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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명(孔明)의 가르침 보국안민(保國安民) -
강유(姜維)가 답중(畓中 : 논밭 경작지)으로 가서 둔전(屯田 :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에서 농사를 짖는 말함)을 하는 사이, 위(魏)나라 등애(鄧艾)는 그 소식을 듣고 정탐꾼을 답중으로 보내어 상황을 지도로 그려오게 하였다. 정탐꾼이 그려 온 지도를 보아하니 답중(畓中)에는 길가에 영채(營寨)가 사십여 개가 서 있는데, 그 연결(連結)을 엮은 이음새가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 말하는 상산(常山)의 뱀처럼 끊어짐이 없었다. 등애는 그 지도를 사마소(司馬昭)에게도 올려 보냈다.
지도를 받아 본 사마소는 크게 화를 낸다.
"강유(姜維)가 벌써 여러 차례 중원(中原)을 넘보고 있는데 이제는 장기전(長期戰)을 준비하기까지 이르렀구나. 얼른 물리치지 않으면 큰 골칫거리가 되겠다!"
곁에서 모사(謀士) 가충(賈充)이 말한다.
"강유(姜維)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병법(兵法)을 깊이 터특(攄得)하고 있어서 급히 물리치기는 어렵습니다. 수고스럽게 많은 군사를 동원할 것이 아니라 지혜(智慧)와 용맹(勇猛)이 있는 자객(刺客) 하나를 보내서 암살(暗殺)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충(賈充)의 말을 듣고 종사중랑(從事中郞) 순욱(荀勖)이 말한다.
"아니 됩니다. 지금 촉주(蜀主) 유선(劉禪)은 주색(酒色)에 빠져 있고 환관(宦官) 황호(黃皓)만 신임하기 때문에 촉(蜀) 조정(朝廷) 모든 대신(大臣)들이 그저 화를 피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강유(姜維)가 답중(畓中)에서 둔전(屯田)하고 있는 것 또한 화를 피하고자 하는 궁여지책(窮餘之策(窮塞))일 것입니다. 이럴 때 유능(有能)한 대장으로 하여금 강유(姜維)를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데 굳이 궁색하게 자객(刺客)을 보낼 필요(必要)가 무엇입니까?"
사마소(司馬昭)가 호탕한 웃음을 웃더니 말한다.
"그 말이 마음에 드는군. 촉(蜀_을 치려면 누구를 대장(大將)으로 삼는 것이 좋겠는가?"
순욱(荀勖)이 대답한다.
"등애(鄧艾)는 명장(名將) 중의 명장이니 등애(鄧艾)를 보내고, 더불어 종회(鍾會)를 부장(副將)으로 함께 보내시면 대(大事)사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뜻과 같구나." 사마소는 즉시 종회(鍾會)를 불러오게 하였다.
사마소(司馬昭)는 실컷 촉(蜀)을 칠 상의(相議)하다가, 종회(鍾會)가 나타나자 엉뚱하게도 종회에게 동오(東吳)를 칠 계책(計策)을 묻는다.
"그대를 대장으로 삼아 동오 정벌을 하려고 하는데, 어떤가?"
종회(鍾會)가 빙그레 웃더니 대답한다.
"주공(主公) 뜻을 헤아려보건대, 동오를 치려는 게 아니라 실(實)은 촉(蜀)을 치려고 하심이 아니십니까?"
"하하하하! 그대는 참으로 내 속 마음까지 꿰뚫는구나. 그래, 實은 촉을 치려고 한다. 무슨 계책을 써야 좋겠는가?"
종회(鍾會)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사마소에게 내밀며 말한다.
"저는 주공께서 언젠가 반드시 촉을 칠 날이 올 것이라고 여겨 이미 상세한 작전 지도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사마소(司馬昭)가 종회(鍾會)의 작전 지도(作戰地圖)를 살펴보니 촉(蜀)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자세(仔細)하게 그려져 있고, 영채(營寨)를 세울 곳, 군량(軍糧)과 마초(馬草)를 쌓아둘 곳, 어디로 진출(進出)하고 급박(急迫)할 때는 어디로 물러나야 하는지까지 모든 것이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地圖)를 상세(詳細)히 살핀 사마소(司馬昭)는 무릎을 치며 만족(滿足)했다.
"실로 훌륭한 장수(將帥)다. 경이 등애(鄧艾)의 군사와 협력(協力)하여 촉을 공략(攻略)하는 것이 어떻겠나?"
