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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고적미가 담긴 가을날의 서정
유 준 호
[한국시조협회부이사장]
Ⅰ.
시조는 정형의 미학을 가진 절제와 균형 속에 태어난 우리 고유의 율격문학이다. 그래서 시조를 쓰는 이는 체험과 연륜에서 느끼는 감흥을 사유의 집에 쌓아두었다가 이를 끄집어내어 시조의 틀에 맞춰 감정의 굴림소리로 써낸다. 이번 현대시조 가을 호에 실린 작품들을 보니 삶의 체험들이 감흥을 얻어 절제와 균형 속에 작품화 형상화한 것들이 많아 마음이 든든하였다. 특히 시조는 당시의 시대상, 현실상을 반영하는 문학 장르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현대시조 가을호에 발표된 많은 작품 중에는 가을을 소재, 제재로 한 작품이 적지 않았다. 가을하면 열매의 계절이지만 조락(凋落)의 계절이기도 하여 뭇 생명들이 핏기를 잃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을은 누가 뭐래도 단풍이 어우러져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지막 뽐내는 계절로 꽃보다 아름답다고들 한다. 지금은 그런 풍경도 다 시들고 한창 때의 가을 단풍 모습은 코로나 19의 기승으로 발이 묶여 제대로 보도 못한 채 다 지나가고 산등성이엔 앙상한 나뭇가지만 애처로이 뻗어 흔들리고 있다. 그런 심상이 있는 작품들과 이번에는 눈을 자주 마주쳤다. 그러다 보니 난 새삼 아, 이젠 가을도 저물어갔구나 하며 감회에 젖게 되었다. 가을을 소재나 제재로 하였거나 가을을 소재로 하지는 않았지만 외롭고 쓸쓸함이 밴 작품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번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번 기을호에는 소시집으로 작품을 발표한 한상전 시인을 비롯하여 쉰다섯 분이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먼저도 말했지만 이번에도 그간 계간평을 드리지 못한 새로운 분들을 찾아 그분들의 작품들을 살펴보기고 하였다. 표본이 되는 작품을 선정하여 평을 드리는 것은 아님을 말씀드린다. 그러나 나름 시조로 수준작이라고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다음에는 이미 언급 드렸던 분들의 작품도 찾아 함께 감상하기로 한다.
Ⅱ.
먼저 소시집으로 발표된 한상전 시인의 작품 두 편을 살펴보고 이 계절의 신작에 실린 작품 중에서 새로운 분들의 작품을 찾아 감상해 보기로 한다.
돌담 돌아 층층 꽃밭
온갖 꽃 어우러져
짙은 향내 풍기며
솔바람에 한들한들
큰 광장
카드 섹션처럼
바람너울 타는 곳
고샅길 따비밭엔
애기 업은 옥수수
저녁노을 퍼져갈 때
장에 간 엄마 기다리고
정겨운
울타리 속에
살 부비며 자라던 곳
-한상전, 유년의 집, 전수
어릴 적의 삶은 꿈의 삶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근심 걱정이 생기고 꿈은 엷어지고 삶은 고달파지는 것 같다. 시제 “유년의 집”이란 말은 어릴 적의 꿈이 새겨진 산과 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아마도 시인은 그리운 고향 산천을 떠나 아름답던 어린 소녀 시절을 그리워하며 이 작품을 쓴 듯하다. 농촌의 한가로운 마을에 자리 잡은“유년의 집”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는 소박한 초가집으로 담 주변엔 꽃밭이 층층으로 만들어져 ‘온갖 꽃이 어우러져’피어서‘솔바람에 한들한들’ ‘짙은 향내 풍기며’마치 카드 섹션을 하는 듯 바람에 너울대며 고움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어릴 적 꿈이 서린 시인의 고향집임을 첫수에서 말하고 있다. 첫수가 고향집과 그 둘레 정경을 표현했다면 둘째 수는 가족 간의 정리(情理)를 표현하고 있다. 부모가 일궈놓은 척박한 따비밭에 옥수수는 자라 애기 업듯 업혀 있는데 거기에 저녁노을이 퍼져가며 해가 저물어 간다. 그 즈음 장에 가 미처 돌아오지 않은 어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정겹고 살갑던 일을 회상하고 그 때를 그리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티 없는 동심이 배어나 순수한 감흥을 던져주고 있다. 한 폭의 아늑한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다.
굽이굽이 산비탈 길
버려진 묵정밭에
발돋움 키로 자라
바람 앞에 비켜서서
삼복의 땡볕을 받고
피돌기로 피었는가.
어디 인생살이
쓰디써야 약이 되듯
한 생애 덧칠하며
생즙으로 모금하는
보랏빛 꿈들을 적셔
처방전을 펼치는가.
