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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라 함은 지금은 손자와 손녀를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지만 손주라 하면 친손주라는 어감이 강했던 것 같다 손주(孫-)’는 본래 ‘손자(孫子)’의 비표준어였으나 2011년 8월 국립국어원에서 ‘손자(孫子)’와 뜻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표준어로 인정한 것을 보아도 그러한 느낌이다. 그리고 손주와 외손주, 친손녀와 외손녀라고 분명하게 구분하여 사용해 왔던 것도 이젠 구분이 희미해지고 통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남녀평등이란 개념이 도입되면서 바뀐 시대적 상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난히 운동을 좋아하였던 딸은 특히 스키보드를 타는 것을 아주 즐겼다. 처음 타보는 보드에 오른 후 거침없이 활강하는 담력이 있던 아이가 바로 딸이었다. 이러한 점은 나를 닮은 듯하다. 여행 중에 비가 내려 계획을 수정해야 했었는데 마지막 날 곤돌라를 타고 정상에 올라 천국의 계단 끝에 서서 사진을 찍기로 한 것이다. 인간의 담력을 요구하는 높이만큼 책정하여 만들어 놓은 계단이라 올라서면 공포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한 높이다.
겁이 많은 아이라 조심스러웠지만 한 두 번 오르더니 익숙해졌다. 반복의 효과가 만든 결과다. 매년 봄과 가을을 이용하여 여행을 하기로 약속한 손주와 함께 2박 3일의 여행을 다녀왔다. 산촌과 어촌의 생태와 삶에 대한 주제를 갖고 출발하였으나 중간에 비가 많이 내려 원래의 취지대로의 여행은 불가능하여 놀이 기구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 또한 잠시 비가 끝 지면 이용하는 순발력을 동원하여 나름대로 즐기게 되었다.
서울을 출발하면서 차량 동선에 많이 신경을 쓰는 편이다. 요일과 출발시간에 따라 도로의 컨디션이 바뀌는 고속도로를 이용을 자제하는 편이지만 목적지를 가는 길에 국도가 효율적이 아니면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경우 출발시간대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바로 나의 오랜 나의 습관이다. 보다 더 안전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오늘 선택한 길은 국도였다. 용문을 지난 후 용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여 국도를 바꿔 탔다. 길은 외 길이지만 한적하고 새롭게 길을 넓혀 놓아 운전하기에 편안하고 주변 풍광이 참 아름다운 곳이다. 용두를 지나 처음 차를 세운 곳은 한국의 용산신학교를 졸업하고 순수 한국적 신학 환경에서 한국인 사제로서 약현성당에서 서품을 받으신 세명의 사제 중 정규하(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이 부임하시어 한국인 신부님 손에 의하여 신축 봉헌된 풍수원 성당으로 가 참례하며 성모 성월의 기도를 드리기로 한 것이다. 성모 성월에 대하여 교회에서는 특별한 전례는 없다. 성모님께 기도를 많이 하는 달 정도의 관습만 전해 오는 것이다. 성모의 밤이란 행사에 대한 특별한 전례도 없다. 각각 본당 자체에서 드리는 예절 정도의~~~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 파리 외방 전교회의 전격적인 지원을 받아 사제가 되셨지만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은 강도영 (마르코. 1863-1928)), 강성삼(라우렌시오. 1866-1903)과 함께 용산신학교에서 공부하시며 약현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신 후 강도영 신부님은 안성 미리내로 내려가 미리내 성지의 기초를 세우시고 강도영 신부님은 현재 마산교구 소속인 명례성지에 부임하시어 사목 하시다 요절하신다.
정규하 신부님은
충청남도 아산 출생. 천주교 신자인 기화(基化)의 3남매 중 장남이셨다. 병인박해로 온 가족이 피신생활을 하다가 15세 무렵 충청북도 충주 부근의 소탱이에 정착하게 된다. 그 후 블랑(Blanc, J.M.G., 白圭三) 주교에 의하여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명동성당의 글방에서 공부한 뒤, 한기근(韓基根) 등과 함께 신부가 되기 위하여 1884년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에 유학을 떠났지만 기후와 풍토를 이기지 못하고 1891년 귀국하여 새로 설립된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지금의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1896년뮈텔(Mutel, G.C.M., 閔德孝) 주교에 의하여 서울 약현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되었다. 신부가 된 뒤 선종하실 때까지 47년간을 강원도 횡성의 풍수원 본당(豐水院本堂)에서만 활동하였다.