"촉은 땅의 면적이 넓고 길이 여러 곳으로 나있으니 한 방면으로만 나가서는 안 됩니다. 소장은 등애(鄧艾)와 군사를 나누어 서로 다른 길로 진격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사마소(司馬昭)는 종회(鍾會)를 진서장군(鎭西將軍)으로 삼고 절월(節鉞)을 주어 관중(關中)의 군사를 지휘(指揮)할 수 있는 권한(權限)을 주었다. 그리고 청주(靑州), 연주(兗州), 서주(徐州), 예주(豫州), 형주(荊州), 양주(揚州) 등의 인마를 소집하도록 했다. 등애에게는 정서장군 관외 농상도독(征西將軍 關外 隴上都督)의 직함을 주어 농상 일대의 군사를 총지휘하게 하고, 종회와 기일을 정해 촉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튿날, 사마소(司馬昭)가 조정(朝廷)에서 문무 대신(文武大臣)들과 촉(蜀) 정벌(征伐)에 대한 의논(議論)을 하는데, 전장군(前將軍) 등돈(鄧敦)이 나서서 말한다.
"강유(姜維)가 여러 번 중원(中原)을 침범(侵犯)하는 바람에 우리 군사가 무수히 죽고 다쳤습니다. 지금은 수비(守備)에만 치중(置重)해도 지키기 어려운 상황(狀況)인데, 어찌하여 산천(山川)이 험(險)한 적지(敵地)에 군사(軍士)들을 보내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화를 자초(自招)하는 것입니다."
사마소(司馬昭)가 버럭 성을 내며 말한다.
"내가 인의(仁義)의 군사를 일으켜서 무도한 촉주(蜀主)를 정벌하려고 하는데, 네가 감히 그 뜻을 거역하는 것이냐! 여봐라! 당장 이놈을 끌어다 목을 베어라!" 사마소는 즉석에서 등돈(鄧敦)의 머리를 베어 버리라는 결정을 내렸다.
잠시 후, 무사들이 등돈(鄧敦)의 머리를 계단 아래에 바쳤다. 그것을 지켜본 모든 신하들은 공포에 떨며 입을 다물었다.
사마소(司馬昭)가 문무 대신들을 보고 말한다.
"내가 동쪽 제갈탄(諸葛誕)의 반란을 제압한 이래 육 년의 세월을 쉬면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완벽하게 다듬으며 오(吳)와 촉(蜀)을 정벌(征伐)하려는 계획을 짜두었소. 먼저 소촉(西蜀을 정벌하고, 그 여세를 몰아서 강물을 타고 수륙(水陸)으로 동시에 동오(東吳)를 평정(平定)할 것이오. 촉의 군사 중 성도(成都)를 지키는 군사는 팔구만, 변경을 지키는 군사는 사오만, 강유(姜維)가 답중(畓中)에서 거느리고 있는 군사는 육칠만 정도에 불과하오. 나는 이미 등애(鄧艾)에게 관외(關外)와 농우(隴右)의 군사 십여만을 거느리고 답중(畓中)을 공격하게 하여 강유(姜維)가 동쪽을 돌아보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 두었소. 종회(鍾會)에게는 관중(關中)의 정예병 이삼십만을 거느리고 낙곡(駱谷)의 세 갈래 길로 나아가 한중(漢中)을 기습하게 하였소. 촉주(蜀主) 유선(劉禪)은 원래부터 어리석었고, 촉(蜀) 변방(邊方)의 수비(守備)는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니 촉나라 안팎이 불안정(不安定)하다 하겠소. 이번에 우리가 나서면 반드시 촉을 얻을 것이오." 대신들은 사마소(司馬昭)의 계책(計策)에 모두 탄복(歎服)하며 엎드려 절했다.
진서장군(鎭西將軍) 종회(鍾會)는 촉(蜀)을 치기 위해 군사(軍事)를 일으켰다.
그런데 마치 동오(東吳)를 칠 준비를 하는 것처럼 군사들에게 청주(靑州), 연주(兖州), 예주(豫州), 형주(荊州), 양주(凉州) 다섯 지역(地域)에서 큰 전함(戰艦)을 만들도록 명령(命令)했다. 또, 당자(唐資)를 등주(登州)와 내주(萊州) 등의 해안지대(海岸地帶)로 보내 해안(海岸) 방어(防禦)를 감독하도록 하였다.
사마소(司馬昭)는 종회(鍾會)의 행동에 의구심이 들어 종회를 불러 묻는다.
"육로로 진격할 텐데 배는 만들어서 무엇하는가?"
종회(鍾會)가 대답한다.