-한상전, 익모초꽃, 전수
익모초는 여름철 배탈이 나거나 소화가 잘 안 되어 속이 불편할 때 즙을 내거나 다려서 먹던 약용식물이다. 이 작품을 보니 내 어릴 적 이것의 즙을 내거나 또는 다린 물을 대접으로 들이켜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즙은 풋내가 나서 먹기가 적잖이 거북하지만 그 약효는 참으로 신통하여 이질 배아피도 거뜬히 낫게 했던 것 같다. 첫수는 산굽이 굽이진 산비탈 길에 농사짓다 ‘버려진 묵정밭’에서 돌무더기를 헤치고 익모초가 한여름 삼복더위 땡볕 아래 모진 바람을 견디며 마치 발돋움한 듯 사람 키로 자라나 피돌기로 피어 자라던 모습을 표현해 보이고 있다. 역경을 헤치고 모질게 자라났으니 약효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둘째 수는 이런 모진 환경을 이기고 자란 익모초를 인생살이에 접목시켜 표현하고 있는데 초장에선 고되고 힘들게 자라 쓰디쓴 속성을 지녔기에 좋은 약이 되었듯이 고됨을 겪은 쓴 맛이 인생살이의 좋은 약이 됨을 표현하고, 이를 중장과 종장에서 구체화하여 쓴 맛의 절정인 생즙 같은 쓰디쓴 삶을 살아본 이는 그것이 인생에 희망의 빛, 보랏빛 꿈들을 펼치는 자양분이 됨을 말하고 있다. 즉 익모초가 쓴 맛으로 삶의 처방전을 펼쳐보여 주고 있다. 익모초라는 순수 자연물을 인생에 투여하여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는 작품이다.
더운 여름 폭풍우 추운 겨울 칼바람에
미동도 하지 않고 견뎌내는 그 모습
세상사
무상하지만
너는 어찌 다르냐.
나무엔 옹이 있고 인생살이 상처 있듯
세월을 건너는 일 힘들고 괴로워도
고요히
가부좌 틀고
선정에 들었구나.
-고영환, 바위, 전수
이 작품은 강인한 삶의 의지를 ‘바위’로 형상화하여 표현한 시조로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외로움에 움직이지 않고’라고 하여 내적 수련을 통한 현실 초극의 삶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준 유치환의 시 “바위”와 유사한 점이 있다. 첫수는 ‘폭풍우’ ‘칼바람’의 모진 세월을 살면서도 제 자리에서 꼼짝 않고 이를 고스란히 견뎌내는 바위의 모습을 보며 세상사는 변동하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고 제 모습 변하지 않는 바위의 불변의지(不變意志)를 찬양하고 있고, 둘째 수는 세월을 살아오며 나무는 옹이도 생기고, 우리 인생은 상처도 생기는데 바위는 이런 힘들고 괴로운 모진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옹이도 상처도 없이 오늘을 어제 같이 끄떡하지 않고 고요히 선승(禪僧)처럼 ‘가부좌(跏趺坐)를 틀고’앉아 참선(參禪)의 경지에 든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바위의 불변위용(不變偉容)을 기리고 있다. 참고 견디는 인간상을 희원(希願)하는 시조 작품이라고 하겠다.
봄 산이 곱다한들
가을 갑사 계곡이랴
쌍무지개 흩뿌린 듯 찬란한 색의 향연
황홀경 환상의 물결
산이 울렁거린다.
천년의 수행으로 나무도 길(道)을 익혀
몇 아름 몸집으로 하늘을 받쳐 들고
줄지어
오는 행락객
산사로 안내한다.
바람 햇살 뒤엉기는
황홀한 색의 율동
대자암 법당 추녀 땡그랑 집(執) 허물어
단무지 김밥 한 줄에
계룡산이 내 것이네.
-김동민, 가을 갑사계곡, 전수
춘동학(春東鶴)추갑사(秋甲寺)란 말이 있는데 이는 봄에는 동학사가 싱그러운 봄볕 아래 피는 꽃들로 명승(名勝)이지만 가을엔 갑사의 단풍이 꽃보다 곱게 피어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여 절경을 이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작품은 시인이 가을을 마음에 담으려 갑사에 가서 주변 계곡을 물들인 가을빛과 그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보고 느낀 감회를 시화한 것이다. 의인화가 잘 이루어져 역동성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첫수는 꽃이 만발한 봄 산이 아름답다고들 하지만 가을 갑사의 계곡을 물들인 단풍의 절경에 견줄 수 없다고 작품의 문을 열고 있는데, 그 절경을 ‘쌍무지개 흩뿌린 듯 찬란한 색의 향연’이라고 찬탄을 하고 있다. 그만큼 빛나고 화려하다는 말이다. 얼마나 경치에 매혹되었으면 이를‘황홀경 환상의 물결’이라고 하며 그 물결에 ‘산이 울렁거린다.’고 하였겠는가. 아마도 맑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단풍의 나뭇잎들을 보고 그리 표현한 것 같다. 둘째 수는 천년쯤 묵은 나무들이 그 세월 동안 수행하여 ‘몇 아름 몸집으로 하늘을 받쳐 들고’서서 ‘줄지어 오는 행락객’을 맞아 수행의 본당 갑사 절로 안내한다고 하여 천년 거목을 수행의 안내자로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으며, 셋째 수는 바람도 햇살도 맑은 가을의 기운을 받아 서로 뒤엉겨 ‘황홀한 색의 율동’을 보여 준다고 말하고 있다. 때 마침 ‘대자암 법당 추녀’끝에선 풍경소리가 ‘땡그랑’울려 고요를 허무니 시인은 단출한‘김밥 한 줄’을 먹고 갑사 풍정을 감상하지만 마음만은 계룡산을 ‘내 것’ 같이 다 품은 듯하다는 감회를 표현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시인이 가을 갑사 경치에 홀딱 반하여 물아일체의 경지를 실감하고 있음을 표현한 한 폭의 심령화(心靈畵)이다.
