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림과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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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혜림(成蕙琳 1937년 1월 24일 창녕 - 2002년 5월 18일[1])은 조선로동당 국방위원장 겸 총비서 김정일의 정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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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연인은 여러 명이다. 그러나 장기간 동거하며 자식까지 둔
- 여인은 성혜림과 고영희 이다. 두 사람은 모두 사망했다.
- 이중 성혜림(成蕙琳.1937-2002)은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의 생모이다.
성혜림은 경상남도 창녕 태생으로 본관은 창녕이다. 그는 명문가의 3대 독자인 아버지
성유경과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개벽’의 여기자였던 김원주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서울 풍문여중에 다니던 성혜림은 전쟁이 일어나자 어머니를 따라 북으로 갔다.
평양 예술학교를 졸업한 후 19살에 당시 정치경제적으로 최고의 혼처였던
이기영(전 조선작가동맹위원장)의 장남 이평(李平)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는 이평 과의 사이에서 '옥돌'이라는 딸을 낳았다. 결혼 도중 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한 혜림은 연출과를 졸업하고 예술영화‘분계선의 마을’을 시작으로
북한 최고 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60년대 말 촬영소에 자주 나와서 영화를 지도하던 '웃분'(김정일)이 성혜림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성혜림은 많은 영화 주연을 한
중견배우였다. 그러나 이른바 '토대'(계급성분)가 나쁘다는 이유로 배우급수도
오르지 못하고 당원도 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혜림은 김정일이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미인이었다.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를 여읜 김정일에게 연상인 성혜림은 따뜻한 모정을 느끼게 해준 것이다. 더구나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김정일은 밤을 새우며 성혜림과 이야기를 나누기 일쑤였다.
그녀는 김정일 보다 다섯 살이나 많았다. 이미 이평 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있는
여성이었다. 당시에 성혜림은 33세이고 김정일은 28세였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데는
나이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첫 번째 동거녀다. 당시 성혜림은 빼어난 미모와 어린 시절
교육받은 교양 있는 예절로 북한 사회에서 인기가 높은 여배우였다. 그녀는 김정일보다
연상이었으며 친구의 형수였다. 물론 김정일은 20대 후반까지 여러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김정일이 진짜 사랑을 한 사람은 성혜림이 처음이다.
당시 김정일은 계모와 권력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유부녀와의 동거’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혜림을 관저로 불러들였다. 김정일은 성혜림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다.
김정일은 훗날 성혜림과 헤어진 후에도 어머니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여성을 좋아했다.
결국 성혜림은 남편 이평 과 이혼하고 1969년부터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한다.
성혜림은 아이를 임신한 1970년 중성동 김정일 관저에 들어갔다. 그 뒤 동거한 지
3년만인 1971년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바로 김정일 위원장의 첫째 아들 김정남 이다.
김정일은 아들의 존재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야 했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에게도
손자가 태어난 사실을 숨겼다. 그는 자신과 성혜림과의 부도덕한 관계가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성혜림과 가까이 지냈던 수많은 예술인들을 수용소에 보내기도 했다.
김정일의 '동거녀' 성혜림과 아들 김정남은 북한에서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다. 김정일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세상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성혜림은 아들 정남에게 동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시 임신하기도 했지만 74년과
77년 경 두 번이나 유산했다. 말 그대로 그들은 김정일이 쳐놓은 울타리를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생활한 관저는 '화려한 감옥' 이었던 셈이다. 김정일도 성혜림과 아들 정남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 이것을 알게 된 김정일의 동생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한번 결혼해서 애도 딸린 여자니까, 정남이는 내가
키울 테니 나가시오. 노후는 잘 보장해 주겠소.”김경희는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말은 성혜림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던져주었다.
언제 자식을 빼앗기고 쫓겨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성혜림은 신경성 질환과
불안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다. 불안, 우울증, 신경쇠약, 노이로제가 겹쳤다.
결국 혜림은 1974년부터 모스크바로 치료를 다니게 된다.
