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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버마)의 민주화 투사인 아웅산 수치(68) 여사가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지난달 28일부터 지난 1일까지 4박5일간 수치 여사는 서울ㆍ평창ㆍ광주를 오가며 공식행사 18개와 비공식 행사 12개 등 모두 30개에 육박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그의 방한은 여러모로 눈길을 끈다.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남은 에너지·천연자원의 보고(寶庫)로, 이제 막 빗장을 연 기회의 땅이다. 지정학적으로도 전략 요충지다. 중국이 선점하는 데 성공했으나 최근 미국·일본이 빠르게 뒤쫓는 형국이다.
수치 여사는 최근 대선 도전 의지를 재확인한 바 있다.
수치 여사의 방한 일정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예방 ▶평창 스페셜올림픽 행사 참석 외에도 문화ㆍ환경 등 다양한 분야의 일정도 포함됐다. 수치 여사의 비서실장 틴 마 아웅 박사는 “수치 여사가 한국에서 미얀마의 경제 발전과 민생 향상 방안들을 모색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한국을 롤모델로 삼아 미얀마의 산업화·민주화 방안을 구상한다는 의지를 내비친 셈이다. 대통령 자리를 꿈꾸는 수치 여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 환경재단 최열 대표 면담 2 서울시장 면담 3 이명박 대통령 예방 4 박근혜 당선인 예방 5 평창 스페셜올림픽 개막식 6 평창 스페셜올림픽 글로벌 개발 서밋 기조연설 및 기자회견 7 5·18 묘역 참배 8 광주명예시민증 수여 광주인권상 수여 9 국회의장 예방 국회 본회의 참관 10 안재욱이영애 등 한류스타 저녁 11 인천시장 면담 12 미얀마 교민 간담회 13 이희호 여사 예방 14 서울대 명예 박사 학위 수여식 [사진 조용철안성식기자, 뉴시스] |
지난달 29일 오전 환경재단 최열 대표와의 비공개 면담에서 수치 여사는 ‘민생 행보’를 펼쳤다. 최 대표가 친환경 태양광 전등세트 1000개 기증 계획을 설명하자 수치 여사는 “여러 가구가 돌아가면서 쓸 수 있도록 대여 시스템을 마련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이 전력난에 시달리는 미얀마에 적절할 것 같다”고 말했다. 미얀마 국민 80%가 낙후된 시설로 인해 전기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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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박원순 서울시장과의 면담에서도 수치 여사는 ▶서울의 도로교통 인프라 구축 및 유지 보수 방법 ▶폐건전지 재활용법 등 미얀마가 배우고 싶어하는 이슈들에 대해 질문 공세를 이어갔다. 1일 송영길 인천시장과 만난 자리에선 송 시장이 “인천시가 미얀마의 심장병 아이들을 돕는 프로젝트를 해왔다고 밝히자 큰 관심을 보이며 “향후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가자”고 말했다.
국내 미얀마 교민들과 만나서는 “한국에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직장에서 힘든 경우는 없는지”라며 민생 챙기기에도 힘썼다고 복수의 교민은 전했다.
지난달 31일 한류 스타들과 가진 만찬 역시 미얀마의 대중문화산업 발전을 위해 마련했다고 틴 마 아웅 비서실장은 밝혔다. 미얀마에서는 수년 전부터 ‘주몽’ ‘대장금’과 같은 한류 드라마가 크게 히트했다. 이를 목격한 수치 여사는 한류의 성공 비결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미얀마의 대중문화를 한류처럼 발전시킬 방안이 궁금해 만찬을 마련했다고 틴 비서실장은 전했다. 만찬엔 ‘대장금’의 배우 이영애씨, ‘주몽’의 송일국씨와 배우 안재욱씨도 초청됐다.
미얀마 제1야당인 민족민주동맹(NLD) 총재인 수치 여사는 대통령이 꿈이지만 갈 길이 멀다. 가장 큰 걸림돌은 헌법이다. 외국인과 친인척 관계인 사람이 대통령직을 맡는 걸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치 여사는 1999년 암으로 숨진 영국인 남편 마이클 에어리스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뒀다. 헌법 개정을 위해선 군부의 협조가 필수다. 수치 여사는 최근 BBC와의 인터뷰에서 “버마군은 내 아버지의 자식과 다름없다”고 말한 바 있다. 수치 여사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가 영국 식민지였던 시절 서구식 군대를 창설해 독립의 초석을 닦았다.