"촉은 우리가 대거 쳐들어간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동오(東吳)에 구원 요청(救援要請)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동오를 칠 것처럼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부려서 동오가 함부로 나서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앞으로 일 년 안에 촉을 깨칠 때 쯤이면 배도 완성되었을 것이니 바로 동오를 치기도 수월합니다."
"대단한 계책다." 사마소(司馬昭)가 크게 감탄하며 출정 날짜를 정했다.
위(魏)나라 경원(景元) 4년(263년) 7월 초사흘, 종회(鍾會)가 대군을 이끌고 출발하자 사마소(司馬昭)는 상(城) 밖 십 리(十里)까지 전송을 나갔다 왔다. 환송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조연(西曹掾 소제(邵悌)가 사마소에게 은밀히 아뢴다.
"주공(主公)께서 종회(鍾會)에게 군사를 십만이나 주시고 촉(蜀)을 치게 하셨는데, 제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종회가 뜻이 크고 높은 사람이라 이것을 이용하여 대권(大權)을 잡으려 들지 않을까 걱정이옵니다."
사마소(司馬昭)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내가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주공께서 아신다면 다른 사람을 동행하게 하여 권력(權力)을 나눠 갖게 하시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사마소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소제(邵悌)에게 나즈막히 말한다.
"조정 신하들의 여론은 아직 촉을 칠 수 없다는 것이 대세였다. 다들 겁을 먹었었던 게지. 겁 먹은 자에게 강제로 싸우게 하면 반드시 패하는 법이다. 헌데 종회(鍾會)는 혼자 치밀한 정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을 보면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겁내지 않으면 촉을 깨칠 수 있다. 촉이 무너지는 날이면 촉의 백성들은 모두 가슴이 찢어지겠지. 병법(兵法)에 '패한 장수는 용기를 말할 수 없고, 망국의 신하들은 살길을 도모할 수 없다[패군지장敗軍之將, 불가이언용不可以言勇, 망국지대부亡國之大夫, 불가이도존不可以圖存]'고 했다. 종회(鍾會)에게 딴 뜻이 있다한들, 촉(蜀)의 백성(百姓)들이 어찌 그를 도와주려 하겠는가? 게다가 군대는 이기면 귀향(歸鄕)할 생각에 결코 종회를 쫓아 반역(反逆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염려할 것이 무엇 있겠나? 지금 내가 한 말은 그대와 나 둘만 아는 것으로 하고 절대 누설하지 말라." 소제(邵悌)는 앞을 내다보는 사마소(司馬所)의 혜안(慧眼)에 감복(感服)하여 엎드려 절을 했다.
한편, 종회(鍾會)는 영채를 다 세우고, 감군 위관(監軍 衛瓘), 호군 호열(護軍 胡烈), 대장 전속(大將 田續), 방회(龐會), 전장(田章), 원정(爰?), 구건(丘建), 하후함(夏侯咸), 왕매(王買), 황보개(皇甫闓), 구안(句安) 등 팔십여 명이나 되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한다.
"대장(大將) 하나가 선봉(先鋒)이 되어 산을 만나면 길을 개척하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으며 전군(全軍)을 인도(引導)해야 한다. 누가 이 일을 맡겠느냐?"
"제가 맡겠습니다!" 종회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장수가 선뜻 나섰다.
종회가 바라보니, 호장(虎將) 허저(許褚)의 아들 허의(許儀)였다.
다른 장수들이 모두 한결같이 말한다.
"허의(許儀)가 아니면 선봉을 맡길 사람이 없습니다."
"좋다. 그대는 호랑이 같은 체구에 원숭이처럼 긴 팔을 지녔으니 부자(父子)가 모두 용맹(勇猛)함으로 이름을 떨칠 것이다. 모든 장수들도 그대를 천거(薦擧)하니, 선봉(先鋒)의 인수(印綬)를 받들어 기병(騎兵) 오천 명(五千名(과 보병(步兵) 일천 명(一千名)을 이끌고 츨동(出動)하라.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한중(漢中)으로 진출하되, 그대는 중군(中軍)을 이끌고 야곡(斜谷)으로 나아가고, 좌군(左軍)은 낙곡(駱谷)으로, 우군(右軍)은 자오곡(子午谷)으로 나아가라. 세 갈래의 길이 모두 산세가 험하니 길을 개척하고, 구렁을 메우고, 다리를 수리하고, 암석으로 길이 막혔거든 바위를 모두 깨뜨려 본대(本隊)의 행군(行軍)에 막힘이 없게 하라. 이를 어기면 군법(軍法)으로 다스리겠다."
