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고성한벌>18회 /갯바람(3회 조영남/둔전리)
진도동학농민군과 스러지고 만 대한제국
1.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운동, 동학혁명]
정의
1894년(고종 31) 반봉건(反封建)·반침략(反侵略)의 기치아래 조선 봉건사회해체기의 제 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
개요
동학(東學)의 종교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도시민·소상인·몰락양반·이서 등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제·반봉건 근대화운동이었다. 1894년 농민전쟁·동학난·동학 혁명·동학혁명운동·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사회경제적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 및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사회는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지주전호제). 특히 지주제의 모순과 봉건적 수취체제의 제반 모순에 따라 직접생산자인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항쟁에 대해 정부는 봉건지배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을 개혁하지 않고 단지 현상적인 부세제도의 부분적인 수정을 통하여 이를 무마하려 했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종래의 봉건적 모순은 더욱 심화·확대되어갔다.
개항 이후 불평등무역구조 속에서 소수의 지주·부농층은 대일 미곡수출을 통하여 많은 이익을 얻어 토지를 사 모으고 지주제를 강화시켜갔다. 이에 반해 대다수 농민들은 지주제의 강화와 상인층과 지주들의 고리대의 수탈로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영세수공업자·상인층도 외국 상인의 침투에 따라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농민전쟁의 진원지인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의 포구·개항장은 대일 미곡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미곡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분화 및 계급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봉건사회를 변혁하려는 일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호남지역에서는 유형원의 학문적 전통을 잇는 부안(扶安) 동림서원(東林書院)과 오랫동안 강진에 유배되었던 다산 정약용 등 실학자의 진보적 사상이 암암리에 몰락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유포되고 있었다. 농민전쟁의 지도자인 전봉준도 그중의 한 인물이다. 이들은 기존의 군현단위의 농민봉기가 가진 지방적 분산성을 극복하고 체제개혁을 위한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각지의 농민들을 조직·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광범위하게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조직을 주목했다. 동학(東學)은 몰락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하여 만민평등의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다.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관념적 차원에 머물렀으나 만민평등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반봉건 의식과 척왜양(斥倭洋)이라는 반침략의 민족 논리를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동학교단은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종교적 운동을 벌였다. 이때 전봉준 등 남접세력은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민족적·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을 기도했다. 이들은 교조신원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금구집회(1893. 3)를 소집, '척왜척양'(斥倭斥洋)과 '수령의 불법 침학 반대'를 외치면서 사회혁명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고부민란
갑오농민전쟁은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민란(古阜民亂)에서 비롯되었다. 고부지역은 전통적으로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매우 심한 곳이었다. 특히 1880년대 말경부터 봉건정부 스스로도 궁장토의 확대 특히 균전수도(均田收賭) 문제와 같이 농민들의 토지를 수탈하거나 지대를 수탈하여 지주제를 확대·발전시키고 있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만석보(萬石洑)의 고율수세를 비롯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들을 착취했다. 고부농민들은 1893년 11월경에 조병갑에게 민장(民狀)을 제출하여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최경선·정익서·김도삼 등 농민지도자들은 봉기를 계획하고 비밀리에 각 마을의 집강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이들은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한다',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 한다'는 등 행동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전임됨에 따라 사발통문결의는 보류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1893년 12월, 60여 명의 고부농민을 거느리고 새로 온 고부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 하게 되자, 사발통문 결의사항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에 1894년 1월 11일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한 후,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둑을 허물고 거둬들인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정부는 민란수습책으로 고부군수를 새로 임명하여 유화책을 쓰는 한편,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여 조사토록 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였다. 이처럼 고부민란은 아직 국지적인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의 폭압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빌미로, 요호부민들을 잡아다 난의 주모자로 몰고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1차 농민전쟁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이 일단 해산한 후, 전봉준은 무장(茂長)으로 가서 3월 초순부터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했다. 약 15일 동안 4,000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첫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했다. 이어 무장·고창·흥덕·태인·정읍·김제·금구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백산에 집결했다. 3월 25일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여 농민군을 정비했다. 연합부대의 대장에는 전봉준이 추대되고, 손화중과 김개남이 부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래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 받는 민중과 봉건통치지배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다. 백산에서 대오를 편성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한 후, 정부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지를 공략했다. 진격하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하여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압수하였으며, 탐학관리를 비롯한 양반·지주·부호들을 징계하고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정부는 4월 2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병을 현지로 파견했다. 그러나 장성의 황룡시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병의 선발대는 농민군에게 격파 당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장성을 떠나 북상 길에 올라 원평·정읍을 거쳐 4월 27일(양력 5. 31)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화약과 집강소체제
전주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는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월 29일에 청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과 일본군은 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 측이 이에 응하여 5월 7일(양력 6. 10)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양도해 주며 사태진전을 당분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화약 이후 정부의 폐정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자,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전라도 53주에서 집행하기 위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개혁사업에 착수했다(→ 집강소).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본거를 두고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에 본거를 두고 전라좌도를 통할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지방통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속과 행정의 말단조직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는 한편, 삼정업무를 관장하고 민간의 사송을 처리해 나갔다. 집강소를 운영하는 주체는 신분적으로 하층민, 경제적으로 소작농민, 토지 없는 농민이 중심이었다. 집강소가 설치된 후 농민군의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양반유생과 이서 층들도 참가했으며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무기의 조작법을 익히는 등 군사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충청도의 동조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북접에 전면적인 호응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인 반침략·반봉건 전쟁을 준비해 갔다. 한편 전라도 농민군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경기도 죽산·안성, 경상도 하동·진주, 강원도 홍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있었다.