풍수원 본당은 강원도 최초의 성당으로, 1866년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로 정부의 천주교 탄압이 극심해지자, 사방에서 피신하여 모여든 천주교 신자들이 형성한 마을에 터를 둔 유서 깊은 성당이었다. 따라서 이곳의 신자들은 화전이나 옹기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신앙의 열기를 이어갔으며 천주교 신부들 중 드물게 의병에 지원하고, 일제의 침략기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인물들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풍수원 본당에 부임하였을 때는 동학혁명의 실패, 민비 시해 사건, 아관파천 등으로 전국에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다. 오지인 풍수원에도 의병들이 피신해 오기도 하였다. 이때 신자들과 함께 이들에게 침식을 제공하는 등 적극 후원하였다. 그 결과 풍수원 본당의 신자들 상당수가 의병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10년부터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가자 본당 사랑방에 삼위 학교(三爲學校)를 개설하고 충남 논산에서 선생을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게 하고 (월남 망국사 越南亡國史)를 보급하여 읽게 하는 등 민족의식의 고취에도 노력하였다. 당시 뮈텔 주교가 일선 신부들에게 선교 우선 정책, 정교분리 원칙을 교회 내부 지침으로 내려보내던 시기임에도 신부님의 노력은 대단하였다 보인다. 1942년 노환으로 은퇴하셨으나 이듬해 선종하시어 풍수원 본당 뒷산 성직자 묘지에 묻혀 계신다.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차를 진입시키면서 동안 많이 변모된 모습을 발견하였다. 원래 아래와 같은 성지개발 계획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이만큼 변한 것에 대하여 몰랐었다.
새롭게 단장된 주차장에서 교우촌을 지나 성당으로 가는 길이다.
아주 오래된 해우소가 보존되어 있고
담과 대문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창호와 문이 전부 바뀌었다. 코로나 19 관계로 미사 시간에만 한정된 신자들에게만 공개되고 참례할 수 있는 것이 요즈음 성지의 추세다. 평일에는 거의 문이 잠겨 있다.
당시 신자들이 총동원되어 정규하 신부님의 의지와 노력과 열정으로 모든 낙관을 극복하며 명동성당의 축소판으로 설계, 신축되어 봉헌된 성전이다.
모든 외부와 내부를 연결하는 문에 새겨진 문양은 대부분 십계명 등과 관련된 글과 성화 위주로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에선 본 두우모 성당 문이 연상됩니다.
사제관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며 아울러 성전을 감싸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의 기운을 느끼게 된다.
아름다운 장미 창이 만물을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 같아 한 참 서서 바라보며 여러 방향에서 찍어 두었다. 신앙선조들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또는 죽음을 맞으면서 하던 기도, 예수 마리아를 연상하며 찍었다.
다음 일정을 위하여 성모님 동산에서 기도를 드린 후 횡성으로 떠났다. 터널을 지나 횡성까지의 길은 오랜 시간 동안 줄곧 다니던 길이라 불편 없이 횡성 재래시장을 찾아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점심을 챙기기 위하여 식당을 찾았다.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손주를 위하여 다른 사람들은 더덕정식을 시켜 해결하였다, 식당 주인께서 손주에게 친할머니처럼 대해주시며 얼마나 잘해 주시던지 기분 좋은 점식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부근에 있는 하나로 마트로 가 생수와 여행 중에 필요한 서너 가지 물품을 구매 후 국도를 타고 달려서 리조트에 도착한 후 체크인과 동시에 수영복을 준비한 후
워터 파크로 몰려 갔다.
저녁을 챙긴 후 다시 돌아와 휴식을 취하다 잠이 들었다.