"네! 명령(命令) 받잡겠습니다!" 허의(許儀)가 군사들을 이끌고 앞서서 출발한 뒤, 종회(鍾會)도 뒤따라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무렵 등애(鄧艾)는 농서에 있다가 촉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바로 사마망으로 하여금 강족(姜族)이 나올 길을 막게 하고, 옹주 자사 제갈서(雍州 刺史 諸葛緖), 천수군 태수 왕기(天水郡 太守 王頎), 농서 태수 견홍(隴西 太守 甄弘), 금성 태수 양흔(金城 太守 楊欣)으로 하여금 각기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각처의 군마가 구름처럼 모여든 그날밤, 등애(鄧艾)는 잠자리에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등애가 높은 산에 올라서 한중(漢中)을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발 밑에서 샘이 세차게 솟아올랐다. 거센 물살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보니 온몸이 샘물에 젖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시 잠이 오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꼬박 밤을 새운 등애(鄧艾)는 날이 밝자마자 주역(周易)에 정통한 호위 원소(護衛 爰邵)를 불러들였다.
등애(鄧艾)가 지난밤의 꿈을 원소(爰邵)에게 자세히 풀어놓자 원소가 말한다.
"주역에서는 산 위에 물이 있는 것을 '건(蹇)'이라 합니다. 이 건괘(蹇卦)는 서남쪽이 이롭고 동북쪽이 불리합니다. 또 공자께서도 '건은 서남쪽으로 가면 공을 세울 수 있으나, 동북쪽으로 가면 길이 막힌다'고 하셨습니다. 장군께서 이번에 촉을 정벌할 수는 있겠으나, 다만 길이 막혀 돌아오실 수 없겠습니다."
등애(鄧艾)는 원소(爰邵)의 꿈 풀이를 듣고 심사가 우울해졌다.
그때 종회(鍾會)로부터 격문이 도착했다. 각기 군사를 일으켜 한중으로 가서 합세하자는 내용이었다.
등애(鄧艾)는 즉시 장군들을 소집하여 출동 명령을 내린다.
"옹주 자사 제갈서(諸葛緖)는 군사 일만오천으로 강유(姜維)의 퇴로를 차단하라. 천수군 태수 왕기는 군사 만오천으로 좌측에서 답중을 공격하라. 농서 태수 견홍은 군사 만오천으로 우측에서 답중을 공격하라. 금성 태수 양흔은 군사 만오천으로 감송(甘松)에 매복해 있다가 강유의 뒤를 치도록 하라. 나는 군사 삼만을 거느리고 이동하면서 돕도록 하겠다."
한편, 종회(鍾會)의 출정길에는 만조 백관들이 모두 성 밖까지 나가서 배웅을 했었다. 무수한 군기(軍旗)가 해를 가릴 지경이었고, 잘 손질한 투구와 갑옷은 눈이 부셨으며, 군마의 자세가 바르고 건장하여 위용을 뽐냈다. 배웅 나온 백관들은 모두 그 모습을 감탄하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유독 상국참군(相國參軍) 유시(劉寔)만이 가만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태위 왕상(太尉 王祥)이 그 모습을 보고 마상(馬上)에서 유식(劉寔)의 손을 잡으며 묻는다.
"종회(鍾會)와 등애(鄧艾) 같은 훌륭한 장수들이 출동했으니 촉(蜀)을 평정하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요?"
유식(劉寔)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가로 젓더니 대답한다.
"촉(蜀)나라를 격파할 것은 틀림이 없소. 허나, 두 장수가 돌아오지 못할 듯 싶습니다."
"어째서 개선장군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거요?"
왕상(王祥)이 의아해하며 되물었으나 유식(劉寔)은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등애(鄧艾)의 꿈을 해석했던 원소(爰邵)처럼 유식(劉寔)도 종회(鍾會)와 등애(鄧艾)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위(魏)나라에서 대군이 출정길에 올랐다는 소식은 답중에 있는 강유(姜維)에게도 전해졌다. 강유는 바로 그날로 후주(後主) 유선(劉禪)에게 표문(表文)을 올렸다.
[청하옵건대 좌거기장군(左車騎將軍) 장익(張翼)에게 양안관(陽安關)을,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 요화(廖化)에게 음평교(陰平橋)를 지키도록 윤허(允許)하여 주소서. 두 곳이 모두 요충지(要衝地)이오니 만일 그곳을 잃으면 한중(漢中)마저 보전(保全)할 수 없게 되옵니다. 그러는 한편 동오(東吳)에 사신(使臣)을 급히 보내어 구원을 요청해 주옵소서. 그동안 신은 답중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적을 막겠사옵니다.]
