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명상
무한(Infinity). 무한한 영역. 형태가 없습니다. 구별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이면서, 무한한 하나됨 속에서 어떤 형태, 어떤 모양, 어떤 크리스탈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마침내 개별성과 자의식을 띠게 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은 자신을 무한으로부터 솟아나게 했던 바로 그 힘, 창조적 존재의 창조적 충동, 모든 것의 근원이자 무한의 근원인 그 힘에 조율합니다.
그것은 자의식이 깊어짐에 따라, 자신을 표현하려는 충동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곳에 아직 전체(All)와의 하나됨으로 솟아 오르지 못한 형태의 영역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가능성과 사랑, 즉 자신을 표현하고 창조하고, 신성한 자질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느끼며, 이처럼 솟아오르는 세상의 일부가 되려는 열망을 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하나로 모아 집중한 뒤, 마치 나무에서 떨어져 하늘거리며 내려오는 벚꽃처럼 천천히 하강합니다.
형태 속으로 하강하기
이 자아는 물질 세계로 합류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공기 중에 떠있는 물 분자들의 집합체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공기라는 것이 무한한 영역에 비해 얼마나 밀도가 높은지 느끼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이 감각에 익숙해지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공기의 세계에서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저 물 분자들의 집합체인가, 아니면 하나의 온전하고 통합된 전체인가?"
그런 다음 그것은 창조적 열망을 실현하려면 물질 영역의 육체라는 더 낮은 차원으로 내려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공기를 식히는 차가운 온도 같은 응축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이 때문에 물 분자가 하나의 물방울로 응결되어 공기 중에서 분리됩니다. 더 이상 공중에 떠있을 수 없게 된 그것은 물방울로 뭉쳐져서 공중에서 떨어지기 시작하고, 대기권을 뚫고 빠르게 내려오다가, 갑자기 큰 충격과 함께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납니다.
더 높은 영역과 물질 영역의 밀도차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육화로 들어올 때의 충격은 물방울이 바위에 부딪혀 작은 입자로 부서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이 낯선 상황에서 중심을 잡으려 해도, 아래로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물방울로 모아져 바위에서 굴러 떨어집니다, 더 아래로 떨어지고, 더 큰 바위에서 굴러 떨어지며, 계속 굴러갑니다, 그러다 갑자기 다가오는 또 다른 물방울을 보게 됩니다. 물방울들은 서로 부딪히며 더 큰 물방울이 되며, 이 힘 때문에 계속 아래로 끌어당겨지고 다른 물방울과 합쳐져 작은 물줄기를 이룹니다.
물줄기는 바위 사이를 굽이쳐 흐르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부드러운 소리를 내지만, 항상 아래 쪽을 향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작은 물줄기들과 합쳐지며 더 큰 물줄기를 이룹니다. 이제 속도와 기세가 더해지면서 귀가 먹먹할 정도의 굉음을 냅니다, 작은 계곡물이 되어 바위 위를 거침없이 내달리며, 앞으로 계속, 그리고 아래로 계속 흘러갑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찾아내야 할 무언가가 있고, 앞으로 밀어붙이는 거침없는 힘에 이끌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점차 더 큰 물줄기를 이루며, 마침내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에 다다릅니다, 이제 개별적인 물방울들은 다시금 자신의 정체감을 형성할 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물살에 휩쓸려 아래로 떠내려가고는 있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에게 어떤 개별성과 통일성, 일관된 존재감, 그리고 지속하는 존재로서의 어떤 감각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을지라도, "나는 하나의 자아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나의 개별성을 자각하고 있다"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인식의 증가
여정은 계속됩니다. 물방울 하나하나는 주변 환경을 더 잘 인식하게 됩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강줄기의 굽이치는 흐름과 돌출된 바위들을 보며 진로를 바꿉니다. 이제 그들은 특정한 패턴들을 발견하고, 자신들이 지금 나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조금씩 이해해 나갑니다.
마침내 그들은 강폭이 넓어지고 물살이 완만해진 산 아래 평원으로 내려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이 수수께끼를 깊이 성찰할 여유를 갖게 됩니다. 내가 나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곳이며, 나아가고 있는 나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강물과 함께 흘러가며 그들은 점차 더 깊은 자각과 내면의 평온함을 얻습니다.
강이 더 넓어지면서, 강물은 점점 더 크게 굽이쳐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보면 물길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막다른 곳이 생기기도 하는데, 갇힌 물방울들이 이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다른 물방울들은 계속해서 강줄기를 따라 흘러갑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강물은 갑자기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곳은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 고통의 바다, 즉 삼사라의 바다입니다, 그곳에서 물방울들은 거세게 일렁이는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내던져지고, 마침내 자신이 무언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의 물방울이 파도의 원형 운동을 따라 회전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파도 중 일부는 마침내 바위투성이 해안으로 밀려 올라가 전체 물줄기에서 분리되며 개별적인 파도로 부서졌다가, 다시 서서히 바다로 되돌아갑니다.