한류 스타들과의 만찬에서 수치 여사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를 제작하려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만찬에 참석했던 오승연 고려대 연구교수는 수치 여사가 “권력을 노리고 아버지를 암살한 사람 역시 결국 권력을 잡지 못했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 자신에게 좋은 일은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②한국과 미얀마의 공통분모, 민주화
“결혼은 했었나요. 당시 몇 살이었나요.”
수치 여사가 지난달 31일 광주의 국립 5·18 민주 묘지를 참배하며 희생자들에 대해 던진 질문이다. 수치 여사는 1980년 5·18 당시 만삭의 몸으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숨진 최미애씨와 도청에서 진압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씨의 묘를 차례로 둘러봤다. 여성은 몇 명이나 희생됐는지도 질문했다. 5·18 묘지를 나와 광주시청을 찾은 수치 여사는 시청 방명록에 “이렇게 용감한 여성과 남성들의 도시에 와서 그들과 하나가 됐다고 느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라고 썼다.
1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난 자리에서도 민주주의가 화두였다. 이 여사는 수치 여사에게 “꼭 버마의 대통령이 되어 자유롭고 평화로운 버마를 만들길 바란다”고 덕담을 했다. 수치 여사는 다른 오찬 자리에선 “야당을 하다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야당 할 때 견지하겠다던 가치를 지키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체코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된 후에도 야당 시절 가치를 견지한 사람인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을 많이 존경한다”고 말했다.
수치 여사는 현재 미얀마를 통치하는 테인 세인 대통령과 거리를 뒀다. 평창 스페셜올림픽을 계기로 열린 글로벌 개발 서밋 기조연설에서 그는 “현 정부가 민간 정부라고는 하지만 군대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며 “지금 이 자리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면 여러분의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는 뼈 있는 농담으로 발언을 마무리했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권리만을 생각하지만 의무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일 서울대 명예교육학박사 수여식 기념 강연이었던 ‘아시아의 민주주의와 발전’에서 수치 여사는 “버마의 민주화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인생처럼 학습의 연속이다. 버마는 지난 50년간 정치·사회 장애를 겪었다. 지금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우린 우리만의 전통의 가치를 지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미래엔 세계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한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③내공 묻어나는 ‘원칙’의 리더십
수여식 뒤 이어진 질의응답 때 수치 여사는 ‘원칙’과 ‘약속’을 강조했다. “정치인들을 보면 가장 화가 나는 게 약속을 너무 쉽게 어기고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는 것”이라며 “이 점이 제일 화가 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약속을 한 번 어긴 적이 있는데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사람들을 기만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거짓 희망을 주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정직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1일 광주에서 비공개로 열린 교민 간담회에서 “가택연금의 힘든 생활을 어떻게 견뎠느냐”는 질문을 받자 수치 여사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놨다. “이 세상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슬프거나 괴로운 일이 있어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 행복하기 위해 욕심만 부리고 떠난다면 삶의 의미가 없지요. ‘쌀은 떨어지고 지구만 무거워진다’는 버마 속담이 있습니다. 내 배만 채우고 내 욕심만 부린다면 세상을 힘들게 할 뿐이란 뜻이지요. 항상 남에게 뭘 해줄까를 생각해야 의미 있는 삶입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무언가를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라”는 원칙을 되풀이해서 강조했다.