초가을 장마 지고 부는 바람 심상치 않다.
찢겨진 비닐하우스 펄럭이는 소리는
나 홀로 아우성치던
내 젊음의 초상이다.
계곡 길 노송 한그루 꼬불꼬불 굽은 몸은
수난의 세월 알아도 묵묵히 말이 없다.
큰 나무 바람 막아주듯
지친 나를 감싸준다.
-김장환, 가을바람, 전수
기분을 시원하게 툭 틔워주는 가을바람은 아니고 몹시 요란스럽게 불어 심란(心亂)을 떠는 가을바람인 것 같다. 가을엔 따끈한 햇살 아래 솔솔 부는 바람을 타고 곡식들 알갱이가 익어가야 정상인데 때 아닌 때 비바람 몰아치는 장마가 지면서 심상찮은 바람이 부니 아무래도 스산하기만 할 듯하다. 그 바람은 비닐하우스 비닐을 찢어 펄럭이게 하고 있다. 망가지는 삶의 현장 소리이다. 그 소리는 시적자아의 질풍노도시절 ‘홀로 아우성치던’ 젊은 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런 심란한 가을을 첫수에 배경으로 놓고 둘째 수에서는 세월의 무게로 지고 숱한 수난을 겪으며 묵묵히 살아오느라 굽을 대로 굽은 노송의 묵직함을 노래하면서 그 노송이 스산한 가을바람을 막아 삶에 지친 시적자아를 감싸준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노송’은 어버이의 은유로 보아야 한다. 즉 어버이의 자애로운 손길을 표현해 보이고 있다고 본다. 첫수가 시적자아의 모습을 표현했다면 둘째 수는 이렇게 늙은 부모님의 끝없는 사랑의 손길을 표현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 작품 속엔 우리의 삶이 투영되어 있는데 시적 전개 방식은 가람 이병기 선생이 주창하던 시조 율격인 각장 전구, 후구에 7〜8 음수율을 사용하고 있어 시조의 가락을 능청거리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은 다음에도 있다.
하늘 한 뼘 보이지 않는 비알에 터를 잡고
곡괭이가 다 닳도록 일궈놓은 밭둑 가득
봄이면 구덩이마다 바작으로 피던 호박꽃
쌓여가는 자갈더미에 스스로 발목을 묻고
한 뿌리 한 포기씩 자기 꿈에 접을 놓다
이순쯤 급하게 가신 아버지의 깨진 거울
묵정밭 둘러 품고 흔적만 남은 돌무지에
아버지의 손때 묻은 깨져버린 거울조각
손톱 밑 아리게 박힌 그 자리 너무 부시다.
-김종빈, 깨진 거울, 전수
‘깨진 거울’은 아버지 모습을 비추던 거울이 깨진 것으로 농부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회상물로 쓰였다. 척박한 땅을 일궈 농사를 짓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연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밑면엔 가난이 깔려 있다. 첫수에서 ‘하늘 한 뼘 보이지 않는 비알에 터’란 구는 외진 산골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 곳에 아버지는 삶터를 잡고 돌너덜 땅을 곡괭이 다 닳도록 일궈 밭을 만들고 그 둑에 듬성듬성 구덩이를 파서 호박을 심으니 그 호박 줄기마다 바지게처럼 호박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둘째 수에서는 아버지가 발목을 그 자갈더미 속에 묻다시피 하고 호박을‘한 뿌리 한 포기씩’키워내 이에 접을 붙여 풍성한 농사일을 하시더니 60세쯤 되신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음을 ‘깨진 거울’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급하게 가신’과 ‘깨진’은 동일 의미의 시어이다. 셋째 수에서는 아버지가 가신 다음 아버지가 사셨던 흔적이 ‘묵정밭 둘러 품은’ ‘돌무지’에 너무 부시게 남았다고 하여 시적자아의 아버지에 대한 회억의 감정이 아리게 스미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 세대의 고단한 삶의 모습이 가슴 저리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아버지의 모습이 ‘깨진 거울’이 되었으니 그 거울에 무엇을 비춰볼 수 있으랴. 고단하게 사셨던 아버지의 모습조차 가물거리게 됨을 느끼게 한다.
번데기를 사가지고 군것질을 하면서
이집트 미이라의 특별전을 보다가
미이라 생김새들이 번데기라 느꼈지.
