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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남화의 성지 운림산방
소재지 : 전남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번지
첨찰산 첩첩산중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숲을 이룬다는 운림산방. 산방 마루에 걸터 앉아 운림지를 내려다본다. 슬며시 내리는 보슬비에 초가지붕이 젖고 이윽고 뜨락에는 산빛 물이 든다. 때 마침 피어 오르던 안개는 나갈 길이 없는지 운림지 가운데 배롱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어느새 몽환의 세계에 갇힌다.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 선생(1808~1893)이 말년에 거처하며 여생을 보냈던 화실이다. 이곳에는 연못과 정원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며 초가집과 소치기념관, 남도전통미술관 등이 있다. 영화 “스캔들 조선남여상열지사”의 배경이 되기도 하여 더욱 유명하다.
이곳에서 소치(小痴)는 미산(米山)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재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허련(許鍊)- 미산(米山) 허형(許瀅)- 남농(南農) 허건(許楗)- 임전(林田) 허문(林田 許文) 등 5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운림산방, 쌍계사, 상록수림이 한데 어우러진 이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운림산방에서 약 150m를 오르면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진 진도아리랑비가 아담하게 서있다.
운림산방 앞에 있는 연못은 한면이 35m 가량되며, 그 중심에는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둥근 섬이 있고 여기에는 소치가 심었다는 백일홍 한 그루가 있다.
붓 하나로 임금님 사로잡은 천재 화가 소치 허련(小痴 許鍊)
기자명 고기복 기자
평택시민신문 기사 입력 2015.03.19. 11:49
추사가 사랑한 ‘문인화의 대가’ 그는 왜 모란을 즐겨 그렸나?
‘허모란’ 비아냥에도 당대 문인화가 불문율 과감히 깨다
경칩이 지났지만, 여전한 꽃샘추위에 개구리가 다시 움츠려들던 날이었습니다. 신장동 고서화수집가 신찬호 선생은 소치 허련 선생의 모란도를 보며 따스한 볕 가득한 봄날을 떠올렸나 봅니다.
“머지않아 꽃피고 새가 울고 만물이 소생하면 가족‧친구간이든 친목회든지 꽃구경 가잖아요? 이 그림을 보면 진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진도엔 소리꾼이 많고 문인 묵객이 많기로 유명한 것도 있지만, 거기 운림산방이 있거든.”
국가지정 명승 80호로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가 추진하고 있는 전남 진도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 세우고 그 아들에 아들이 대를 이어 한국 남종화의 본산을 이룬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 임인 허림, 4대 임전 허문, 5대 허진은 그 주인공들입니다.
생전에 모란을 많이 그렸다 하여 ‘허모란’이라고도 불렸던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은 ‘홍길동’을 쓴 허균의 후예로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해 일반인들 사이에선 낯선 이름입니다. 하지만 소치는 조선조 남종화풍을 토착화하는데 기여하여, 오원(吾園) 장승업(1843~1897)과 함께 19세기 후반 조선 회화의 양대 산맥으로 꼽힙니다.
소치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가 고향 전남 진도를 벗어나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필력을 알릴 기회를 얻게 된 것은 32세에 당대 최고의 학승이었던 해남 대둔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만나면서부터입니다. 추사를 만나기 전, 소치는 가사문학의 대가 윤선도 일가의 ‘공재화첩’을 빌려, 몇 달에 걸쳐 모사하면서 그림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남의 그림이나 베끼며 공부하던 소치가 초의의 추천으로 추사 저택 대문을 두드릴 때만 해도 한낱 시골뜨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서화가였던 추사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행운 중의 행운이자,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추사는 소치를 문하에 거둔 지 몇 달 뒤 제주로 유배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추사는 “화법이 심히 아름다우며, 우리 고유의 습성을 타파하여 압록강 이동(以東)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했을 정도로 소치를 아꼈습니다. 소치 또한 9백리에 달하는 바닷길을 거룻배를 타고 유배지 제주도까지 따라갈 정도로 추사를 온 몸과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당시 당파 싸움 속에서 목숨을 겨우 부지한 대역죄인이었던 스승을 따라 유배지를 따라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9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유배 생활했던 추사를 소치는 세 차례나 찾아갑니다. 추사는 권력 중심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 중이었지만, 조정의 이목이 집중된 죄인이었습니다. 권세와 이득을 쫓는 세상 얄팍한 인심과 달리 서슬 푸른 감시 속에도 귀양살이로 초췌한 늙은 죄인을 섬긴 소치에게 추사가 어떤 존재였는지 가늠하고도 남습니다. 죄인인 스승을 뒷바라지 한 소치는 홍길동을 썼던 허균의 후예다운 면이 있습니다.
