤 이미지에서부터 후기 희화화된 메두사까지, 그 진화 과정을 잘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의 이미지는 전신을 모두 표현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 흉측한 얼굴만을 떼어내 상징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얼굴의 방향도 전쟁 상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정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형상이 돼야만 했다.
이를 ‘고르고네이온(Gorgoneion: Gorgon’s Head)’이라 하며 다른 상징에 비해 두드러진 특징으로 간주된다. 더군다나 페르세우스는 자른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에게 헌납했고, 아테나는 이 메두사의 머리를 박아 넣어 천하무적의 방패 ‘아이기스(Aegis)’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아이기스’는 생소하겠지만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그렇지 않다. 아이기스의 영어식 표현은 ‘이지스’. 항공기나 미사일을 포함한 그 어떤 공격도 무력화할 수 있는 해군 함정의 방어 시스템이다.
여기서 필자가 관심을 갖는 주제인 고대 전문장이 오늘날 로고의 뿌리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물론 ‘문장은 상속이 가능했던 중세 기사로부터 시작됐다’는 학술적 정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 로고의 기본 틀은 방패이고 그 방패가 갖는 상징성은 이미 고대부터 정립됐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메두사 머리를 박아 넣은 아테나의 아이기스나 이를 모방한 그리스 방패(특히 아테네)야말로 이미지가 가질 수 있는 상징 가운데 정점에 있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신화에는 종종 아테나의 방패에 있어야 할 고르곤이나 메두사가 가슴에 출몰하기도 한다. 페르세우스가 그 머리를 잘라 아테나의 방패에 박았는데 가슴에도 등장하니 혼란스러울 수 있다.
신화에 의하면 아테나는 헤라클레스가 네메안의 사자를 죽이고 그 가죽을 쓰고 다닌 것처럼 거인족 팔라스(Palas)의 가죽을 벗겨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쓰고 다녔다. 또 메두사를 죽인 뒤 ‘끝자락에 뱀들이 물결치듯 꿈틀거리는 갑옷’을 어깨에 걸쳤다는 대목도 나온다.
아테나가 상체에 걸치고 나오는 외투에 종종 뱀 비늘 같은 문양이 묘사돼 있는데 이는 메두사의 머리만이 아니고 그 가죽을 벗겨 걸쳤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요컨대 메두사의 머리는 방패의 일부가 되고, 메두사의 가죽은 갑옷의 일부가 돼 아테나를 ‘천하무적의 신’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아이기스 역시 1차적으로는 메두사 얼굴이 박힌 방패를 일컫는 말이겠지만, 동시에 그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속’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의 메두사는 ‘상징·로고의 뿌리’다. 또 앞서 언급한 로마의 독수리는 상징·로고가 방패에서 깃발로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