이때가 경요(景耀) 6년(263년)을 염흥(炎興) 원년으로 고친 해였다.
후주(後主) 유선(劉禪)이 날마다 환관(宦官) 황호(黃皓)와 궁중(宮中)에서 놀며 즐기는 와중(渦中)에 강유(姜維)의 표문이 도착(到着)했다.
표문(表文)을 읽은 후주(後主)가 황호(黃皓)에게 묻는다.
"지금 위(魏)나라에서 대군을 일으켜 종회(鍾會)와 등애(鄧艾) 두 장수가 양 갈래로 몰려온다는데 어쩌면 좋겠는가?"
황호(黃皓)가 아뢴다.
"대장군(大將軍) 강유(姜維)가 큰 공로(功勞)를 세울 욕심에 과장(誇張)된 표문(表文)을 올린 것이옵니다. 큰 일이 아니오니 폐하(陛下)께서는 염려(念慮)하지 마옵소서. 또 설령 위군(魏軍)이 쳐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신에게는 다 방도(方道)가 있사옵니다."
"무슨 방법(方法)이 있는 것이오?"
"도성 안에 있는 무당 하나가 신통력(神通力)이 아주 대단하다 하옵니다. 그 무당을 불러다 점(占)을 쳐보시면 길흉(吉凶)을 모두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흐주(後主)는 황호(黃皓)의 말을 쫓아 후전(後殿)에 향불, 꽃, 종이, 초 등의 제물을 차리도록 했다. 그리고 황호에게 명하여 용하다는 무당을 수레에 태워 궁중에 모셔다가 용상(龍牀)에 앉히기까지 하였다. 천자 유선은 무당이 앉아 있는 용상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향(蜀)을 사르고 축원을 올렸다.
무당이 갑자기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전상(殿上)에서 수십 차례나 펄쩍펄쩍 뛰더니, 제사상 주위를 맴돌며 기이한 춤을 추었다.
그러자 황호(黃皓)가 후주에게 귀엣말로 말한다.
"무당에게 신이 내린 것이옵니다. 폐하(陛下)께서는 좌우 측근(左右側近)을 모두 물리시고 홀로 기도를 드리소서." 후주는 시중 드는 신하들을 모두 밖으로 물리고 다시 무당에게 절을 하며 축원(祝願)을 올렸다. 절을 올리는 후주에게 무당이 벌컥 고함을 지른다.
"내가 서천(西川)의 토지신이오! 이미 테평성대(太平聖代)를 누리고 있으면서 뭘 또 물어보는 것이오? 몇 년만 지나면 위나라의 강토도 모두 폐하의 것이 될지니, 아무 근심 마시오." 말을 마친 무당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후주 유선은 무당의 점괘에 크게 기뻐하며 무당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이 때부터 후주는 무당의 말을 굳게 믿고, 강유가 올린 표문 (表文)은 그대로 무시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궁중에서 잔치를 열어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강유(姜維)는 황제(皇帝)에게 소식이 없자 여러 차례 거듭 표문(表文)을 올렸으나 그 표문 (表文)들은 모조리 황호(黃皓)의 손으로 들어가 끝내 후주(後主)에게는 전달(傳達)되지 않았다.
종회(鍾會의 대군(大軍)은 허의(許儀)가 앞서 가며 개척해놓은 길을 따라 한중을 향해 진격했다.
전군(全軍)의 선봉(先鋒) 허의(許儀)는 공(功)을 세울 욕심(欲心)에 한 발 앞서 남정관(南鄭關)에 다다랐다.
허의(許儀)는 부장(部將)들에게 명령한다.
"남정관(南鄭關)만 지나면 바로 한중(漢中) 땅이다. 관 위에 수비(守備)하는 군마(軍馬)가 많지 않으니 단숨에 적(敵)을 무찌르고 관문(關門)을 점령하라!"
모든 장수들이 일제히 관문(關門)을 향해 돌격했다.
당시 남정관(南鄭關)을 지키는 촉(蜀)의 장수(將帥) 노손(盧遜)은 촉군(蜀軍)에서도 지략(智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장수였다. 노손(盧遜)은 진작에 위군(魏軍)이 들이닥칠 것을 예상(豫想)하고 미리 관문(關門) 앞 나무다리 양 옆으로 군사(軍士)를 매복(埋伏)해 두었다.
그리고 제갈무후(諸葛武侯 : 제갈량을 시호(諡號)로 이르는 말)가 고안한 십시연노(十矢連弩)를 무기로 사용할 채비를 갖추어 놓았다.