추사는 유배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의 꽃을 피웠습니다. ‘세한도’에서 보듯 추사는 거센 제주 하늬바람에도 도도함을 자랑하는 소나무를 통해 선비의 곧은 정조와 굳센 기개를 표현했습니다. 힘든 수련 과정을 충실히 따랐던 소치는 스승의 가르침에 한 점 의문도 품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치는 스승에게서 학식과 이론을 겸비하여 표현하는 것을 배우고 남종문인화의 거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림으로 돈 벌지 않는다’
문인화가 불문율 깨고 모란 그려 팔아
삼절(三絶) 최고 경지였으나 쓸쓸한 노년
소치는 38세 되던 해(1846)에 유배 중이던 추사의 소개로 해남우수사 신관호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후일 영의정에 오른 권돈인을 만나 헌종(재위 1834~1849)에게 그림을 바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소치 인생 최고의 시기가 이때쯤이었겠지요. 40세(1848년)에 소치는 다섯 달 동안 헌종이 하사한 붓으로 그림을 그려 바치는 영광을 누립니다. 그 덕에 왕의 총애를 얻어 고부감시를 거쳐 친림회시 무과에 급제하고 훗날 정이품 무관인 지중추부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붓 하나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천재 화가 소치는 더 이상 시골뜨기가 아니었습니다.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소치는 중앙무대에서 정약용의 아들 정학연,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익 등 유명 인사들과 교유하며 많은 그림을 그립니다. 정약용의 장남 정학연은 소치를 삼매라고 평했습니다. 삼매는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나 영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헌종은 소치가 관직을 얻은 다음 해(1849)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어 1856년(48세)에 추사가 죽자, 소치는 다음 해(1897년)에 고향 진도에 운림산방을 짓고 은거하면서 그림에 몰두합니다.
십여 년 간의 은둔 생활을 마친 후, 소치는 다시 대원군, 민영익 등의 권문세가들은 물론이고, 전국을 떠돌며 부유한 중인들의 주문을 받아 서화를 품평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특히 부귀를 상징하며 ‘꽃 중에 왕’(花中之王)이라는 모란을 돈을 받고 그립니다. “미술은 어디까지나 취미로 하는 여기(餘技)이지 그림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는 당대 문인화가들의 불문율을 깬 셈입니다.
소치가 살던 시대는 조선조 5백년 양반정치가 무너지고, 쇄국이냐 개항이냐를 놓고 조정이 첨예하게 갈등하던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치는 평생 사대부로서의 삶을 지향했고, 남종문인화로 일가를 이뤘습니다. 소치는 시‧서‧화(詩書畫)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모란을 즐겨 그리며 돈벌이로 삼아 허모란(許牡丹)이란 빈정거림도 들었습니다.
몰락한 양반 가문 후예로 궁벽한 유배지 진도에서 나고 자라 반골 기질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관념적 사대부로서 돈을 받고 그림을 팔았던 행위를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죄인이었던 스승을 모시고 그림을 배웠고, 후일 왕의 총애를 얻어 중앙무대를 경험한 그는 분명 철저히 중세적 사고의 양반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전국을 방랑하며 모란을 그렸던 것은 유배지 출신으로서의 소외감을 털어버릴 탈출구를 그림에서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비록 돈을 받았지만 그는 영혼마저 자유로웠던 예인이었습니다. 이제 모란도를 감상하며 그의 속내를 살펴볼까요?
霑濕春霏更不嫌 흩날리는 봄비에 축축이 젖어도 흉하게 변하지 않고
花技婭姹雨廉纖 아양 떠는 소녀처럼 구부러진 꽃은 가랑비처럼 수수하구나
소치의 모란도는 마디마디 힘이 느껴지는 그의 대나무 그림과 달리 붓 자국이 부드럽고 꽃은 튀지 않으면서도 탐스런 모란의 풍부함을 잘 드러냅니다. 또한, 칠언절구로 쓰인 시만으로도 봄비에 젖은 모란이 눈에 선한 걸 보면, 삼절(三絶)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미술사가들은 “말년으로 갈수록 잘되지 못하거나 보잘것없는 작품인 태작이 많다”고 말하며, 모란도를 탐탁지 않게 평하기도 합니다. 그럼 당대 최고 문장이었던 추사에게 사사하고 남종문인화를 토착화시켰는데도 허모란이라는 비아냥과 함께 태작이 많다는 평가는 정당할까요?