파라오를 넣은 관도 그렇구나 했는데
관 안의 미이라도 쪼그리고 누운 것이
고치 속 번데기와는 영락없이 같았어.
누에의 번데기가 고치를 열고 나와
비단 날개 펄럭이며 공중을 날아가듯
사후의 파라오들도 우화등천 했나봐.
-김종상, 미이라의 모양, 전수
미이라(mirra)는 썩지 않고 마른 상태로 있는 시체를 두고 하는 말로 그 쪼글쪼글한 모습이 번데기를 닮았다고 하여 번데기와 미이라와의 공통점을 잡아 작품화한 것이다. 이 작품은 시상을 현장감 있게 물 흐르듯 전개하여 표현하고 있다. 첫수는 번데기를 사가지고 군것질하며 이집트 미이라 전을 관람하다가 미이라가 꼭 번데기 같다고 느껴 이를 시화하였고, 둘째 수는 한 때 이집트를 호령하던 정치 종교의 최고 지도자 ‘파라오’도 죽어 관에 들어가서는 미이라가 되어 쪼그리고 누워 있는 모습이 꼭 고치 속 번데기와 닮았음을 보고 권력도 인생도 무상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셋째 수는 ‘누에 번데기가 고치를 열고 나와’고운 ‘비단 날개 펄럭이며’공중을 날듯이 죽은 파라오들도 번데기에서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갔나 보다고 하여 관에 든 이집트의 파라오와 고치 속 번데기를 일체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이집트 파라오들이 깃이 돋아 하늘로 올라갔으니 지금은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까. 사람을 곤충화하여 표현한 작품으로 번데기가 우화(羽化)하여 깃이 돋아 하늘을 나는 곤충이 되어 살다가 다시 번데기가 되어 돌아가듯 인간도 번데기에서 출발하여 사람으로 살다가 번데기가 되어 돌아가는 존재로 생각하면서 비교 은유하여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해된다.
그리움 아라리오
꽃으로 피어나면
그대로 심어두어
울음으로 불러내리.
벽오동 바람 잔 등에 미움으로 지워내리.
만개 파도 춤을 쉬고
억수 바람 숨 멎은 날
구천 소리 내려와
인간 속에 숨어들 적
옹달샘 천만리 길에 구름 실어 보내리.
-박길중, 젓대 소리, 전수
젓대는 옆으로 부는 피리로‘젓대 소리’하면 애절함이 떠오른다. 첫수 초장은 그리움이 애절하게 ‘아라리오’하며 꽃으로 피어난다고 하여 고적한 젓대 소리인 무형물을 유형물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 젓대 소리는 어느새 울음을 불러내니 벽오동에 부는 바람 등에 실어 보내 이를 지우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의 ‘미움’은 애잔한 그리움에 울음소리로 나타난 음률이라고 느껴진다. 둘째 수에서 ‘만개 파도’ ‘억수 바람’은 거친 세상 풍파를 지칭하는 말로 이런 것이 가라앉는 날 젓대 소리가 구천의 하늘 소리로 내려와 인간의 가슴 속에 서리서리 숨어드니 이를 생명의 옹달샘물 천리만리 가는 길에 구름에 실어 띄워 보내겠다고 하여 애증을 씻고자 하는 마음을 변이(變異) 환치(換置)하여 표현하고 있다. 인생의 잔잔한 설움, 잔잔한 아픔을 지워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 전통 악기인 이 젓대 소리는 왜 그리 애절할까. 아마도 우리의 정서 속엔 잔잔한 슬픔이 자리하고 있어서 인가 보다. ‘아라리오’란 말은 우리 민요 ‘아리랑’에 나오는 말인데 아리랑은 ‘아리다’에서 나왔다고 하니 ‘아라리오’는 ‘아리구나.’란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마음 속 아림을 지워내고픈 마음이 이 작품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내륙의 깊숙한 곳
민속촌 같은 마을
담장은 성(城)이라 둘러
세월을 쌓아두고
여기는 고려 땅이다
버티고 선 백일홍
달빛 젖은 선죽교
피 묻은 메아리
은거의 세월 속에
꽃들은 죄가 업어
육백년 피고지고 피고
꽃눈 흩어 뿌려준다.
-배종관, 고려동 백일홍, 전수
주(註)에 달아놓은 것처럼 조선시대 고려 유민의 마을인 고려동을 노래하고 있는데 백일홍은 그 마을 지키는 지킴이로 쉬 지지 않는 육백년 된 단심(丹心)의 상징으로 등장시킨 것 같다. 첫수는 고려동의 위치와 백일홍을 소개한 부분으로 고려동은 ‘내륙의 깊숙한 곳 민속촌 같은 마을’로 담장은 성으로 둘러 있고 거기는 오랜 세월의 흔적들이 있는 고려 땅으로 백일홍이 육백년 지킴이로 피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둘째 수는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의 선죽교 피 흘림의 이미지를 백일홍의 붉은 색에 접목하여 피 붉은 아픔의 메아리로 떠올리고 있다. 오랜 세월을 산 백일홍은 죄도 없이 숨어서 육백년을 피고지고 또 피어 단심의 꽃눈을 흩뿌려 고려의 옛 자취와 역사적 아픔을 보여준다고 하고 있다. 포은(圃隱) 선생의 불사이군(不事二君) 단심이 메아리치고 있다.