수영으로 피곤했는지 깊은 잠을 자는 손주를 발견하고 동안 폭풍 성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영향으로 비대면 교육이 실시되면서 학교 등교시간이 사라지면서 또는 적어지면서 체중이 많이 늘어 걱정이다. 다중이 모여하는 시설에 보내지 않으니 운동량이 부족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 점에 대하여 염두에 두면 잡은 여행 계획이었다. 불필요한 에너지를 몸 안에 가둬 두지 말고 운동으로 발산하자는 것이 봄 여행의 스케줄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날 아침 혼자 5시에 일어나 산책에 나섰다. 따라 나올 것 같았던 딸과 손주는 기척을 보이더니 다시 잠이 드는 모습을 보고 살며 시 나왔다 아무도 없는 산책길 고요하면서도 생태의 원형을 보여 주려는 듯 있는 그대로의 형상으로 다가왔다. 등산로를 따라 걸으며 심신을 고요함 속에서 끌어올리며 생동감을 주기 시작하니 맥이 빨라진다. 호흡도 거칠어지고... 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적응기를 넘기는 순간부터 행동이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등산을 마치고 내려와 다시 호수길을 걸어 두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으로 올라오면서 전경을 살피자 어제와 달리 어둡고 칙칙한 먹구름이 내려앉아 있었다. 많은 비가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잠시 후 세찬 바람이 초목을 흔들어 놓고 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오후 3시까지 이어진다는 일기예보. 모든 일정을 변경하는 수순을 갖고 대비하였다.
우선 아침을 챙기려 식당으로 내려갔다. 딸은 엄마를 모시고 앉고 손주는 나와 함께 앉았는데 중간에 유리 칸막이가 설치된 테이블에 앉았다. 코로나 19가 만든 현상이다. 비닐 장갑을 끼고 음식을 접시 담아 서너 차례 오고 간 끝에 아침을 정리하였다.
매사 조심해야 하는 극한 환경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겪고 있는 생활환경이다.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고약한 새로운 역질이 창궐하여 이 세상의 기존 질서를 무너트릴 줄은 아무도 모른다. 어서 빨리 생태계의 본모습으로 되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질서 정연하게 살아야 하는데... 현재의 문명의 속을 들여다보면 불가능에 가깝다. 광고가 전해 오는 메시지에 따라 무제한적 소비가 삶의 미덕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으니 재앙을 이길 방법이 있겠는가. 환경보호는 환경과 관련된 질서회복에 대한 노력은 내일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기존의 무제한 적 소비는 당장 멈춰야 한다.
아침을 먹은 후 밖에선 비가 계속 내리고... 외출은 할 수가 없는 상태라 곧장 지하로 내려가 적당한 놀이를 찾아 함께 즐겼다.
우선 손자와 할머니가 좁은 공간에 함께 들어 가 쏟아지는 공을 다시 넣어 점수를 많이 얻으면 다시 한 번 더 게임을 즐겼다.
그러나 갑자기 쏟아지는 공을 주워 담기란 쉽지 않었으나 대체로 열공을 하여 기본은 넘겼다.
코끼리 벽화 앞에 서 보기도 하고... 보링도 즐기며 오전 내내 시간을 보내다 컵라면을 사서 들고 와 끓여서 먹고 잠시 비가 주춤하자 관리실로 전화를 하여 썰매는 개장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쏜살 같이 매표소로 달려 가 표를 챙긴 후 할머니만 빼고(다리를 치료 중이라...) 여러 차례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쏜살같은 속도감과 출발하면서 자유낙하 시 느끼게 되는 무중력 상태가 섬뜩하지만 반복하니 견딜만하였다.
母子가 아주 신이 났다.
다음은 플라잉 라인을 타기로 하고 호수로 갔다. 역시 딸은 장비를 갖춘 후 선발로 나섰다.
아들과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쏜 살같이~~~
건너 온 호수를 배경으로~~~. 손주는 망설이다 결국 포기한다.
할아버지도 산악 자동차와 썰매를 손주와 함께 신나게 달렸다. 특히 산악 자동차를 속도감 있게 달렸더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할아버지도 플라잉 라인을 출발하면서 손들어 인사를 남기며 쏜 살같이 내달렸다.