허의(許儀)의 군사(軍士)들이 관문(關門)으로 들이닥치는 순간, 여기저기서 '딱딱'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화살과 돌이 우박 내리 듯이 쏟아졌다. 허의(許儀)가 급하게 퇴각(退却) 명령(命令)을 내렸으나 이미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병사가 수십이었고, 사방으로 도망간 병사도 여럿이었다.
허의(許儀)는 본영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종회(鍾會)에게 보고했다.
종회는 직접 중무장한 군사 백여 명을 이끌고 남정관(南鄭關)으로 짓쳐들어갔다. 과연 허의(許儀)에게 들은대로 화살이 한꺼번에 수백 대가 날아들어 이대로는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했다. 종회(鍾會)가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려는데 관 위에서 노손(盧遜)이 군사 오백을 휘몰아 바짝 뒤를 쫓아왔다. 종회가 따라오는 노손(盧遜)을 보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종회(鍾會)가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다리 위의 흙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그 탓에 말굽이 흙구덩이에 빠져서 종회(鍾會)는 하마터면 말 안장에서 튀어 나갈 뻔했다. 말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종회는 우선 말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종회(鍾會)가 다리 중턱에 이르렀을 때, 뒤쫓아온 노손(盧遜)이 창(槍)을 치들어 종회를 찌르려 했다. 그 순간, 위군 장수 순개(荀愷)가 재빨리 몸을 돌려 노손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노손은 순개의 화살을 맞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그 사이에 종회(鍾會)는 다시 말을 일으켜서 마상(馬上)에 오른 뒤, 군사들을 휘몰아 관문(關門)으로 돌진했다. 관문 위에서 활을 쏘던 촉군(蜀軍) 병사들은 위군(魏軍) 바로 앞에 아군(我軍)이 있어서 함부로 화살을 날리지 못했다. 종회(鍾會)는 그대로 관으로 돌격하여 촉군(蜀軍)을 흩어내고 남정관(南鄭關)을 손에 넣었다.
종회(鍾會)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낸 순개를 호군(護軍)으로 삼고, 안장을 얹은 말과 투구, 갑옷을 하사했다. 그리고 허의(許儀)를 장막으로 불러들였다.
"네가 전군 선봉으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었더냐? 진군하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리 하나 제대로 고쳐 놓지 못해 나를 죽일 뻔 한 것이냐? 순개(荀愷)가 아니었으면 지금 난 죽은 목숨이다. 너는 군령을 위반했으니 당장에 군법대로 처형하겠다!"
허의(許儀)에게 호통 친 종회(鍾會)는 주위의 무사들에게 허의를 끌고 나가 목을 베라고 명령(命令)했다.
그 처분을 듣고 여러 장수들이 고한다.
"허의(許儀)의 아비 허저(許褚)가 나라를 위한 공을 많이 세웠으니 목숨이라도 살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종(鍾會)회가 말한다.
"군법이 그렇게 흐릿해지면 많은 군사를 통솔할 수 없다. 예외는 없다." 그리하여 허의(許儀)는 목이 달아났다. 허의의 머리는 진(陣)의 문 앞에 효시(梟示)되었다. 그것을 보며 떨지 않는 군사가 없었다.
낙성(樂城)을 지키고 있던 촉의 장수 왕함(王含), 한성(漢城)을 지키고 있는 장수 장빈(蔣斌)은 위군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감히 나가 싸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성문을 굳게 잠그고 지키기만 했다.
촉의 방어태세를 본 종회(鍾會)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린다.
"전쟁은 신속성이 가장 중요하다. 지체하지 말고 성을 공격해가라!"
종회는 전군장 이보(前軍將 李甫)에게 낙성을, 호군 순개에게 한성을 포위하게 하고, 본인은 대군을 직접 이끌고 양안관을 공략하기 위해 떠났다.
양안관을 지키던 촉장 부첨(傅僉)은 부장 장서(副將 蔣舒)와 방어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장서가 말한다.
"위군의 숫자가 굉장합니다. 그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우니 응전하지 말고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낫겠습니다."
부첨이 말한다.
"그렇지 않소. 위군(魏軍)은 장거리를 이동해왔으니 필시 모두 지쳐있을 것이오. 병력이 많으나 두려워 할 정도까지는 아니오. 우리가 싸우지 않으면 한성과 낙성은 함락되고 말 것이오."
장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때 급보가 들어왔다. 위의 대군이 벌써 관문 앞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부첨과 장서는 서둘러 문루(門樓)에 올라서서 밖을 내려다 보았다. 종회가 채찍을 공중으로 번쩍 치켜 드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종회가 기세 좋게 외친다.
