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길을 벗어난 버스가 벽송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폭이 좁은 다리를 지나니 마주 오고 있는 다른 버스가 보였다. 버스 이마에 “아름다운 함양”이라고 크게 써 붙인 모양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유림 가는 분들은 저 차 타이소!” 하고 외친 기사가 문을 열자 ‘할매’ 몇 명이 느릿느릿 내려 버스를 갈아탔다. 다시 출발한 버스는 그 유명한 지리산 칠선계곡을 옆으로 끼고 달렸다. 추성 마을 입구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린 기자는 벽송사로 이어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경사진 길을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지리산의 평화로운 산세가 눈에 가득하게 들어왔다.
그때 갑자기 몰려온 한 무리의 거센 바람이 내 이야기 좀 들어 보라는 듯, 우우~ 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문득, 한때 지리산을 휩쓸었던 좌우 대립의 피바람이 떠올랐다. 그 난리통에 죽어갔을 수많은 이들의 넋이 아직도 화해하지 못한 채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뜬금없는 잡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이윽고 벽송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서야 이 여정이 월암 스님을 만나기 위해 나선 길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선교겸수, 한국 간화선의. 오래된 미래.
조선 중종 15년(1520년)에 창건된 벽송사는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보조 국사의 간화선 법맥을 이은 벽송지엄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이곳에서 길러진 그의 문하에서 한국 선불교의 양대 산맥인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벽송사가 근래 들어 다시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바로 월암 스님이 벌인 벽송선회 때문이다.
“중국에서 돈오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면서 이제 이론 공부는 그만하고 참선에 매진해 보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선방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한동안 정진하면서 지내다 보니 수행자들이 참선만 중시할 뿐 교학은 경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뭐랄까, 깨달음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그런 문제의식이 점차 깊어져 가고 있던 와중에 그는 벽송사에 오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기막힌 인연이었다. 벽송사는 그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 줄 ‘선교겸수(禪敎兼修)’라는 전통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벽송사를 창건한 벽송지엄 스님은 선사인 동시에 강주이기도 했습니다. 스님께서 학인들을 가르칠 때 썼던 교재가 『도서』, 『절요』, 『서장』, 『선요』인데, 오늘날 한국불교전통강원의 사집교과목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스님께서 세운 선교겸수의 전통은 그 후로도 벽송사에서 계속 되었습니다. 스님의 뒤를 이은 108조사들 역시 모두 선방의 조실인 동시에 강원의 강주였으니까요. 이렇게 훌륭한 가풍이 있는 벽송사에 와서 선원장을 하게 되니 그 전통을 다시 살려서 계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실참과 논강을 병행하는 선회(禪會)였지요.”
하루 8시간의 정진 가운데 4시간은 선방에서 실참을 하고, 나머지 4시간은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공부하는 벽송선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006년 가을과 작년 가을 해서 이제 겨우 두 번 열렸을 뿐이지만 수행자들의 호응만큼은 무척 뜨겁다. 자리가 모자라 참가하지 못한 이들의 성화가 빗발치는 바람에 올해는 봄에도 선회를 열 계획이니 말이다.
“사교입선은 교학을 다 공부한 다음에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선에 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교학은 필요 없고 참선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어 안타깝습니다. 『선가귀감』에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구절이 있는 것에서 보듯, 선교겸수는 우리의 오랜 전통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는 선회가 벽송사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열려 새로운 간화선풍이 진작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한 마디.
월암 스님의 고향은 경주이다. 경주 하면 불국사, 석굴암, 감은사지 같은 신라 불교의 유산들이 퍼뜩 떠오르는 만큼 스님 역시 불교와 친숙한 환경에서 성장했을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스님의 집안은 불교와 인연이 없었다. 그가 불교와 만나게 된 것은 조금 독특한 경로를 통해서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 도서실이 생겨서 책 대출 출납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때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석가모니, 원효 대사, 사명 대사 같은 분들의 위인전에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불교가 뭔지는 몰랐지만 그 분들의 수행만큼은 정말 멋있어 보이더군요.”
중학교 2학년 때 드디어 그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불교학생회에 가입하라는 고등학교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분황사 법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도문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더군요.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도를 생각하리라. 나는 무엇을 말할까, 도를 말하리라. 나는 무엇을 행할까, 도를 행하리라.’라는 게송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바로 저렇게 사는 것이 진정 가치있는 삶이겠다는 확신이 들었지요.”
그 길로 소년은 반은 학생, 반은 행자로 지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소년은 도문 스님을 은사로 완전히 출가했다. 나이가 차서 청년이 된 소년은 군대를 갔다. 군종병으로 복무하다가 제대를 한 후 그는 속가를 찾았다. 다시 납자로서의 생활로 돌아가려니 부모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깐 인사만 하려고 간 길이었다. 하지만 막상 집에 가니 어머니께서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것 아닌가?