호수를 가르면서 상쾌함과 호젓함을 느끼는 심리상태를 느끼는 순간 벌써 착지의 순간이 다가왔다.
건너에 서서 아빠 하며 사진을 찍어주는 딸아이에게 손으로 답례하고~~~
오랜만에 차보는 안전벨트가 설악산 적벽과 울산바위, 천화대, 용아장성을 오르던 추억과 선인봉 표범, 박쥐, 허리 길 등을 오르던 추억을 소환해 주었다. 비가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자 우린 차로 달려 가 오른 후 동해바다를 가기 위하여 리조트를 출발하였다.
여러 개의 터널을 통과한 후 북 강릉을 통과한 후 주문진 항에 도착하였다. 3시에 출발하여 4시에 도착하였다. 자주 들러 어물을 샀던 어시장으로 내려갔다. 시장을 리모델링하여 상인과 손님 사이의 간격을 좁혔고 어물들도 정돈되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구매하기가 과거보다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골로 다니던 어물전 안 보여 거의 끝 지점으로 가 횟감으로 활어 두 마리와 해삼, 오징어 등을 구매하여 어물전에서 소개하는 손질만 전문적으로 하는 상인들에게 가 소정의 금액을 지불한 후 바로 옆 식당으로 가 자리 값 형식으로 매운탕 끓여주는 가격, 밥 값을 지불하고 저녁을 챙겼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문적으로 회를 판매하는 식당을 이용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기본적으로 식단을 채워주는 여러 가지 찬과 그리고 서비스를 생각하면 전문 식당을 찾아 가 먹는 것이 오히려 이런저런 부담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주문진 모습이 모두 사라진 항구에서 인정이 가득 담긴 정경을 찾을 수 없었다. 건오징어와 쥐포를 유난히 좋아하는 딸, 건어물 사회로 가 건어물을 사서 차에 실은 후 저녁노을이 시작되는 무렵에 다시 리조트로 돌아왔다.
주문진을 다녀온 후 횡성 재래시장에서 사 온 더덕 막걸리와 여종 종류의 캔맥주 중에 벨기에 맥주를 꺼내 놓고 딸과 마주 앉아 마셨다. 처녀시절에는 술을 조금 먹었는데 시집을 가서는 한두 잔이 고작이다. 켄 맥주 한 켄을 놓고 밤 새 먹을 수 있는 주량으로 변한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셔 두었다. 운전 때문에 소주 한 잔 마시지 못하는 아비 안타까운지 저녁을 먹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주더니 리조트에 도착하면 아빠랑 한 잔 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을 했었다. 강화도에 가서 인삼 막걸리는 종종 먹었지만 더덕과 소주를 담근 주는 마셔 보았지만 더덕 막걸리는 처음 경험이다. 반 병 즈음 마신 후 일찍 잠을 청했다. 내일은 늦어도 오후 3시경에는 출발을 해야 한다. 손주가 목요일은 등교하는 날이기 때문에 일직 귀향하여 제출할 과제물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일찍 귀향하려 하는 것이다.
수면을 충분하게 취한 후 일어나 내부 정리를 끝냈다. 재활용 분리, 생활용품 정리 정돈, 침구정리 등 내부 정리를 말끔하게 챙긴 후
곧바로 조식을 하고 산 정상으로 향하였다.