2차 농민전쟁
1894년 6월 21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한편,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켰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므로 농민군의 지도부는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면서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재봉기를 확정했다. 전봉준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란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투쟁에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반침략투쟁이 농민군의 주요한 과제로 되었다. 그리고 전봉준은 종전 제1차 봉기 때 반대하던 입장을 지녔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북접 연합군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 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세력을 초토화했다.
역사적 의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이었으며, 이른바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이었다.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은 봉건적인 생산관계와 수탈을 제거하고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보장해주는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향은 일련의 투쟁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오리의 제거, 민씨정권의 타도와 봉건적 폐단의 시정, 봉건제도의 폐지, 친일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 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제2차 농민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철저히 압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농민전쟁은 투쟁과정을 통하여 농민대중에게 봉건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세력으로 강화시켰다. <출처 Daum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2. 진도동학군과 동학혁명 그리고 최후
진도동학군의 개요
진도부와 무기고를 점령해 기세를 떨쳤던 진도지역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인근 목포, 장흥, 나주, 무안 등지 까기 확산되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졌다. 또 공주와 장흥에서 패배한 동학혁명군 수백 명이 진도로 집결해 남하한 일본군과 최후 항쟁을 벌인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최후 항쟁지이며 동학군의 처형장소인 진도군 진도읍 송현 마을에 역사공원 및 전시관 건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가 밝힌 진도동학군
20일 오후 <진도지방의 동학농민혁명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주제로 열릴 학술대회에서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1894년 일본군의 조선왕궁 점령사건이 일본정부와 군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일본나라여자대학 나카츠카 아키라교수가 참석해 왜곡된 운양호사건의 실체에 대한 사료들을 국내최초로 공개한다. 아키라교수와 동학농민혁명 기념 사업회는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운양호 사건이후 일본의 조선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한다.
지난달 20일 130주년을 맞은 운양호사건은 1875년 5월 일본군이 군함을 불법으로 부산항에 침입한데 이어 조선정부의 사전 승인도 없이 9월 항로 측량구실로 강화도 앞바다를 침입, 즉각 물러가라는 조선 측의 요구를 무시하고 조선양민을 학살, 양측 간에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일본은 이를 계기로 조선 측이 일본에 적대행위를 했다는 이유를 들어 1876년 1월 7척의 군함을 보내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강제로 맺게 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 사업회 주최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에서 목포, 장흥, 무안 등지 까지 진출해 연합농민군을 이루며 영향을 끼친 진도동학혁명의 활동을 자세히 조명한다. 특히 1995년 일본 홋카이도 대학 강당에 방치된 유골은 그동안 1894년 12월께 처형된 동학지도자 진도 조도면출신 박중진의 것으로 가장 유력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최종확인 됐다. 농민군지도자 박중진의 유골은 1906년 면화재배지 시찰을 온 한국통감부 권업모범장 목포출장소 ‘사토마사지로’에 의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 것으로 조사됐다.
홋카이도대학 강당에 방치된 유골은 발견 당시 한국, 북한, 러시아, 아이누 등 민족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국제적으로 진도지역 동학농민혁명이 알려진 계기가 됐는데 농민군지도자 박중진의 유골은 1996년 국내로 봉환되어 현재 정읍시 황토현의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에 임시 안치됐다. 이번 조사과정에서 1900년대 이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불법으로 채집되어 반출된 한국인의 유골이 최소한 600여구이상 된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향후 한일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특히 동학이 처음 진도에 들어온 시기는 1892년 1월께 나주출신 나치현으로 진도동학 교세는 다음해인 1893년 충청도 보은집회를 계기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1894년 5월께는 동학농민군지도자 박중진, 김수종, 나치현 등이 이끄는 농민군이 진도부를 점령, 집강소를 설치하고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동학혁명 당시 진도농민군은 진도부 점령과 함께 무기고를 빼앗을 정도로 세력이 막강했고 영암, 목포, 무안, 나주, 영광, 장흥등지 까지 진출하여 연합농민군부대를 편성해 반봉건, 근대화, 반외세 및 자주화를 위한 혁명을 이뤄 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다 진도지역 동학농민군이 1894년 11월 공주 우금타 전투와 12월 장흥 석대 전투에서 패배 후 진도로 집결, 진도농민군과 연합하여 남하한 조선정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조사됐다.
진도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앞으로 조성될 동학혁명군의 역사공원으로 당시 동학혁명군이 처형당한 진도읍 송현리 일대가 타당하다”며“규모는 1만평정도로 동학군의 유골 안치와 봉분, 사당, 기념 조형물 및 전시관을 건립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브레이크뉴스 박성민 기자 기사입력: 2005/10/20 최종편집: ⓒ jb-brea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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