모란은 기본적으로 부귀영화를 뜻합니다. 세한도로 대표되는 추사에게서 그림을 배웠던 소치가 사랑한 소재가 모란이라는 것은 역설적이긴 합니다. 그럼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서슬 퍼렇던 붕당 앞에서 스승을 따랐던 그 곧은 기개와 절개가 없었다면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는 운림산방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림은 예기(藝技)에 그쳐야지 돈벌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당대 풍습을 깨버렸던 소치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화가들은 소치의 덕을 보고 있습니다. 소치가 남긴 유산을 먹고 있는 셈입니다.
소치에 대한 변명을 하다 보니 분위기가 무거워졌네요. 독립 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김영랑의 시를 빌어 소치에 대한 변명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붓을 놓지 않을 테요.”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진도 운림산방(珍島 雲林山房)
서화 예술이 발달한 진도에서도 대표적인 서화 예술가로 꼽히는 이는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로 불리는 소치 허련(小痴 許鍊)이다. 그는 당나라 남송화와 수묵 산수화의 효시인 왕유의 이름을 따 허유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운림산방은 허련이 말년에 서울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의 당호다. 진도읍에서 바로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첨찰산 서쪽, 쌍계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ㄷ’자 기와집인 운림산방과 그 뒤편의 초가로 된 살림채, 새로 지어진 기념관들로 이루어져 있다. 운림산 방 앞 오각으로 만들어진 연못에는 흰 수련이 피고 연못 가운데 직경 6m 크기의 원형으로 된 섬에는 배롱나무가 있다. 소치 허련 선생은 1809년 진도읍 쌍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주를 보였다. 28세부터 해남 대둔사 일지암에서 기거하던 초의 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30대 초반 그의 소개로 서울로 가서 추사 김정희에게서 본격적인 서화 수업을 받아 남화의 대가로 성장했다. 왕실의 그림을 그리고 여러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김정희가 죽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진도에 내려와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그림에 몰두했다.
운림산방은 오랫동안 방치되다가 1982년 허건에 의해 지금과 같이 복원되었다. 화실 안에는 허 씨 집안 3대의 그림이 복제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고, 새로 지어진 소치기념관에는 운림산방 3대의 작품과 수석,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이다. 운림산방이란 이름은 첨찰산을 지붕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구름 숲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소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문의 061-540-6262
홈페이지 진도군 문화관광 https://www.jindo.go.kr/tour/tour
운림산방 입장료
성인 기준 2,000원이며, 청소년·군경은 1,000원, 어린이는 800원.
무료·할인
미취학 아동, 만 65세 이상, 진도군민은 무료.
단체는 30명 이상이며, 단체요금은 어른 1,500원·청소년 700원·어린이 500원.
휴무일 연중무휴
이용시간
[하절기(3월~10월)] 09:00~18:00
[동절기(11월~2월)] 09:00~17:00
※ 관람 1시간 전 매표 마감
운림지
예술가의 타고난 감성 때문일까. 소치는 운림산방을 이름처럼 멋지게 꾸몄다. 작은 초가집인 소치고택 앞에 널찍한 연못(운림지)을 파고 한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어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지금도 여름이면 연못 가득한 수련과 함께 붉은 배롱나무꽃이 핀다. 이 아름다운 연못은 영화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를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소치화실과 소치고택
소치화실의 정갈한 방안에는 그림을 그리는 허련의 형상이 놓여 있다. 소치고택은 소치 선생이 거주했던 초가집이다. 소치화실과 뒤편의 소치고택은 1982년 소치의 손자인 남농 허건에 의해 복원된 모습이다.
소치 1관과 소치2관
‘소치 일가 5대 미술관’이다. 소치 선생과 직계 후손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며 두 개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소치 1관은 허련 선생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으며 소치 2관은 2대부터 5대까지 후손들의 작품 10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2대 허형, 3대 허건과 허림, 4대 허문, 5대 허진 허청규 허재 허준 허은 등 후손들의 작품 100여점을 감상할 수 있다.
●소치 기념관을 재단장한 소치 1관
소치 1관은 기와를 얹은 전통 건축물로 기존 소치 기념관을 재단장했다. 소치 선생의 작품들만 모아 놓았으며 약 4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노송과 모란, 사군자, 괴석 등 잘 그렸던 그는 특히 산수화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짙은 먹과 마른 붓을 번갈아 쓰는 자유분방한 붓질과 많은 여백, 독특한 색감들이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소치를 논할 때 추사 김정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30살이 될 무렵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나갔으며 이때 남종화의 화법과 정신을 익혔다. 이후 자신만의 시서화를 완성하며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진다. 추사는 소치의 그림을 두고 ‘ 압록강 동쪽에서는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며 극찬을 마지않았는데 소치 또한 일평생 스승을 극진히 모신 것으로 유명하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었을 때는 세 번이나 바다를 건너 그를 찾아가기도 했다.
