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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중구 순화동 재개발지구. 왼쪽 상단 소나무 아래가 유영숙 씨가 남편 故 윤용헌 씨와 운영하던 한식당 자리다. ©정현진 기자 |
현장 설명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은 유영숙 씨는 단란했던 네 가족의 모습과 지금은 없는 남편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재개발이 진행될 것이라는 소식이 있어 가끔 들르지만, 사실 이곳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소”라고 말했다.
유영숙 씨는 “10여년 간 이곳에서 장사를 했다. 상권이 좋아 점심시간이면 줄을 서지 않고는 밥을 먹을 수 없는 장소였다”고 하면서, “용역들이 드나들며 행패를 부리면서 한두 집씩 이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남편과 지덕춘 총무 등이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방적으로 보상금을 천만 원가량 정해줬다”고 설명했다.
그 돈으로는 어디 가서도 다시 장사를 시작할 수 없었고,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 유영숙 씨는 “당시 남편이 연대 투쟁을 해야 한다고 가족을 설득했을 때는 반대했었다. 우리는 여전히 2009년에서 삶이 멈춘 상태로 고통스럽게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 투쟁이 필요하다고 당부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재개발이 시작되는 순간, 세입자는 사람이 아니다
부동산 사기, 가정파괴, 용역 폭력에 대한 법적 책임, “판례 없다” 기각
두 번째 방문한 경기 고양시 덕이 마을은 다른 곳과 조금 달랐다.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는 다른 지역과 달리 재개발이 진행됐고, 새로 지은 아파트에는 입주한 가구도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자신의 가구매장이 있던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김명자 씨가 있다.
이곳은 재개발이 어느 정도 진행돼, 가구단지였던 넓은 땅에 도로가 나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러나 아파트 입주율은 30%에 그쳐, 인근을 순찰하는 경찰들은 이 지역을 ‘유령 마을’이라고 부른다.
▲ 덕이마을에 도착한 유영숙 씨와 전재숙 씨가 김명숙 씨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정현진 기자 |
그는 한때, 일산 가구단지에서 200여 평의 가구 매장을 가진 인정받는 사장님이었다. 2006년 매장에 화재가 났을 때도 절망하지 않고 매장을 다시 일으켰다. 매장에 쏟아 부은 돈만 2억 2천 800만 원. 2008년 4월, 땅 주인과 재계약을 맺은 지 3개월 후 땅 주인은 김명자 씨에게 아무런 상의 없이 재개발 업체에 땅을 넘겼다. 그렇게 김명자 씨와 세 딸의 천막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용산의 죽음이 나를 살렸다. 이 악물고 끝까지 연대투쟁 할 것"
김명자 씨는 “재개발은 이미 2006년 5월쯤에 시작됐지만, 어느 세입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땅 주인은 그것을 알면서도 불이 난 매장을 내 손으로 복구하게 했고, 재계약했다. 법이 존재하는 줄 알고 대응했지만, 법원은 ‘판례’가 없다며 기각시켰다”고 하면서, “이주비조차 땅 주인에게 빼앗겼다. 부동산 사기, 그로 인한 가정 파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에 대한 폭력행사...그 무엇도 법의 저촉을 받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그는 “눈앞에서 딸이 용역에게 폭행을 당하고, 나 자신도 농성 때문에 2009년 말부터 2010년 초까지 69일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우리는 대책 없이 모든 것을 다 잃어야 했다”면서, “기가 막힌 5년의 세월이었다. 우리 네 가족의 5년이면 모두 20년인 셈이다. 중학교 2학년인 막내딸이 대학생이 됐고, 철거는 그 아이의 꿈을 수의사에서 건축가로 바꿔놓았다”며 목이 메었다.
▲ 김명숙 씨와 세 딸이 살고 있는 천막 뒤로 들어선 아파트. 김명숙 씨의 가구점과 생활공간은 그 사이 도로 위에 있었다. 포장된 도로는 세 모녀의 삶마저 덮어버렸고, 넘을 수 없는 삶의 간극이 되어버렸다. ©정현진 기자 |
김명자 씨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빚은 있지만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던 때, 세 딸과 정답게 평범한 행복을 꿈꾸며 살던 때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지주들이 일방적으로 진행한 민간 투기 재개발
재개발 시작되자마자 마을버스 끊겨, 행정에서 배제된 주민들...