"내가 십만 대군을 몰고 왔다!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 항복하는 자에게는 벼슬을 주겠다. 어리석게 항복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너희들에게 곧 재앙이 닥칠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부첨은 장서에게 명한다.
"그대는 관문을 단단히 지키시오. 나는 군사 삼천을 이끌고 가서 저 놈들을 휩쓸어 버리겠소." 부첨의 군사가 일제히 쏟아져 나오자 종회(鍾會)는 군사들을 이끌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부첨이 기세를 몰아 추격하는데, 흩어져서 도망가던 위군이 다시 합쳐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뭉친 위군은 부첨의 군사들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부첨은 황급히 군사들을 되돌려 관문을 향해 갔다. 하지만 관문은 꽉 닫힌 채 잠겨 있었다. 부첨이 위를 올려다 보니 성루 위에 난데없이 위나라의 깃발이 올라가 있었다.
잠시후 장서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부첨에게 외친다.
"나는 위나라에 투항했다!"
부첨은 노발대발하며 소리를 지른다.
"이 배은망덕한 도둑놈아! 네가 무슨 낯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겠느냐!"
부첨은 다시 말을 돌려 위군 진영으로 달려나갔다. 위군은 부첨의 군사들을 사방에서 에워싼 뒤 점차 포위망을 좁혀 들어왔다. 부첨은 죽을 힘을 다해 위군을 깨쳐보려 하였으나 소수의 병력으로 포위망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거느린 군사들 대부분이 죽거나 다쳐서 더 이상 적을 맞설 힘이 없었다.
부첨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탄식한다.
"촉의 신하로 태어난 나는 죽어서도 촉의 귀신이 되겠다!" 그리고 다시 말고삐를 단단히 쥐고 위군 속으로 돌진했다. 위군의 창과 칼에 부첨의 갑옷과 투구는 금방 피투성이가 되었다. 타고 있던 말이 쓰러지자 부첨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음을 택했다.
종회(鍾會)는 드디어 양안관을 점령했다. 양안관 안에는 군량과 마초, 병기가 그득히 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종회는 기뻐하며 삼군을 배부르게 먹였다. 그날밤, 종회의 군사들은 양안관에 머물렀다. 군사들이 잠들어 있는데 홀연 서남쪽에서 함성이 크게 울렸다.
종회가 깜짝 놀라서 급하게 장막에서 나와 밖을 살폈다. 허나 밖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밤공기마저 고요했다. 하지만 위군 장병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 잡혀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밤, 또 서남쪽에서 함성이 일었다. 종회는 사태를 파악해 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새벽녘에 사람을 보내 무슨 사정인지 알아보게 했다.
이윽고 정찰대가 돌아와서 종회에게 보고한다.
"십 리 밖까지 나갔지만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틀 밤이나 서남 방향에서 사람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무도 없다니 종회는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직접 서남방 일대를 순찰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얼마쯤 갔는데 눈 앞에 우뚝 솟은 산이 나타났다.
그 산을 중심으로 모든 방향에서 살기(殺氣)가 일더니 먹구름과 안개가 산봉우리를 뒤덮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다. 종회가 말을 세우고 향도관(鄕導官)에게 묻는다.
"이 산은 무슨 산인가?"
"이 산은 정군산(定軍山)입니다. 옛날에 하후연(夏侯淵)이 제갈공명의 계략에 속아 이곳에서 죽었습니다." 향도관의 말을 듣고 종회는 어쩐지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감회에 젖어 잠시 정군산을 바라보던 종회는 말머리를 본영 방향으로 돌렸다.
종회(鍾會) 일행이 산비탈을 막 돌아나오는데, 갑자기 광풍이 일더니 수천 명의 기병대가 함성소리도 없이 곧장 위군을 향해 돌진해 왔다.
깜짝 놀란 종회와 그 부하들은 정신없이 도망쳤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 나머지 말에서 떨어진 장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종회가 겨우 양안관에 이르러서 부하들을 살펴보니 사람이나 말 모두 조금 다치거나 투구를 잃은 정도이지, 그 이상의 더 큰 피해는 없었다.
종회(鍾會)는 뒤로 쳐졌다가 뒤늦게 들어온 병사를 불러다 묻는다.
"뭔가 본 것이 있느냐? 촉군은 아니더냐?"
"촉군은 확실히 아니었고 사람 같지도 않았습니다. 검은 구름이 이는 가운데에서 기병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가까이 다가와서도 사람을 헤치지 않았습니다. 곁을 스쳐지나갈 때 보았는데, 기병이 회오리바람으로 바뀌더니 먹구름 사이로 사라졌습니다."