교민들에게도 원칙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여러분 모두가 미얀마의 거울이다”라며 “어떤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깨끗하게 해달라”고 전했다. 미얀마 정부가 주한 대사관을 통해 자신들에게 세금만 거둬가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는 교민들의 불만에 대해서는 “(테인 세인) 대통령에게 잘 전달하겠다”고 하면서도 “그래도 세금은 국민으로서 중요한 의무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원칙 강조는 때로 냉정함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1일 서울대 명예박사학위 수여식 후 질의응답에선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카친족(族)과 미얀마 정부의 갈등에 대해 수치 여사와 NLD 측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항의성 발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수치 여사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정식으로 관여를 해야 하는데 지금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증오와 갈등은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는 태도에서 나온다”며 “나와 다른 것에 가치를 두고 존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수치 여사가 딱딱한 원칙주의자의 면모만 보인 것은 아니다. 연설과 대화에서 종종 농담을 하기도 했다. 1일 서울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미얀마 교민과의 대화에서 한 남성이 “요즘 미얀마 여성들이 전통 복장을 안 입고 미니스커트를 입어서 보기 싫다”는 말을 하자 “음, 나도 미니스커트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들이 더 전통을 잘 지키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라며 재치 있게 응수했다. 지난달 31일 강운태 광주시장과 면담 후 ‘천기수병(天氣樹甁)’을 선물 받으며 “이 잔에 물을 담아 마시면 천년을 산다”는 설명을 들으면서는 “너무 나이 드는 것 같다”고 답했다. 이어 강창희 국회의장을 만난 자리에선 “버마 민주화가 더디지만 설탕이 물에 바로 녹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말해 좌중을 즐겁게 했다.
④‘철의 난초’의 이미지 정치
“매일 아침 호텔 방으로 장미꽃을 가져다 주세요.”
수치 여사가 한국 방문 초청을 수락하며 제시했던 조건 중 하나라고 한다. 상세한 조건도 따라왔다. ▶색상은 흰색, 노란색, 분홍색 ▶너무 활짝 피지 않은 꽃송이로 골라 ▶각각 열 송이씩 준비해 달라는 것이다. “붉은 육류는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이니 유의해 달라”는 다른 요청사항과는 특이한 주문이었다. 초청 과정에 관여한 한 인사는 “외국 국빈 초청 경험이 많지만 이런 요청 사항은 처음이었다”며 “까다로운 분일 줄 알고 긴장했었는데 알고 보니 소탈한 분이었다”고 귀띔했다.
비밀은 수치 여사의 머리 스타일에 있었다. 그는 오랜 기간 어깨 길이 머리를 단정히 내려 묶고 검은색 핀으로 고정하는 스타일을 고수해왔다. 이 검은색 핀에 생화를 장식해 포인트를 주는 게 수치 여사의 트레이드 마크다. 애용하는 꽃은 장미와 난초. ‘철의 난초(iron orchid)’라는 별명도 얻었다. 여기엔 미얀마 전통문화에 대한 수치 여사의 자긍심이 숨어 있다. 미얀마 측 수행단원인 표 제야 타우(32) NLD 소속 의원은 “미얀마 여성들은 생화로 머리를 장식하는 걸 좋아하며, 수치 여사도 그런 문화를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옷도 미얀마 전통 의상인 롱지(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고집한다. 미얀마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자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러면서도 시간ㆍ장소와 행사 성격에 따라 스타일에 변화를 주는 패션 센스를 발휘했다. 지난달 31일 오전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 참배 후 광주인권상을 받는 자리에선 짙은 푸른색 롱지에 옅은 회색 재킷을 받쳐 입고 흰꽃을 꽂아 차분함을 연출했다. 같은 날 저녁 서울로 돌아와선 배우 이영애·안재욱씨 등과 비공개 만찬을 하는 자리에선 반짝이는 보랏빛 비단 소재에 화려한 자수가 놓인 롱지로 갈아입고 머리엔 분홍색 꽃을 꽂아 멋을 냈다. 수행팀 관계자는 “자신의 차림새가 깔끔한지 항상 신경 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수치 여사는 1m60㎝가량의 키에 마른 체격이지만 꼿꼿한 자세와 부리부리한 눈매 때문에 카리스마가 넘친다. 수치 여사를 만난 인사들은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수치 여사의 말투에 나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1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수치 여사를 만난 송영길 인천시장은 “우아한 이미지에 귀족 같은 인상을 받았다”며 “군사독재 정권 탄압을 견디고 아픔을 이겨내며 얻어진 기품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듯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