●미디어 아트와 포토존이 있는 소치 2관
진도 역사관을 개보수한 소치 2관은 현대적인 건축물로 1관과 대비를 이룬다. 가장 먼저 소치 선생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미디어 아트와 대나무 정원을 테마로 꾸민 홀로그램 포토존이 눈길을 끈다. 벼루와 붓이 단정히 놓인 탁자 앞에 앉아 있으며 바람결에 흔들리는 숲에 들어온 듯 마음이 정갈해진다.
이머시브룸은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변하는 실감형 미디어 아트 공간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과 바닥에 사계절 변화하는 풍경이 음악과 함께 펼쳐진다. 벽면을 터치하면 꽃이 활짝 피어나고 황금빛 나비 떼가 몰려오는 등 영상 속에 흠뻑 빠져든다. 마치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처럼 화려한 미디어 아트가 본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전시관은 소치 허련 선생의 직계인 2대 미산 허형과 3대 남농 허건, 임인 허림, 4대 임전 허문과 5대 오당 허진 등의 작품들을 세대 순으로 감상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미산은 소치 선생의 막내아들로 후손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가교 역할을 했는데 아버지와 비슷한 화풍의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특히 <묵매>와 같은 사군자들이 일품이다.
●200년을 넘나드는 예술 테마 시간 여행
미산의 두 아들인 남농과 임인은 엄혹한 시기에도 각자의 방식대로 예술혼을 꽃피웠다. 남농은 남종화에서 나아가 신남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고안했으며 한국 화단에 여러 업적을 남겼다. 임인은 토점화라는 독창적인 화법을 만들어냈다. 그는 일본 화단에서 천재 화가라는 찬사까지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20대에 요절했다. 대신 소치 일가의 화맥을 잇는 임전 허문을 남겼다.
임전은 구름과 안개가 주제인 운무산수화라는 몽환적인 세계를 창조해 냈다. 그래서 ‘안개 작가’라고도 불린다. 그의 작품은 오묘한 흡인력이 있다. 화폭에 담긴 산과 숲, 절벽, 폭포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금세라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마치 꿈을 꾸는 듯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떠나지 못한다. 80세가 넘은 노화백이지만 지난해에도 개인전을 여는 등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5대에 이르러서는 예술 세계가 더욱 다양해진다. 소치의 고손자들인 허진과 허재, 허준 등은 시대의 흐름에 각자의 개성을 더해 선조들과는 다른 독특한 작품들을 보여준다. 저마다 다른 철학과 내면세계를 담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근원을 따라가면 결국 소치로 귀결된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을 나설 때면 마치 200년에 걸친 시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된다.
남도전통미술관 - 진도군의 많은 예술인들의 전시 공간
남도 전통미술관은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에 위치하며 운림산방 매표소 근처이다. 이곳은 남종화의 본 고장인 진도군의 많은 예술인의 전시 공간 마련을 위해 건립된 곳이다. 전통 미술관답게 외관은 한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누구나 편히 들어와서 관람할 수 있다. 무료로 관람이 가능한 곳이지만 미술관이 넓고 깨끗하며 전문 미술관임이 엿보이는 곳이다. 전라남도는 대한민국 남종화의 화맥이 시작된 곳이자 수묵화의 전통을 가장 잘 지켜온 고장으로 공재 윤두서, 소치 허련, 남농 허건 등 수묵화 거장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곳에는 동양 산수화와 전통에 충실한 작가들이 자신만의 화풍으로 표현한 수묵 산수화가 가득 전시되어 있으며 수묵의 기본 재료들도 전시되어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수묵화뿐 아니라 채색화, 자기, 병풍, 관련 책자 등 다양한 전시물들이 있어 우리나라 미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근처에 운림산방이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상세정보
문의 및 안내 : 061-540-6264
홈페이지 : 진도군 관광문화 https://www.jindo.go.kr/tour
주소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운림산방로 315
이용시간
- 하절기 09:00~18:00 (입장 마감 17시30분)
- 동절기 09:00~17:00 (입장 마감 16시 30분)
휴일 : 매주 월요일 / 설·추석
주차 : 가능(주차 요금 무료)
이용요금 : 무료
운림산방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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