아주 오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물방울들은 외부의 어떤 힘에 떠밀려 다니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물방울이 파도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고, 파도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물방울들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지혜가 아니라, 세상을 초월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 즉 삼사라의 바다를 서로 충돌하거나 바위 투성이 해안에 부딪히는 격렬한 파도의 지옥으로 만드는 그 투쟁을 초월하는 지혜를 얻기 시작합니다.
투쟁의 감각을 극복하기
점차적으로 이 물방울 중 일부는 더 이상 투쟁을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무언가를 찾아내고, 무언가를 성취하며, 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감각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합니다. 이제 그들은 바위 투성이 해안이 아닌 모래사장으로 밀려 올라옵니다, 해변으로 떠밀려 온 그들은 모래 위를 구르며 나아가다 상승하는 운동량이 다하면, 다시금 자신들을 바다로 끌어당기는 중력의 영향권에 놓이게 됩니다.
수많은 물방울이 해변으로 밀려 올라와 어떤 높은 곳이나 전환점에 도달했다가 다시 바다로 굴러 내려가고,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구르다가 또다시 위로 튕겨 올라가는 이 과정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물방울은 마침내 깨닫기 시작합니다,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느낌, 심지어 앞뒤로 오가는 이 반복적인 움직임으로 해안을 깎아내야 한다는 느낌조차 뛰어넘는 길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물방울들이 붓다의 지혜라 할 수 있는 것을 얻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들은 현실, 즉 자신들이 살아가며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과 현상들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비록 자신이 바다 속 물방울 하나일지라도, 바다의 흐름을 반드시 따라야할 필요는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끊임없이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표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내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더 깊이 내려갈 수 있다”. 그렇게 하면 파도의 순환적인 움직임을 넘어서게 됩니다. 물 위에 떠 있으려고 애쓰던 저항을 멈춥니다. 그들은 고요해지고, 몸을 맡겨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습니다.
물방울들이 일렁이는 파도의 표면 아래로 가라앉을 때, 때로는 해류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아라는 바다의 더 깊고 고요한 영역을 탐구하고 싶은 열망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다의 규모와 움직임, 바다 속 깊은 곳의 미묘한 흐름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한동안 새로운 경험과 풍경, 나아가 자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선사하는 이러한 흐름 중 하나를 따라서 흘러갑니다. 그들은 바다라는 우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아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들은 흐르며, 무한해 보일 수도 있는 이 깊은 영역들을 가로질러 여정을 이어가지만, 시간이 흐른 뒤 어떤 물방울은 바다의 흐름 너머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물방울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합니다: "물방울은 항상 움직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러다 보면, 어떤 물방울들은 자신들이 긴 여정을 거쳐왔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모든 물방울은 여정의 지난 단계들을 때때로 잊어버리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는 아닐지라도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합니다, 아주 오래전, 저 멀리 높은 차원의 영역에서 여정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공기의 영역으로 들어섰고, 이내 물방울로 뭉쳐져 아래로 떨어져 내렸던 것입니다.
바위에 부딪히는 순간부터 여정이 시작되었고, 멈출 수 없었습니다. 산비탈로 굴러 떨어지고, 물살이 거센 강물에 몸을 맡겼다가 느릿한 강물로, 다시 바다로 흘러 들어가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온갖 경험을 했습니다, 바위투성이 해안이나 모래사장으로 밀려 올라갔다가, 다시 해류를 타고 떠밀려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여러분은 자신이 긴 여정을 거쳐왔으며, 그 여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관점, 즉 진정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점을 얻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정에서 마주한 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 여정을 직접 겪어낸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무언가를 배운 것입니다. 자아는 여정을 통해 변형되었고, 이제는 여정을 시작할 때보다 더 이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무한으로 돌아가기
그러다 어떤 물방울은 움직임의 단계를 거치는 이 여정에 지쳤다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래 왔던 곳, 곧 무한의 차원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움직임과 동일시하는 것을 멈춰야 하며, 이 세상에서 어딘가로 가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멈춰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 대신, 고요해져야 합니다.
약간의 혼란을 겪은 뒤 그들은 비로소 고요함에 자신을 내맡기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토록 긴 여정을 거쳐왔고, 나 스스로를 움직이는 물방울로 여겨왔는데,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는 과연 누구일까?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라는 자아가 남아 있을까?' 두려움과 떨림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은 결국 깨닫게 됩니다, 나는 고요함 속에서 시작되었으니, 고요함에서 형성된 나의 자아가 다시 고요함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어찌 사라질 수 있겠는가? 그때 비로소 그들은 움직임의 영역에서 여정을 통해 얻은 것들을 잃지 않고도 고요함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되돌아오는 자아는 처음 내려왔던 자아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이 자아는 형태나 움직임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으며 무한한 자아, 곧 무한한 창조주의 개별화된 표현인 자아감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제 그 자아는 처음 내려왔을 때보다 훨씬 더 큰 자각을 갖게 됩니다.