“저 놈이 어릴 때 출가하더니 이제 철이 나서 다시 식구들 하고 살려는가 보다 하고 크게 기대를 하셨던 것이지요. 가긴 가야겠는데 어머니가 너무 마음에 걸려서 일주일 동안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문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뒤에서 ‘마, 가나!’ 하고 소리치시더군요. 그냥 그렇게 또 가는 것이냐는, 어머니의 그 한 맺힌 절규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 열심히 수행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포교하라는 어머니의 채찍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요.”
우주 법계가. 실은. 모두 통하는 것이니….
월암 스님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스님이 지향하는 바는 회통(會通), 즉 얼핏 보기에 서로 대립하는 것들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듯했다. 실제로 스님은 초기불교부터 해서 부파불교, 중관, 유식, 여래장, 밀교, 정토, 삼론, 천태, 화엄 등등 복잡하게 전개된 다양한 교학들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선으로 회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견성성불과 요익중생도 따로 떼서 볼 것이 아니라 수행이 오롯이 교화가 되고, 교화가 오롯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지고 보면 벽송선회 역시 선과 교를 회통시키고자 하는 시도에 다름 아닐 것이다.
“뉴스를 보니 요즘 보수니 진보니 해서 갈등이 심각한 것 같더군요. 하지만 보수나 진보나 결국은 한 몸의 일부입니다. 왼손이 오른손 싫다고 오른손을 잘라버리거나, 오른손이 왼손 싫다고 왼손을 잘라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에는 미운 놈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게 실은 성한 몸 망치는 일 아닐까요? 좌나 우 어느 한 편을 주장하기 전에 좌우를 아우른 한 몸을 먼저 생각해야겠지요. 중도의 입장에서 대립을 회통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아쉽습니다.”
스님을 만나고 다시 마을로 내려온 기자는 정류소 앞 구멍가게에서 차표를 샀다. 버스가 오기까지는 한 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지만 달리 갈 곳은 없었다. 마침 주인 할아버지가 난로를 켜는 것을 본 기자는 슬쩍 그 옆에 앉아 곁불을 쬐기 시작했다. 유리문 너머로 어둠에 잠긴 지리산의 윤곽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주인 할아버지와 드문드문 나누던 대화가 6.25 때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땐 밤만 되면 공비 세상이라. 밤새 설치고 다니다가 날 밝으면 다시 산으로 올라가고 그랬지.” 할아버지는 자신도 전투경찰로 입대하여 공비 토벌 작전에 참가했다고 했다. ‘빨치산 대장’ 이현상은 보지 못했지만 최후의 빨치산인 정순덕을 체포할 때는 현장에 있었다고 했다. “대숲 밑에 굴을 파고 숨어 있었더라구….”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던 할아버지는 그때를 잘 모르는 요즘 사람들을 걱정했다. 그 시절의 지리산이 피로 얼룩졌던 것은 공비들 때문이었고, 지금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좌빨’들 때문이 아니겠냐는 뜻 같기도 했다. 아늑한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았던 기자는 아무 대꾸 없이 난로불만 쬐었다. 깊은 계곡을 타고 내려왔을 겨울바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텅 빈 버스를 타고 가며 기자는 벽송지엄 선사의 일화를 떠올렸다. 지엄은 벽계정심 대사를 찾아 57세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애써 찾은 벽계정심 대사는 지엄에게 도는 가르쳐 주지 않고 광주리 만드는 일만 시켰다. 3년 동안 그렇게 지내던 지엄은 결국 다른 길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스승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가던 지엄에게 벽계정심 대사가 외쳤다. “지엄아, 너는 도를 받아라!” 깜짝 놀란 지엄은 그 순간에 도를 깨쳤다.
기자는 부질없는 상념에 잠겼다.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 세상에는 누가 도를 던져 줄까? 그때 월암 스님이 해 주었던 오른손 왼손 이야기가 떠올랐다. 기자는 스님이 말했던 ‘회통’ 한소식이 모두에게 던져지는 날을 상상했다. 차창 밖의 어두운 하늘에 서울에서 보지 못했던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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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암 스님 _ 지리산 벽송사 벽송선원장. 1973년 경주 중생사에서 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중국 북경대학교 철학과에서 돈오선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중국과 한국의 제방 선원에서 수선 안거하였다. 선교겸수, 선농일치, 불이선 운동 등을 통해 한국의 간화선풍 진작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에 『간화정로』와 『돈오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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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 고맙습니다................_()_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