가파른 계단으로 조심스럽게 올라가는 손주를 응시하며 촬영을~~
양 우리를 찾아 가 사료를 사서 주고 돌아오는 가족들~~
손주 사진을 열심히 찍어주는 할머니
정상에서 내려와 다시 리프트를 타고 루지(Ruge)를 타기 위하여 리프트 종착점으로 향하였다. 굴곡지고 유자형의 얼음 위를 설매를 타고 달리는 동계올림픽 때 스피드 게임을 육상에 비슷한 시멘트 길을 만들어 고안한 놀이기구다. 앞에 가슴 높이 손으로 잡는 핸들을 이용하여 밀어주면 자연 가속이 붙어 내달리고 운전자 쪽으로 당겨주면 정지 또는 속도가 줄어드는 기구다. 비탈지고 굴곡이 심해 조절을 잘하고 굴곡을 지나칠 때 회전의 위치를 잘 잡아주어야 탈선을 방지할 수 있다. 그리고 루 지간의 거리가 적당해야 충돌을 막을 수 있다. 딸이 제일 앞장서고 다음은 손주 마지막으로 내려오면서 두 사람의 관찰하며 위험을 방지할 목적으로 맨 뒤에서 내려오는데 손주가 멈짓멈 짓하여 위치를 바꿔다. 딸이 뒤로 중간에 손주, 할아버지가 선두, 그런데 중간 길목에서 근무하는 근무자가 할아버지는 먼저 내려가라 요청하는 것이다. 근무자가 손주 옆에서 달리며 지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충돌, 탈선 등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근무자들이 중간에 대기하며 관찰하고 있어 안심해도 된다.
혼자 상당한 속력으로 질주하며 루지의 스피드를 만끽하였다. 도착지 돌아와 헬멧과 루지를 반납하고 한 참 떨어져 내려오는 손주와 딸을 찍어 주기 위하여 포토존으로 옮겼다.
근무자의 협조를 받으며 안전하게 달려 내려오는 손주~~ 이젠 익숙하게 조정을 하고 있다. 나중에 무엇이 힘들었느냐 하였더니 앞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너무 뻑뻑해 힘들었고 급커브를 돌 때 균형과 속도를 잡기가 어렵다 하였다. 운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할 수 일이었다. 급커브는 우측으로 최대한 붙으면서 돌아나가야 안전한데 원심력을 돕기 위하여 경사지게 만들어 놓아 겁이난 모양이다.
헬멧을 벗어 반납하려는 손주
이젠 자신이 있단다. 조형물로 데려가 기념사진을 하나 만들어 주었다.
응원꾼과 관람자 역할을 하는 할머니도 초대하여 사진을 만들었다.
잘 탄다는 덕담도 이어지고
손주를 사랑한다는 마음의 증거를 남겨 두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범퍼카를 모자지간에 경쟁하듯 타다, 적당하게 운전자가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을 만들어 놓아 재미를 더해 주는 것이 범퍼 카라... 엄마 차가 아들 차 꽁무니를 받는 바람에 손주의 목이 심하게 꺾일 정도로 흔들려었었다.
이에 화가 난 손주가 엄마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이 또한 범퍼카 만의 재미이다. 관리자 3회 이상의 시간을 주어 더 흥미를 끌며 재미있게 지켜볼 수 있었다. 이로서 2박 3일의 여행은 끝이 났다. 일기가 불순하여 원래의 계획대로 진행할 수 없었지만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손주의 스트레스를 풀어 줄 수 있었다. 학업에 탄력을 받아 잘 나가다 역질의 방해로 맥이 끊긴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를 슬기롭게 대처하여 원래대로 회복하려면 많은 노력과 심적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나마 이런 시간을 만들어 함께 보내며 응원한다는 것은 좋은 시간이 된 것 같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또 답답함과 위축으로 마음고생하겠지만 2박 3일의 여행기를 손주 스스로 적어 나가며 그리고 사진을 통해 회상하며 극복의 시간을 잘 보내었으면 좋겠다. 다녀온 사진을 중심으로 여행기를 만들어 손주에게 보내 주려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주혁아! 힘내거라, 너에 미래는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공간처럼 무한하단다. 꿈과 용기로 현실의 어려운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너에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국가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며 그 안에서 너 자신의 이익을 얻어 나가는 삼익(參益)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걸어서 하늘까지 가는 것과 같은 것이 너에 일생의 삶이란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자연에서 대안을 찾아보거라! 그리고 너 자신을 맑고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학업과 함께 마음공부에도 공을 드려야 한다. 함께 한 여행기간 내내에도 쑥쑥 자라는 너에 모습을 보고 행복하였다. 가을에는 더욱더 행복한 시간을 함께 만들어보자! 아자 아자 주혁이 파이팅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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