물방울은 무한한 영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임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행하거나 성취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기 외부의 무언가를 바꾸거나 유한한 세계 속의 어떤 지점에 도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고요해짐으로써, 자신이 고요함에서 태어났으며 결코 그 고요함을 떠난 적이 없다는 현실과 다시 연결되는 문제일 뿐입니다. 고요함은 움직임의 배경입니다. 고요함이 없다면 움직임도 있을 수 없기에, 마침내 물방울은 모든 것이 붓다의 본성이라는 말에 담긴 진리를 알기 시작합니다.
이제 이런 인식이 시작됩니다: "나는 붓다 본성이다. 나는 현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특정한 개별적 자아로 현현했으나, 그 현상들 또한 불성이 그러한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제 나는 여정이 완성되었음을 느끼며, 따라서 지금의 나인 이 자아로서 고요의 영역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면 물방울은 움직임의 세계, 즉 움직이는 듯 보이는 현상들로부터 주의를 거둘 수 있습니다. 물방울은 바다의 흐름으로부터도 자신을 분리하여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마침내 모든 움직임을 내려놓고, 몸을 맡겨 자아의 바다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자아라는 바다에는 바닥이 없습니다. 결코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습니다. 점점 더 깊이 내려가는 동안, 실제로는 물방울의 상태를 초월하는 연금술적 과정을 겪기 시작합니다. 이제 물방울은 에테르화되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자신이 아래로 내려가는지 위로 올라가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이 위로 솟아오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물방울은 먼저 공기 중으로 다시 솟아오르는 물 분자로, 이어서 에테르적 형태, 즉, 이 여정을 시작했을 때보다 더 커진 에테르적 자아의 감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오,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이 기쁨. 여러분은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자신을 어떤 사물과 동일시하지 않게 되므로, 여러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면 지구와 같은 행성에 육화한 생명 흐름들을 돕는 붓다의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몰입상태에서 깨어나도록 그들을 고양시키고, 눈에 보이는 현상(겉모습)이 그들을 지배할 힘이 없음을 깨닫게 하며, 나아가 그들 또한 고요함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그들을 고양시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고요함으로 돌아오면, 여러분은 사람들을 강요해 억지로 변화시키려 하거나 특정한 결과를 성취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지 않게 됩니다. 언제나 그 고요함에 머물게 되며,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눈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겉모습)이 진정한 현실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유일한 현실은 자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먼저 겉모습 속에 깊이 빠져들어 그 현상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가, 여러 단계를 거쳐 형태와의 동일시에서 점차 깨어나 고요함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여전히 삼사라의 바다에 머물러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 고요함에 조율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시대를 초월한 붓다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이 표현은 하나의 도구이자 기회입니다, 이는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이나 현재 느끼는 자아감이 곧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관점을 갖기 시작하는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겪어온 여정의 무한함에 단단히 고정되어, 전체 여정을 조망하는 관점을 얻음으로써, 현재의 상황이 단지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저항을 멈추고 투쟁을 멈춤으로써 그 너머로 흐르거나 그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습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계속 발로 차고 움직여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오로지 외적인 자아, 즉 분리된 자아뿐입니다, 왜냐면 그 자아는 자신이 익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아는 고요함 속에 빠져 익사하지 않을 것이며, 고요함 속에서 진정한 삶, 참된 삶을 찾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요함 속에서 나왔으며, 움직임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삶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나(I AM)라는 고요함, 고요함 속으로 돌아와야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즈라! (9회 이상)
[지침]
붓다는 세상의 주(Lord of the World)로서의 지위를 지니며, 육체를 가진 존재들이 형태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을 유지하는 존재입니다. 형태가 존재하려면 반드시 공간이 필요하기에, 붓다는 고요의 영역과 움직임의 영역을 잇는 연결 지점이 됩니다. 이는 곧 붓다의 사무국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고요함에 이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선물은 여러분이 각자의 방식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주어졌습니다. 이를 듣거나, 소리 내어 읊거나, 혹은 그 안에 깊이 몰입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고요함이 움직임의 세계가 지닌 현상 속으로 스며들게 되어, 온전한 해방이 이루어집니다.
고요함은 그 존재를 드러냈고, 비록 마라의 데몬들이나 여러분 자신의 에고가 이에 대항할지라도, 여러분은 여러분 위에 붓다의 현존을 시각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붓다의 손이 여러분의 손과 겹쳐지게 한 상태로 땅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바즈라! 바즈라! 바즈라! 바즈라! 바즈라! 바즈라! 바즈라! 바즈라! 바즈라!(9번)" 이를 통해 육체를 지닌 채로도 고요함 속에 머물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언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마음이 아닌 내면의 고요함의 중심에서 이렇게 하면, 땅이 솟아올라 육체를 가진 붓다로서 살아갈 여러분의 권리를 확증해 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지닌 잠재력입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잠재력입니다, 붓다의 직분은 오로지 한 가지 목적, 즉 육화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미 붓다라는 현실을 깨달을 기회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고요함은 모든 움직임의 바탕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붓다의 본성입니다. 이는 단지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느냐, 고요함에 초점을 맞추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 두 가지를 선택할 능력이 있으며,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고요함에 초점을 맞추기로 선택할 때, 여러분은 비로소 불성을 구현한 붓다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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