새파란 풍선 속에 흰 구름 꽃 피며 날고
들녘은 물결치는 풍요로운 황금바다
가을 님 모습 숨기고
숨바꼭질 하구나.
옹골찬 결실의 계절 사랑하는 님 마음
토함산 녹색 깃발 불국사를 감싸 안고
조양동 둥근 솔 뫼산
짙은 포옹하구나.
-손주일, 가을 님이여, 전수
계절 ‘가을’을 ‘님’이라고 하여 자연현상을 인간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님’은 그리움이 대상, 사모의 대상, 절대적 힘의 존재 등으로 파악되는데 여기선 가을이 그런 존재이다. 아름다운 비유가 펼쳐진 작품으로 첫수는 맑고 높은 파란 가을하늘을 ‘새파란 풍선’으로 은유하고, 흰 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님을 ‘꽃 피며 날고’라고 하여 가을 하늘을 꽃처럼 풍선처럼 초장에서 표현하고, 그 아래 들녘에서 곡식들이 익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황금 바다’라고 하여 가을 들판에 곡식들이 익어서 넘실대는 모습을 중장에 배치하고 있다. 종장에는 가을 하늘과 들판 사이에 ‘가을 님’이 숨바꼭질하듯 숨어서 느낌만 줄 뿐 보이지 않음을 표현해 보이고 있다. 둘째 수는 곡식들이 옹골차게 영그는 가을을 ‘가을 님’이 사랑한다고 하며, 그 ‘가을 님’은 역사의 고장 경주 토함산의 푸른 숲(+녹색 깃발)으로 불국사를 감싸 안고 왕릉 등 신라 유적이 숨쉬는 ‘솔 뫼산’을 포옹하며 가을 정경을 빛내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가을을 포근히 안아주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마치 어머니 같은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
꽃길을 걸어가는
새색시 꽃고무신
폭우에 휩쓸려간
잃어버린 신발 한 짝
다리를 씰룩이면서
그리움에 허우룩.
-신미경, 외짝, 전수
짝은 둘이 있어야 제격인데 외짝이라니 옆이 얼마나 허전할까. 뭔가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마음을 흔들고 있으리라. 이 작품은 희망찬 꿈을 안고 아름다운 인생길인 ‘꽃길을 걸어가는’젊은 날의 모습이 초장에 나타나 있고, 중장엔 때 아닌 세상 풍파인‘폭우에’그 모든 희망이며 꿈이었던 ‘짝’인‘새색시 꽃고무신’을 잃고 외톨이가 되어(=잃어버린 신발 한 짝) 이별의 아픔과 불완전한 삶의 단초가 생기게 되었음이 나타나 있고, 종장에선 ‘다리를 씰룩이면서’란 시구로 비정상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까운 이와 이별하여 그리움에 사무치는 모습을 표현해 보이고 있다. 그리움과 아픔이 솔솔 배어나는 작품으로 친한 이, 사랑하는 이를 ‘꽃고무신 신발 한 짝’으로 은유하고 있다. 아련함이 스미어 있는 단시조 작품으로 초중종장 끝을 명사와 어간만으로 단절된 끝맺음을 하여 시적 감흥을 돋우고 있다.
사는 것의 의미를 너무 깊게 생각 말자.
오늘 하루 부지런히 즐거운 마음으로,
소소한
작은 일들에서
기쁨 받고 기쁨 주고.
풀벌레 그 소리에 행복이 구르누나.
가을 향기 느껴보는 그것만도 행복하네.
폭염이
놓고 간 자리
정리하니 가을 냄새.
-신민숙, 가을 향기, 전수
가을의 상큼함에서 인생의 상큼함을 표출하려 한 작품으로 자연스럽고 억지가 없는 삶이 바로 기쁨을 누리는 일임을 표현하고 있다. 주어진 여건에 충실하게 삶의 흐름대로 살며 복잡한 생각일랑 다 지우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여 부지런히 살아가면 기쁨도 받고 기쁨도 줄 수 있음을 첫수에서 보여주고, 둘째 수에서는 가을 풀벌레 소리에도 행복이 있고, 가을이 풍겨주는 향기만 느껴도 행복을 느낀다고 하면서 지난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다 떠난 자리를 말끔히 정리하니 가을의 상쾌한 향기가 마음을 싱그럽게 한다고 하고 있다. 우리말에 깊이 생각할수록 깊은 근심이 생겨난다는 말이 있는데 너무 어렵게 살려 하지 말고 적당히 마음을 비워두고 자연 그대로를 호흡하며, 하찮은 일에도 만족하는 마음으로 살 일임을 말하고 있다.