마지막 방문지는 경기도 김포 신곡마을. 원래 농업 지대였던 이곳에 하나 둘 씩 공장이 들어서 90여 개의 공장이 들어섰던 이곳은, 지금은 밤이 되면 어른들도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할 만큼 폐허가 됐다. 공장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인근 슈퍼마켓, 식당 등도 문을 닫게 됐다.
신곡지구상공대책위원장 조규승 씨는 이 지역이 “전형적인 부동산 민간투기로 인한 재개발 지역”이라고 말했다. 2006년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이 지역 땅값은 평당 1300만 원을 호가했다. 김포에서 가장 많이 치솟은 부동산 가격이 평당 800만 원인 것을 감안하면 천정부지였지만, 입소문만 부풀려지다 말았다. 신동아건설, 청구건설, 남강 토건 등이 뛰어든 이 재개발은 거품만 잔뜩 끼었다가 시행사 부도로 중단됐고, 주거 세입자와 공장 세입자 10여 명만 남아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조규승 씨는 “한 마디로 무책임한 재개발”이라고 일갈하면서, “민간개발업체, 지주조합이 개발을 신청하고 재개발 승인이 떨어지는 동안 이미 살고 있는 세입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사전 통보, 정보도 없이 갑작스레 당해야 하는 일이다. 조합이 결성되는 즉시 땅값이 두 배로 뛰고, 진행되면서 3배, 4배로 뛰는 과정에서 오로지 땅 주인만이 이득을 볼 뿐”이라고 한탄했다.
▲ 한 가운데 깃발이 꽂힌 집이 신곡마을의 유일하게 남은 거주 가구다. ©정현진 기자 |
누군가에게 절박한 삶의 터전이 누군가에겐 투기의 대상
철거민들이 또 다른 철거지역으로 흘러가는 악순환...강제철거는 모든 공공권 박탈
이번 순회의 계기가 된 용산참사의 현장 역시 마찬가지다. 추가 분담금 문제가 불거져 공사가 중단된 남일당 터는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유영숙 씨는 “번듯한 건물이라도 서있었다면 덜 억울하지 않겠나. 이러려고 그렇게 사람을 내쫒기부터 한건가?”라며 끝내 순회 중에 눈물을 터트렸다. 또 누군가는 “이미 떠난 세입자들도 결국 다른 철거지역으로 들어가야 했을 것”이라며, 터무니없이 쫓겨난 이들이 또 다른 철거를 겪어야 하는 유목의 삶을 한탄했다.
건설 시공사들의 재개발 부지 선정, 땅 주인들의 결탁, 집을 삶이 아닌 투기의 목적으로 대하는 이들이 빚어낸 비극은 또 다른 ‘용산’으로 복제되고 있다. 세입자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공공성 보다는 소유주의 절대권을 보장하는 재개발은 개발이나 건설이 아닌 ‘파괴 행위’에 다름 아니다.
철거는 단순히 집을 빼앗기는 주거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주거가 불분명한 경우, 취업이 어려워 노동권의 침해도 이어진다. 주거와 노동권 박탈은 즉, 모든 공공권을 잃는 데에 이르는 죽음의 악순환이다.
재개발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고 계류 중이지만, 근본적으로 재개발의 이면에 있는 ‘욕망’의 실체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실효성이 없다. 현재 시민사회단체에서 “주거권 보장, 지주의 금전적 이익보다 거주민들의 인권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개발, 재정착의 권리 보장, 퇴거 과정의 폭력 근절과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 그리고 반드시 거주민의 동의를 얻을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강제퇴거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장 순회가 끝나고 다시 대한문으로 출발할 때, 또 다른 철거 지역에서 일이 터졌다며 몇몇 활동가들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 “재개발의 논리와 방법이 지금과 같다면, 누구도 철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이것은 우리 삶의 문제다. 재개발 현장에서 무너진 ‘공공성’이 다른 영역에서 온전할 리 없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4주기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2009년 1월 20일을 살고 있다.
▲ 현장 순회단은 마지막으로 각 마을 주민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다. ©정현진 기자 |
▲ 김포 신곡마을의 전경. 90여개의 공장과 주민들이 북적대며 살아가던 풍경은 이제 없다. 날아온 나무 씨앗이 사람키를 넘도록 자라는 동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정현진 기자 |
▲ 현장 순회단은 세 현장에 모두 플랜카드를 걸며 남은 주민들을 응원했다. ©정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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