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활초 공소]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고향의봄길 278-7 (활초리 산 118-1)
박해 때도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피신처 교우촌
병인박해가 임박한 1866년을 전후한 무렵에 이미 남양 고을 내에는 백학, 홀연이, 활초리 등 3개의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 공소 설립연도와 배경 등이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박해 시대부터 교우들이 모여 옹기그릇을 구우며 살던 교우촌 흔적이 있고,
교우들에게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1866년부터 1873년까지 무려 8년 동안의 엄청난 대박해 속에서 백학과 홀연이는 포졸들의 습격으로 산산조각이 났으나,
활초리는 박해의 끝자락에 해당되는 1870년대 초반에야 교우들이 숨어들어 오랫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안전한 교우들의 피신처로 남게 되었다.
1888년 7월 본당으로 승격된 왕림 본당의 관할에 있던 남양 공소가 1961년 남양 본당으로 승격되어 서신면, 송산면, 남양면,
비봉면 일부를 본당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남양 본당 초기에 가장 오래된 공소로는 백학(또는 쌍학) 공소, 홀연이 공소,
활초(活草) 공소로 그 공소 설립 연도와 배경 등이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나 박해 시대부터 교우들이 모여 옹기그릇을
구우며 살던 교우촌 흔적이 있어, 그 내용이 오늘까지 교우들에게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는 현실이다.
활초 공소는 대원군 박해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구전이 있다.
병인박해의 후반부에 해당되는 1870년대 초반에 ‘이씨(李氏)’라는 선비가 외부에서 들어와서 글방을 차리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자,
박해를 피해 떠돌던 많은 교우들이 이곳으로 와서 은신하며 박해를 피했다고 하는 활초리 공소는 왕림 본당이 설정된
1888년은 물론이고 대한제국 말기까지 교세 통계에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그러다가 1915~1916년 현재 활초 공소 교우 세대는 51세대이며 교우는 142명(남 50, 여 83)으로 비교적 교우수가 많은 공소로 나타나고 있다.
활초리 교우촌은 남양면 소재지에서 남향으로 약 6km 떨어진 남양부 둔지곶면에 속해 있던 곳이다.
역골을 거쳐 메주 고개를 넘어 활초초등학교를 지나 활초리 공소 윗밭 과수원 자리가 점터가 있던 자리라고 구전되고 있다.
아직도 주위에 불 먹은 흙과 질그릇 깨진 것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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