종회(鍾會)는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서 촉에서 투항해온 장수 장서에게 묻는다.
"정군산에 신령을 모신 사당이 있느냐?"
장서가 대답한다.
"사당은 없고, 제갈무후(諸葛武侯 의 묘가 그곳에 있습니다."
종회(鍾會)가 깜짝 놀라더니,
"아까 본 것은 틀림없이 제갈무후(諸葛武侯)께서 현성(顯聖)하신 것이다! 내가 그 분 묘 앞에서 제를 올려야겠다."
다음날, 종회(鍾會)는 제물(祭物)을 성대盛大하게 갖추어 정군산(定軍山)으로 향(向)했다. 산 아래에 이르니 또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었다. 종회는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묘(墓)에 재배(再拜)하고 제(祭)를 올렸다. 그러자 광풍(狂風)이 사라지고 먹구름도 흩어지더니 맑은 바람이 일고 이슬비가 촉촉히 내렸다. 그리고 이내 날씨가 맑게 개었다. 종회(鍾會)와 위군(魏軍)은 크게 기뻐하며 모두 제갈공명(諸葛孔明)의 묘(墓)에 절하여 사례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그날밤, 종회(鍾會)는 장막(帳幕) 안에서 책상(冊床)에 엎드려 설핏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줄기의 맑은 바람이 불어오더니 웬 사람 하나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머리에는 윤건(綸巾)을 쓰고, 손에는 우선(羽扇)을 들고, 몸에는 검은 띠를 두른 학창의(鶴氅衣)를 걸치고, 발에는 흰 신을 신고 있었다. 얼굴은 관옥(冠玉)처럼 말쑥하고, 입술은 붉고, 눈썹이 짙고 눈은 맑고 깨끗했으며 신장(身長)은 팔척(八尺)이 넘어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신선(神仙) 같았다.
[여기서 잠시 삼천포로→ 신장(身長)이 팔척(八尺)이면, 1尺은 30.3cm x 8척 = 242.4cm 즉 2m 42cm 다른 글에서도 가끔 8척 장신이란 말이 나오는데 제갈량(諸葛亮)이 팔척 장신(八尺長身)이란 말은 들어본적 없고, 위(魏)의 장수 종회(鍾會)의 꿈속에서라면 넘어갈 수 있겠네요. ㅎㅎㅎ~ 나하사 첨(添) ]
종회(鍾會)가 일어나서 그 사람에게 묻는다.
"공(公)은 뉘신지요?"
그 사람은 자신(自身)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종회(鍾會)에게 말한다.
"오늘 나를 정성껏 돌봐주어 고맙다. 내가 그대에게 일러줄 말이 있어 왔노라. 한(漢)나라의 운수(運數)가 이미 쇠(衰)하여 천명(天命)을 거스를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촉천(蜀川)의 애꿏은 백성(百姓들이 전란(境界)에 고초(苦楚)를 겪을 터이니 참으로 가련(可憐)하고 애달프도다. 그대가 촉(蜀)나라의 경계(境界)에 들어서더라도 무고(無辜)한 백성(百姓)을 죽이는 일은 없도록 하라."
그 사람은 말을 마치더니 소매를 떨치고 사라져 버렸다. 종회(鍾會)가 붙잡으려고 하다가 깜짝 놀라 깨어보니 그것은 꿈이었다. 종회(鍾會)는 꿈 속에 나타났던 인물(人物)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인 것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종회(鍾會)는 바로 영채(營寨) 앞에 커다란 백기(白旗) 하나를 내걸었다.
거기에는 '보국안민(保國安民)' 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군사(軍士)들을 모두 불러들여 엄명(嚴命)을 내린다.
"앞으로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인명(人命)을 해치는 자(者)가 있으면 목숨으로 그 죄(罪)값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 소문(所聞)은 삽시간(霎時間)에 퍼져나갔다.
그 이후로 종회(鍾會)의 군대(軍隊)가 가는 곳마다 한중(漢中) 백성(百姓)들은 성(城)에서 나와 절하며 영접(迎接)했다. 종회(鍾會)는 백성(百姓)들을 일일히 위무(慰撫)하고, 장병(將兵)들도 무고(無辜)한 백성의 목숨과 재물(財物)을 범(犯)하지 않았다.
생전(生前)에 백성(百姓)을 사랑했던 공명(孔明)이 죽어서도 촉한(蜀漢)의 백성(百姓)들을 지켜준 것이었다.
삼국지 - 414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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