풀이라 여겼더니
여리여리 핀 꽃들
하도 예뻐 꺾으려니
찬바람 싸늘 불고
화들짝 놀란 꽃들이
체머릴 흔드네요.
-윤윤주, 가을 들꽃, 전수
‘들꽃’은 풀숲에 숨은 작은 꽃이기에 얼핏 보면 잘 보이지 않는다. 참말로 세심히 눈여겨보아야 보이는 꽃이다. 모습이 이렇기에 시인은 ‘풀이라 여겼더니’숨어서 ‘여리여리’피었다고 하였다. 그 꽃은 예쁘장하다. 그래서 갖고 싶은 욕심에 꺾으려하니 ‘찬바람’이 싸늘 불어 그 꽃을 흔드는 바람에 꽃들은 화들짝 놀라 인간의 욕심에서 벗어나 ‘체머리’를 흔들고 있다. 인간의 욕심을 자연이 제어하는 모양새가 종장에 나타나 있다. 가을 들꽃은 어쩌면 야리야리한 소녀의 모습을 닮은 쓸쓸하고 외로운 존재인 것 같다. 의인적 표현기법이 시조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오후가 낮잠 자는 한적한 시골길
놀러 나온 낮달이 달맞이꽃 깨우고
여유를 방아질하며
힙합 추는 방아깨비.
바람이 졸고 있는 차선 없는 하늘 도로
마법 걸린 구름 자동차 뛰뛰빵빵 우쭐대면
수호신 고추잠자리
빨간 신호등 흔든다.
-이남성, 기분 좋은 날, 전수
“기분 좋은 날”은 어떤 날일까. 이 작품을 보면 붐비는 일 하나 없는 한가로운 시골에서 낮달이 뜨고 달맞이꽃이 피어나는 시골길에 방아깨비가 멋에 겨워 힙합을 추는 듯 방아질하고 있는 여유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날인 듯싶다. 거기다 바람도 자고 없는 고요한 하늘에 마법에 걸린 듯 구름이 자동차처럼 우쭐대며 떠다니는 풍경에 고추잠자리가 신호등이 된 양 꼬리를 흔들고 날아다니는 동화 속 세계 같은 일이 펼쳐지는 날이 시인이 생각하는 기분 좋은 날인 것 같다. 다분히 동화적 시적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는 작품으로 한 폭의 산촌 풍경을 그려놓은 동화책을 보고 있는 듯한 밝고 환한 묵시적 이미지가 지배적 심상인 작품이다.
억센 삶 시려 밟고 물안개 휘어 안고
물밑에 뿌리 내어 터 잡은 왕버들숲
에둘러
뭉클한 인연
손짓하는 잎사귀.
억겁을 숨죽이며 깊숙이 소리 삭혀
잠자리 소금쟁이 노닐던 물풀 위로
진초록
늘어진 잎새
마른 흔적 지우듯.
침몰한 전설들과 가라앉은 찌꺼기들
허름한 차림새로 수천 년 지켜내 온
달콤한
속삭임마저
꿈도 새겨 날리네.
-이동배, 우포늪 왕버들숲, 전수
우포늪은 경남 창녕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습지로 각종 동식물이 살고 있는 자연보존지역이다. 이곳엔 왕버들을 비롯한 갈대들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고, 넓은 습지엔 자욱한 안개가 늘 끼어있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 가운데 왕버들을 시제로 삼아 이곳의 생태계를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첫수는 왕버들의 치렁치렁한 가지와 엉겨 내린 뿌리로 터 잡고 왕성히 자라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삶의 뭉클한 인연을 잎사귀들이 손짓하고 있다고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는 우포늪이 ‘억겁을 숨죽이며 깊숙이 소리 삭혀’물 풀 위에 잠자리 소금쟁이 노닐게 하며 ‘진초록 늘어진 잎새’로 이미 지나 말라버린 흔적을 다 지워내고 이곳이 생태계의 요람임을 알리려는 듯하다. 그리고 셋째 수는 왕버들이 숱한 전설, 가라앉은 세월의 찌꺼기를 특별한 가꿈도 없이 수천 년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하면서 달콤한 속삭임, 달콤한 꿈을 새겨서 날린다고 하여 이곳은 수천 년 동안의 순수 자연으로 수많은 티 없는 사연들이 숨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시상詩想을 미늘에 꿰어
세상 복판에 드리운다.
입질이 올 때까지
들여다보고
기다리고
번번이 놓쳐버린 손맛,
그 느낌이
절실하다.