1970년대 후반 모스크바에서 혜림은 병이 심해 밤마다 구급차가 와서 수면 주사를
놓아줘도 자지 못했다. 불안발작이라는 차마 볼 수 없는 신경병은 갈수록 심해졌다.
본인의 고통은 말 할 것도 없고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괴로울 정도 였다. 성혜림은
이때부터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요양하다가 가끔 평양에 들어갔다. 성혜림과 김정일은
1968년부터 연애를 시작해 1974년 모스크바로 신경쇠약 치료를 받으러 가기 전까지
6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이런 불행한 세월을 보낸 성혜림은 2002년 5월 모스크바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당시 그의 나이 63세였다. 북조선은 성혜림의 장례식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그의 시신은 사망 직후 북한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인수해 갔다.
성혜림은 병원 치료과정에서‘오순희’라는 가명을 썼다. 묘지 관리사무소
사망자 명부에도‘오순희’로 기재돼 있다.
성혜림의 동생 성혜랑은 1996년 미국으로 망명해 살고 있다.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은
대한민국에 망명해서 결혼해 거주하다가 암살되었다. 성혜랑이 1996년 서방으로
망명하면서 김정남의 위상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성혜림은 모스크바 서쪽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아들 내외가 묻힌 무덤에서 불과 10여m 사이에 자리했다. 묘비에는
‘성혜림의 묘’라는 글씨와‘1937년1월24일~2002년5월18일’이 새겨져 있다.
묘비 뒷면에는 `묘주 김정남'이라고 또렷이 새겨져 있다.
주변의 다른 묘가 서쪽을 향한 것과는 달리 '성혜림의 묘'는 정반대로 자리하고 있다.
봉분이 밖으로 크게 노출된 것도 주변 러시아인들의 묘와 구별된다.
봉분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묘비 주변에는 낙엽과 나뭇가지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상당 기간 사람이 찾지 않은 것이다. 김정남이 삼남 김정운 대신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가 됐다면‘성혜림의 묘’는 달라졌을 것이다.
한편 창녕성씨의 시조 성인보(成仁輔)는 고려 때 호장을 지냈다.
호장은 고려시대에 지방민을 다스리는 호족장이다. 성인보 이래 대대로
창녕에서 호장을 지낸 후손들이 창녕을 본관으로 삼았다.
성씨가 명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성인보의 아들 성송국이 문하시중과
군기감을 역임하면서 시작된다.
창녕성씨의 계보는 성송국의 아들 공필 과 한필 등 형제 대에서 "노상파"와 "노하파"의 2개 파로 갈린다. 길을 가운데 두고 아래 윗마을에 갈라 살았던 데서 계파의 명칭이 유래했다.
성씨는 독곡 성석린, 회곡 성석용, 상곡 성석인 3형제가 조선 개국에 참여하면서 가문의
번성을 가져온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성씨는 조선조에 1백38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삼곡(三谷)"으로 불리는 성석린 3형제는 고려 말의 절신 성여완 의 아들들이다.
특히 회곡 의 후손에서는 성삼문 등 절신이 나와 유명하다.
상곡 의 후손에서는 성현, 성혼 등 이름난 학자가 많이 나왔다.
매죽헌 성삼문은 도총제 성승 의 아들이며 성석용의 증손자다. 1456년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탄로 나자 목숨을 버렸던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정권의 변동기에 신념과
절의에 충실했던 그는 창녕성씨의 정신적 지주로 일컬어진다.
성삼문은 세조를‘전하’라 부르지 않고 끝까지‘나으리’라고 불렀다.
이 사건으로 성삼문의 일문은 멸족의 비운을 겪는다. 아버지, 세 아우, 아들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불과 38년의 짧은 생애를 살았다.
성삼문은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받은 녹은 한 톨도 손대지 않았다. 창녕성씨는
조선시대에 모두 48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인구는 2000년 현재 167,903명이 있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3337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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