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의무이다. 태어남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듯, 학교를 다니고 남자는 군대를 가야하며,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노후를 책임져야하는 의무의 연속이다.
행복은 그 가운데서 특별히 운이 좋다거나, 남보다 덜 불행한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버린다는 사람은 있어도, 길바닥에다 지갑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객관적 기준을 초월한 판단이다. 행복은 상대적이기에 자신의 주관으론 헤아리기 어렵다.
우연히 예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전원일기를 보았다. 배우들의 분장 모습이 다소 촌스러운(? )것 같은 걸 보니 초창기의 작품인 듯 하다.
이웃 수남네에서 대추를 따던 날, 일용엄마는 치마 앞춤에 대추를 얻어 감싸고 김회장네에 들러 막걸리를 얻어 마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설움의 눈물을 흘렸다. 일찍 가버린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가난한 살림살이에 대한 서러움이 겹쳤다.
어느 해던가? 혼자 강화도 마니산을 다녀오다 전원일기의 촬영지인 김포 양촌리에서 차를 갈아탔다. 그곳엔 드라마의 흔적을 남긴 광고물들은 많았으나, 그 평화로운 농촌 흔적은 없었다. 세월이 무수히 흘렀다는 결과이다
어린시절 우리동네는 140호가 넘는 큰 동네였다. 시골 면단위에서 단일 마을로서는 매우 큰편이었다.
또래 친구도 많았고 서로의 살림살이를 알고 살았다. 그러나 나는 삶에 대한 부러움이 적었다. 커다란 집도, 넓은 농토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내가 부러워 한것은 우리집에 없는 살구나무와 단감나무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집주변에 심으면 될 것을 왜 심지 않았을까?
어린 마음에 집 주변의 공터가 아까워 이것 저것 많은 것들을 심었다. 인삼장수에게서 꼬마인삼을 얻어 심기도 하고, 나는 기억에 없지만, 어머니 말씀이 배추를 심었는데 얼마나 잘되었던지 동네 사람들이 놀라더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예쁜 꽃보다는 오래 볼 수 있는 나무가 좋다. 한때는 전원주택을 선호했고, 바닷가에 터전을 마련했으나 뜻하지 않은 토지수용으로 다 허사가 되고 말았다.
훗날 새로 마련한 토지에다 단감나무와 살구나무를 심었으나 또다시 두고 떠나야 했다.
행복이란 꿈꾼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족해도 조그만 것에서 만족하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게 행복이다.
때론 가난해도 부러움이 없었던 그때가 문득 그립다. 모두가 행복한 그날을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