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용하 공소 터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송용길 145 (용하리57)
박해 이후 설립된 산두 공소의 뒤를 이은 공소였으나 이마저도 사라진 공소
이른바 '영동지역 복음화의 모태'로 불리던 신앙 공동체의 흔적이 사라져 가고 있다.
거진 본당 용하리 공소가 5, 6년 전 문을 닫아, 현재는 폐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용하리 공소는 북서쪽으로 3km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산두 공소의 뒤를 잇고 있다.
산두 공소는 19세기 후반 대원군이 주도한 병인박해(1866년) 이후 생걱났다.
원산지역으로 피신했던 신자 상당수가 이곳 거진읍 산북리 북쪽 노인산 기슭의 산두골에 정착한 것이다.
그들은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만들어 내다 팔아 생계를 이었다.
그 당시 신자 수는 70∼19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6.25 전쟁으로 산두 공소 건물이 불타 없어지면서 피난 갔다 돌아온 천주교인들이 용하리에 자리를 잡았다.
박해가 사라졌으므로 넓직하고 개방된 곳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긴 것이다.
용하리 공소는 1958년 인근의 대진, 자산 공소와 함께 설립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이곳에 살던 신자들은 1년에 2번 본당 신부의 방문을 받았다.
윤경화 사라 할머니(80)는 "봄, 가을 두 차례의 판공성사를 위해 원산, 내평 본당의 외국인 신부님을 모셔왔다.
미사궤를 운반하기 위해 지게를 짊어지고 갔다"고 선조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하였다.
그 이후 신자들은 남쪽에 새로 생긴 주문진, 양양 본당까지 먼길을 오가는 도중, 학야리, 도문 등지의 교우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용하리 공소의 마지막 회장 권재익 스테파노 형제(53)는 "그러면서 혼인관계가 맺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곳에는 하씨, 윤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말했다.
용하리 공소는 1998년 오영민 바오로 신부가 신자 감소 등을 이유로 폐쇄했다.
스테파노 전 회장은 "대신 봉고차를 사서 신자들을 본당까지 모셔 간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냉담자가 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공소에서 본당까지 거리는 6km 정도. 공소가 폐쇄되기 전에는 이곳에서 토요특전 미사가 거행되어 본당 신자들이
일부러 이곳을 찾기도 했다고 한다.
용하리 공소의 전신인 산두 공소는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중요성이 있는 만큼 그 있던 자리에 표지석이라도 남겨둘 필요가 있다.
현재는 감나무 너댓 그루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료: 「우리의 뿌리」, 춘천교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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