-이상익, 낚詩, 전수
시조 쓰는 것을 낚시에 비유하여 “낚詩”라는 시제를 붙여 쓴 작품이다. 시상을 시어의 은유로 쓰인 ‘미늘’에 미끼로 꿰어서 시조 작품을 세상에 건져 올려 내보인다고 초장에서 말하고, 중장에서는 시조가 잘 써지지 않을 때는 시적 발상이 떠오를 때까지 곰곰이 생각하여 들여다보고 기다린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시적 발상이 쉽게 떠오르지 않고 있음을 종장에서‘번번이 놓쳐버린 손맛’이란 시구로 표현하여 작품 쓰기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낚시질할 때 고기를 낚으려 낚시를 드리우면 잘 잡히는 날도 있지만 영 입질이 없거나 입질하고 미끼만 따먹고 도망가는 경우도 있듯이 시조 작품이 잘 써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때가 허다하다. 이를 낚시에 비유하여 쓴 시조이다. 시조를 쓰는 일은 고난의 행군이요, 정신을 혹사하는 행위라고 한다. 좋은 작품은 쉽게 순산되는 게 아니라 난산의 산고(産苦)를 겪고 태어나는 옥동자이니만치 시적 사고(思考)를 갈고 닦으며 기다림의 미학을 익힐 필요가 있을 듯하다.
허기진 그 시절의 가득함을 담고 싶다.
어머니 손때 묻은 귀 닳은 한 되짜리
차디찬 방 윗목에서 만복 되길 기다리는
언제나 소박한 꿈은 배불리 먹는 것
품삯을 당겨 먹고 보릿고개 넘을 적엔
언덕 위 흰 찔레꽃도 쌀밥으로 보였다.
-이한성, 되, 전수
‘말’ ‘되’하는 말은 곡식의 양(量)을 헤아리는 단위인데, 요즘은 이것 대신에 쌀 한 가마니 몇 kg하는 식으로 ‘kg’이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말’ ‘되’하는 말이 나오면 향수심을 자극한다. 아니 옛날 향기가 난다. 시인은 이런 말인 ‘되’를 시제(詩題)로 하여 어려운 삶을 살았던 어머니 시절 삶의 고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수는 한 되, 한 홉 먹을거리가 없어 허기져 살았던 옛 시절을 가득 담고 있는 이 ‘되’는 어머니가 사시며 자주 사용하여 손때가 묻어 있다고 하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이야기하며 그 때는 불도 제대로 지피지 못하여 그 ‘되’는 차디찬 방 윗목에서 곡식이 가득 담겨 만복을 누릴 날을 기다린다고 하여 빈한했던 시절을 회억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수는 그 시절엔 먹는 것이 하나의 꿈이요 행복이었기에 밖에서나 안에서나 어른들을 뵐 때 지금은 “안녕하셨어요.”하지만, 그 때는“진지 잡수셨어요.”였다. 주변에 굶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품삯도 미리 당겨 먹거리를 사서 겨우 겨우 보릿고개도 넘겼다. 그러다 보니 허기지면 헛것이 보인다고 하더니‘언덕 위 흰 찔레꽃도 쌀밥으로 보였다.’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죽지가 부러지는 그 아픔 누가 알까.
꼿꼿이 허리 펴고 하늘 향해 서 있던
김제 들 정정한 다리
주저앉은 아버지.
세월이 빠른 건지 마음이 급했는지
나뭇잎 떨어지고 놀던 새 품은 떠나
산 너머 홀어머니도
속병 앓다 스러졌다.
-임주동, 고사목, 전수
이 작품은 죽어가며 마르는‘고사목’을 통하여 쇠(衰)하여 잦아드는 어버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무도 인생도 젊은 날의 싱싱함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고 아픈 데도 자꾸 나타나고 뼈도 바삭거리며 부러지기 일쑤다. 거기다 곁에 있던 자식들은 나뭇잎이 떨어져 나뭇가지에서 떠나듯 하나 둘 곁을 떠나고 쓸쓸함과 아림만 남는다. 첫수는 김제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정하게‘꼿꼿이 허리 펴고 하늘 향해 서 있던’아버지가 세월의 무게에 지쳐 고사목처럼 삭아 허리는 굽어 주저앉고 있음을 아쉬워하며 안타까워하는 효심을 보이고 있으며, 둘째 수에서는 세월이 빨라서인지, 마음이 급해서인가는 모르지만 나뭇잎들이 떨어져 새로운 품을 찾아 떠나듯 인생의 잎인 아들딸들은 성혼하여 새품을 찾아 떠나고, 산 너머에서 홀로 살던 홀어머니도 속병을 앓다가 결국은 ‘스러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생은 허무하고 고적하다. 자연의 순리는 이렇게 일정 세월이 지나면 조금씩 삭아 스러져가는 것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짧아진 햇살 속에 너 울어 슬픈 날은
산빛도 내려앉고 물빛도 설움인데
갈대의 잦은 노래가 법문처럼 들린다.
한 세상 사는 일이 갈대로 대나무로
스스로 불바다에 헛발을 디딛는 일
줄 타는 어름사니의 버선발과 같구나.
팽팽히 당겨오던 수많은 생의 구비
가슴속 떨림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해
가을비 울고 간 들녘 샛강으로 흐른다.
-함세린, 가을비 지나간 그 후, 전수
가을을 인생에 접목하여 노래한 작품이다. 가을에 내리는 비는 때로 폭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추적추적 적막을 연주하며 구슬프게 내린다. 하루해는 자꾸만 짧아지는데 슬픔을 품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면 더없이 울적하다. 그 때 아름답게 산골을 물들이던 단풍은 다 져서 쓸쓸함을 돋우고, 물빛마저 설움을 이고 흐르는데, 비에 젖은 갈대에 바람 서걱이는 소리는 법문(法文)을 외는 듯하다. 우리가 한 세상 사는 동안에는 봄여름처럼 곱고 싱싱한 세월도 있지만 가을날의 갈대, 대나무처럼 저 홀로 외롭게 세상을 지키며 살아가는 쓸쓸한 삶도 있고, 고난과 시련을 겪으며 ‘헛발’ 디디며 사는 허랑함도 있어 늘 사는 일은 남사당패 줄 타는 이 버선발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어쩌면 팽팽히 당겼다 놓았다 하는 줄다리기 같은 것이 삶의 여정이다. 그래서 우리네 삶엔 기쁨과 설렘이 있고, 고난과 아픔이 있다. 제 정신 차리고 올바로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억지로 살려면 안 된다. 이런 시상들이 전편(全篇)에 전개되어 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 삶은 ‘가을비 울고 간 들녘 샛강으로 흐른다.’처럼 그렇게 자연의 흐름대로 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묻혔던 꽃씨들이 기어이 뜨더니
뜨거운 젊은 피로 물들었던 사루비아
그 해 봄 하늘이 열렸다. 새떼들이 날듯이.
보았네, 자유가 그리도 간절함을
알았네, 자유가 이리도 드높음을
광장에 환한 이 기상, 언제라도 봄이다.
-홍오선, 프라하의 봄, 전수
프라하의 봄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비에트연반이 간섭하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간섭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던 민주화시기를 일컫는데, 이 시기는 1968년 1월 5일에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파 집권하면서 시작되었으며, 8월 21일 소비에트 연방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여 개혁을 중단시키면서 막을 내린 단명의 시기이다.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시민과 함께 쟁취한 것인데 동구권에 번질 것을 우려한 소비에트 연방의 무력진압으로 좌절되었다. 그 일시적 기간의 일을 작품화하였다. ‘묻혔던 꽃씨’는 억눌려 살던 자유 의지를 두고 하는 말로 이가‘뜨거운 젊은 피로 물들었던 사루비아’로 피어났다. 즉, 젊은 피를 흘려 자유가 피어났음을 ‘사루비아’란 핏빛 꽃으로 표현하였는데 이 ‘사루비아’는. ‘프라하의 봄’의 은유로 파악된다. 그 ‘젊은 피’에 의하여 프라하에 새처럼 자유로운 하늘이 열렸음을 첫수에서 보이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자유의 간절함, 자유의 드높음을 이 프라하의 봄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던 이들의 피 흘림을 보고 알았다고 수사법상 도치법을 사용하여 강조하면서, 그 프라하 광장을 누비던 기상은 얼마 안 있다 막을 내렸지만 언제라도 다시 자유를 누리는 봄을 불러와 개방된 사회가 열려 자유로운 사회가 될 것을 ‘언제라도 봄이다’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Ⅲ.
시조의 원형은 단시조이고, 거기서 파생 발전된 모습이 연시조이다. 단시조는 그 종장 처리가 시조 성패의 핵심이다. 그래서 종장 처리가 가장 중요하다. 종장 첫 구에는 돌올(突兀)한 전환에 의한 촌철살인의 시구가 배치되어야 그 역할을 다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촌철살인은 못 되더라도 감흥의 전환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연시조는 적당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시조에서 정서의 절정은 대부분 종장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조가 시조로서의 특질은 바로 이 점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말은 시조의 정형을 어떻게 잡아야 하느냐의 문제인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본율격으로 거의 통용되고 있는 3장 6구 12소절을 지켜서 써야 하겠다. 그리고 한 소절의 자수율도 3〜4자, 종장 첫 구 3자, 둘째 구 5〜6자를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종장 첫 구에 배치(配置)되는 말은 독립성이 보여야지 뒷말에 예속되거나 띄어쓰기만 3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조가 시와 다름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도 아니고 시조는 더욱 아닌 작품은 나오지 말아야 한다. 이번 2021 현대시조 가을호에 실린 작품은 대부분 이를 잘 지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는 소절의 음수가 넘치고 어떤 경우는 소절수도 넘치는 작품이 한두 편 섞여 있었다. 시조 의 세계화와 발전을 위하여 다 함께 노력할 일이다. 위 계간평 대상 작품에서 ‘바작’ ‘미이라’ ‘사루비아’등 비표준어로 쓰인 것들이 있었는데 이는 지은이의 의도를 살려 시적허용으로 생각하고 그대로 사용하고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은 현대시조지(現代時調誌)가 자꾸 얄팍해지는 것을 보니 발간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 현대시조를 통하여 문단에 나오신 분들이 출신 잡지의 성장 발전을 위하여 현대시조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